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의 무덤, 스스로 추방된 자들을 위한 풍경
승효상 지음 / 눌와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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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란 어떻게 하면 인간일 수 있는 것인가? 철학적 의문적 사고에서 레비나스는 제1의 철학은 윤리라고 했다. 개인적으로 나는 윤리와 도덕을 분리한다. 가령 전에 베스트셀러로 팔린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정의는 무엇인가에서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을 많이 인용했는데, 거기서 번역자의 실수가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을 읽기전에 <윤리형이상학 정초>에서 윤리 대신 도덕이란 단어를 사용했다. 원래 독일어로 된 칸트의 원전 도서와 영어로 된 마이클 샌델 교수의 책의 번역을 다르게 봐야 한다.

 

그것은 중요한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도덕이란 단어가 왜 위험한가에서 도덕은 하나의 사회적인 인식이나 관념의 당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도덕에서 미덕이란 단어가 붙는다. 가령 한국에서 시간이 늦어 오는 것도 미덕이라거나 혹은 덤으로 끼워주는 것이 미덕이라거나 하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미덕으로 작용할 수 있으나 윤리적 판단이나 선험적 기준에서 결코 좋은 것이 될 수만은 없다. 가령 어느 도시에 온 사람이 시골에 와서 마을주민들에게 일일이 인사하면 맛있는 음식을 대접해야한다는 고정적 사고가 하나의 도덕이다.

 

단순히 도덕은 어느 국가만이 아니라 작은 소규모 사회나 공동체에도 존재한다. 그래서 미덕이란 것은 위험하다. 당시 사회적 분위기에 따라 하나의 결정적 판단에 오류로 등장할 수 있다. 특히 1789년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나자 자코뱅파이 왕당파를 제거하고, 내부적으로 만든 국민공회의 상징성을 너무 지나치게 부여한 나머지 국민공회를 비판하는 자에 대해 제거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영화 <당통>에서 실제 1793년에 일어난 일을 재각색한 팩션으로서 그 당시 로베스피에르와 같은 국민공회 정부는 제일 중요한 자유의 요건에서 양심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부정했다.

 

같이 자코뱅클럽에서 혁명을 일으키고, 내부적으로 지롱드파와 대항하며, 외세침략까지 막아낸 동료들을 어느 순간 기요틴 아래에서 화려한 칼날로 그들의 목과 몸을 분리했다. 그리고 그 시대에서 그것이 하나의 도덕이다. 도덕이란 단어가 위험한 이유는 옳은 일이 나올 수 있어도 옳지 않을 경우가 허다했다. 국민공회의 경우 그들은 모든 법적인 통제 위에 있고자 했다. 국민공회를 무시한 자는 프랑스공화국을 무시하여 국민의 아래에 있어야 할 그들이 오히려 국민의 위에 있었다. 이로서 프랑스혁명의 중요한 역할을 한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배반했다.

 

웃기는 일이다. 로베스피에르는 <사회계약론>을 항상 들고 다니며, 하나의 상징을 부여했다. 루소의 열렬한 지지자가 루소의 가르침에 가장 반대되는 행위를 했으니 말이다. 도덕이란 그래서 무서운 것이다. 처음에는 옳은 일을 해도 뒤에 지나가면 망가질 가능성이 있다. 그런다고 이런 역사적 모순을 부정만 할 수 없다. 지금 프랑스가 문화, 예술, 철학의 나라가 된 이유는 바로 이런 연유다. 프랑스 파리에 3대 박물관인 루브리 박물관이 있다. 이것이 대중에게 공개된 이유는 국민공회가 국민을 위해 미술관으로 모두 공개한 이유다.

 

모순의 역사에서 그렇게 인간의 역사는 진보적으로 때로는 후퇴하기도 한다. 변증법적인 상황에서 우리는 과도기 뒤에 도래하는 과도기를 맞이한다. 하지만 그것에 대한 대가는 너무나도 크고 잔혹하며 때로는 숭고하다. 영화 <당통>에서 당통은 자기의 목이 잘리기 전에 사형집행인에게 부탁을 한다. 사형집행인에게 자기 목을 들고, 자신의 얼굴을 파리의 수많은 시민들에게 보여 달라고 말이다. 그는 어긋난 프랑스대혁명의 취지를 군중에게 각인하기 위해 죽음을 선택했다. 하지만 1794년 테르미도르반동과 나폴레옹의 등장으로 프랑스대혁명은 끝이 난다. 영화 <레미제라블>처럼 19세기에서도 계속 혁명은 일어나도 왕당파와의 끊임없는 투쟁을 벌인다.

 

 

그래서일까? 역사란 언제나 힘이 있는 자에게 영광만 돌아간다. 그리고 그것은 그 시대의 당연한 미덕이 되었다. 힘과 권력에 대한 인간의 욕망은 인간 스스로 신화를 만들어내고, 그 신화의 벽에 폭력, 억압, 착취라는 것을 만들었다. 민주자유주의국가에서는 그런 것들을 부정하나, 아직까지 이 3가지 단어는 전혀 사라지지 않는다. 숭고한 자유와 평화, 그리고 사랑이란 슬로건은 여전히 빛을 보고 있다. 이 3단어가 아무리 사람들이 외쳐도 타인들은 왜 고통 받고 있을까? 그것에 대한 의문은 곧 윤리적인 철학적 사고로 이어지나, 가끔 그것이 거론되는 것이 바르지 않은 것 같다.

 

 

그것에 대한 의문을 건드는 사람은 마치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들거나 또는 용의 비늘을 건드는 행위와 같으리라. 이익도 되지 않고 충분히 자신에게 불리한 길을 선택하지 않아도 되는데, 그것을 선택하는 사람은 역사에 언제나 있는 법이고, 그것을 택하여 그의 생전에는 언제나 쓰라린 패배와 고통, 좌절, 그리고 절규만이 들린다. 때로는 허무하게 죽기도 억울하게 죽기도 한다. 내 인생에 길이 남을 영화 <당통>에서 스스로 기요틴 아래 목을 받친 당통이나, 당통을 죽일 수밖에 없던 로베스피에르가 존경하던 장 자크 루소, 노동자들을 위해 스스로 편안한 길을 버린 카를 마르크스, 러시아혁명의 영웅이나 스탈린에게 살해당한 레온 트로츠키 등을 보면 언제나 역사에서 새로운 바람을 부는 이에게 비참한 죽음만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비참하게 만든 자는 권력을 잡았고, 아주 후세에 이르러는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받았다. 물론 우리나라에도 그런 인물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단지 우리사회가 과도기란 이유로 그들의 이름을 말하는 것조차도 어렵다. 왜 그럴까? 대한민국 헌법은 국민이 주인이고, 양심의 자유가 있는데 말이다. 헌법에서 제시하는 민주주의정신과 현실의 도덕과는 괴리감으로 가득하다. 바로 그 괴리감에 대하여 의문을 던지고, 그 의문으로 인해 갈등이 생겨 그것을 차근차근 해결해가는 것이 진정한 민주주의사회다.

 

 

민주주의라는 사회구조는 절대로 평온하지 못하다. 오히려 시끄럽고 때로는 논란이 되어 사회적 이슈가 되는 일이 많다. 민주주의라는 것은 사회 내부의 갈등을 조율하면서 성장해 가는 것이다. 문제는 그것을 스스로 짊어가는 이가 누구냐는 것이다. 말과 행동은 일치될 수 없기에 그 행동의 주체는 항상 모든 지탄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즉, 상징적 존재가 되어야 하나 그 상징적인 존재가 신성시되는 것이 아니라 그를 벌거숭이가 될 정도로 고통의 굴레를 지나가야 한다.

 

 

한국이란 나라에서 그런 짐을 지고 가는 것은 너무나도 위험하다. 물고문에 전기고문에 죽기도 하고, 살아도 몸과 정신이 성치 않아 고통스럽게 눈을 감는 이들도 있다. 이번에 소개한 승효상 교수의 <노무현의 무덤, 스스로 추방된 자들을 위한 풍경>은 바로 그런 굴레의 짐을 스스로 지고 가다 운명을 맞이한 어느 남자에 대한 추모서적이다. 책 본문에 인상 깊은 구문이 있다. 승효상 교수는 네이버캐스트 지식인의 서재에서 2번째로 나올 정도로 아주 박식하고 뛰어난 인물이다. 세계적으로 건축학으로 인정받으며, 한국종합예술대학교 학생들에게 건축을 가르친다.

 

 

그의 건축이 되던 노무현 비석, 그것은 아주 특별한 의미가 있다. 그것은 예술이야 말로 삶이고 정치적 표현이기 때문이다. 예술은 삶을 광학적으로 보고, 미학이란 것은 철학의 칼로 예술을 가르는 것이라고 한다. 노무현의 죽음을 삶의 광학으로 보면 어떤가? 삶의 광학에서 그의 죽음은 그저 허무함과 아쉬움, 그리고 원망까지 섞여 있다. 오늘 회사에서 다른 부서의 상사가 자신은 노무현이 죽어서 싫어하게 되었다고 한다. 왜 죽어야 하는 것이냐고 한다. 그런 말은 아는 동생으로부터 들었다. 하지만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던 그의 입장을 내가 직접 알 수 없으나, 그렇게 할 수밖에 없던 것은 분명 안타까운 일이다.

 

 

인간의 자살을 두고, 사회적 타살이라고 한다. 스스로 권력으로부터 추방시키고, 이제 스스로 세상과의 인연으로부터 추방시켰다. 쓸쓸한 한국의 지식인이던 한 시민주의자는 그렇게 삶을 마감했다. 승효상 교수는 <오리엔탈리즘>의 에드워드 사이드가 저술한 <권력과 지식인>을 두고 노무현에 대해 논한다. “지식인이란 지역성, 주관성, 현재의 시점이라는 각각의 것들과, 보편성이라는 것 간의 상호작용에 반응하며, (중략) 애국적 민족주의와 집단적 사고, 그리고 계급, 인종, 성적인 특권의식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어야 한다.”

 

 

“지식인인 한, 스스로 경계 밖으로 추방하며, 관습적인 논리에 반응하지 않고, 모험적 용기의 대담성에 변화를 재현하는 것에 가만히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것에 반응하는 자여야 한다.”고 했다. 이때까지 프랑스혁명과 역사에 대한 명제로 통해 우리가 인류문명이 오면서 되풀이되는 비극적 인간의 모습에서 무엇이 바뀌고 찾았는가? 그런 노무현의 죽음이기에 그의 죽음은 상징성에 대한 부여가 쉽지 않음이다. 예술에서 그 중에서 특히 건축이란 인간에 대하여 유물론적인 구조이면서 가장 관념적인 부분을 지배하기 쉽다.

 

 

건축물을 보면 우리가 사는 집과 아파트, 빌딩과 조형물, 심지어 오랜 시간을 견딘 유적에도 존재한다. 건축물에 대한 미적인 부분에서 서양에서는 당연히 성당과 교회일 것이다. 그것들은 예술이기도 하면서 아니기도 하다. 예술에서 숭고함을 너무 추구하면 그것은 예술이 아니라 하나의 기적과 같은 신앙이다. 노무현의 죽음은 예술에서 어떻게 그려야 하는가? 그의 무덤은 작은 비석만 놓여 있다. 높지도 않아 거의 바닥에 누워있고, 비석에 새겨진 글자는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라고 되어 있다.

 

 

그는 여전히 시민주의자였다. 아마 법을 전공하였고, 대한민국 헌법 역시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기본 되는 점과 존 롤즈의 <정의론>과 같이 정치적 자유주의를 추구한 대통령이었다. 그것에 대한 상징은 역시 시민이었다. 시민 대 시민, 만인 대 만인의 투쟁보다는 시민 대 시민이라는 동등한 위치에서 보자는 것이다. 그의 비석은 우뚝 서있지도 않고 누워있다. 그의 비석 주변의 광장은 신성한 장소이기보단 누구나 밟을 수 있는 공간이다. 경계로 되어 있는 부분은 그의 작은 비석 주변이다.

 

 

그 누구라도 노무현의 비석에 동등한 위치에 있을 수 있다. 그것이 승효상 건축가가 바라본 광학적인 삶이다. 노무현의 비석으로 가는 길은 독특하다. 입구에서 시작하여 마치 역삼각형이 퍼지는 모습, 그 앞에는 작은 호수 수반이 있다. 물이라는 공간 즉 생명을 말한다. 생명이 깃든 수반, 그것을 시작하여 죽은 자의 비석으로 간다. 노무현의 광장은 살아있는 자의 삶과 죽어있는 자의 죽음을 연결하는 통로다. 단지 그 수반의 모양은 미국 페미니스트 예술가인 주디 시카고의 작품인 <디너파티>와 흡사하다.

 

 

조금 여성의 자궁을 상징하는 생명의 공간 같기도 하나, 그 종점은 죽은 자가 있다. 하지만 죽음은 한 갈래로 모이는 것이 아니라 가면 갈수록 퍼진다. 삶과 죽음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언제나 하나다. 살아가는 것은 곧 죽어가는 것이고, 인간은 삶을 영위하면서 죽음의 시간 앞에 선다. 그래서 죽었다는 것은 살아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실존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그 역삼각형의 공간을 보면 우리는 여러 갈래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넓은 공간 중심에 노무현의 비석이 외롭게 누워있다.

 

 

그 외로운 비석 옆을 걸어가면 많은 직사각형 돌들이 틈틈이 메운다. 그의 삶과 죽음까지도 사랑하고 그리워하고 아파하던 모든 이들의 소원과 명복들이 들어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작은 비석까지 밟고 갈 수 있다. 비석으로 이루어진 길을 밟으며 같이 그들의 마음에 공감한다. 이 광장은 끝까지 시민 대 시민으로 남은 것이다. 스스로 권력 속으로 은폐하여 신화화하지 않으려한 노무현, 하지만 그의 그런 모습이 그를 신화의 주인공으로 만들었다. 그는 신이 되었다. 인간의 욕망을 투영한 신이 아니라 인간의 억압을 해방하려고 한 신으로서 말이다. 그래서 그는 희생양이 되어야 했다. 사회적 타살이란 자살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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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3-03-19 2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500점이길래 대단하다 했는데 20000점이니 후덜덜하네요....ㅎㅎㅎ

만화애니비평 2013-03-19 22:43   좋아요 0 | URL
이게 다 덕심인겁니다! ㅋㅋㅋ
 
에밀 돋을새김 푸른책장 시리즈 11
장 자크 루소 지음, 이환 옮김 / 돋을새김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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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루소의 도서는 그가 살던 시절인 1760년대부터 죽기 전인 1788년까지 금서에 올라갔다. 그리고 특히나 로베스피에르가 애용한 <사회계약론>, 칸트가 즐겨보던 <에밀>은 대표적인 어느 중세유럽의 금서목록(“어느 마술의 금서목록” 제목 패러디, 내 블로그 이웃인 피콜로군을 위해!)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 2가지 책은 현대사회에서도 금서로 보기에 적당한 것 같다. 기존에 <사회계약론>이란 도서는 민주주의국가에서 반드시 전 국민이 지키거나 보장받아야 할 헌법의 기본이 되는 도서인데도, 헌법보단 위에 존재하는 초월적인 존재가 이미 존재한 상태이고, 그런 존재들이 용이하고 영원불멸한 이권을 지키기 위해 권력을 승계한다.

 

권력이란 재산과 공권력도 있으나 중요한 것은 그것을 이어갈 하나의 수단이다. 현대사회에서 그 수단은 바로 교육이다. 교육만큼 인간에게 이득이 오는 것만큼 해로운 것은 없다. 일전에 읽어본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에서 루소의 사상을 잘 볼 수 있다. 학문을 인간을 이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이익을 위한 곡학아세하는 행위들은 결국 가난한 자들을 비탄에 빠지게 하는 원리와 같다. 그런 점에서 루소의 <에밀> 역시 현대의 우리 어른들에게 금서목록 중에 하나일 것이다.

 

특히 극성적인 어머니들에게 말이다. <에밀>을 읽는 순간 그들의 표정은 심각하게 일그러지고, 입에선 오만 때만 욕이나 비난이 터질 것이다. <에밀>은 딱히 그런 사람들을 욕하거나 비난하는 도서는 아니지만, 책을 읽으면 자동으로 알게 된다. 참으로 아이러니다. 한국사회에는 분명 자유민주주의국가라고 하고, 그 정신의 모태는 결국 프랑스대혁명과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거슬러 올라가지 않을 수 없으나, 결국 제일 맞지 않은 책이 되었으니 말이다. <에밀>에서 보인 내용에서 만약 루소가 현대에 살았고, 그가 한국에 왔다면 기절했을 것이다.

 

친구가 외국에 있는 유명대학교 대학생이 한국의 대학가와 노량진학원가를 보면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저렇게 몇 년 동안 청춘을 보내야 한다는 점을 말이다. 어떻게 보면 교육 그것이 문제다. 좋은 학교는 결국 자신의 인생에 성공을 보장하는 수단이란 점에서 말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꼭 그런가 싶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생각해도 학벌은 중요한 위치를 미친다. 학교를 보면 고교 성적표가 보이고, 대학교에 따라 선후배라는 인맥이 형성된다. 한국은 인맥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구조의 사회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익을 중심으로 모인 대학사회이니 당연히 학문에 대한 철학적 자세나 인문학적 소양은 이미 분리한지 옛날이다. 학교 정문에 쇼핑가를 설치하여 학문의 장이 경제적 효과로 이끄는 총장이나, 그 총장이 뇌물을 받아먹고 구설수에 오른 것을 보면 교육이 정말 어떻게 해야 하는가? 라고 의문을 가진다. 사실 한국에서 교육만큼 중요한 것이 없을 것이다. 늘 교육감이나 대통령선거까지도 교육이 이래저래 말이 많다. 대통령이 바뀌면 거기에 따라 교육부 수뇌부까지 교체된다. 국가적 교육정책이 큰 변화를 준다.

 

안타깝게도 교육의 변화는 없을 것 같다. 아니 더 치열하고 잔혹하고 소름이 끼치는 사회가 될 것이다. 교육 그것은 무엇인가? 사실 <에밀>이 왜 지금 우리 사회의 금서라고 생각하는가에서, 우리 사회는 무조건 빨리빨리 그리고 남의 머리를 밟고 올라가기를 바라는 경쟁사회이다. 남이 어떻게 되든지 상관없이 나만 살면 된다고 가르치는 어른들, 그러면서 어른들은 그 자신의 아이들에게 착하게 바르게 살라고 한다. 웃기지도 않은 농담이고, 세상에 그런 위선이 없다. 우리는 후예들에게 진실적인 인간이기를 바라는 것인가? 아니면 세론에 맞추어 우월감에 젖어 타인들을 무시하고 깔보는 무례한 인간으로 키우는가?

 

예전에 영화 <공공의 적>을 보았다. 똑똑한 엘리트가 재산을 차지하기 위해 부모를 살해한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나, 잔혹하고 더러운 일들이 사회에서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낮은 계층보단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 많이 일어나고, 오히려 부정적인 재산축재와 범죄의 깊이가 더 사회지도층에서 일어난다는 점이다. 많이 배우고 많이 아는 사람일수록 더 추하고 더럽고 비겁한 행동을 하는 것이다. 레미제라블에서 장발장은 당장 굶어죽을 것만 같은 고통에서 빵 하나를 훔쳐 큰 죄 값을 치루나, 막상 그런 사회를 만든 자는 경건한 자세로 근엄한 척한다.

 

역시 교육인가? 인간에게 주어진 환경에서 자라고 배운다. 인간은 나는 처음부터 많은 사람들을 칼로 찌르고, 총을 난사하고, 수류탄을 던져 죽이려고 하는 살인마로 될 생각한 사람은 없다. 단지 그렇게 만들어질 뿐이다. 환경이라 주변 여건에서 인간의 인격이 형성된다. 물론 선천적인 요소가 있으나 후천적 요소 역시 크다는 점이다. 그것은 바로 교육이다. 오늘날 우리사회의 병들어가는 이유가 무엇인가? 경제성장을 하고도 국가적 지위에서 세계 강대국과 비교한다고 떠들어대도 여전히 부족한 것들이 많다.

 

왜 우리는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가? <에밀>을 보는 순간 그 해법은 나오되, 아마 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한편으로 대학교 입시생 내지 교양철학 시간에 루소의 도서는 매우 중요하므로 책에 있는 내용을 외울망정 이해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역시 한국의 교육은 위대한 것 같기도 하다. 얼마 전에 입시시험에 질 들뢰즈나 마빈 해리스와 같은 사상가들의 도서내용이 나온 것으로 아는데, 대학에 들어가는 학생들이 들뢰즈나 마빈 해리스의 사상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까?

 

안타까운 일이다. 이들은 인간의 문제와 사회의 문제 게다가 이 세계에 대한 문제를 다루는데, 그것을 염두 하지 않고 점수 따기라니, 우리 사회의 교육은 바로 이것이다. 뭐든지 조급하고 뭐든지 억지로 물꼬를 트는 점이다. 부모들은 그것이 트이면 트이는 데로 따라간다. 우리 아이들은 천재가 될 것이라고 하거나 혹은 좋은 곳에 가야 한다고 말이다. 이제 나이가 유치원에 갈 때도 안 된 상태에서 외국으로 보내 유학 물을 먹인다. 참 부끄럽다. 만약 부모가 외국으로 일을 가서 거기서 살아갈 것이라면 외국어는 필수이나 한국어도 모른 상태에서 영어로 하여 결국 토익 내지 토플로서 높은 줄에 서야 한다는 강박관념, 거기에 떨어지면 인생은 끝이라고 말하는 부모들, 과연 그 아이들은 행복할까?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는 영화가 있었던 한국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행복은 성적순이 되어 버린 지도 모른다. 덕분에 세상은 더 좋아지긴 보다 삭막한 냉정한 기운마저 돈다. 인간이 스스로 인간이 아닌 기계로 되어가는 세상, 감정이란 그저 자신의 상태만 나타기 위한 표출이다. 아니 그런 표출조차도 하기 어려운 세상이 되어가는 것 같다. 이른바 세론, 루소가 세론을 <에밀>에서 언급할 때 나는 많이 놀랐다. 그 당시나 지금이나 그 세론이 사람들을 잡는다. 흔히 우리 인간이 주체가 아니라 시대의 흐름도 아닌 그저 그렇게 사람들이 무의식적 심리에서 새로운 것만이 나오기 바라는 욕망, 그 욕망이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에서 말이다.

 

생각해보면 인간이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에서 사회적 관계가 형성되는 라캉의 말처럼, 그 욕망은 끝이 없다. 해결만 해도 다른 욕망이 다시 떠오른다. 인간의 욕망은 한도 끝도 없다. 루소의 <에밀>에서 욕망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은 욕망의 해결이 아니라 해소다. 해소라는 것은 참 어렵다. 지금의 우리 사회에서 욕망은 끝없이 굴러가는 눈사태와 같다. 물론 욕망의 종점은 있다. 내가 망가지거나 혹은 타인들이 망가지거나 말이다. 문제는 타인이 망가져도 나만 괜찮다는 식의 사람이 존재하면 눈사태는 이젠 타인만을 밟고 지나간다.

 

이것이 되는 이유? 역시 교육이다. 그 교육의 책임은 바로 어른이고 그 사회다. 아이가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라 아이를 그렇게 만들도록 나쁜 행위를 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식량, 집, 의복과 같은 의식주가 먼저다. 그러면 이것이 만족하면 무엇이냐? 라고 물어보면 자유라고 할 것이다. 나의 의지로 살아갈 수 있는 힘, 하지만 자유라는 것이 무엇이라고 스스로 물어본다면 참으로 난감하다. 우리는 자유가 소중하다고 하지 그 자유라는 의미는 제대로 알려주지 않는다. 자유를 알기 위해서는 인간의 의지와 사유가 중요하다.

 

<에밀>에서는 인간의 자유를 가르친다. 그런데 자유를 위해 억지로 아이를 건들지 않는다. 우리 사회와 달리 아이에게 꽉 끼는 옷을 주는 것이 아니라 헐렁한 옷을 주고, 자연과 친숙하기 위해 맨발로 흙을 밟고 옷이 더러워도 좋으니 이래저래 뛰어놀게 한다. 그것이 유아와 아동기, 게다가 청소년기이다. 우리 사회를 보자. 일단 꽉 맞는 옷을 계속 사서 입히고, 움직이지 못하게 한다. 맨발로 돌아다니면 당장 화를 내고, 풀밭에 갈 시간도 없고 갈 곳도 없다. 아스팔트와 콘크리트 숲속에 풀이란 겨우 조경 수준이다.

 

산으로 가면 역시 많은 사람들로 넘친다. 루소가 살던 18세기 유럽은 아직까지 심각한 환경 오염되지 않았다는 전제가 있기에 가능하다. 그렇지만 루소 역시 시골농촌에 가서 아이를 키우기를 바란다. 우리는 대도시 8학군에 가서 어린 시절부터 좋은 초등학교-중학교-고등학교로 보내려고 악을 쓴다. 심지어 유치원도 영어유치원을 선호하여 풀밭에서 뛰어다니는 것은 고사하고 축구공을 들고 방과 후 뛰어노는 것도 용서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나는 행복한 어린 절인 모양이다. 초등학교 시절 모래로 가득한 운동장을 뛰어다니며, 그나마 도시개발이 덜 된 상태라 뒤에 숲속에 가서 산딸기를 따먹고, 갯벌에 가면 작은 게나 고동을 잡아 익혀 먹기도 했다.

 

루소는 바로 그런 자연적인 체험을 중요시했다. 직접 바람을 맞고, 책으로만 연상하지 않고 실제 자신의 몸을 스스로 익히는 것을 말이다. 게다가 기예도 중시했다. 필요한 물건을 무조건 구매보다는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목공일을 하면서 책상이나 의자도 만들어보고, 해의 위치를 보며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까지 말이다. 제일 마음에 드는 것은 청소년 시절이다. 이때는 제2차 성징기이며, 인간의 사춘기가 도래한다. 게다가 혈기왕성하기에 그 젊은 피를 억제하기보단 운동으로서 풀어주는 것이다.

 

신체를 단련하는 것은 자유롭게 들판을 뛰어다는 모습이라, 요새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억지로 가르치지 않고, 스스로 터득하고, 학문적으로 깊은 내용은 차츰 가리키는 모습을 말이다. 물론 남녀의 성적인 사회적 관계에서 루소는 중세와 근대의 사이에 있었으나, 그의 남녀 간의 업무와 애정에 대한 것도 흥미로웠다. 지금은 그렇지 않으나 루소는 어린 소녀에게 집에만 있기를 바란 것이 아니라 공개된 장소에서 자유롭게 춤과 노래를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점이다. 억지로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어울려서 즐길 권리가 있는 점이다.

 

가끔 우리 청소년들이 불량하게 되는가에서 그들이라고 처음에 규정에 맞게 행동하라고 설교를 듣지 않았던가? 하지만 계속 어기고 더 큰 반항을 하게 된다. 그것을 하게 된 이유는 어른들의 문제라는 점이다. 그들은 자신들만의 공간이 없기에 어른들이 가진 공간을 넘보고, 그것을 자신에게 올 수 없기에 비행을 저지른다. 담배피우고 술을 마시고는 결국 어른이 하는 행동이고, 아이가 아이로서 남아두는 자리를 모조리 앗아 가는 바람에 결국 아이가 아닌 어른이려고 하는 것이다.

 

자유라는 것도 자유의 기회조차 주지 않으면서 자유라는 숭고한 이름을 하나의 속박으로 목을 옭아맨다. 루소의 <에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유라는 것이다. 그 자유는 모든 것의 속박에서 해방되어야 가능하다. 한국사회에서 이렇게 교육할 가능성은 없으나, 한 번 제고할 필요가 있다. <에밀>의 마지막 부분은 소피라는 소녀를 만나 에밀과 순수하고도 이성적이며 열정적인 사랑을 확인도 있으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

 

에밀이 부잣집인데도 그는 스스로 일한다. 목공일을 하며 땀 흘리며, 주변 농민들과 잘 지내며 그들의 일도 돕고 같이 밥도 먹는다. 루소의 근본적으로 <에밀>에서 에밀을 가르치는 이유는 인간의 인간성 회복이다. 본문에서도 장인의 기술은 소중하다고 한다. 물론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대량생산대량소비이기에 공장에서 나온 많은 상품에서 장인들의 손맛을 알 수 없다. 모르겠다. 농민의 손에서 나온 귀한 음식이라면 그럴 만도 하겠다. 루소가 어떤 부분을 말한 것이 인상적인가?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가 그랬다. 그는 공사장에서는 목수가 되었고, 병영에서는 북치는 병사가 되었다.”, 조금 내용이 비켜가도 스파르타 왕들은 누구보다 차가운 바닥에서 자고, 누구보다 용맹하게 앞에 나간다고 한다. 음식도 병사들과 같이 먹고 잠자리도 같이 한다. 오히려 높은 위치에 있기에 그런 특권의식을 버리기에 주변의 존경과 그 위치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영국에서는 “노블레스 오블리제”, 루소의 정치제에서도 민주정치를 원하나 그 민주정치에서도 귀족정치를 원한다는 것을 보았다.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 外>에서 간사하고 무식하고 이기적인 시민이 인민의 대표로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되는 순간 자신의 이익만 추구하고, 그것은 곧 다른 인민들을 해롭게 하기 때문이다. 그런 일들은 종종 우리 사회에서 보는 것이라 안타까우나, 루소는 인간의 본연적인 자세를 중시했다. 필요한 것만큼 먹고, 그 필요이상은 멀리하려고 했으며, 그런 필요이상의 기대나 세론이 오히려 인간을 속박한다고 한 것이다. <에밀>을 읽으면서 불현듯 생각나는 애니메이션이 있었다.

 

그것은 안노 히데아키 감독이 제작한 <신세기 에반게리온>이다. 주인공 이카리 신지군은 학교생활에 그다지 눈에 튀지 않고, 조용히 지내면 성적도 나름 우수하고 첼로도 켜는 학생이다. 어떻게 보면 모범생 같은 느낌은 강하나 사람과의 접촉을 두려워하며, 인간관계가 무척 약하다. 신지만이 아니라 레이나 아스카, 그 위의 어른들인 이카리 사령관, 미사토, 리츠코, 카지와 같은 인물 역시 어른 나름대로의 고통과 고뇌가 있었다. 이 작품에서 어른들이란 아이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가치관을 제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이들을 억압하고 괴롭게 하는 존재이다. 아이의 어긋난 자아와 행동들은 그 사회가 가진 병에 걸린 모습을 반증하는 것인가? 자신의 의지가 없이 타인에 대한 세론이나 눈치 보는 신지나 그렇게 살아온 나 역시 그런 느낌이 든다. 그나마 지금은 반항적인 기질이 있어서 가끔 주변에서 사춘기 소년 같다는 말을 듣는다. 원리 원칙적으로 윤리적으로 선험적인 이성으로 내 사고는 옳으나 세상은 옳지 않다는 것이 유감이다. 그나마 <에밀>에서 내가 가진 생각은 그나마 옳은 모양이다.

 

에밀이 소피의 집에 초청받을 때, 그 날 못가고 며칠이 지난 후에 갔다. 일하다가 귀가 길에 누군가 길에 넘어져 고통 받는데, 그 사람은 처음 소피의 집에 가기 전에 주변에 있던 농민이었다. 그 농민은 다리가 부러져서 말을 탈 수 없자, 에밀은 스승과 같이 들 것을 만들어 그 농민을 집까지 모셔드린다. 그런 후에 에밀은 의사에게 달려가고, 자신이 탄 말은 의사에게 주고, 자신은 걸어온다. 그런 사정을 이야기하니 소피는 오히려 에밀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생각한다면 교육의 진실한 가치는 이런 모습이 아닌가 싶다. 5장 성인기의 에밀이 남녀의 사랑도 중요하나 그 사랑만큼 중요한 게 인간을 어떻게 대하는 점이다. 우리의 교육 그런 철학이나 있을까?

 

집안의 지나친 가난과 병마로 자살한 노동자와 서민 그리고 소외된 자들, 우리 헌법에서는 누구나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다고 그렇지 못한 경우가 허다하다. 그런 사람들에 대해 따뜻한 말 한 마디는커녕 차가운 무시와 악의가 담긴 폭언을 날리는 사람들, 그들 대부분 젊은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오늘날 <에밀>이란 책이 왜 다시 한 번 읽어보는 것이 중요한지는 내가 볼 때 역시 어른들이 문제다. 어른이 되어가는 것은 이상하게 인간 스스로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자기만 살아남고 남은 어찌 되든지 상관없다는 그런 이기적인 존재가 어른이 아닌가 싶다. 그러면서 후예들에게 스스로 얼굴을 드는 모습에서 교육 참 어렵고도 험난한 존재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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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과 예술에 대하여 외 한길그레이트북스 92
장 자크 루소 지음, 김중현 옮김 / 한길사 / 2007년 12월
평점 :
품절


곡학아세(曲學阿世), 그것은 아주 무섭고도 위험하고도 치명적인 단어이다. 흔히 우리나라에서도 조선시대에 심각한 국가적 정치적 문제로 인해 국민들이 고통 받는 것을 두고 가렴주구(苛斂誅求)라고 칭한다. 아니면 <마의 백광현> 소설을 보면 어느 여인이 무덤3개 앞에서 울고 있는 장면을 둔 모습을 생각할 수 있다. 그 여인이 우는 까닭을 묻자, 시아버지와 남편 그리고 아들까지 모두 호랑이에게 잡혀 먹히어 가족을 잃은 셈이다. 그런데도 무덤가에서 울며 사람들이 많이 사는 부락이 아닌 산 속에 사는 이유는 바로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부패한 관리라고 한다.

 

 

부패한 관리 중에 호방이나 이방과 같은 중인 계급층이 그들과 밀접하겠으나, 그들을 진실로 힘들게 하는 것은 높은 자리에 앉은 ‘나리’ 덕분이다. 다산 정약용 선생의 <목민심서>를 읽어보면 목민관의 위치는 그 마을의 어버이와 같은 존재고, 임금을 대신하는 존재이다. 그 만큼 관리들의 업무를 중요하다. 백성이나 혹은 백성을 돌보는 존재들은 그 위치나 입장을 생각하면 항상 공정하고도 양심적인 판단을 내리지 않을 수가 없다. 생각해보면 작년 2012년은 내가 존경하는 인물인 다산 정약용 선생의 탄생주기 250년이었고, 이와 달리 서양에서는 장 자크 루소의 탄생주기 300년이었다.

 

 

루소의 이름을 생각하니 최근에 루소의 도서를 열심히 읽은 것 같다. 여러 가지 경로가 있었으나, 현대 내지 현대 이전의 근대의 민주주의 역사나 사회구조에 대한 연구에는 반드시 루소를 거치지 않고서는 말하기는 어렵다. 프랑스대혁명과 더불어 헌법의 기본적인 명제가 다 루소의 사상에서 시작한 점을 고려한다면 말이다. 특히 <사회계약론>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치와 사회를 알려고 하는 사람들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한다. 민주주의에서 자유, 평등과 같은 정치적 가치와 더불어 인권이란 중요한 원리원칙을 적용했기 때문이다.

 

 

최근에 대한민국 헌법을 보면서 루소의 <사회계약론>에 대한 정치철학적 사상과 유사한 면이 많았다. 그러나 막상 루소는 그런 위대한 사상가였음에도 불구하고 매일 박해와 조롱만 당했으며, 그의 고독과 슬픔 그리고 좌절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수모를 당했다. 충언은 역이고, 옳은 말은 하는 것은 역시 잘못된 상식인가? 이번에 읽어본 장 자크 루소의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 외>는 참으로 나에게 많은 생각을 심어준다. 평소에 조금 내가 생각한 부분들이 이미 루소가 250년 전에 했다는 것에서 이렇게도 시간과 공간이 다른데도 충분한 공감과 이해, 그리고 여러 가지 문제를 알려준 그의 성찰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의 구성은 2가지로 되어 있다. 1번째는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 자체의 논문 그리고 그 논문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반박을 하자 그 반박에 대한 반박문이고, 2번째는 루소가 <산에서 쓴 편지>다. 시기적으로 보면 1번째는 루소가 <사회계약론>과 <에밀>을 저술하기 전이고, 2번째는 그것을 저술한 이후다. 루소의 <참회록>을 읽다보면 루소는 1762년 이후 상당히 심한 박해와 수모를 당한다. 자신의 고국 제네바에선 루소에 대한 체포령과 동시에 그의 저서들을 모두 불태운다.

 

 

그것도 국정회의라는 근대적 정치제도를 가진 다소 민주적인 정치제도를 가진 나라에서 말이다. 생각해보면 국정회의는 우리나라에서는 국회의원과 비슷한 곳이다. 입법부로서 법을 집행하고 각종 국가적 의회적 관건을 다루는 점을 말이다. 하지만 법을 만드는 것은 사람들의 편익과 더불어 공공선을 추구하기 위해서이나, 문제는 그들은 법의 아래 있다는 것보다 법의 위에 있자는 것이 문제이다. 루소의 2번째 <산에서 쓴 편지>를 읽으면 루소에게 가해진 시대적 폭력과 더불어 그 문제가 다소 자신 만에게 가해진 문제만이 아님을 다룬다.

 

 

루소가 이토록 열렬한 사상가로서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참으로 안타까우나 그가 처해진 현실이었다. 인간은 자신의 환경을 만들어가기보단 만들어진 것이라는 구조적 상황에서도 그 만들어진 공간에서 만들어가기에 다시 시대적인 조류와 갈등을 빚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런 사회적 갈등에서 루소의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에서는 그렇게 길지 않은 논문이었으나, 그가 의미하는 바는 많은 의미를 보여준다. 루소가 살던 시절은 <그네>라는 그림을 그린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가 살던 시절이다.

 

 

당시는 귀족들의 탐미주의 성향의 욕망이 강한 로코코시대, 그 이전에는 고전주의, 르네상스, 바로크 시대가 있었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그 바로 예술이란 것이 인간의 정신을 흐리고 망치고 나라를 어렵게 한다는 점이다. 생각해보면 전에 읽은 진중권 교수의 <서양미술사-고전예술편>에서 서양의 미술이나 예술을 보면 대부분 민속예술보단 왕족예술 내지 종교예술에 많은 것을 두었다. 특히 왕족이나 귀족들은 권력을 상징하기 위해 많은 금액을 들어 예술로서 만들기보다는 하나의 상징성을 부여했고, 종교 역시 그렇다.

 

 

그러다보니 그것은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를 지켜주기 위한 것보단 자신들의 권력의 위상과 입지를 알리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 게다가 학문 역시 많은 사람에게 열려있지 않았다. 서양 중세역사에서 성경이 자국어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 라틴어로 되어 있다. 그것은 19세기 프랑스도 그런 것 같았다. 스탕달의 <적과 흑>에서 주인공 쥘리엥 소렐이 가정교사로 역임할 때나 귀족집안에서 화려한 생활을 할 때 그는 분명히 라틴어로 성경을 가르치고 있다는 점이고, 나폴레옹의 이야기가 가득한 점을 본다면 충분하다.

 

 

학문은 인간의 실생활에 도움을 주는 하나의 기예(ART)가 아니라, 미셀 푸코가 지적한 것처럼 언어가 권력을 낳고, 권력이 언어를 낳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루소는 바로 그 학문과 예술이 인간의 생활을 윤택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불행하도록 만든다는 점이다. 특히나 서문에서 김중현 교수가 거론한 곡학아세의 이야기에서 그 학문과 예술을 사회를 어지럽힌다는 의미는 아마도 인간 실생활에 도움이 되어야 하는 그것들이 오히려 도움이 되지 않고, 게다가 억압한다는 점이다.

 

 

루소의 미적 가치를 보면 그는 자연주의자이다. 전에 읽은 루소의 <식물사랑>이란 도서에서 루소는 식물이 가진 효용과 가치에 중시하기보단 자연 있는 그대로를 존중했다. 인간의 마음을 치유하고 그 순수한 것을 찾기 위해서는 오로지 자연의 은혜를 알아야 한다고 말이다. 식물표본을 하나하나 관찰하고 그것이 어떻게 생기고, 언제 나오며, 특징은 무엇인지 찾는 루소의 관찰은 지식으로 타인을 괴롭히거나 우월감을 나타내지 않았고, 오히려 그 지식으로 통해 교류를 나누고, 자연의 소중함을 새긴 것이 인상적이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예술가는 자연이라고 한다. 인간은 자연에 대한 빛에 대한 신기함과 계절의 변화, 광활한 대지와 푸르고 푸른 바다와 하늘들이 우리 모두의 보물이었을 것이다. 물론 자연은 아름다운 부분을 보여주는 것처럼 무섭고도 미지의 세계일 것이다. 그래서 자연의 숭고의 대상이었다. 숭고의 대상이 점차 착취와 파괴의 대상으로 변해가고, 마르쿠제의 <에로스와 문명>처럼 자연의 착취를 할 수 없으면 그 착취의 대상은 인간으로 변한다. 인간에 대한 착취에서 지식이란 반드시 필요한 것이고, 예술이란 상징을 만들기 위한 도구였다.

 

 

루소가 가진 사상에서 그 학문과 예술을 비판하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 아닐까? 전에 읽어본 피에르 부르디외의 <구별짓기>에서 취미와 취향이 인간을 구분하는 척도가 된다. 생각해보면 나 역시 구별짓기하고 있는지 당하는지 묘한 상황이다. 이른바 mass-culture에 대한 회의감과 더불어 그것에 대한 무관심이 일반 대중들과 대화가 어렵다는 점이다. spectacle의 요소는 바로 이런 것인가? 대신 내가 철학이나 예술에 대한 담론을 나눌 수가 없는 점에서 나는 별종으로 보일 뿐이다. 아니라면 다소 sub-culture 내지 underground-culture에 관심을 가지기에 대중문화에서 소외된 존재다.

 

 

아니라면 오히려 그런 곳에 있기에 문화적인 현상과 문화로 통해 보는 정치와 사회에 대한 비판의 칼날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것을 깊이 다루기에 어렵고, 깊은 들어가도 그들이 주장하는 담론에서 많은 한계성이 보인다. 본래 인간은 불평등하다. 태어나고 자라고 그들이 추구하는 것에서 불평등이 생긴다. 그 불평등이란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입지가 태어나면서 결정되는 선천적인 영역이 강하나, 한편으로 후천적인 부분이 강하다. 내가 오늘 돈 5만원을 들고 서점에서 책을 몇 권을 사는 것이나 혹은 친구들과 소주한잔 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이나 그것으로 인해 발휘되는 효과는 사뭇 다를 것이다.

 

 

문제는 책을 사든 술은 마시든 2가지 부류 모두 자신이 옳다는 생각을 가진다. 하지만 생각하면 전자가 바른 판단력이 가질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오히려 알면 알수록 말하기가 어렵다. 일반 사람들이 아는 철학적 지표는 모두 한계점이고, 대부분 그 한계점에 몰린 반면에 진짜 노력하는 이들은 그 한계점을 넘어 자신만의 영역을 도달하려 한다. 그래서 루소도 저렇게 심한 꼴을 당하지 않았는가? 그런 상태에서 학문이란 것은 똑똑한 바보들이 사는 대다수에 대한 헤게모니적인 영향을 발휘한다.

 

 

특히 그런 부분에서 루소가 비판하는 것이 종교적 부분인 것이다.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와 더불어 <에밀>, <사회계약론>에서 정치에 대해 종교적 부분은 분리되어야 한다고 했다. 또한 종교는 신앙이 중요하지 기적을 바라면 안 되는 것이다. 흔히 기적이라고 하는 것은 뭔가 특별한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신화적 욕망이다. 기적이란 메시아주의에서 발생하는 하나의 현상이며, 메시아주의가 강할수록 그 사회의 대중들의 의식구조는 낮고 이기적이며 무책임한 것이다.

 

 

또한 그런 종교적 현상에는 항상 예술이란 상징적 권위가 부여된다. 예전에 칸트의 <판단력비판>을 읽으면서 칸트가 루소의 사상을 많이 영향 받았다는 점과 특히 <에밀>을 읽으면서 자신의 산책시간을 놓칠 정도로 깊이 몰입했다는 점에서 루소의 사상은 인간에게 주어진 주변 환경보다 선험적이고, 이성적인 사고력을 전해준 것이 가장 특징이고, 인간의 개인적 계몽을 추구하는 것이 옳다고 여기는 칸트와 마찬가지로 루소의 서적들은 계몽주의적 요소가 상당하다는 점이다. 왜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 외>가 <에밀>과 <사회계약론>하고 통하면서 학문과 예술에 대해 그토록 비판의 날을 세우는 것인가? 그것은 내가 인상 깊게 본 문구로 통해 알 수 있다.

 

 

“사치는 수백 명의 도시인을 먹여 살리지만, 수천 명의 농부는 농촌에서 죽어가게 한다. 사치에 필요한 물건을 공급해주기 위해 부유한 사람들과 예술가들의 손 사이를 오가는 돈은 농부들의 삶에 아무 쓸모도 없다. 부유한 사람들에게 장식 줄이 필요하기 때문에 농부에게는 의복이 모자란다. 사람들의 양식으로 이용되는 물질을 낭비하는 일은 사치를 역겹게 느끼도록 만들기에 충분하다. 내 반대자들은 우리말이 어려워 그들이 뻔뻔스럽게 옹호하는 주장에 대해 부끄러워하도록 내가 조목조목 따지지 못하는 것을 지극히 행복해한다. 우리의 부엌에는 주스가 필요하다. 바로 그 때문에 그토록 많은 환자에게는 수프가 부족하다. 그리고 그 때문에 농부들은 물만 마신다. 가발에는 밀가루가 필요하고, 바로 그 때문에 그토록 많은 가난한 사람이 빵을 먹지 못한다.”

 

 

당시에 자본주의 경제구조보단 농경사회이기에 지금 경제사회구조와 조금 다를 수 있겠지만, 예술이 왜 문제라는 이유는 예술이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루소의 예술적 사고는 왠지 모르게 아방가르드 정신과 부합되는 점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예술을 파괴하기 위해 만들어진 예술 아방가르드, 그 자체도 근현대미술 역사의 한 자리에 들어가는 비극적 운명을 맞이하나, 루소의 사상처럼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이 바라는 예술이란 바로 배고픈 농부, 20세기에는 가난한 도시 서민과 노동자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보면 그 당시 지식인들은 왕족, 귀족, 성직자들과 친교가 있기에 자신의 신분적 상승과 위엄에 많은 도움이 되었으면 할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지식을 가진 자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고 대항하기 위해서는 거기에 해당되는 지식을 가진 자들이 필요한 점이다. 루소의 서적에선 당시 시민과 부르주아들은 국가적으로 지식과 양심을 가진 훌륭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산업혁명과 프랑스혁명 이후에는 부르주아는 마르크스의 <자본>에서 나온 것처럼 악독한 귀신과 같았다. 귀족과 왕족이 있던 자리를 대체하였다. 노예와 주인의 사슬을 끊을 수 없는 그 인간의 고뇌에서 루소는 그 고리를 끊으려한 인물이다.

 

 

그런 루소이기에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 외>라는 서적은 현대사회의 지성인이라면 반드시 읽고 새겨둘 필요가 있다. 학문과 예술은 버릴 수가 없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것이 정말 인간에게 도움이 되는지 안 되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학문적으로 과학의 발달은 인간에게 문명의 발전과 동시에 삶의 혜택은 주었다. 그러나 환경오염, 전쟁무기의 잔인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예술에서 음악하거나 미술 한다는 것은 곧 가정의 부를 알려주는 척도가 되어버린 현실이다. 그래서 우리나라에는 예술다운 예술이 없는 것 같다.

 

 

인간의 자연적인 느낌을 표현이 아니라 상징성을 부여하기에 그렇다. 물론 상징이 없으면 안 되는 것이 아니나, 그것이 곧 나 아닌 타인에 대한 인간애적인 요소가 없다는 것이 문제다. 루소의 서적에서 그가 보낸 편지에는 무고하게 희생된 사람과 그 원인을 집어내는 부분이 있다. 학문과 예술이 왜 존재해야 하는지? 무엇을 위해 행동하는지에 대해 알 수 없거나 판단조차 할 수 없는 학문과 예술은 세상에서 가장 필요 없는 존재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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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아드레날린(ADRENALIN) 4 (완결) 아드레날린(ADRENALIN) 4
이정화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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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권을 보면 조금 이상하게 시작한다. 3권에서 희용이가 렌에게 납치된 점과 아델리아가 강력한 뱀파이어의 힘을 보여준 이유는 바로 희용이의 피라는 점에서 뱀파이어 엘프인 렌은 희용이의 피를 시험 삼아 마셔본다. 그러나 강력한 뱀파이어 엘프는 오히려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갑자기 소환되어 버린다. 소환된 곳은 인간이 사는 곳이 아닌 엘프나 정령 그리고 요물들이 사는 환상의 세계, 이른바 웰치아라고 불리는 곳으로 이때까지 평범한 인간의 모습이던 랄프도 이상한 악마의 모습으로 보인다.

 

여기는 모든 존재가 원래 모습으로 드러나는 곳이고, 인간이 살아가는 곳이었다. 란 일행들이 모두 정신적으로 충격에 빠질 때 갑자기 생각난 인물이 있었다. 아델리아의 심복인 로이스가 여기 세계에 존재할 것이란 점이다. 희용이의 피를 조사하기 위해 먼저 이세계에 간 것으로 되어 있기에 충분히 구출된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역시 희용이었다. 희용이는 혼자 낯선 곳에 떨어지다가 우연히 만난 수인 소녀에게 안경을 빼앗긴 채 방황하다가 수인소녀의 오빠의 도움으로 구출을 받는다.

 

도착한 곳은 수인들의 마을, 촌장은 인간의 얼굴 대신 완전히 개와 비슷한 얼굴을 가져서 희용이는 촌장의 얼굴에 가면을 쓴 줄 알고 얼굴을 위로 당기는 것과 운 좋게 찾아온 란도 역시 촌장을 보면서 머리를 한 대 쥐어박는다. 그리고 희용에게 하는 소리가 “괴물은 물리쳤으니까 그만 가자.”라고 한다. 희용이가 맞는 것에 아무리 익숙해도 주먹 한 대에 촌장을 기절시킨 란의 주먹 힘이 너무 강한지 란의 일행은 모두 감옥에 갇힌다. 1권에도 재혁이가 란을 함부로 건들면 안된다는 말을 했는데, 그 위력이 4권에서 확실히 나온다. 아니 중간마다 싸움을 하는 모습에서 나온다. 뱀파이어에 물린 인간은 보통 인간보다 훨씬 강력한 체력을 가진다는 점이 특이했다.

 

대신 분명 여자로 태어나서 본능적 기질에서 여자로 보이나 말투는 여전히 험악하고, 그 말투에 실망한 일행들은 란의 머리를 발로 차서 쇠창살에 볼이 엉망이 되도록 밟는 장면은 역시 작가가 미소녀 망가지는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어째든 란 일행이 웰치아에 온 이유는 렌의 신변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연히 촌장이 알게 되자, 뭔가 짚이는 얼굴을 보이며, 상황은 렌이 심각한 상태를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1권과 2권에서 분명 랄프와 로이스가 대립하는 장면이 나오나, 4권에서는 싸우기 보단 그저 방목하는 태도를 보인다.

 

뱀파이어 엘프인 렌이 아델리아의 의식을 방해하는 이유는 단순히 적을 제거하는 것보다 다른 원인이 있다는 것으로 보였다. 여기서 랄프가 뱀파이어 일족에서 렌의 신변을 보는 것을 거부당할 때 이 역시 작가의 오류가 등장한다. 악마 중에서 인큐버스와 서큐버스 차이가 있는데, 인큐버스는 남자고, 서큐버스는 여자이다. 랄프는 남자이기 때문에 인큐버스이지 서큐버스가 아니란 점이다. 1권에서 예선이 15세에 차를 몰아대는 설정 역시 이치에 어긋난 부분에서 작가의 세심한 연출이 부족한 게 아쉬웠다.

 

그렇게 랄프와 로이스의 대화를 나누는 부분에서 희용이의 피가 어떤 것인지 나오는데, 여기서 아델리아에 대한 비밀까지 나온다. “완벽한 악을 지니고 태어나는 뱀파이어 황족의 혈통과는 틀리게 아델리아님은 불완전 악으로 태어나셨습니다. 이 소년의 혈액은 아델리아 님의 그 불완전한 악을 완벽하게 맞춰주는 나머지 조각이라 할 수 있죠. 하지만 반대로 완벽한 악을 지니고 있는 순수혈통, 혹은 수수혈통이 아닌 불순 뱀파이어들에겐 오히려 치명적인 독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라는 비밀이 풀린다.

 

뱀파이어 엘프인 렌에게 치명적인 독이고, 소멸의 위기에 처한 것이다. 렌의 죽음에서 다소 신화학적인 요소가 드러나는데, 웰치아는 이른바 아귀계, 괴물들이 존재하는 곳이고, 인간계와 아귀계는 분리된 공간이다. 차원의 벽이 가려져 있다. 그러나 그것을 연결하는 것이 요정계라는 점에서 요정이란 존재는 인간의 자연적인 신앙요소에서 애니미즘 내지 샤머니즘적인 요소가 반영되어 있다. 정령적 존재이기에 인간생활과 밀접한 부분이 많다. 진짜 존재하는 것인가 아닌가의 차이가 중요한 게 아니라 요정 내지 정령이란 존재는 인간의 고대의 주술적인 부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점이다.

 

신이의 요소에서 제일 가까운 존재가 엘프다. 엘프와 관련하여 인간과 사랑을 나누는 이야기가 제법 만화, 애니메이션, 영화, 문학 등에서 보이는 것도 다 그런 연유다. 그런데 요정이 웰치아 주민에게 포획당해 멸종위기에 처하고, 그 요정이 없다면 웰치아의 주인이면서도 인간의 피를 양식으로 하는 뱀파이어에겐 치명적인 위험이었다, 그래서 엘프 왕족을 영원불멸한 뱀파이어로 변신시켜 세계의 균형을 유지하고자 했다. 뱀파이어 황족인 아델리아가 인간세계에 눌러 있는 점에서 그녀는 인간을 공격하면서 피를 마시고 싶지 않은 것은 절대적 악이 아닌 불완전적 존재였기 때문이다.

 

희용이가 <아드레날린>에서 주인공이라고 하기보단 하나의 사건의 열쇠라고 보는 것이 좋은 부분이 이 장면이었다. 약간의 사연을 지닌 촌장과 렌, 지난 과거보단 렌의 상황에 집중한 촌장은 어떤 물건을 란에게 주고, 뱀파이어의 성에 향하게 한다. 그리고 1시간이 걸린 주문으로 통해 인간계에 돌아온 일행들은 아델리아에게 보고하자, 아델리아 스스로 웰치아로 가게 된다. 아델리아는 인간계에서 웰치아로 가게 돼서 뱀파이어 엘프인 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100번째 희생인 희용이를 제물이 되지 않게 되는 점은 남자인 그녀들이 원상복구 되는 것이 불가능한 점이다. 아델리아의 의식을 하지 않아 모두 남자로 갈 수 없는 점이다. 이때 1주일간은 모두 정신이 나간 상태가 되고, 희용이는 아르바이트를 구해 마음 편하게 지낸다. 이때 란이 모두에게 여자로 사는 것에서 문제 있냐 말에 모두 곰곰이 생각하더니 없다고 한다. 인간은 모두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는 존재인가? 샤론은 5년이나 되었고, 예선과 메이는 이미 스타모델이기에 아쉬울 부분도 없었다.

 

그리고 마리는 이미 그래 살기로 결심했기에 문제없다. 란은 혼자 상념에 빠진다. 란이 처음에 희용이를 내쫓으려고 하는 이유는 마지막에 나온다. 어린 시절 부모님도 모르고, 할머니 밑에 자라다가 할머니마저 돌아가시자 친척집에 몸을 맡기게 된다. 문제는 그 친척이 장례식에서 큰 소리로 “우리가 왜 저 애를 맡아야 해요! 어차피 입양해서 키운 아이였잖아요! 근본도 모르는 애를 키워야 해요!” 라는 부분이다. 집에 오면 작은 엄마는 란을 차갑게 아주 잔인하게 대했다. 성적표가 모두 수인데도 보려고 하지 않았다. 1권에서도 별로 좋은 학교도 아닌데도, 란은 전국 1등이었다.

 

회상하면서 남자로서 “다시 작은 아버지 댁으로 돌아가는 것보단, 여기서 이렇게 사는 게 나을지 몰라.”라고 생각한다. 장면에서 예선과의 앙숙이라는 것에서 예선의 모습이 나오지 않고, 마리, 메이, 샤론만 나오고 희용이는 꼽사리로 나온다. 역시 연애 장르와 전혀 상관없이 마무리를 짓는다. 어차피 희용이는 제물대상이란 점에서 별 의미 없이 끝난다. 작품을 보면 처음에 희용이가 주인공인 것처럼 보이나 실제 주인공은 란이었다는 점이다.

 

작품 마지막을 보면 아델리아가 다시 복귀하고, 그 후에 렌이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온다. 렌이 돌아온 이유는 아델리아의 복수를 위해서라고 한다. 하지만 작품을 전반적으로 보면 렌은 아델리아를 미워한 것이 아니라 아델리아가 뱀파이어로서의 정체성을 버리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에 온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덕분에 란은 ‘ 밥 맛 없는 가시나!’란 표정으로 렌을 가리킨다. 작품 끝까지 보면서 이야기 구조가 엉성하여 딱히 좋은 평가를 내리기 어렵다.

 

단지 소년챔프라는 만화잡지에서 남자 초등학생부터 중고등학생, 심지어 대학생까지 즐기는 만화책에 여성작가가 캐릭터의 그림체를 조금 퀄리티를 높인 점과 다소 페티시즘적인 요소를 그린 점에서 조금 새롭다고 볼 수 있다. 최근에 내가 재밌게 보고 있는 <금지소년>과 같이 여성작가가 그리고, 다소 TS적인 장르에서 남자의 시선을 자극하는 그림체를 연출한 점에서 조금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과거에 만화라는 것은 남자아이의 전유물이고, 대부분 작가가 남자였으나, 최근에는 여자들도 많이 보고 여자작가도 늘어가는 추세이다. 남자가 보는 관점과 여자가 보는 관점에서 만화가 다른 재미를 볼 수 있다. 남자가 알 수 없는 그런다고 여자도 알 수 없는 그 뭔가의 상황연출과 표현연출이 가능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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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아드레날린(ADRENALIN) 03 아드레날린(ADRENALIN) 3
이정화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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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반은 재혁이란 학교의 짱으로부터 시작이다. 뱀파이어에게 1번 물리면 바로 사람의 육체적, 정신적인 변화가 생긴다는 점에서 다소 의아한 부분이나, 재혁이는 뱀파이어 엘프에게 물린 덕분에 몸에 이상이 생기고, 게다가 렌의 정체를 본 이유로 랄프에게 살해당할 위기에 놓인다. 운 좋게 도망을 치나, 자신이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위기감에 란에게 가고, 그때 아델리아가 아무 생각도 없이 재혁의 목을 물면서 피를 흡혈한다. 그것이 최선의 방법인지 아닌지는 알 수가 없다. 단지 재혁이가 살 수 있는 방법은 독은 독으로 해결하는 극단의 처방이라는 점이다.

 

아델리아는 배고 고파서 마셨다고 하나 피를 흡혈당한 재혁이에겐 매우 곤란한 상황이 되었다. 본래 아델리아는 뱀파이어이면서 마성이 덜 들어간 뱀파이어이기 때문에 악의 없이 철부지 아이처럼 구는 것이다. 재혁이의 피를 마시고 “맛있다.”라고 말하는 부분은 정말 백치미의 극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아델리아의 집에 사는 5명의 여자 모두 흡혈당한 이유로 남자에서 여자로 되었다. 본래 흡혈귀에 물리면 흡혈귀로 되는 것인데, 인간인 것이 더 좋은 것일까? 아무래도 괴물보단 인간인 여자가 좋은 것 같다.

 

재혁이의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란은 재혁이를 데리고 사라지고, 남은 예선이가 희용이를 데리고, 이래저래 끌고 다닌다. 이때 분명 남자이나 쇼핑에 대한 본능적인 소비욕구에서 예선은 정신적 상태가 남자보다 여자에 가까워진다. 다소 관념론적 부분과 유물론적 부분이 서로 오고가는 점에서 약간 관념보다 신체적 조건에 가까운 형태가 후반에 가면 두드러지게 나온다. 그것은 희용이가 쇼핑에서 짐꾼 역할을 맡은 점과 햄버거가게에 들어가서 “햄버거 쪼가리 먹는 거보다 집에 가서 마리가 해 준 밥 먹는 게 훨 낫다아이가.”라는 점에서 원래 남자인 2명이라면 아마 동의했을 것이다.

 

햄버거 가게에서 보인 장면은 너무 억지스러운 연출이 흠인데, 미스터리 솔루션 닷 컴이라고 자칭 해결사들이 전단지를 나누어주는 장면이다. 게다가 인터넷에서 찾아보는 예선의 행동은 너무 부드럽지 못한 서사구조를 보여주었다. 문제는 이들을 부르고 난 뒤에 그다지 스토리 전개에서 비중을 주지 못하고 개그요소만 부각한 점이 아쉬웠다. 예선이가 호출하여 학교에 나올 때 해결사보다는 엉뚱한 콤비로만 부각시켰고, 특히 안경 낀 여자는 희용이를 보면서 반했다고 하고, 다른 한쪽은 랄프를 보고 반했다고 한다.

 

해결사가 말하기에는 너무 설정이 어긋나 있는 것이 3권의 최악이라고 보인다. 그나마 다행인 부분은 흡혈되는 사람들에 대한 사연이다. 희용이가 제물이 되어야 하는 점이 너무 심한 처사라는 것이다. 아델리아가 흡혈하지 않고 살기 위해 의식을 치루는데, 만월의 날에 100번째 의식에서 희생양의 피를 마셔야 한다. 이때까지 다른 사람들이 물리면 모두 여자로 살아갈 뿐 죽지는 않으나, 그 100번째는 생명을 마리의 슬픈 얼굴에서 나온 것처럼 “의식의 종지부를 찍기 위해 그 생을 마감할 지어다 되어 있습니다.”

 

아델리아에게 물린 후에 재혁이는 미소녀가 아니라 근육질에 무서운 인상을 가진 여자로 되자, 자신의 모습을 보고 충격 받으나, 의식의 끝난 후에 원래대로 갈 수 있다는 점에서 좋아했지만, 그 대가가 바로 재혁이의 죽음이란 말에 양심의 가책을 받는다. 학교에서 소문난 악질 싸움꾼이 여자로 다시 변하면서 눈물을 흘린 점에서 이 작품은 여성성과 남성성의 감수성의 차이를 구별하는 느낌이 들었다. 딱히 그것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무런 연고지도 없고 힘든 삶을 살아온 희용이에게 동정심을 가져주는 란의 모습을 본다면 오히려 타인에게 무관심한 것에 지나 괴롭히는 감정 없는 인간보다 더 좋다는 점이다.

 

그래도 아무리 생각해도 어느 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성별이 바뀌어버려 그것을 인식하는 그 느낌은 어떠할까? 예선이의 계략에 의해 란이 처음 여자로 될 때, 마리를 보면서 귀엽다고 여기고, 미소녀 모습에 옆집 아저씨처럼 걸으면서 허리를 긁어댄다. 화장실에서 자신이 여자로 바뀐 지도 모르고 꿈으로 여기고, 거울 앞에 미소녀가 보인데다 심지어 볼륨까지 좋자, 남자의 관념으로 자신의 가슴을 마구 만지는 모습은 과연 남자라면 저렇게 하겠구나. 라고 공감하는 부분이 좋은 듯하다. 특히 자신의 가슴을 보면서 코피를 흘리는 장면은 기가 막힌 부분이다. 15세에 물려 2년 동안 란은 적응이 덜 된 상태로 나온다. 제2차 성징기를 거친 후에 한참 성적 호기심이 강한 남자아이에서 여자아이로 된다는 것은 상당한 충격이 아닐까 싶다.

 

예선의 이야기에서 란은 “뭐, 그 뒤에도 가끔 샤워하기 전, 자기 몸매 감상하면서 헤헤 거리기도 했지만..”라는 점에서 관념적 부분과 유물적 부분의 뒤틀림을 알 수 있다. 그래도 이 중에서 여자가 된 것을 후회하는 자만 있는 게 아니다. 마리의 경우 어린 시절 아버지가 재혼하면서 새어머니를 모시게 되나, 아버지가 허리를 다쳐 일을 못하게 되고 그 이후 새어머니에 의해 집에서 쫓겨나게 된다. 이때 아버지는 마리를 겨울철 추위로부터 지키기 위해 옷을 모두 덮어주고 대신 자신은 죽는다.

 

이때 아델리아를 만나고, 지난날의 모든 아픔을 버릴 수 없으나, 그것으로부터 초월을 위해 아델리아를 따르고, 흡혈당한 후에 여자아이로 살아간다. 가장 얌전하고 성격이 온순한 인물 역시 마리다. 여기서도 재혁이, 예선이, 란 모두 마리의 이야기를 듣고 우는 모습이 나온다. 약간 작품에서 마음에 드는 부분은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점이고, 그 부분에서 가족에 대한 부분이 강하다. 1권에서도 희용이는 부모 없이 할머니 홀로 밑에 살아온 것과 재혁이도 이혼한 어머니가 실성하여 자기 눈앞에서 사고로 죽는 것을 봤다는 점이다. 어머니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집 쓰레기통에서 자기를 안고 있는 여자가 길가에서 죽은 실성한 여자란 점과 아버지가 방 혼자서 울고 있다는 점이다.

 

 

누구나 사연은 있고, 고통은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것을 아무리 타인이라 하여도 그냥 지나갈 수 있으나, 그것이 얼굴도 모르는 것도 아닌 바로 옆에 있는 타인일 경우 조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최종적으로 심적인 고통을 주는 이는 희용이다. 랄프와 렌은 희용이의 피에 비밀이 있다는 점을 감지하고 희용이를 납치한다. 납치당한 희용이를 구하러 가면서 3권은 끝이 나는데, 전반적으로 매우 서사전개가 불안정하고 어지러웠다. 캐릭터 설정까지 좋으나 해결사의 등장은 희용이가 납치당해 추적하는 일 외엔 아무런 중요한 역할이 되지 못함이 아쉬운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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