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 돋을새김 푸른책장 시리즈 11
장 자크 루소 지음, 이환 옮김 / 돋을새김 / 2008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루소의 도서는 그가 살던 시절인 1760년대부터 죽기 전인 1788년까지 금서에 올라갔다. 그리고 특히나 로베스피에르가 애용한 <사회계약론>, 칸트가 즐겨보던 <에밀>은 대표적인 어느 중세유럽의 금서목록(“어느 마술의 금서목록” 제목 패러디, 내 블로그 이웃인 피콜로군을 위해!)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 2가지 책은 현대사회에서도 금서로 보기에 적당한 것 같다. 기존에 <사회계약론>이란 도서는 민주주의국가에서 반드시 전 국민이 지키거나 보장받아야 할 헌법의 기본이 되는 도서인데도, 헌법보단 위에 존재하는 초월적인 존재가 이미 존재한 상태이고, 그런 존재들이 용이하고 영원불멸한 이권을 지키기 위해 권력을 승계한다.

 

권력이란 재산과 공권력도 있으나 중요한 것은 그것을 이어갈 하나의 수단이다. 현대사회에서 그 수단은 바로 교육이다. 교육만큼 인간에게 이득이 오는 것만큼 해로운 것은 없다. 일전에 읽어본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에서 루소의 사상을 잘 볼 수 있다. 학문을 인간을 이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이익을 위한 곡학아세하는 행위들은 결국 가난한 자들을 비탄에 빠지게 하는 원리와 같다. 그런 점에서 루소의 <에밀> 역시 현대의 우리 어른들에게 금서목록 중에 하나일 것이다.

 

특히 극성적인 어머니들에게 말이다. <에밀>을 읽는 순간 그들의 표정은 심각하게 일그러지고, 입에선 오만 때만 욕이나 비난이 터질 것이다. <에밀>은 딱히 그런 사람들을 욕하거나 비난하는 도서는 아니지만, 책을 읽으면 자동으로 알게 된다. 참으로 아이러니다. 한국사회에는 분명 자유민주주의국가라고 하고, 그 정신의 모태는 결국 프랑스대혁명과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거슬러 올라가지 않을 수 없으나, 결국 제일 맞지 않은 책이 되었으니 말이다. <에밀>에서 보인 내용에서 만약 루소가 현대에 살았고, 그가 한국에 왔다면 기절했을 것이다.

 

친구가 외국에 있는 유명대학교 대학생이 한국의 대학가와 노량진학원가를 보면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저렇게 몇 년 동안 청춘을 보내야 한다는 점을 말이다. 어떻게 보면 교육 그것이 문제다. 좋은 학교는 결국 자신의 인생에 성공을 보장하는 수단이란 점에서 말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꼭 그런가 싶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생각해도 학벌은 중요한 위치를 미친다. 학교를 보면 고교 성적표가 보이고, 대학교에 따라 선후배라는 인맥이 형성된다. 한국은 인맥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구조의 사회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익을 중심으로 모인 대학사회이니 당연히 학문에 대한 철학적 자세나 인문학적 소양은 이미 분리한지 옛날이다. 학교 정문에 쇼핑가를 설치하여 학문의 장이 경제적 효과로 이끄는 총장이나, 그 총장이 뇌물을 받아먹고 구설수에 오른 것을 보면 교육이 정말 어떻게 해야 하는가? 라고 의문을 가진다. 사실 한국에서 교육만큼 중요한 것이 없을 것이다. 늘 교육감이나 대통령선거까지도 교육이 이래저래 말이 많다. 대통령이 바뀌면 거기에 따라 교육부 수뇌부까지 교체된다. 국가적 교육정책이 큰 변화를 준다.

 

안타깝게도 교육의 변화는 없을 것 같다. 아니 더 치열하고 잔혹하고 소름이 끼치는 사회가 될 것이다. 교육 그것은 무엇인가? 사실 <에밀>이 왜 지금 우리 사회의 금서라고 생각하는가에서, 우리 사회는 무조건 빨리빨리 그리고 남의 머리를 밟고 올라가기를 바라는 경쟁사회이다. 남이 어떻게 되든지 상관없이 나만 살면 된다고 가르치는 어른들, 그러면서 어른들은 그 자신의 아이들에게 착하게 바르게 살라고 한다. 웃기지도 않은 농담이고, 세상에 그런 위선이 없다. 우리는 후예들에게 진실적인 인간이기를 바라는 것인가? 아니면 세론에 맞추어 우월감에 젖어 타인들을 무시하고 깔보는 무례한 인간으로 키우는가?

 

예전에 영화 <공공의 적>을 보았다. 똑똑한 엘리트가 재산을 차지하기 위해 부모를 살해한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나, 잔혹하고 더러운 일들이 사회에서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낮은 계층보단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 많이 일어나고, 오히려 부정적인 재산축재와 범죄의 깊이가 더 사회지도층에서 일어난다는 점이다. 많이 배우고 많이 아는 사람일수록 더 추하고 더럽고 비겁한 행동을 하는 것이다. 레미제라블에서 장발장은 당장 굶어죽을 것만 같은 고통에서 빵 하나를 훔쳐 큰 죄 값을 치루나, 막상 그런 사회를 만든 자는 경건한 자세로 근엄한 척한다.

 

역시 교육인가? 인간에게 주어진 환경에서 자라고 배운다. 인간은 나는 처음부터 많은 사람들을 칼로 찌르고, 총을 난사하고, 수류탄을 던져 죽이려고 하는 살인마로 될 생각한 사람은 없다. 단지 그렇게 만들어질 뿐이다. 환경이라 주변 여건에서 인간의 인격이 형성된다. 물론 선천적인 요소가 있으나 후천적 요소 역시 크다는 점이다. 그것은 바로 교육이다. 오늘날 우리사회의 병들어가는 이유가 무엇인가? 경제성장을 하고도 국가적 지위에서 세계 강대국과 비교한다고 떠들어대도 여전히 부족한 것들이 많다.

 

왜 우리는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가? <에밀>을 보는 순간 그 해법은 나오되, 아마 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한편으로 대학교 입시생 내지 교양철학 시간에 루소의 도서는 매우 중요하므로 책에 있는 내용을 외울망정 이해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역시 한국의 교육은 위대한 것 같기도 하다. 얼마 전에 입시시험에 질 들뢰즈나 마빈 해리스와 같은 사상가들의 도서내용이 나온 것으로 아는데, 대학에 들어가는 학생들이 들뢰즈나 마빈 해리스의 사상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까?

 

안타까운 일이다. 이들은 인간의 문제와 사회의 문제 게다가 이 세계에 대한 문제를 다루는데, 그것을 염두 하지 않고 점수 따기라니, 우리 사회의 교육은 바로 이것이다. 뭐든지 조급하고 뭐든지 억지로 물꼬를 트는 점이다. 부모들은 그것이 트이면 트이는 데로 따라간다. 우리 아이들은 천재가 될 것이라고 하거나 혹은 좋은 곳에 가야 한다고 말이다. 이제 나이가 유치원에 갈 때도 안 된 상태에서 외국으로 보내 유학 물을 먹인다. 참 부끄럽다. 만약 부모가 외국으로 일을 가서 거기서 살아갈 것이라면 외국어는 필수이나 한국어도 모른 상태에서 영어로 하여 결국 토익 내지 토플로서 높은 줄에 서야 한다는 강박관념, 거기에 떨어지면 인생은 끝이라고 말하는 부모들, 과연 그 아이들은 행복할까?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는 영화가 있었던 한국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행복은 성적순이 되어 버린 지도 모른다. 덕분에 세상은 더 좋아지긴 보다 삭막한 냉정한 기운마저 돈다. 인간이 스스로 인간이 아닌 기계로 되어가는 세상, 감정이란 그저 자신의 상태만 나타기 위한 표출이다. 아니 그런 표출조차도 하기 어려운 세상이 되어가는 것 같다. 이른바 세론, 루소가 세론을 <에밀>에서 언급할 때 나는 많이 놀랐다. 그 당시나 지금이나 그 세론이 사람들을 잡는다. 흔히 우리 인간이 주체가 아니라 시대의 흐름도 아닌 그저 그렇게 사람들이 무의식적 심리에서 새로운 것만이 나오기 바라는 욕망, 그 욕망이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에서 말이다.

 

생각해보면 인간이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에서 사회적 관계가 형성되는 라캉의 말처럼, 그 욕망은 끝이 없다. 해결만 해도 다른 욕망이 다시 떠오른다. 인간의 욕망은 한도 끝도 없다. 루소의 <에밀>에서 욕망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은 욕망의 해결이 아니라 해소다. 해소라는 것은 참 어렵다. 지금의 우리 사회에서 욕망은 끝없이 굴러가는 눈사태와 같다. 물론 욕망의 종점은 있다. 내가 망가지거나 혹은 타인들이 망가지거나 말이다. 문제는 타인이 망가져도 나만 괜찮다는 식의 사람이 존재하면 눈사태는 이젠 타인만을 밟고 지나간다.

 

이것이 되는 이유? 역시 교육이다. 그 교육의 책임은 바로 어른이고 그 사회다. 아이가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라 아이를 그렇게 만들도록 나쁜 행위를 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식량, 집, 의복과 같은 의식주가 먼저다. 그러면 이것이 만족하면 무엇이냐? 라고 물어보면 자유라고 할 것이다. 나의 의지로 살아갈 수 있는 힘, 하지만 자유라는 것이 무엇이라고 스스로 물어본다면 참으로 난감하다. 우리는 자유가 소중하다고 하지 그 자유라는 의미는 제대로 알려주지 않는다. 자유를 알기 위해서는 인간의 의지와 사유가 중요하다.

 

<에밀>에서는 인간의 자유를 가르친다. 그런데 자유를 위해 억지로 아이를 건들지 않는다. 우리 사회와 달리 아이에게 꽉 끼는 옷을 주는 것이 아니라 헐렁한 옷을 주고, 자연과 친숙하기 위해 맨발로 흙을 밟고 옷이 더러워도 좋으니 이래저래 뛰어놀게 한다. 그것이 유아와 아동기, 게다가 청소년기이다. 우리 사회를 보자. 일단 꽉 맞는 옷을 계속 사서 입히고, 움직이지 못하게 한다. 맨발로 돌아다니면 당장 화를 내고, 풀밭에 갈 시간도 없고 갈 곳도 없다. 아스팔트와 콘크리트 숲속에 풀이란 겨우 조경 수준이다.

 

산으로 가면 역시 많은 사람들로 넘친다. 루소가 살던 18세기 유럽은 아직까지 심각한 환경 오염되지 않았다는 전제가 있기에 가능하다. 그렇지만 루소 역시 시골농촌에 가서 아이를 키우기를 바란다. 우리는 대도시 8학군에 가서 어린 시절부터 좋은 초등학교-중학교-고등학교로 보내려고 악을 쓴다. 심지어 유치원도 영어유치원을 선호하여 풀밭에서 뛰어다니는 것은 고사하고 축구공을 들고 방과 후 뛰어노는 것도 용서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나는 행복한 어린 절인 모양이다. 초등학교 시절 모래로 가득한 운동장을 뛰어다니며, 그나마 도시개발이 덜 된 상태라 뒤에 숲속에 가서 산딸기를 따먹고, 갯벌에 가면 작은 게나 고동을 잡아 익혀 먹기도 했다.

 

루소는 바로 그런 자연적인 체험을 중요시했다. 직접 바람을 맞고, 책으로만 연상하지 않고 실제 자신의 몸을 스스로 익히는 것을 말이다. 게다가 기예도 중시했다. 필요한 물건을 무조건 구매보다는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목공일을 하면서 책상이나 의자도 만들어보고, 해의 위치를 보며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까지 말이다. 제일 마음에 드는 것은 청소년 시절이다. 이때는 제2차 성징기이며, 인간의 사춘기가 도래한다. 게다가 혈기왕성하기에 그 젊은 피를 억제하기보단 운동으로서 풀어주는 것이다.

 

신체를 단련하는 것은 자유롭게 들판을 뛰어다는 모습이라, 요새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억지로 가르치지 않고, 스스로 터득하고, 학문적으로 깊은 내용은 차츰 가리키는 모습을 말이다. 물론 남녀의 성적인 사회적 관계에서 루소는 중세와 근대의 사이에 있었으나, 그의 남녀 간의 업무와 애정에 대한 것도 흥미로웠다. 지금은 그렇지 않으나 루소는 어린 소녀에게 집에만 있기를 바란 것이 아니라 공개된 장소에서 자유롭게 춤과 노래를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점이다. 억지로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어울려서 즐길 권리가 있는 점이다.

 

가끔 우리 청소년들이 불량하게 되는가에서 그들이라고 처음에 규정에 맞게 행동하라고 설교를 듣지 않았던가? 하지만 계속 어기고 더 큰 반항을 하게 된다. 그것을 하게 된 이유는 어른들의 문제라는 점이다. 그들은 자신들만의 공간이 없기에 어른들이 가진 공간을 넘보고, 그것을 자신에게 올 수 없기에 비행을 저지른다. 담배피우고 술을 마시고는 결국 어른이 하는 행동이고, 아이가 아이로서 남아두는 자리를 모조리 앗아 가는 바람에 결국 아이가 아닌 어른이려고 하는 것이다.

 

자유라는 것도 자유의 기회조차 주지 않으면서 자유라는 숭고한 이름을 하나의 속박으로 목을 옭아맨다. 루소의 <에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유라는 것이다. 그 자유는 모든 것의 속박에서 해방되어야 가능하다. 한국사회에서 이렇게 교육할 가능성은 없으나, 한 번 제고할 필요가 있다. <에밀>의 마지막 부분은 소피라는 소녀를 만나 에밀과 순수하고도 이성적이며 열정적인 사랑을 확인도 있으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

 

에밀이 부잣집인데도 그는 스스로 일한다. 목공일을 하며 땀 흘리며, 주변 농민들과 잘 지내며 그들의 일도 돕고 같이 밥도 먹는다. 루소의 근본적으로 <에밀>에서 에밀을 가르치는 이유는 인간의 인간성 회복이다. 본문에서도 장인의 기술은 소중하다고 한다. 물론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대량생산대량소비이기에 공장에서 나온 많은 상품에서 장인들의 손맛을 알 수 없다. 모르겠다. 농민의 손에서 나온 귀한 음식이라면 그럴 만도 하겠다. 루소가 어떤 부분을 말한 것이 인상적인가?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가 그랬다. 그는 공사장에서는 목수가 되었고, 병영에서는 북치는 병사가 되었다.”, 조금 내용이 비켜가도 스파르타 왕들은 누구보다 차가운 바닥에서 자고, 누구보다 용맹하게 앞에 나간다고 한다. 음식도 병사들과 같이 먹고 잠자리도 같이 한다. 오히려 높은 위치에 있기에 그런 특권의식을 버리기에 주변의 존경과 그 위치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영국에서는 “노블레스 오블리제”, 루소의 정치제에서도 민주정치를 원하나 그 민주정치에서도 귀족정치를 원한다는 것을 보았다.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 外>에서 간사하고 무식하고 이기적인 시민이 인민의 대표로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되는 순간 자신의 이익만 추구하고, 그것은 곧 다른 인민들을 해롭게 하기 때문이다. 그런 일들은 종종 우리 사회에서 보는 것이라 안타까우나, 루소는 인간의 본연적인 자세를 중시했다. 필요한 것만큼 먹고, 그 필요이상은 멀리하려고 했으며, 그런 필요이상의 기대나 세론이 오히려 인간을 속박한다고 한 것이다. <에밀>을 읽으면서 불현듯 생각나는 애니메이션이 있었다.

 

그것은 안노 히데아키 감독이 제작한 <신세기 에반게리온>이다. 주인공 이카리 신지군은 학교생활에 그다지 눈에 튀지 않고, 조용히 지내면 성적도 나름 우수하고 첼로도 켜는 학생이다. 어떻게 보면 모범생 같은 느낌은 강하나 사람과의 접촉을 두려워하며, 인간관계가 무척 약하다. 신지만이 아니라 레이나 아스카, 그 위의 어른들인 이카리 사령관, 미사토, 리츠코, 카지와 같은 인물 역시 어른 나름대로의 고통과 고뇌가 있었다. 이 작품에서 어른들이란 아이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가치관을 제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이들을 억압하고 괴롭게 하는 존재이다. 아이의 어긋난 자아와 행동들은 그 사회가 가진 병에 걸린 모습을 반증하는 것인가? 자신의 의지가 없이 타인에 대한 세론이나 눈치 보는 신지나 그렇게 살아온 나 역시 그런 느낌이 든다. 그나마 지금은 반항적인 기질이 있어서 가끔 주변에서 사춘기 소년 같다는 말을 듣는다. 원리 원칙적으로 윤리적으로 선험적인 이성으로 내 사고는 옳으나 세상은 옳지 않다는 것이 유감이다. 그나마 <에밀>에서 내가 가진 생각은 그나마 옳은 모양이다.

 

에밀이 소피의 집에 초청받을 때, 그 날 못가고 며칠이 지난 후에 갔다. 일하다가 귀가 길에 누군가 길에 넘어져 고통 받는데, 그 사람은 처음 소피의 집에 가기 전에 주변에 있던 농민이었다. 그 농민은 다리가 부러져서 말을 탈 수 없자, 에밀은 스승과 같이 들 것을 만들어 그 농민을 집까지 모셔드린다. 그런 후에 에밀은 의사에게 달려가고, 자신이 탄 말은 의사에게 주고, 자신은 걸어온다. 그런 사정을 이야기하니 소피는 오히려 에밀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생각한다면 교육의 진실한 가치는 이런 모습이 아닌가 싶다. 5장 성인기의 에밀이 남녀의 사랑도 중요하나 그 사랑만큼 중요한 게 인간을 어떻게 대하는 점이다. 우리의 교육 그런 철학이나 있을까?

 

집안의 지나친 가난과 병마로 자살한 노동자와 서민 그리고 소외된 자들, 우리 헌법에서는 누구나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다고 그렇지 못한 경우가 허다하다. 그런 사람들에 대해 따뜻한 말 한 마디는커녕 차가운 무시와 악의가 담긴 폭언을 날리는 사람들, 그들 대부분 젊은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오늘날 <에밀>이란 책이 왜 다시 한 번 읽어보는 것이 중요한지는 내가 볼 때 역시 어른들이 문제다. 어른이 되어가는 것은 이상하게 인간 스스로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자기만 살아남고 남은 어찌 되든지 상관없다는 그런 이기적인 존재가 어른이 아닌가 싶다. 그러면서 후예들에게 스스로 얼굴을 드는 모습에서 교육 참 어렵고도 험난한 존재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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