[전자책] 레퀴엠 - 죽은자를 위한 미사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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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니체의 <선악의 저편>에서 프랑스 대혁명의 광기 속에 죽음을 기다리던 롤랑 부인의 대사가 나온다. “자유여, 당신의 이름 아래 얼마나 많은 죄가 저질러졌는가!”, 그렇다. 자유 그놈의 자유가 문제다. 프랑스대혁명에서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법조인 출신의 당통과 로베스피에르에게 깊은 영향을 주고, 로베스피에르가 공포정치를 하는 동안에도 루소의 가르침을 담은 <사회계약론>을 항상 들고 다녔다. 영화 <당통>을 보면, 로베스피에르의 아내에게 남동생이 있는데, 당통을 기요틴 아래 목을 자르고 나서 집에 가니 루소의 가르침을 아내의 남동생이 외워 로베스피에르에게 대답해주고 있었다.

 

 

당통을 죽인 로베스피에르는 정치적 권력에서 승자지만, 민주주의에서 패자가 되었다. 아니 패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로베스피에르가 괴물이 된 이유, 그리고 그렇게 잘 못된 길을 톱니바퀴가 쉬지 않고 돌아가야 할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전쟁과 혁명은 왠지 모르지만 공통성과 차이점이 있다. 2가지 모두 폭력을 시작으로 인간의 죽음이 발생되며, 그 피는 당사자에게 잔혹한 운명이나 그것을 피하고 지켜보는 이에겐 숭고하고도 아름다운 희생이다. 따라서 숭고 속에 이루어진 미학적 감각은 죽은 자로 하여금 애국자 내지 순국자란 이름을 부여한다.

 

 

그렇지만 죽음의 가치가 모두 다르다고 해도 죽으면 모두 같아진다. 죽는 순간 그 사람이 죽음으로서 더 이상 자신의 평판을 들을 일이 없다. 아무리 내가 존 롤즈라는 미국 정치철학자를 존경해보아도 그는 이 세상에 없다. 그의 험담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롤즈가 열 받는 게 아니라 내가 열 받아야 하는 것이다. 전쟁과 혁명의 죽음에서 그들이 어떻게 죽든지 그들은 그 죽음에 대해 평가할 수 없다. 사자(死者)는 말하지도 듣지도 보지도 다가올 수 없으리라! 오직 사자가 올 수 있다면 셰익스피어의 <햄릿>처럼 햄릿 왕자의 아버지가 몽상 속에 나타날 것이다.

 

 

대신 우리는 이렇게 외치야 할 것이다. “그대는 누구인가? 사람인가? 짐승인가?” 우리 인간이 이성을 가졌다고 하여 신과 가장 가까운 동물이고, 데카르트 합리주의 이래로 인간의 영혼과 육체와 분리되어 있다고 믿음이 결국 최악의 마녀사냥을 남기고, 고전주의가 활성화로 이어진 중세시대에는 십자군이란 광기의 메시아주의로 정의라는 이름을 실현한다. 물론 자신의 신념 아래 살아가고 죽는다는 것에서 전사들이 만족하면 나름 다행이겠다. 무사들의 전쟁에서 항상 이런 말이 나온다. “무사의 최고의 영광은 바로 전장에서 죽는 것이다.”

 

 

그들이 죽음을 선택하는 것은 그들의 유한성이란 목숨을 유한성을 넘어 영원불멸한 신화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왜 그렇게 보는 것일까? 진중권 교수의 <레퀴엠>, 이 책을 읽으며 평소 내가 생각하던 내용을 이리저리 모아 요점을 정리하면서도 탁월한 이성적인 관찰과 때로는 거침 감정의 파도는 나를 압도한 기분이었다. 진중권 교수의 아내는 미와 쿄고, 일본인이다. 나이도 진중권 교수보다 3살 많은 것으로 아는데, 어떻게 한국에서 가장 담론을 시끄럽게 하는 분과 결혼했는지 생각하면 정말 재미있기도 할 것이다.

 

 

책 안에 가미카제 특공대의 박물관에 갔는데, 그곳에서 재미난 모습을 본다. 자살특공대가 하늘을 날아올라 미국 해군의 구축함을 정통으로 부딪치는 장면에서 모두 함성을 지르는 분들을 본다. 모두 머리카락이 하얗게 되시고, 손목에 손이 달린 대신 이상한 갈고리가 달린 늙은 노인이다. 그들은 분명 제2차 세계대전에서 대동아공영화라는 슬로건 아래 청춘을 광기의 군국주의에 헌신했을 것이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오로지 장애뿐이나 그것을 대체할 것은 그때의 광기다. 그것이 아니면 그들이 살아있는 이유란 없다. 인간에게 자신이 가진 정체성을 중시하는데, 그것은 도저히 이성으로 설명해도 불가능하다.

 

 

그 어떤 것이라도 거기에 반발할 경우 바로 낙인이 찍히기 마련이다. 다행히 요새는 우리나라에선 전기고문과 물고문이 없어졌지만, 대신 사회적인 생활에서 경제적으로 압박을 가한다. 차라리 혼자 죽으면 그만이나, 가족들까지 무슨 죄가 있으랴? 그래도 이런 생활을 해도 아직도 파시스트의 추억은 달콤한 모양이다. 파시즘의 매력은 아주 달콤하다. 왜냐하면 대다수의 군중 속에 가려져 내가 나오지도 않아도 나는 정의로운 인간이 될 수 있으며, 만약 거기서 조금 활동적으로 행동하면 영웅이 된다. 고문기술자가 자신의 고문을 예술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고문기술자가 고문당하는 사람에게 “나는 너를 3개월 안에 죽게 해줄 수 있고, 6개월 안에 죽게 해줄 수 있어!”라는 말에서 고문이 하나의 기술(ART)로서 인정받으니 참 아이러니한 상황이 아닐 수가 없다. 그러나 정말 예술은 맞는 모양이다. 그 당시 많은 현장을 돌고 돌며 많은 사람들에게 그토록 칭송을 받았으니 말이다. 당시 사람들은 미적 감각이란 그 수준이다. 미학에 대해 사람들은 아름다운 것이라고 하나, 나는 미학에 대해 말하면 그 미적으로 판단될 대상이 나올 때에는 그것이 하나의 문화적 현상이란 점이다.

 

 

문화가 비단 가수와 드라마만 존재하겠는가? 경제, 사회, 정치, 군사, 외교, 환경 등 다양한 조건이 따라 붙는다. 그래서 문화를 단순히 보기에는 큰 무리가 있는 것이다. 그 시대에 그것이 하나의 미라는 것이다. 자유라는 단어를 위해 자유라는 것을 없앤 것이 말이다. 그래서일까? 인간의 자유와 이성을 중시하는 휴머니즘은 결국 안티 휴머니즘으로 바뀌어가고, 인간에게 이성보단 오히려 광기가 더 어울리는 것이 아닐까? 문제는 그 과정에선 항상 희생자가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죽음은 극적인 plot을 일으킨다. plot이 있기에 드라마나 영화가 재미있는 것이다.

 

 

무엇인가 뻔히 보이나 충격적이고도 눈에서 피하기 어려운 매력, 그 plot에서 죽음이란 테마는 매우 극적인 연출을 보여준다. 언제인가? 꼭 TV음악방송에서 제일 많이 나오는 장면 중에 하나가 죽음이다. 4분 내외의 뮤직비디오의 극적연출에서 죽음만큼 극적인 부분은 없다. 특히 곡이 발라드에다가 클라이맥스에서 말이다. 우리는 그런 잔혹한 희생을 보고 깊은 몰입을 한다. 하지만 막상 본인은 저 상황에 놓이지 않기를 바란다. 남의 고통이 진실이든 가상이든 자기와는 관계없는 것이다.

 

 

그래서 진중권 교수의 <레퀴엠>에서 글은 저런 진실이든 가상이든 모든 것을 뛰어넘은 글이 된 것이다. 프랑스 후기구조주의학자인 장 보드리야르가 이런 말을 했던가? 이라크전은 하지 않았다. 그것은 무엇일까? <레퀴엠>은 상당히 철학적 요소와 종교적 요소가 강한 도서다. 이라크전이 했지만, 하지 않았다는 말에서 우리가 보는 전쟁의 모습과 실제 일어나는 전쟁의 모습은 다르다는 것이다. 가령 이라크의 당시 권력자인 후세인이 결코 좋은 인물이 아님을 안다. 하지만 후세인이 나쁠 뿐이지 그 외의 일반 사람들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압정과 폭정으로 인해 고통 받을 뿐이다. 그렇지만 전쟁이 나면 누가 가장 타격을 입는가? 그것은 일반 사람들이다. 군대 가는 남자들은 모두 이런 말을 들을 것이다. 전쟁에서 가장 안전한 사람은 군인이라고 말이다. 적어도 20세기 이전에는 군인이 제일 많이 죽었다. 왜냐하면 군인들은 일반 농민이나 부녀자들을 건들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20세기에서는 그 희생자들의 대상이 군인이 아니라 불특정 다수라는 점이다. 여기에 아이와 여자, 노인 모두 열외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이 최고의 피해자다. 남자들은 모두 총을 들고 게릴라 군으로 활동하면 여기저기 활보하나 연약한 신체를 가진 그런 사람에게 불리하다.

 

 

최근에 여자들도 발육과 신체적 조건이 전쟁에 참전하나, 그렇다고 하지 말란 법은 없다. 단지 한국의 입영대상이 남자만이고, 여자는 부사관과 장교로 가기에 계급적인 요소에서 남자들의 비애가 강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전쟁나면 여자 남자 상관없다. 여군의 죽음을 보고 여자들의 입영을 만류하는 외국의 여론이 있었으나 정작 그 여군들이 전장에 가서 민간인 여자들을 살해하는 것은 생각하지 않는다. <레퀴엠>을 보라. 엄청 끔찍한 이야기가 나온다. 머리가 반통이 나가 파리가 누워있는 남자아이에게 붙어있거나, 여자아이의 목이 떨어져 나가거나, 하체가 모두 나간 병사, 시체가 조각된 채로 들어와 그 붉은색 피와 이물질이 바닥에 떨어지는 것들, 나는 군대의 필요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군대가 있는 것은 만약의 대비이지, 만약을 만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랴? 생각해보면 진중권 교수는 <레퀴엠>에서 비판한 사람에 대해서도 레퀴엠을 올린다. <이런 바보 또 없습니다. 아! 노무현>에서 진중권 교수는 2009년 정치적인 압박으로 자살한 故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에 대해 애도한다. 글을 보면 너무 이성적이라 약간 식상한 맛이 없지 아니하나, 그 속에는 오랫동안 인류가 가지고 내려온 피의 숙청이 따라오는 정치적 보복을 고전을 토대로 언급했다. 단순히 통시적인 사건을 공시적인 사건으로 결부지은 것이다.

 

 

자살은 사회적 타살이라고 했던가? <레퀴엠>에서 다루던 진중권 교수는 당시 우리나라의 이라크전 파병에 대해 심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한국군의 피해는 거의 없었고, 최소한의 피해조차 남기지 않으려고 한 방침에 아마 당시 한국군은 1명만 사망한 것으로 생각난다. 그런데 전쟁은 아무리 생각하여도 사회적 타살에 가깝다. 왜냐하면 전쟁참전 자체가 자살에 가깝기 때문이다. 전쟁이란 것이 나는 왜 무섭냐면, 인간의 광기를 최고로 올리기 때문이다. 무슨 짓을 해도 용인되고, 무슨 짓을 해도 모르기 때문이다.

 

 

게다가 총을 잡은 병사는 그 개인 하나 하나가 그 나라의 영웅으로 생각한다. 영웅이라고 생각되는 그 개인은 다른 개인의 마음과 동일하지 않기에 각각마다 영웅이란 사고가 스스로 특별한 존재로 여기게 된다. 하지만 인간이 자신을 두고 특별하다고 여기는 것은 매우 보편적이다. TV에서 연애이야기가 나오면 세상을 다 살은 인간처럼 절망한다. 이 세상은 나와는 관계없이 흘러가는구나! 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런 것은 왜만하면 다 있는 일이고, 나처럼 그다지 연애에 아마추어라도 그런 일들도 있었다. 그런 것이 있다고 무척 괴로워해도 남은 모른다고 여기겠으나 다들 그런 경험이 있다.

 

 

사람들은 공통적인 부분이 항상 그것을 특별한 것으로 여기기에 이런 전쟁도 잘 나오는 부분이다. 결국 총을 들고 있는 군인, 당신은 조국의 미래요 희망이다. 생각하면 정답이 아니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다. 일제강점기 시절에 만주를 누비던 독립군의 희생을 우리는 비웃을 수 없다. 그들이 직접적으로 광복절에 요인을 줄 수 없을망정, 우리의 정체성을 유지했다는 점에서 반드시 기억하고 존경해야할 분들이다. 하지만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라면 냉정하게 생각하고 판단해야 할 것이다.

 

 

세상에 독재국가라는 골치 아픈 숙제가 있다. 그곳의 대부분 국민들은 어려운 생활과 억압으로 매일 하루가 고비일 것이다. 하지만 지나친 통제는 인간의 이성을 마비시킨다. 조지 오웰의 <1984>에서 스미스의 모습을 보았는가? 2+2가 4가 아니라 5라고 마지막에 말하던 그의 모습을? 인간에게 가해지는 폭력이 물리적이든 정신적이든 인간의 영혼은 망가진다. 망가지지 않으면 인간일 수 없다. 그래서일까? 언제나 조금씩 정신이 망가진 내가 그 폭력적 사회적 문화와 현상에서 정상인처럼 보인 이유는? 물론 남에게 정상인의 범주에서 멀어져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광기를 머금고 뱉기에 이성을 유지할 수 있을지 모른다. 정말 옳은 것에 대해 지금 말하면 나쁜 사람이 되는 상황에서 말이다. 미학에서 도덕적인 면을 부각한 것이 당시의 작품이라면, 나치의 괴벨스의 프로파간다 역시 나치에 의해 만들어진 예술일 것이다. 나치의 독일은 위대하고 모든 종족은 열등하다. 따라서 상징을 내세워 하나의 신성성을 부여하니 예술이 아니겠는가? 단지 그것은 우리가 미술관이나 박물관의 예술품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의 숭고함을 가진 예술이다.

 

 

몽타주의 화려한 연출은 인간에게 하나의 정의감을 부여한다. 언론의 역할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진실성이 아니라 공정성이라고 하는데, 몽타주의 화려함은 없는 내용을 만들고, 있는 사실을 감춘다. 이 세상은 이미 몽타주의 세계이다. 통신전자가 발달하여 정보의 홍수 속에서도 그것조차 몽타주처럼 만들어진다. 그것은 뉴스를 봐도 나오고, 아직 철없는 아이들의 인터넷 키보드 베틀과 도배에서 볼 수 있다. 문제는 그런 행위를 하는 자들은 정의의 사도들이란 점이다. <레퀴엠>에서 그런 자들이 스펙타클의 사회에서는 가장 따분한 구경꾼이고, 열광적일수록 지루한 인간임을 나타낸다.

 

 

자기의 주관이 결국 헤게모니 속에서 움직이니 말이다. 병사들은 아마 헤게모니의 강력한 지배에서 숨을 쉬어야 한다. 그들은 눈을 뜨고 있을 때나 혹은 잠을 자고 있을 때도 죽음이 있어도 죽음은 자신에게 아닌 적에게 있다고 생각해야할 것이나, 막상 폭탄이 떨어지는 곳에서 그것은 불가능이다. 아무런 판단의지도 없이 나와 죽이고 죽어야 하는 공간에서 그들은 도망칠 곳은 오직 죽음이다. 폭력이 미적인 가치가 되는 곳이 파시스트의 세계라면, 그 죽음의 미학적 부여는 인간의 끊임없는 투쟁의 장을 보여준다. 인간이 평화를 원하는 것도 사실이고 인간이 상대방의 머리를 밟고 가고 싶어 하는 것도 사실이다.

 

 

결론적으로 자신의 발밑에 인간들을 두고 평화롭게 살고 싶은 것이 인간의 욕망이다. 노예와 주인이 구분되어 노예가 평생 받들고 살아야 하는 세상, 그것이 헤게모니의 유지성이다. 전쟁은 그런 노예와 주인이 영원하기를 바란 것이고, 혁명은 그것을 뒤집거나 없애려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혁명은 위험하고 어려운 것이다. 노예보다 주인의 권력과 폭력적 수단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런다고 혁명을 이루었다고 기뻐해서도 안 된다. 프랑스혁명과 러시아혁명, 최근 우리의 역사까지 보면 혁명은 일어나도 성공한 적은 없다. 특히 미국독립전쟁 이후 혁명정부의 수립에서 미국은 혁명을 했으되, 아직도 성공하지 못했다. 그래도 그나마 오바마가 대통령이 되어 약간은 좋아진 것으로 봐야할 것인가?

 

 

이렇듯 인간은 자신들의 세상이 어찌 돌아가고 있는지 생각도 없이 계속 그 주변을 맴돌고 있다. 오늘도 내일도, 그렇게 돌고 있는 자들이 가장 먼저 전쟁에서 죽고 죽이고 결국 자신의 처지를 잊고 만다. 미군 탱크에 깔려 죽은 여중생의 비극에서 우리는 아직까지 전쟁이란 참혹함을 알았으나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다. 단순히 어느 국가를 무조건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것만이 정답이 아니나, 결국 어떤 것이든 폭력은 일어난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타자성이라고 레비나스가 그랬던가? 내가 당하지 않으면 남에 대해 알 수 없다. 우리는 내가 당해도 나도 남도 알 수 없다. 계속 <레퀴엠>의 연주곡은 흐를 것이다. 이 굴레를 파악조차 하지 못하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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