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 문학으로서 삶
알렉산더 네하마스 지음, 김종갑 옮김 / 연암서가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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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니체를 읽으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혹은 이미 한 번 니체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나는 이 책을 추천할 것이다. <니체, 문학으로서 삶>, 생각보단 니체에 대한 서적에서 꽤 유명한 서적이고 많이 읽어진 도서다. 한국에 번역이 늦어 이제 출간된 점에서 뭔가 의아한 부분이다. 한국에도 니체학회가 있을 정도로 니체의 학문적 역량은 막강한 것이다. 예전에 질 들뢰즈라는 프랑스 철학자가 저술한 <들뢰즈의 니체>를 읽어보면서 니체의 입문서로 좋다고 하나, 솔직한 생각으로 질 들뢰즈가 저술한 니체 입문서보단 알렉산더 네하마스가 저술한 도서가 더 좋은 것 같았다.

 

그 이유는 이 철학자가 니체를 꾸준히 연구한 점이고, 미국에서 니체와 더불어 실존주의 철학을 오랫동안 강의한 것이다. 따라서 니체를 읽어본 사람이나 혹은 읽어 보려한 사람에게 제법 친절한 도서라는 점이다. 사실 니체의 책을 읽기란 쉽지 않다. 전에 읽어본 <비극의 탄생>에서 2번 읽어도 난해한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니체는 기존의 모든 형이상학을 뒤집기 위해 반형이상학적으로 글을 적었다. 하지만 형이상학을 전도시키기 위해서는 형이상학으로 대할 수밖에 없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예를 들어 역사의 흔적에서 역대 폭군에 의해 고통 받는 민중이 있다면 그들은 부당한 폭력에 반항하기 위해 혁명을 일으킨다. 하지만 그 혁명의 방법에서 폭력이란 수단이 동원될 수밖에 없다. 폭력을 이기기 위해서는 폭력이 필요하고, 이와 다르게 사랑을 잃으면 새로운 사랑이 필요하다. 오히려 필요 없다는 것이 더 필요하게 되는 것이 인간이 살아온 역사적 흐름이다. 그래서 니체는 기독교의 집안에서 태어났음에도 기독교를 엄청 비판하지 않았던가? 니체는 오히려 기독교 본질적 요소를 원했을지 모른다.

 

더러움 권력과 물욕에 사로잡힌 독거미 같은 당시 교회권력에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외쳤다. 신이 진짜로 죽은 것이 아니라 신의 죽음으로서 그 믿음이란 절대적 광기를 폭로함으로서 신의 존재성을 부정했는지 모른다. 인간이 스스로 주인이기 위해서는 신은 죽어야 했다. 아니 오히려 인간이 신으로 되어야할지 모른다. 고대 그리스에선 인간과 신은 이분법적 존재보다는 그 중간적 존재를 인정했다. 그리고 인간은 항상 자연 속에 하나로서 운명적 비극을 맞이해야 했다. 특히 소포클레스의 비극전집을 보면 비극 속에서 우리 주인공은 나락으로 떨어진다.

 

그것을 보는 코러스들의 합창, 합창의 엄중한 화음은 그들의 운명적 비극을 위로하고 찬양한다. 희극으로 끝나면 모든 것이 마무리되어야 하나 비극으로 되면 다시금 돌아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비극은 영원한 것이다. 그 영원한 노래 속에는 그 본질적 특성인 항상 변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것 자체가 불변하기에 영원한 것이다. 니체의 사상에 그렇게 원근법적인 시야를 가진다. 절대적으로 그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추구하다가 그의 이야기를 비틀어버린다. 마치 이때까지 따라온 독자를 우롱하듯이 말이다.

 

니체의 문체는 매우 화려하고 아름답고 장엄하다 못해 하나의 노래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노래를 계속 따라가면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영원히 미로를 헤매고 있는 독자에게 차라투스트라는 그 길을 따라오라고 하는 것처럼 보이나 이내 멀리 내쫓으려 한다. 니체는 인간 그 스스로가 주인이어야 한다고 했다. 권력이란 바로 자신을 지배하는 인간이다. 니체는 귀족을 추구한 것은 아니나 귀족주의를 추구했다. 인간 스스로 고귀하고 위대해지는 것을 말이다. 그러나 인간이 위대하기 위해서는 인간 자신을 예술적인 삶으로 살아야 한다고 했다.

 

마치 군대행렬의 기수가 되는 전위부대처럼 아방가르드의 정신을 생각하면 니체의 사고는 많은 영향을 준 것 같다. 그것은 예술이란 것은 그 자체로 다른 것과 구별되어야 한다는 점과 그 구별이 결국 개인에 대한 자아의 형성이다. 그리고 그것은 권력에 대한 자유로운 의지다. 타인을 지배하거나 지배받는 것이 아닌 그 자체로서 말이다. 그런 니체의 서적들을 여기저기 찾아보면 겹치거나 일치하는 부분이 있다. 개인적으로 니체의 도서는 <비극의 탄생>, <도덕의 계보>, <반사회적 고찰>,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정도이다.

 

<니체, 문학으로서 삶>을 읽다보면 저자는 니체의 많은 서적을 골고루 참조하여 니체가 가진 공통적인 철학을 제시한다. 그러나 철학이기보단 문학이란 것은 이야기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하나의 서사이기보단 그 서사로서 만들어가기 때문이다. 그 서사에는 모든 것을 좌충우돌하는 아이러니로 가득할 것이다. 그러나 니체가 그토록 흔드는 이유는 인간에게 절대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절대성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그 모든 것을 거부하기에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 니체는 사람을 알기 위해서는 그 사람과 한 번 싸워야 한다고 했다. 그래야 친해질 수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진심으로 대할 수 있기에 그 사람의 본질적 요소를 알 수 있는 것이다. 화를 내고 웃고 울고 때로는 냉정하고, 다양한 모습에서 인간을 알 수 있다. 니체의 문체는 바로 그런 다양한 감정들이 숨어 있다. 마치 웅장한 연설가가 하늘 아래서 내려 보는 기분이 들면서도 한편으로 위대하고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것 같다. 누가 선위에 있는지 알 수 없다. 한번 니체의 책을 읽어볼 사람이라면 무엇을 어떻게 갈지 혹은 어떤 식으로 자기가 읽었는지에 대해 생각하면 제법 매력 있을 책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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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3집 - 기억상실
부활 노래 / 지니(genie)뮤직 / 199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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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3집이 다시 나온다. 내가 중학교 시절에 나온 부활3집이 말이다. 김태원의 부활에서 1집과 2집의 사운드는 다소 강렬한 느낌이라면 3집은 매우 서정적이다. 그리고 매우 슬픈 기타소리다. 부활이 만약 3집의 사랑할수록이란 곡이 없었다면 다시 부활할 수 있었을까? 그래서 다른 부활 앨범과 달리 3집을 들으면 마음이 아쉬워할 수밖에 없다. 떠나간 김재기의 목소리가 너무 부드러우면서도 강렬하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사랑할수록이란 곡은 그렇게 어렵지 않게 들리는 곡이나 막상 불러보면 어려운 노래이다.

 

그게 아마 보컬리스트 김재기의 타고난 능력이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은 몇 곡 되지 않는다. 단 하나의 앨범, 그리고 한국의 가요계와 락음악에서 큰 획을 긋은 노래들, 사람들은 대부분 사랑할수록만 알 것이나, 소나기를 비롯한 다른 노래도 많이 있었다. 하지만 소나기가 아주 강렬하게 느낀 것은 보컬리스트 김재기와 기타리스트 김태원의 강한 공유의식이다. 두 사람 모두 가난하고 불우한 청춘을 보낸 사람이다.

 

배고픈 두 사람이 결합하여 이제 녹음하던 찰나 김재기가 교통사고로 죽는다. 이때 김태원은 ! 재기가 바람으로 떠났다라고 한다. 정말 바람처럼 떠나고, 그의 노래만 남아 영원히 우리의 가슴에 살아있다. 1993년에 발매되어 20년이 지난 지금도 3집을 들을 때면 그저 가슴이 담담할 뿐이다. 아직 노래를 많이 더 부를 수 있는데 말이다. 부활3집은 김재기의 음악이 반이고, 김재기를 추모하는 음악이 반이다. 811이란 곡은 811일 김재기가 죽는 그날이었고, 게다가 811은 한 번만 나온 게 아니다. 다른 앨범에도 계속 김재기의 죽음을 기억하는 음악이 있었다.

 

김재기의 목소리가 아니지만 김태원이 김재기의 죽음을 계속 기리는 것은 계속 부활 앨범에서 나온다. 부활베스트 이솝의 붓에서 박완규로 시작하여 7집에도 그 후에도 계속 소나기는 나온다. 그래도 뭔가 모르게 소나기를 들으면 김재기의 목소리가 아련하게 들린다. 처음에는 박완규의 폭발적이고 강렬한 보컬이 좋았다. 김재기와 비교하여 힘이 있었고, 허스키한 스타일이 가슴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보니 김재기의 목소리에 이끌리는 것은 김태원의 섬세한 감정을 김재기가 잘 소화한 것이다.

 

그래서 3집은 너무 아까운 앨범이다. 앨범에 주요 기타연주곡인 Lost of memory나 별은 김재기의 목소리를 대신할 수밖에 없는 김태원의 느낌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부활 2집에서는 김태원의 고집으로 곡 자체에 보컬이 들어있는 것보다 기타연주가 들어있는 것을 더욱 추구했다. 하지만 3집은 아예 반주로 채울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런 슬픔은 김태원만 아니었다. 당시 다른 부활 멤버도 김재기의 죽음을 많이 아쉬워하고 아파했다.

 

당시 100만장이란 밀리언셀러인 앨범, 물론 많은 사람들이 알고 듣고 불러주는 것은 좋은 것은 분명하나, 그 앨범에 담긴 깊은 목소리를 느낄 수 있을까? 라는 걱정도 앞선다. 확실히 알아줄 것은 김재기는 힘으로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음악에 힘을 불어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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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소년 공주님 1 - Novel Engine
모베 지음, 모브 그림 / 데이즈엔터(주)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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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무척 막장으로 가는듯한 작품이나 나름 이 라이트노벨도 1권으로 끝내기 정말 아까운 작품이었다. <절대소년 공주님>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으면서 엉성한 이야기보단 너무 엉성한 인물이 가득했다. 그런데도 나름 읽을 만한 이유는 이 라이트노벨을 정말 끝까지 읽고 후기까지 참고해야 하는 것이다. 라이트노벨이란 장르가 한국에 거의 10년 정도 된 것으로 알고 있다. 아직 일본에 비하면 발간 부수나 종류가 매우 열악한 현실이다. 그런 와중에 라이트노벨이 계속 개인적 번뇌나 망상으로 가득하여 읽어도 거기서 거기인 것도 역시 아쉽다.

 

물론 개인의 자유로운 창작의지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나, 그런 이야기만 가득하면 결국 돌고 도는 이야기 속에 라이트노벨이란 경소설이 그저 하나의 유치한 이야기로 전략하기 때문이다. 문화콘텐츠 면에서 스토리텔링이 중시되는 점을 고려하면 라이트노벨이란 콘텐츠의 무한한 보고이다. 일본에서 나오는 라이트노벨에서 만화, 영화, 드라마, 게임 등이 파생되어 상품화된다. <스즈미야 하루히> 시리즈를 보면 그 인기도 상당하다. 한국에서 라이트노벨에 대한 작품성을 논하기에 아직 부족한 게 많다.

 

그 최대 이유는 작가가 얼마나 자신 스스로 수련 하였는가 이다. 라이트노벨이 만화와 애니메이션 시나리오로 택하기에는 매우 중요한 것은 사실이나, 그 스토리라도 나름 규칙과 정해진 패턴이 있다. 물론 지나친 규칙과 패턴에 얽매이면 작품은 그저 붕어빵 공장에서 찍혀 나오는 레디 메이드에 불과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절대소년 공주님>을 적기 앞서서 <스즈미야 하루히> 시리즈를 이야기하는 것은 그만큼에 대한 이유가 있다. <스즈미야 하루히> 시리즈를 보다가 나츠메 소세키라는 작가가 나오는 부분이 있다.

 

조금 아쉬운 점은 내가 읽을 시점이 라이트노벨이 아니라 만화책으로 읽었기에 원작과 대조함에 있어서 얼마나 잘 분석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단지 만화책에 주인공 스즈미야 하루히가 일본 근대문학의 최고선구자인 나츠메 소세키와 만난 것에 대한 에피소드다. 현대 일본 문화평론가 및 사상가인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에서 나츠메 소세키의 그 역량은 이루어 말할 수 없으며, 그가 내놓은 소설이나 각종 문학이론도서 역시 일본문학만 아니라 한국을 비롯하여 세계적으로 인지도가 높다.

 

사실 나츠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마음>이란 소설을 읽어보면서 그의 치밀하고도 높은 글에 놀라움을 느낄 뿐이다. 바로 이런 문학에 대한 요소들은 라이트노벨에 직접적으로 차용했다는 점은 나름 작품에 대해 의미하는 바가 있다는 것이다. <스즈미야 하루히> 시리즈는 전형적으로 포스트모던한 작품이다. 시공간의 비일치와 더불어 신이라고 여기는 스즈미야 하루히가 신적인 소양이란 없다. 절대적인 요소를 부정한 것이다. 그래도 작가는 그런 점을 생각했는지 안 했는지 모르나, 그 상상력에는 그만큼 문학에 대한 기본적 소양이 있다는 사실이다.

 

<절대소년 공주님>을 읽으면서 먼저 후기부터 살펴보았다. 거기에 그가 읽은 도서로 유명 작가가 있었다. 나츠메 소세키, 무라카미 하루키와 같은 일본 근현대 작가만 아니라 그 외 다수의 유명한 작가들의 서적들을 읽었던 것이다. 책의 본문을 보면 왕국의 공주를 납치한 마왕국의 한 신하가 마왕국의 경제와 내부 살림을 걱정하는 모습이 나온다. 물론 본래의 작가이름은 다르게 표시했으나, 암만 봐도 경제학을 생각하면 유명한 이름과 서적이 나온다.

 

시장경제주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아덤 스미스의 <국부론>, 아덤 스미스가 발견하지 못한 공황과 자본주의 구조를 제일 잘 분석한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론>, 그리고 미국 대공황시기에 루즈벨트가 차용한 존 케인즈의 <일반론>이란 도서가 나왔다. 아무리 웃기려고 한 라이트노벨이라고 하나 적어도 이런 도서를 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작가 본인은 어느 정도 문학적 혹은 사상적 배경이 있었다는 증거다. 따라서 작품을 보면 그 나름대로 교훈이 보인다. 라이트노벨에서 무슨 교훈을 찾을 수 있는가에서 분명 찾을 수 있다.

 

김용석 교수의 <서사철학>에서 그 어떤 이야기라도 분명 철학적 담론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아주 못난 일본 극우적 만화에서도 찾을 수 있다. 저런 극우적 성향이 강한 만화에 교훈이 이데올로기적으로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판단하여 문제가 있다고 찾아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철학적인 부분이 그 이야기에 없을지라도 우리는 스스로 철학적인 부분을 찾아낸다. 생각해보면 플라톤이 자신의 스승인 소크라테스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만든 대화록이 그런 게 아닌가? 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찾기를 말이다.

 

<절대소년 공주님>의 답은 별 것도 아닌 이야기에서 혹은 정말 엉망인 생활에서 마지막에 나온다. 억지로 납치당해 공주 행세를 해야 하는 레빈 루안에서 그가 최후의 행동이 그런 것이다. 남장으로 통해 용사 하는 실제 공주는 사실 절대적 힘을 소유하고 있다. 그리고 그 공주 대역인 레빈은 아주 힘이 약하고 소심한 남자아이다. 문제는 그 진짜 공주와 가짜 공주를 보위하는 메이드의 이야기다. 그 메이드가 어린 시절 인신매매를 당해 가혹한 생활을 했을 때 어떤 남자아이에 대한 기억이다.

 

그 남자아이는 다정했기도 했으나, 나중에 구출단이 와서 정의라는 이름의 폭력이 난행할 때 정의의 응징을 당해야하던 인신매매 조직까지 보호하려 했다. 칼을 가진 구출단이 잔인하게 인신매매 간부를 다리를 조금씩 자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반대하자, 용사는 그 어린 남자를 구타한 것이 나온다. 메이드로서 보위하는 기사 넬의 어린 기억에서 레빈 루안의 행동은 무엇을 뜻하는 것이다. 조금 아쉬운 부분은 이 라이트노벨이 가이낙스 애니메이션인 <마호로매틱>과 많은 유사점을 보인다.

 

<마호로매틱>에서 마호로의 의상이 매우 비슷하다는 점이다. 그리고 1기에서 마호로가 세인트의 전사 류가와 싸울 때 스구루가 나타나 그 연약한 몸으로 싸움을 말리는 부분에서 말이다. 단지 스구루는 연약한 신체인데도 세인트의 전사 류가에게 정면으로 막았다면, <절대소년 공주님>의 레빈 루안은 다른 식이다. 그는 여자아이처럼 작은 몸집의 남자아이고 게다가 매우 귀엽게 생겼다. 자신의 비밀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대해선 모두 여자라는 점이다. 그는 용사로 나타난 공주 앞에서 만약 마왕성에서 물러나지 않으면 자신의 팬티를 내리고 그 팬티를 내린 모습을 공개하겠다고 한다.

 

용사군이나 마왕군이나 모두 강력한 전사나 마법사다. 오로지 자신만 무기 하나 잡지도 못하고 마법조차 모른다. 하지만 레빈 루안은 그런 식으로 용자군을 스스로 물러나게 한다. 넬이 왜 어린 시절의 아픈 기억이 레빈 루안에 의해 회복되는 것이다. 사실 마왕국에 납치당한 것은 사실이나 막상 마왕국의 일상은 두려움보다 재미라는 것이 있었다. 본래 왕국의 시녀였으나 알고 보니 마왕국의 신하였던 자도 아주 친절한 사람이고, 마왕은 세계정복이니 왕국타도가 아니라 그저 은둔형 폐인이고, 그 마왕의 여동생은 이름을 줄여 빈유라고 하고, 그 빈유를 지닌 몸인 만큼 키도 정신연령도 낮다.

 

남에게 도저히 위험을 끼치지 않을 것만 같은 마왕국이다. 당초 공주납치도 부당한 채무부담을 해소하기 위한 점에서 어떻게 본다면 우리는 그 본질을 모르고, 그저 알고 있는 것만으로 대하는 것이 얼마나 나쁜 것인가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마왕과 마왕의 주변 인물을 모두 제거하고, 얼마든지 왕국으로 갈 수 있었던 레빈 루안이나 그는 선택하지 않았다. 그저 마왕국에 포로로 잡힌 공주로서 남는다. 서사적으로 완료설정은 공주가 구출되어 다시 복귀하여 레빈 루안은 일반 가정으로 돌아가는 것이나, 이 작품의 완결은 그저 레빈 루안과 넬이 마왕국에 남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우리가 절대적으로 옳은 것이라고 보는 집단보단 그 집단이 적대시 하는 공간에 막상 가보니 사실과 다른 공간임을 알고 자신이 편한 위치에 있기를 거부한 것이다. 물론 왕국에 가도 공주 행세는 계속 해야만 한다. 그래도 마왕국의 포로보단 왕국의 공주대우가 훨씬 좋을 것이다. 결국 인간은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진정한 용기와 정의는 무엇인가? 강한 힘을 가진 용사군단일까? 아니라면 용사단이 마왕국의 사람들을 모두 죽이는 것을 막으려고 약골인 자신을 날리는 레빈 루안인가? 물론 본질을 모른다면 결국 용사들의 손을 들겠지만, 본질적으로 본다면 무엇이 옳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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ㅏㅏ 2015-04-01 0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해조차 못한 주제에 그 경향을 다 알고 있다는 듯 떠드는 모순이 같잖이 그지없다

만화애니비평 2015-04-01 09:09   좋아요 0 | URL
그런 네가 네 아이디 걸고 네가 적어봐
 
절규신데렐라 3
눈미 유 글 그림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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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인 나로서는 여성의 심리적 변화를 아는 것은 무리다. 평소 눈치 없는 점도 기여하겠으나,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여성이 기르고 있는 머리카락을 짧게 자르는 것은 아주 큰 변화가 있을 때란 점이다. 이번에 읽은 <절규 신데렐라> 마지막 3권에서 해인의 시작은 짧게 자른 단발머리다. 자신이 오랫동안 기르던 머리카락을 자른 것은 이때까지 살아온 인생관을 바꾼다는 의미와 같다. 그 의미를 부여하게 된 동기는 케빈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깨우쳤기 때문이다.

 

우연히 집 앞에서 노래연습하려고 아버지 차안에 있던 해인은 케빈과 공주가 같이 있는 모습을 본다. 케빈의 입술에 공주의 입술이 닿는 순간, 해인은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왠지 모를 아픔과 절망,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흐른다. 해인이 이때가지 제대로 알지 못한 자신의 마음을 확인하는 순간, 해인의 마음에는 하나의 한()이 맺히기 시작한다. 때마침 라디오 테이프에서 흘러나오는 반주음악, 해인은 우연히 그 음악과 자신의 상황이 일치하는 것을 느낀다.

 

음악이란 것은 감정의 표현이고, 음악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산 자가 죽은 자를 달래기 위해 읊조리는 경우 책을 읽듯이 읽는 것이 아니라 노래하듯이 읊는다. 그것은 죽은 자를 부르고 대답하는 것을 노래이기 때문이다. 그런다고 실제 죽은 자가 강림하는 것은 아니나, 그 노래의 의미는 옆에 있는 많은 사람들의 감정을 이끌어내기 위한 하나의 레퀴엠이다. 그렇기 때문에 죽은 자이든 살아있는 자이든 의식을 하는 것은 살아있는 자, 그리고 그것을 직접 노래를 부르는 사람을 위한 곡이기도 하다.

 

그런 만큼 마음 속 깊이 우러러 나오는 감정의 기복이란 당연히 큰 파장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해인의 성장은 바로 그 아픔에서 나오는 진정한 감정의 발견이다. 자신의 솔직함을 보여주고 싶은 해인은 그 각오를 다지기 위해 단발머리로 나오는 것이다. 아무리 공주에게 케빈이 있다고 해도, 해인 본인 자신이 케빈이 좋아하는 것만큼은 사실이고, 그 마음은 결코 변하지 않는 자신만의 자신감이다. 케빈이 옆에 있어도 노래하는 자리가 긴장해도 그 마음은 변하지 않기에 해인의 노래는 매우 솔직하고, 또한 감정을 매우 깊이 자극한다.

 

상대방의 마음을 이끌게 하는 그 음색은 자신의 내면에 있는 거짓 없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해인의 재능을 알아본 작곡가 동호로서는 해인 그 자체가 보물이었다. 전에 해인이 녹화를 하지 못한 이유로 동호는 자신의 차에 해인을 태우고 집으로 향한다. 물론 동호는 해인에게 직접적으로 나쁜 마음을 가지지 않았으나, 연예계 뒷소문으로 동호는 좋은 평판이 아니기에 그것을 안 케빈이 해인에게 고백을 하고, 신데렐라의 가장 큰 절규 중에 하나가 해결된다.

 

하지만 절규 하나가 끝이 나도 다른 절규가 남아있다. 그것은 해인과 해인의 아버지에 대한 관계다. 어머니를 잃고 오로지 아버지에게 자란 3남매에게 아버지란 존재란 유별날 수밖에 없다. 케빈이 해인에게 돌아서고, 게다가 작곡가 동호에게 선택된 이유로 공주는 해인에 대해 앙심을 품고, 결국 해인의 아버지에게 해인의 비밀을 털어놓는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동안 자기가 믿고 노력한 해인이에게 배신감을 느끼고, 최후 오디션에선 부녀의 인연까지 끊으려 한다.

 

해인이 이때까지 한 번도 아버지를 거슬리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의지로 만든 성과가 아버지와 나누지 않으면 의미가 없었다. 해인은 자신을 뒤로 한 채 쓸쓸하고 작은 어깨를 보인 아버지에 향해 노래를 부른다. 아마 노래는 <절규 신데렐라> 1권에서 해인이가 예선 오디션에서 아는 노래가 없어서 어릴 적에 부른 동요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 노래를 부르던 장면에서 어린 시절 어머니와 추억이 나오기 때문이다. 해인에게 우리 해인이 노래 잘 한다고 박수치며 좋아하던 어머니 옆에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아내가 남편에 향하여 해인이 노래 소리 정말 예쁘죠?”라고 묻자, 남편은 ~ 듣고 있어, 듣고 있어, 정말 예쁘구나.” 라고 대답해준다. 아내와 아이를 유독하게 사랑하던 한 가장은 해인이가 의사가 되어야 한다고 하는 이유는 바로 아내의 죽음을 정말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다. 자신이 무너지지 않기 위해 그동안 아내와 해인이랑 보낸 시간을 잊어 버렸는지 모른다. 아니 잊기보단 생각하지 않으려한 것이 아닐까 싶다. 해인이가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그에게 아픈 추억이 떠오른 것이다.

 

해인이 변했다고 생각한 아버지나, 알고 보니 해인은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변한 것은 아버지 자신이 아닌가 싶다. 해인은 진심으로 아버지를 사랑했고, 돌아가신 어머니를 사랑했다. 그 당시 맺어진 유대감을 다시 찾기 위해 해인은 노래를 부른 것이다. 그 어떤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 맨발로 달려가 거리에서 큰 소리로 애절하게 부른 해인의 모습은 이 작품은 절정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본래 신데렐라 신화는 신데렐라가 왕자와 결혼한 것으로 끝이 나나, 여기서는 아버지의 관계까지 회복한 것이야 가능했다.

 

, 여자가 기존 가정에서 다른 가정으로 이동하면서 신분적 상승을 노리는 것이 아니라 기존 가정을 고수하고 다른 가정과의 관계성을 갖는 것이다. 신분상승도 단순히 케빈의 도움이 아니라 자신의 노력이 있었다. 신데렐라 신화적으로 이 작품은 약간 뒤틀어 버린 작품이다.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우위에 있는 남성에게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 도움이 있더라도 자기의 능력으로 그 위치를 찾아갔기 때문에 기존의 신데렐라 콤플렉스와 많은 차이점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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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규신데렐라 2
눈미 유 글 그림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10년 4월
평점 :
절판


 

절규 신데렐라 2권에서는 갈등의 전조가 보인다. 일단 무대 위의 주인공들은 1권에서 다 모여 있으며, 그 인물들이 앞으로 내보일 갈등과 위기의 순간은 다가온다. 서사 속에 인물들의 관계에서 이른바 동기 즉 모티브라는 것이 중요하다. 왜 그렇게 하게 되었는가? 점에서 말이다. 해인의 경우 왜 작곡가 동호에게 강한 관심이 있었을까 이다. 작품을 보면서 느낀 것은 서로 간의 공감이란 것이다. 작품 내에서 극적인 플롯으로 해인의 어머니의 죽음이다. 해인의 아버지가 평소에 아이들에게 유유하게 대하다가 갑자기 엄격해진 것은 어머니의 부재를 대신 처리하기 위해서다.

 

낮에는 직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저녁까지 먹이는 해인의 아버지는 전형적인 꼰대로 나온다. 가족의 죽음은 그만큼 인간의 인격이나 성격에 큰 변화를 주기 때문이다. 작품에서 해인은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해 실어증에 걸리는 것이 나온다. 물론 위에 오빠와 언니가 있으나 그들은 어머니의 죽음을 겪어도 후유증에 시달리지 않으나, 해인은 어머니의 죽음으로 말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인간의 감정에서 그 감정은 관념적인 영역도 포함되나, 그 관념적인 부분을 지나 육체적인 감각까지 앗아버렸다.

 

집 마당에서 나비를 쫓아가던 중에 넘어서 이마에서 피가 흘려도 아프다고 말하지도 못하고, 울지도 못한 채 그저 입만 뻐금뻐금 거리는 해인의 모습에서 어린 시절 어머니의 죽음은 그야말로 커다한 충격이었다. 그 덕분인가? 해인의 감수성은 정상적인 15세라기보다는 차라리 아직 초등학교 학생에 가깝다. 2차적 성적 변화가 육체적으로 이미 왔으나, 정신적으로 오지 않았던 것이다. 사춘기 소녀의 모습에서 그녀는 동호에 대해 남성이란 영역보단 아직 7세 시절의 자신의 느낌은 반영한다.

 

그 이유는 바로 공감이란 것이다. 공감이란 서로 뜻이 통하기도 하나, 그 통하는 정신적 유대감이 결국 일직선이란 공간적 한계가 있는 것이다. 동호가 우연히 해인의 어린 시절에 있었던 이야기를 들으면서 왜 해인이가 자신의 변칙적인 피아노곡에 맞추어 노래를 할 수 있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어린 시절에 새겨진 지독한 그리움이란 슬픔이다. 단지 동호는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들여다보면 사랑한 마음만큼 미움과 절망이 가득하고, 해인은 어머니를 사랑한 마음만큼 추억과 애한이 스며있다.

 

2사람이 가지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공통적이나, 동호의 경우는 잊고 싶은 과거라면 해인은 잊고 싶지 않은 기억인 것이다. 2사람의 접점은 바로 동호가 15세 피아노 연주에서 드러난다. 어머니의 사랑에 대한 그리움과 동시에 자신을 버리고 먼저 가버린 배신감에서 슬픈 마음을 피아노 선율로 흐르는 것이다. 그 선율을 해인은 듣고, 자기 자아의 내부 깊숙하게 박힌 어머니의 죽음은 각인하고, 비로소 울음을 터뜨리다. 개인적으로 이 장면이 슬픈 것은 해인이 어머니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우는 장면이 아니다. 해인이 우는 장면을 보고 그리고 해인이 말을 하는 것을 보고 해인의 아버지가 웃었다는 점이다.

 

자기 자신도 마음이 괴롭고 힘들 것이다. 해인이가 어머니와 딸이 지니는 가족애는 7년이나, 아버지는 그 이상으로 가족애를 가졌을 것이다. 그것을 받아 들이야 하는 해인의 아버지야 말로 어떻게 보면 비극이야기 속의 희극적인 인물일 것이다. 슬픔마저도 웃을 수밖에 없다는 그 아이러니한 모습을 말이다. 아버지의 그런 모습이 작품 내에서 꼼꼼하고 전형적인 소시민 인간상으로 보이는 하나의 조건이라고 본다. 해인이 왜 연애감정이 없는가에서 아버지의 교육관이 강하게 작용한다. 오로지 의대에 가야한다 성공해야 한다라고 하는 목표만 주었기 때문이다. 아니라면 그것이 아니면 자신의 마음이 쓰러질지도 모른다.

 

동호의 예정신곡인 Please don't change 것을 생각해도 제발 변하지 말아주세요. , 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계속 자신에게 변하지 말아야 대상이고, 그 대상은 어머니일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늘 변해가는 존재이다. 자신이 살아있음은 곧 죽어가고 있음이다. 어제와 오늘은 같아 보여도 다르게 조금씩 변해간다. 변화의 모습이 자신조차 찾아보지 못할 정도로 늘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해인은 변해가기 시작한다. 그 변화의 중심은 케빈이 있었다. 삼각관계의 구조가 <케빈-해인-동호>에서 이제 새롭게 <해인-케빈-공주>라는 다른 구조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공주가 해인이의 비밀을 알았고, 강한 자존심과 독점욕을 가진 공주는 잘생기고, 명랑한 케빈을 마음에 들었다. 물론 그런 조건이 있었으나 한편으로 해인이라는 존재가 눈에 가시처럼 보였고, 해인이의 모든 것을 빼앗고 방해하고 망치고 싶은 질투심이 작용한 것이다. 결국 해인의 비밀을 담보삼아 공주는 케빈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고 한다. 이때까지 그냥 친구처럼 보이던 케빈이 공주 옆에서 인형처럼 있는 것을 보고 해인은 이때까지 느끼지 못한 감정을 느낀다. 동호는 동경하는 사람으로 우러러 봤으나 케빈은 그저 친한 친구처럼 느꼈다.

 

어려울 때 도움을 주던 친구, 하지만 막상 그 친구가 태도가 변할 때에는 해인은 알 수 없는 감정을 느낀다. 그것은 어릴 적에 어머니가 돌아가신 시기와 비교하면 미치지 못하나 이때까지 전혀 알 수 없었던 감정이다. 해인이 오디션을 봐야할 다른 후보들의 노래를 듣고 나서 자신의 차례가 왔을 때 차마 노래를 부를 수 없었다. 음악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은 감정의 표현이다. 기교나 기술과 같은 전문적인 요소도 중요하나 제일 중요한 것은 자신의 내면에 나오는 깊은 마음이다. 그 깊은 마음에서 해인은 자신도 모르게 케빈이란 존재가 무의식적으로 매우 소중한 존재가 되었다는 뜻이다.

 

집에 오면서 계속 울던 해인이 여태까지 아버지에게 늘 착한 딸이었으나, 처음으로 반항을 하게 된다. 매일 공부하라고 하고 모의고사 일정만 챙기던 아버지에게 해인은 매일 공부공부, 그만 좀 해!! 아빠는 공부 말고는 아무 것도 관심 없지?!”라고 한다. 그 말을 듣자 아버지뿐만 아니라 언니와 오빠 역시 충격에 빠진다. 해인이의 노래에 감수성이 풍부하게 된 이유는 어머니와의 추억이다. 그러나 이제 어머니와의 추억으로 노래를 부를 수 없게 되었다. 케빈에 대한 마음이 이제 자신의 마음을 변화시켰고, 그 케빈이 공주와 같이 연인행세를 하는 것을 보고 해인의 감정을 흔들리게 만든 것이다.

 

케빈이란 존재가 결국 해인에게 제2차 성징기의 정신적 영역을 열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 감정적 요소는 케빈 역시 마찬가지다. 해인은 어머니의 죽음과 아버지의 집착에 의해 이성에 대한 감정이 없다면, 케빈은 이와 달리 어머니와 같이 있어서 이성에 대해 감정이 없었을 것이다. 케빈은 자신의 친구인 태희에게 해인을 부탁하는 모습에서 다른 이성친구들에 대해 이성적 감정을 가지지 않은 것이다. 그 동기는 패션디자이너인 어머니의 영역이 크다. 케빈의 가족구조를 보면 아버지는 나오지 않고, 오로지 어머니만 나온다.

 

게다가 한국남자이면서 화장이나 메이크업과 같은 일에 관심을 가진다. 케빈의 성격이나 인격은 어머니에 의해 많이 조성된 것이다. 그런 관점으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요소에서 아버지 없이 어머니와 잘 지내는 아들에서 모자의 유대관계는 매우 단단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와중에 해인과의 관계에서 케빈은 어머니보다 해인에 대한 감정이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방에 혼자 들어와 눈물 흘리는 케빈에게 서로의 감정을 제대로 알 수 없는 채로 아파하고 있다는 뜻이다. 만화책 이름이 절규 신데렐라인 이유는 정해진 시간이 넘으면 아버지의 통제로 인해 그 자체가 가수지망생이란 환상에서 현실로 변모한다.

 

그런 와중에 신데렐라가 절규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때까지 몰랐던 신데렐라가 자신을 프린세스로 만들어준 대상이 결국 진짜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도움을 주는 케빈 역시 명랑하고 성격 좋으며 미남인 청년이다. 그러나 그런 소중함을 알아채지 못하다가 그런 존재가 옆에서 멀어질 때 비로소 우리는 깨닫게 된다. 인간의 관계에서 그런 요소들은 많이 나타난다. 케빈은 처음부터 해인에게 관심이 있었고, 동호의 접근에 질투심을 내비추었다. 그렇기에 차가운 모습으로 해인을 대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케빈의 모습에서 해인은 자신 마음속에서 올라오는 슬픔으로 절규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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