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기 에반게리온 4 - 아스카 오다
GAINAX 지음, 사다모토 요시유키 그림 / 대원씨아이(만화) / 1997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주인공을 2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메인 주인공과 서브 주인공으로 말이다. 메인 주인공으로 본다면 신지, 레이, 그리고 아스카다. 만화책 <신세기 에반게리온> 4권은 메인 주인공이면서 히로인 중에 하나인 아스카가 등장하는 편이다. 만화책 1권당 TVA <신세기 에반게리온> 2편 분량과 맞먹는 것을 생각하면 아스카의 등장은 만화와 애니메이션이 동일하게 진행되는 이야기로 볼 수 있다. 게다가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파(破)>를 감상하면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서(序)> 이후에 아스카가 등장한 점에서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등장할 모든 주역이 모인 셈이다.

 

 

먼저 메인 주인공인 아스카의 등장했다면 서브 주인공은 누구로 하는 것이 적당한지를 생각해보면, 당연히 신지의 아버지인 이카리 사령관, 신지와 같이 동거하는 사회적 어머니인 미사토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메인 주인공 3명과 서브 주인공 3명에서 애니메이션에서 서브 주인공 3번째는 리츠코 쪽이 강하다면, 만화책에서는 카지 쪽이 강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점은 한양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박기수 교수의 <애니메이션 서사 구조와 전략>을 참고하면 서브 주인공을 이카리 사령관, 미사토, 리츠코로 결정하였고, 나 역시 그런 구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만화책에서는 카지 쪽이 훨씬 비중이 높다는 점이다.

 

 

게다가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파(破)>를 보면 카지의 역할은 기존의 TVA <신세기 에반게리온>에 비해 매우 약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미사토가 제레의 정체와 더불어 에바의 정체와 네르프 이카리 사령관이 무엇을 꾸미는지 알아가는 것은 추적이란 플롯에 중요한 위치를 맡기 때문이다. 그런 미사토가 추적자로서 활동할 수 있는 계기가 바로 카지와의 교류다. 카지는 어떤 목적의식을 갖고 이중 스파이노릇을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아스카의 등장은 곧 카지의 등장으로 이어지는 점에서 그의 역할이 미사토와 아스카의 갈등에서 중요한 입장인 것을 알 수 있다.

 

 

TVA나 만화책이나 비교해보면 아스카가 카지를 좋아하는 모습이 나온다. 남들보다 예쁘고, 키도 클 정도로 성숙하며, 머리까지 좋아 14세에 이미 대학교를 졸업하고, 네르프에서 대위라는 계급으로 통해 에바2호기를 조종하는 아스카에게 보통 남자들은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카지에게 이끌리는 모습이 나온다. 카지는 본래 대학교 시절 미사토와 애인이었고, 어떤 이유로 2사람은 헤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네르프 본부에서 2사람은 만나고, 그 인연의 고리가 아스카에게 미사토에 대해 갈등관계를 일으키는 요소로 나온다. TVA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그 갈등관계는 매우 강했고,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파(破)>에서는 그런 관계는 아예 제외했다.

 

 

만화책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TVA보다 약하다는 점이 특징이다. 아스카의 등장과 카지의 등장은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인간관계 갈등과 내면적인 고통을 강조하는 하나의 계기로 볼 수 있다. 아스카라는 인물이 그런 우월주의적 인물로 나오나, 한편으로 억지로 무리하는 모습이 나온다. 처음부터 바다에서 나온 제6사도를 프로그레시브 나이프로 절단하여 격퇴하는 모습은 에바 조종을 신지나 레이보다 훨씬 잘하는 것을 알려준다. 그런 성격인 만큼 그녀의 첫 등장은 사고뭉치였다. 길거리에서 인형 잡는 기계를 하다가 잘 되지 않자 발로 차거나 신지 일행에게 막무가내로 돈을 내라고 하거나 옆 사람과 시비 붙어 싸움까지 한다.

 

 

게다가 신지와 다시 네르프에서 조우할 때 억지로 가면을 쓰고, 카지에게 마치 착한 미소녀인 것처럼 행동한다. 엄청난 내숭의 소유와 동시에 그 내숭 안에 가려진 난폭함은 신지로 하여금 질리도록 한다. 아스카는 다른 것은 모르나 자신에 대해 무시하는 것을 절대로 참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아스카는 평소 신지가 인간관계가 어리숙하다 보니 자긱 기분에 내키는 대로 행동하나, 레이처럼 다른 사람에 대해 관심 없거나 왠지 무시당한다는 기분이 들면 매우 짜증을 낸다. 자기편을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다는 점이 아스카의 결점이다. 자기 스스로의 나르시시즘이 결국 심리적 공허감에 의해 생긴다는 점이다.

 

 

아스카는 레이와 말다툼하던 중에 레이에게 뺨 한 대를 치려고 했으나, 신지가 말리는 장면이 나온다. 이때 아스카는 도망가듯이 그 자리에 벗어난다. 그 누구에게 지는 것을 싫어하고, 그 누구에게 무시당하는 것이 싫어하는 아스카이기에 제7사도가 등장할 때, 아스카가 먼저 공격하여 두 쪽으로 내지만, 그 사도는 코어가 2개라 그 코어를 분리하여 동시에 파괴하여야 격퇴가 가능했다. 그 누구의 잘못이 아닌 일방적인 자신의 행동에 작전이 실패하자 신지에게 그 실패를 떠넘긴다. 아스카는 그 붉은색 에바2호기처럼 불타는 성격으로 타인과 잘 지내지 못하는 것이다.

 

 

그나마 신지는 타인과 불필요한 충돌을 일으키지 않으려는 성향이기에 서로 지내는 것이 가능했다. 그래도 사도에게 패한 것에 대한 분함과 그것을 만전하기 위해 특별훈련에서 아스카는 제대로 따라잡지 못하는 신지를 구박한다. 이와 다르게 신지의 연습하는 곳에 온 레이는 한 번도 연습하지 않았는데도 신지와 바로 윤무를 잘 맞출 수 있었다. shell we dance?의 의미는 단순히 춤이라는 것이 테크닉이나 화려함을 보여주기 위한 자랑거리가 아니라 그 상대방과 얼마나 잘 호흡이 맞는지 조율해 가는 과정이다. 아스카가 며칠이나 연습해도 제대로 되지 않던 신지였으나, 레이와 단 1번으로 성공하자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나고, 그 화가 자신의 반성보단 타인에 대한 공격 내지 회피로 되는 것이다.

 

 

티격태격하면서 신지가 이카리 사령관의 아들이나 아버지와 잘 지내지 못한 것을 두고 파파보이라고 놀리나, 사실 같이 연습하며 잠들었을 때, 아스카는 엄마를 찾으면 왜 먼저 죽었냐고 혼자 울면서 잠꼬대를 한다. TVA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는 무의식중에 화장실에 다녀온 아스카가 신지가 자고 있는 곳에 와서 잠이 든다. 신지는 아스카의 얼굴을 보며, 그 입술에 키스하려 하나, 아스카가 울면서 엄마라고 하자 “자기도 애인 주제에”라고 중얼거리며 잠이 든다. 아스카의 정신적 부담에는 어머니의 죽음이 각인되어 있기에 타인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다.

 

 

그런 도중에 아버지도 실제로 존재하는 아버지가 아니라 정자은행에서 우수한 유전자를 골라 어머니의 난자와 교배한 시험관아이라는 점도 크게 작용한다. 기본적으로 아스카에게 친아버지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은 것과 같다. 그런 와중에 카지를 만난 것은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한 여자아이로서 육체적으로나 혹은 심리적으로나 카지에게 귀여움을 받고 싶었던 것이다. 알고 보면 자기 자신도 애인 주제에 어른처럼 행동하는 소년이나 소녀들은 제법 있다. 그런 방법이 엄청나게 어른인 척하나, 어른은 아랫사람을 내려 보기보단 그들을 포용해주는 것이다.

 

 

아스카의 성인여성이기를 바라는 방법들은 그저 투정을 부리는 여자아이라는 점이다. 오히려 자신을 거부하는 대상에 대해 반발하는 행동 자체가 도리어 그 사람과 똑같이 되어버리는 점에서 신지가 애라고 생각하는 아스카야 말로 진짜 애였던 것이다. 어떻게 어른 같은 애는 신지에 가깝다. 회피하는 방법은 젊은 학생에게 있어서 별로 좋지 못하다. 그런 아스카가 신지하고 같이 사도를 격퇴하는 것은 에바 조종사를 떠나 자신의 프라이드가 걸려 있었다. 출전 하루 전날에 감시카메라를 부수고, 신지와 아침까지 연습한 아스카는 결국 신지와 함께 사도를 격퇴한다.

 

 

어떻게 보면 평소 마음을 열지 않은 아스카에게 그나마 마음을 열어 보인 사람은 카지와 신지였을 것이다. 사도 격퇴 후에 마무리 착지가 엉성하여 아스카가 신지에게 구박을 주나, 신지가 너무 피곤하다는 말을 하자 아스카가 “너 같이 아둔한 애가 이렇게까지... 정말 잘했어.”라고 한다. 신지도 “네 입에서 날 칭찬하는 말이 나올 줄은 몰랐는데..”라고 대답한다. 사실 아스카가 진짜 인정받으려면 상대방을 인정하는 것이 정답이나, 아스카는 인정해주는 것을 매우 꺼리는 타입이다. 하지만 아스카가 제일 인정하지 않은 사람은 타인이 아니라 본인이란 점이 중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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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칼 마르크스 지음, 최형익 옮김 / 비르투출판사 / 2012년 4월
평점 :
절판


역사는 두 번 반복된다. 아니 영원히 반복될 수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오히려 똑같은 구조가 다른 시간과 공간, 그리고 주연배우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영원히 비극에서 소극으로 전환하고 있다. 그렇지 아니한가? 프랑스대혁명 이후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인해 혁명이 무너지고, 나폴레옹이 군사권으로 통해 프랑스 황제가 되었다. 나폴레옹은 지나친 전쟁수행으로 인해 유폐되었고, 다시 프랑스는 봉건적인 사회가 되었으나, 한편으로 자본주의 유입으로 통해 근대화라는 착취, 억압, 폭력이란 신화로 가득차게 되었다.

 

생각하면 많은 사람들이 프랑스혁명을 1789년 7월만 생각하고 그 뒤에 목이 단두대 아래 분리된 마리 앙투아네트와 루이16세의 부르봉왕가만을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1830년에도 있었고, 1848년에도 있었고, 1871년에도 있었다. 게다가 불과 반세기 전인 1968년에도 5월 혁명이 존재했다. 프랑스는 말 그대로 혁명의 나라이고, 진실한 공화국이었다. 전에 국내 어느 국회의원이 민주주의가 무엇이냐는 말에 자본주의라고 하였는데, 진정한 민주주의의 목표는 공화주의이다.

 

공화국의 가치는 자유, 평등, 박애이다.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가고 구속받지 않을 자유와 평등, 그리고 개인적인 요소에서 타인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박애정신이 공화주의(共和主義) 국가의 이념이다. 한자로 풀어보아도 모두가 잘 지내는 것을 목표로 사는 의의를 두는 것이기에 공화국의 가치란 바로 그런 것이다. 따라서 이번에 읽어본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을 읽는 순간 조금 당황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 이유는 카를 마르크스라는 사회경제학자가 여기서는 정치역사학자로서 나오기 때문이다.

 

현재 유럽 선진국에서 통용되는 사회민주주의에서 사회주의 노선만을 생각할 수 있겠으나, 여기서는 차라리 민주공화주의에 더 가까운 그의 모습이 나온다. 그가 생각하는 부분은 루소와 비교하자면, 루소는 <인간 불평등의 기원> 내지 <사회계약론>에선 농경사회 중심, 즉 착취대상자가 대부분 농민으로 본다면, 마르크스는 노동자로 보는 것이다.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나기 전에 부르주아 계급이 막 탄생하여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입지를 세우려 했으나 봉건사회에서 왕족과 귀족이 아닌 이상 그 한계점이 존재했다.

 

그에 반해 마르크스가 살던 시절은 부르봉파와 오를레앙파가 존재해도 이미 그들은 봉건주의적인 사고에서 자본주의적 요소를 많이 내포하고 있었다. 가령 부르봉왕가는 금전적인 동산 부분을 많이 소유했다면, 오를레앙 쪽은 토지와 같은 부동산 계열에 많은 재산권을 소유하고 있었다. 이들은 추후에 의회를 가진 프랑스 국가에서 계속 정치적, 경제적인 권력을 누리고 있었으며, 그것을 유지하려고 했다. 그런 와중에 1830년 혁명에서 1848년 2월 혁명과 6월 봉기로 통해 새로운 선거를 실시했으나 여전히 부르봉파, 오를레앙파, 보나파르트파가 득세하고 있었다.

 

그에 따라 대통령 선거에서 루이 보나파르트가 당선되고, 곧 그는 나폴레옹 3세라는 명칭과 함께 과거 프랑스에서 전쟁영웅이 된 나폴레옹의 후광을 받으려고 했다. 그는 전쟁에서 치열한 모습의 나폴레옹 동상에서 황제의상을 입은 나폴레옹으로 바꾸려고 했다. 자신을 프랑스 영웅인 나폴레옹과 동일 시 하려는 속셈이었다. 물론 나폴레옹은 전쟁을 한 만큼 국고를 피폐하게 만들었고, 많은 군인들을 죽도록 만들었다. 전쟁으로 영웅이 탄생하는 것은 곧 인간의 기본적인 원리가 비슷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프랑스대혁명으로 인해 열기가 가득한 그 나라가 어느 순간 왕국으로 변했는가?

 

결국 나를 제외한 누군가를 적으로 만들거나 혹은 자신을 우월하게 만들 자가 필요한 것이다. 아니라면 그런 기대감으로 가득하여 혹시 자신에게 뭔가 이익이 되는 것을 바라고 뽑는 경우가 있다. 그것이 바로 루이 보나파르트를 대통령으로 만들어 주었다. 온갖 사기와 공갈 심지어 쿠데타까지 일으켜 의회를 점거한 그를 말이다. 그래서 반복되는 역사적 사실에서 그의 행동이 소극으로 되는 이유는 단순히 이 책은 루이 보나파르트의 사기꾼 행위에 촉각을 두기보단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더 치중을 둔다.

 

이 책의 후반부의 논문에서 등장하는 제일 중요한 문장이 “인간은 자기 자신의 역사를 만들지만, 자기 마음대로 만들지는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이 선택한 상황 아래서가 아니라 과거로부터 직접 발견된, 주어진, 그리고 물려받은 상황 아래서 역사를 만든다.” 라는 부분이다. 생각해보자. 분명히 프랑스 시민의 혁명과 봉기가 실패하여 민주주의 정체 역시 후퇴한다. 그것으로 통해 루이 보나파르트는 대통령이 되었으나, 어떤 구조냐는 것이다. 그것은 루소가 농경사회의 프랑스에서 가장 가엽게 여긴 농민들이 그렇게 만들어 준 것이다. 농민들에 대한 지식이나 의식구조는 정말 수준이 낮았다.

 

루이 보나파르트의 삼촌인 나폴레옹에 대한 향수감에 젖어 프랑스 전 지역의 농민은 서로 얼굴을 맞대지 않으나 그들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감자포기에 든 감자는 출신이나 생산지가 다 다르나, 그 맛은 같다고 보면 된다. 그런 상황에서 보나파르트는 승리를 하고, 그가 자신의 영역을 우위를 두기 위해 처음에 부르주아 세력과 규합하고, 그 뒤에는 사기꾼, 야바위꾼, 깡패 등과 같은 룸펜프롤레타리아를 자신의 전위대로 만들어버렸다. 사실 사회적 구조에서 가장 빈곤하고 처량하고 구제받을 대상이 가장 심한 범죄와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가 있다.

 

그런 소극적 일들은 당시 프랑스에도 20세기에서도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한국에서도 종종 일어난다. 정치깡패 내지 시위대 앞에 경찰이 아닌 비경찰세력이 폭력을 일으키는 현장에서 종종 룸펜프롤레타리아를 볼 수 있다. 보나파르트는 그들에게 술과 돈을 주고, 그 술과 돈은 자신에게 위지한 부르주아의 돈이었다. 처음에 보면 군중이 봉기하거나 혁명을 일으키면 부르봉왕가, 오를레앙가, 부르주아 등과 같은 지배세력이 자신의 이익을 손해 보므로 거기에 대한 대항마로서 보나파르트에게 지지했으나, 점차 보나파르트는 이들의 돈을 넘봤고, 1852년 대통령 임기가 다가오자, 자신의 정치적 권력을 위해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결국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잔머리를 사용한 부르주아는 오히려 그 잔머리에 발이 걸렸고, 그 당시 제일 부자인 부르주아의 집에는 보나파르트의 군대가 발사한 대포를 맞이해야 했다. 결국 보나파르트는 독재로 통해 프랑스 전부를 가질 의도였다. 그런 보나파르트가 집권하고 게다가 쿠데타를 일으켜도 국가적으로 가능하고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인가? 그것은 신화적인 욕망과 더불어 무지의 산물이다. 인간은 자기가 알고 있는 것에 대해 모든 것을 판단한다. 선험적 비판능력이 없는 농민들에게 보나파르트는 그저 나폴레옹 신화의 연속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정치적 한계에서 가장 어리석은 인간들이 적에게 무모하게 도전하는 것보다 적의 적은 나의 동지라는 잘못된 생각이다. 그런 점들은 한국 정치사회에서 많이 본다. 일반적으로 정치적 참여에 대해 보면, 사람들은 자신이 싫어하는 대상에 대해 비판하거나 비난하는 사람에게 지지를 돌린다. 이탈리아에서 어느 코미디언 같은 사람이 정치인으로 될 수 있는 이유 역시 양비론적인 자세다. 헤겔의 변증법으로 보면 찬, 반, 합의 세계에서 부정의 부정은 긍정이란 명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마르크스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비극에 대한 비극은 소극이란 새로운 형태로 탄생했기 때문이다. 역사의 비극이 2번 되풀이되면 소극이 되는 것은 인간의 어리석음이 얼마나 잘 드러나는지 알려주는 셈이다.

 

에리히 프롬이 인간이 알고 있는 지식적 좌표는 한계성이 있고, 그 좌표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있기에 인간이기에 합리적인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을 증명한 셈이다. 곧 인간은 합리적인 선택을 하지 않는다는 의미와 같다. 무지한 대다수의 의견이 곧 하나의 정의 내지 도덕적인 가치가 되는 순간, 민주주의가 가장 전체주의로 되기 싶다는 토크빌의 충고가 증명되는 셈이다. 또한 그런 독재자인 보나파르트에게 의지하다가 그 보나파르트에게 잡혀먹은 어리석은 부르주아의 일화에서 우리 역시 소극을 보고 있는 점을 생각하면, 역사는 진실로 주인공이 바뀌면서 반복되는 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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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고화질] 신세기 에반게리온 03 신세기 에반게리온 3
GAINAX / 대원씨아이 / 2013년 3월
평점 :
판매중지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인상 남는 에피소드에 대해 뽑으라고 한다면 그 중에 하나가 나는 야시마 작전이라고 말하고 싶다. 가장 인상이 남는 이유는 그만큼 슬프고 기쁘고 여러 가지 감정을 나에게 주었기 때문이다. 이번에 리뷰 하는 만화책 <신세기 에반게리온> 3권은 바로 그 야시마 작전이 나온 단행본이다. TVA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는 5화와 6화, 그리고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서(序)>의 마지막 대미를 장식한 것 역시 야시마 작전이다. 그 정도로 에반게리온을 좋아하는 팬의 입장에서 본다면 야시마 작전은 백미 중에 백미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과저 1990년대 일본 도쿄에 아키하바라 하는 장소가 있다. 각종 전자제품을 파는 번화가로서 이른바 오타쿠 문화에서 아키바계가 탄생할 정도로 소비주의 아키바계 현상은 기존의 오타쿠 문화가 소비와 생산을 동시에 진행하는customer였다면, 아키바계 유형의 인간은 오로지 소비지향의 물신주의적으로 변모했다. 그것은 긍정적 요소로 본다면 서브컬쳐의 시장의 영역이 확대되는 것이나, 반대로 말하자면 서브컬처에서 새로운 문화적 토대로 생기는 것이 힘들게 되었다는 점이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에 대해 생각해보면 애니메이션 감독인 안노 하데아키나 만화작가인 사다모토 요시유키는 기본적으로 오타쿠 문화에서 소비를 지나 생산자적인 요소를 지녔다.

 

특히 안노 히데아키 감독은 애니메이터에서 지나 실사영화를 제작하고 실제로 나올 정도로 그의 역량은 이미 단순한 애니메이션업계의 인물을 지나 대중문화를 지나 (실사)영화예술까지 넘보게 되었다. 그런 오타쿠에서 아키바 위주의 문화로 넘어갈 무렵, 아키하바라에서는 3대 여신이 있었다. 그 인물은 바로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에서의 나디아, <기동전함 나데시코>에 등장하는 호시노 루리, 그리고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아야나미 레이였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에 등장하는 히로인으로 레이 이외에 아스카나 미사토도 존재하나 왜 레이였는가? 라는 의문에서 바로 이 야시마 작전이 큰 변수라는 점이다.

 

<신세기 에반게리온> 중에서 역대 사도 중에 강력한 사도를 뽑으라면 바로 제5사도도 포함 될 것이다. 장거리 공격이 가능하며, 주변에 포착하는 방해물에 대해 강력한 레이저로 융해시키기 때문이다. 작품에서 보더라도 신지가 탑승한 초호기가 지하기지에서 나와 지상으로 나오는 순간 제5사도는 강력한 레이저를 발사한다. TVA에서 신지가 적의 공격에 괴로워하며 절규하는 모습을 생각하면 항상 내 마음이 아프다. “아버지 도와줘요! 죽고 싶지 않아요!”라는 그 비명은 너무 처량하고 안타까워 보였기 때문이다. 만화책 <신세기 에반게리온> 3권에서도 역시 신지의 괴로운 사건이 발생한다.

 

제5사도의 공격을 받고, 의식을 잃은 신지가 무의식적으로 떠오르는 꿈의 세계에서 과거에 있었던 일들을 추억한다. 아버지는 자신을 내버리고, 어머니가 없었던 그 시절, 신지는 자신에게 자전거가 있었으면 하지만, 경찰이 오해로 신지를 자전거 도둑으로 착각하고 파출서로 데려간다. 이때 친척들이 와서 돈이 충분히 보내오니 왜 사달란 말을 하지 않았냐고 하나, 사실 신지는 부모님의 사랑이 그리고 관심이 필요했다. 그에게 항상 꼬리 붙어 달린 외로움은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고뇌였다. 그 아픈 기억을 꿈에서 보던 신지가 병원에서 깨어나니 옆에 레이가 있었다.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저 신지만을 바라보면서 말이다. 사실 신지는 이때 레이가 매우 불편했을 것이다. 우연히 레이의 신분증 카드 유효기간 완료되어 갱신시키기 위해 레이의 집에 갔을 때, 레이의 방에 놓인 이카리 사령관의 안경을 신지가 만지고 만 것이다. 그 안경은 레이가 0호기 테스트 중에 폭주를 일으켜서 사고가 발생했을 때, 이카리 사령관이 맨손으로 레이를 구하려다가 손에 화상을 입어 안경이 떨어진 것을 레이가 주은 것이다. 이카리 사령관의 그 모든 것은 레이의 모든 것이었고, 그런 레이에 대해 신지는 항상 레이가 궁금했다.

 

자신에게 아무런 이야기나 친절을 베풀지 않은 절대적으로 작전만 우선하는 아버지가 레이의 목숨을 위해 희생한다는 것에 의아한 것이다. 그런 아버지였기에 신지는 아버지의 사랑도 받고 싶었으나, 레이가 왜 아버지에게 사랑받는지 궁금했다. 안경을 집은 이유도 자신도 안경을 착용함으로서 아버지와 동일시하려고 하는 욕망이었다. 단지 TVA <신세기 에반게리온>과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서(序)>에서는 신지가 직접 안경을 끼는 모습이 나오나 만화책에서는 끼는 모습이 나오지 않는다. 직접적으로 아버지에 대한 권위를 자신에게 부여하려는 욕망이 만화책에서 약하다는 점이다.

 

그만큼 사다모토 요시유키 작가가 느끼는 신지는 아버지와의 갈등이 애니메이션보다 적다는 것이다. 그러나 레이에게는 다른 입장이었다. 레이는 오로지 이카리 사령관이 전부였다. 이카리 사령관만이 레이에게 믿을 수 있는 그 모든 것이었다. 야시마 작전에서 왜 레이가 히로인으로 등급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기존에 레이가 믿는 사람이 이카리 사령관만이 아니라 이카리 신지군도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제5사도를 격퇴하기 위해 작전에 투입된 2사람은 생사를 넘나들고, 그 결과 제5사도를 격퇴하나, 0호기로 방패막이를 하던 레이는 부상을 입게 된다.

 

이때 신지가 0호기의 엔트리 플러그를 꺼내어 직접 자신의 손으로 엔트리 플러그의 문을 열고 레이를 구출한다. 이때 레이는 의식이 흐릿하였으나, 순간 신지의 모습을 이카리 사령관으로 착각한다. 그리고 자신의 엔트리 플러그를 개봉한 사람이 신지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는데, 이상하게도 신지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분명히 출동 전에 병원에서 아픈 기억이 떠올라서 눈물 흘린 신지가 또 눈물을 흘리자 레이는 순간 당황했다. 그 눈물의 의미는 슬픈이 아니라 기쁨의 눈물이라고 신지가 말해준다.

 

인간은 눈물을 흘리는 이유는 너무 슬픈 것이라는 아픔과 동시에 너무 기쁘다는 행복에서 흘릴 수 있다는 점이다. 평소 그 누구에게 미소를 보여준 적이 없는 레이, 레이가 신지의 눈물을 보며 당황하자 이때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고 한다. 그때 신지는 레이에게 그저 웃으면 된다고 했다. 이때 보여준 레이의 미소는 살짝 빙긋 웃는 모습이었으나, 왠지 모르게 강한 충격이 되었다. 인간의 감정이란 그렇게 서로 상대방과의 교감으로 통해 새롭게 만들 수 있는 것이 신선한 충격이었다.

 

아마 그 레이의 미소는 에반게리온 시리즈를 본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잊을 수 없는 장면일 것이다. 아키하바라 3대 여신으로 올라간 이유도 그런 안노 히데아키 감독의 연출에서 시작하여 사다모토 요시유키 작가 역시 깊이 생각한 점이다. 단지 차이점은 레이가 신지에게 “사요나라(안녕).”이란 슬픈 인사를 TVA <신세기 에반게리온>과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서(序)>에서 병실에 신지가 누워있을 때와 야시마 작전 전에 했다면, 만화책에서는 야시마 작전 전에 했다는 점이다. 신지가 레이의 생존을 기뻐한 이유는 마치 죽을 것을 대비한 사람인 것처럼 행동하는 레이가 살아있다는 것에 대한 확인이었다.

 

그것은 자신에게 아무 것도 없다고 여긴 신지였으나, 자신보다 더 없다고 생각하는 레이에 대한 강한 연대의식일 것이다. 마지막에 살아있다면 언젠가는 반드시 살아있길 잘했다고 느낄 날이 올 것이라는 말하는 신지에서 평소 부정적인 말과 행동만 보이던 신지가 긍정적인 말을 한 것은 매우 다른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마지막 페이지에 “아주 어두워서 아무것도 안 보이는 길이라도 둘이서 가면 무언가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 어두운 하늘에 뜨는 달처럼..”이란 독백은 자신의 비관적 상황에서 필사적으로 헤쳐 나가려는 신지의 의지가 보인 점이다.

 

만화책 <신세기 에반게리온> 3권을 다 본 후에 조금 생각이 남는 부분은 이번 단행본은 신지와 레이의 중심으로 많이 전개된 점이다. 사실 TVA <신세기 에반게리온>과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서(序)>를 보면 신지의 역할과 레이의 히로인적인 요소도 중요하나, 미사토가 보여준 작전 전략 역시 잊을 수 없는 묘미다. 일본의 전 지역의 전기를 모아 쓴 것과 어렵게 양전자포를 발사하는 총을 입수하는 과정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쓸데없이 무기를 소비해야 만족하는 군사조직이란 점에서 오타쿠 문화 중에도 밀리터리 오타쿠가 있듯이 안노 히데아키 감독이 전쟁 및 폭발장면을 잘 연출해도 막상 작품을 보면 전쟁이란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인지 야시마 작전을 이끌어내는 미사토의 역할이 조금 아쉬운 만화책 <신세기 에반게리온> 3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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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기 에반게리온 2 - 나이프와 소년
GAINAX 지음, 사다모토 요시유키 그림 / 대원씨아이(만화) / 1997년 5월
평점 :
절판


TVA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보인 신지의 모습은 철두철미하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나지 않으려 한다. 오히려 자신을 숨기고 나에게 보이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그의 모습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러나 만화책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조금 다른 모습으로 보인다. 신지의 모습은 마치 한참 사춘기 청소년이 어른에게 반항하는 모습을 가진 아이였다. 오히려 TVA의 신지 더 어른다웠다. 아이가 아이답지 못함에 따라 왠지 모르게 카메라의 시점에서 본다면 “짜증이 밀려오는 녀석” 같았다.

 

그런 요소에서 TVA에선 왠지 회피하는 신지라면 만화책에서는 회피보단 그저 반항을 하는 것이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본래 질풍노도의 시기에서 반항하는 아이들은 반항의 수단으로서 일탈과 탈선, 지시에 어긋나는 행동 그리고 침묵과 회피 등이 있다. TVA에서는 신지는 일탈하는 모습을 보여주나 그런다고 그 자신이 일탈에 대해 반항으로서 의미보단 차라리 회피로서 가까운 모습이다. 이른바 도망치는 것이다. 자신을 괴롭히는 모든 것에서 말이다. 만화책에서 보이는 신지는 왜 이리 도망친다는 느낌보다 반항하는 이미지로 강하게 느껴지는 것일까?

 

원작인 애니메이션과 달리 만화책에서는 작가인 사다모토 요시유키의 관념이 강하게 들어간 것이 분명하다. 나중에 <신세기 에반게리온> 만화책 단행본을 읽으면서 알게 된 점은 작가인 사다모토 요시유키에게 아버지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어머니와 어린 자신을 남겨놓은 채 젊은 나이에 죽었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신지가 느끼고 있는 강한 억압감이 작가에게 크게 다르게 느끼고 있는 것일 것이다. 그래도 안노 히데아키의 <신세기 에반게리온>과 같이 스토리를 전개하므로 두 가지 연계성을 가지고 보는 것은 당연하다. 단지 작가가 주인공에게 가지는 입장 차이는 이야기의 흐름에서 알 수 있다.

 

이야기 주요 내용은 신지가 중학교에 전학하여 처음 전학생으로 관심을 받게 되었는데, 그가 에바 초호기 조종사란 것이 학교 내에서 알려지면서다. 제3사도를 무찌르면서 초호기가 도시를 파괴했는데, 문제는 그 과정에서 부상자가 생겼고, 그 부상자가 같은 반의 토우지의 여동생이었다. 여기서는 주호라고 되어 있으나 토우지는 교복 대신 츄리링을 읽고 다니며 사투리를 사용하고 다소 말을 거칠게 하는 소년이다. 하지만 여동생에 대한 사랑은 그 누구보다 다정하고 좋은 오빠였다. 집에 가도 부모님이 계시지 않기에 홀로 남은 여동생을 보살피는 도중 지난 전투에서 일어난 충격으로 머리를 크게 다친 것이다.

 

신지를 바라보는 시선이 당연히 고울 수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신지에게 주먹을 휘둘렸으나, 문제는 신지의 태도다. 보통 동급생에게 한 대 맞으면 저항하여 같이 주먹다짐을 할 것이나, 신지는 오히려 토우지보고 옥상 위에서 자기를 떨어뜨리고 싶으면 하라고 한다. 신지는 토우지에 대하여 진심으로 대하는 게 아니라 그저 피상적인 관계로 대할 뿐이다. 인간관계에서 특히 동급생 관계에서 다툼이나 충돌이 일어나는 것이 분명하다. 친구관계는 대부분 자연스럽게 옆에 있다가 친해지는 경우가 있으나 가끔 서로 주먹다짐을 나누는 과정에서 생기는 경우가 있다.

 

한 번 상대방과 마음을 진심으로 내놓을 수 있을 때 본심이 나오기 때문이다. 신지는 그런 것을 거부한 점에서 너무 아이 같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회피하는 방법은 어른들의 세계에 흔히 있는 일이다. 피곤하고 복잡한 일에 귀찮게 되지 않도록 그저 슬쩍 발을 빼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동급생에게 그런 신지였으나 막상 위에 어른들에게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반항하고 신경질적으로 대할 뿐이다. 신지가 미사토의 집에 기거하게 되면서 미사토의 방에 들어가게 되고, 그때 우연히 미사토가 기록한 신지의 기록물이 있었다. 신지는 그것을 미사토가 자신에 대해 인간관계가 아니라 그저 도구로 보고 있다는 점에서 화가 났다.

 

그래서인지 이번 단행본에서는 아이가 엄마에게 하는 반항적 태도가 무척이나 인상 깊었다. 사실 TVA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신지는 미사토에게 그렇게 엄마처럼 해달라는 응석을 부리지 않았다. 만화책에서 가능한 이유는 안노 히데아키와 달리 사다모토 요시유키가 아버지 없이 어머니 아래서 힘들게 성장했다는 점이 작용했을 것이다. 사다모토 요시유키 나름 이카리 신지에게 자신을 투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TVA <신세이 에반게리온>에 대해 안노 히데아키 감독은 등장하는 인물 모두 자신을 투영했다고 한다.

 

이카리 사령관이나 신지나, 레이, 그리고 아스카에 대해서 말이다. 그런 점에서 만화책은 신지와 이카리 사령관 쪽으로 더 치중한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중간에 있는 레이 역시 중요한 인물이다. 어째든 안노 히데아키의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가족과 친구 등의 인간관계 전반적이라면 사다모도 요시유키의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가족 중심적인 갈등이 강하게 그린 점은 분명하다. 토우지의 분노가 강렬한 이유 역시 여동생 사쿠라(<신극장판 에반게리온 Q>에 등장하는 의무담당관)의 부상이었다.

 

신지에게 여동생의 부상으로 자신을 때린 토우지, 자신을 그저 도구로 보고 있다고 생각되던 미사토에 대해 반항적 요소가 제4사도 격퇴에서 나온다. TVA에서 켄스케와 토우지의 탑승은 미사토의 명령에 의해 실행되었으나, 만화책에서는 신지 스스로 의지에 의해서였다. 게다가 사도에 대해 신지가 달려드는 이유는 신지가 사도격퇴라는 어른사회의 강압적인 명분에서 생겨난 강박관념이라면, 만화책에서는 미사토에 대한 반항의식이었다. 신지는 사실 미사토가 자신의 집에 살자고 했을 때, 그녀가 자신을 진심으로 대하길 바랐다.

 

하지만 그 기록물을 보고 나서 상심했다는 점이다. 그런 신지가 네르프에서 나가려고 했을 때, 미사토는 오히려 신지에 대해 책망하기보단 신지가 그런 마음에 에바에 타는 것은 바르지 못한 것이며, 다시 시골로 돌아가는 것이 신지에게 좋겠다고 한다. 신지는 그때 비로소 미사토가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깨달았으나 상황이 너무 늦었으며, 미사토가 왜 신지가 반항적인지를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우연히 찾아온 토우지와 켄스케에 의해 그 의미를 알았고, 신지를 찾아간다.

 

신지에게 찾아간 미사토가 신지를 다시 위로하고 안정하게 해준 것은 펜펜에 대한 이야기다. 자신이 펜펜을 데리고 온 것과 신지를 데리고 온 것은 “줄곧 혼자서 생활했었어. 일을 마치고 밤늦게 지쳐서 돌아왔을 때, 날 반겨주는 누군가가...가족이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야.”와 함께 신지에게 오해하지 말아달라고 한다. 신지는 원래 자신이 오던 곳에 가기 싫다고 한다. 신지가 원래 있던 외갓집, 그곳은 신지에게 좋은 곳이 아니었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신지가 아무리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는 일만 한다고 해서 저 정도로 비뚤어진 이유는 그쪽 시골 가족들에도 문제가 있다는 점이다.

 

신지의 성격이 저렇게 소극적이면서도 반항적인 아이로 된 이유는 제대로 된 가족의 사랑을 받지 못한 이유다. 그런 의미에서 신지가 다시 시골로 돌아가더라도 괴로움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네르프에 있는 것보다 더 괴로울 수도 있다. 신지가 네르프에서 초호기를 타는 것이 괴로워도 견딜 수 있는 것은 바로 미사토의 진정한 고백이었다. 가족처럼 같이 살아보자는 의미, 그리고 혼자인 것은 신지만이 아니라 집에 돌아와 아무도 없이 지쳐 있는 미사토 역시 그렇다. 사람은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고, 가족이 필요한 이유도 역시 그렇다. 토우지 역시 가족이 소중하기에 신지에게 그런 폭력을 휘두른 것이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보면 가족이란 것은 혈연적인 관계보다 더 소중한 가족관계가 바로 유대감이란 것이다. 유대감 요소에서 신지와 미사토의 관계를 보면 서로에 대해 의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혈연관계가 더욱 진한 유대의식을 가지겠지만, 아들인 신지를 멀리 친척집에 맡기고 네르프에만 빠져있는 이카리 사령관을 보면 반드시 혈연관계라고 해서 가족이 유대감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유대의식은 혈연이든 아니든 서로 만들어나가야 하는 목적이란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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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림슨의 미궁
기시 유스케 지음, 김미영 옮김 / 창해 / 2009년 12월
평점 :
절판


 

크림슨의 미궁에서 크림슨이란 것은 주인공 후지키가 납치되어 마치 게임 안의 주인공이 되어야 했던 그 장소에 살던 새였다. 마치 피가 넘치듯이 흘러내리는 불길한 영토에 그 불길한 요소를 더해주는 크림슨이란 새는 온 몸이 핏빛처럼 감싸고 있었다. 모든 것이 불안하고 알 수 없는 그곳, 정확한 위치는 남반구 오스트레일리아 인근에 위치한 작은 섬이다. 일본이 대략 북위가 30도 전후인데, 남반구까지 온 것이라면 상당히 멀리 이동했을 것이다. 그것도 수면제를 먹인 후에 배로 싣고 왔으니 얼마나 많은 시간을 걸려 섬에 온 것인가?

 

섬에 온 것은 마치 누군가 자신을 농락하는 것임이 분명하다. 실직자인 어느 증권회사의 유능한 직원이 한 순간에 회사에서 나가고, 집에서 아내에게 배신당하며, 결국 부랑자처럼 길거리에서 먹고 자고 해야 하던 운명을 말이다. 생각해보면 우리 인생살이에 대해 논하면 마치 게임과 같다고 볼 수 있다. 게이머는 우리를 직접적으로 움직이게 하지는 않으나 그들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도록 만든다. 게임의 법칙에서 아무런 위험도 문제도 없는 자들은 게임에서 이기는 것이나 지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단지 그 게임에서 어떤 상황이 연출되고, 자신들이 파놓은 함정에 누군가 걸려 거기서 허우적대어 결국 최후에 어떤 비극으로 가는지가 궁금하다. 그래서 일부러 그런 환경에 집어넣고 일부로 손을 놓은 것만큼 비겁하고 치사한 것은 없다. 따라서 후지키는 그런 상황에 놓인 점에서 자신들의 운명을 농락하던 자의 미소를 용서할 수 없었을 것이다. 리얼비디오라는 스너프 무비는 분명 달콤하고도 재밌는 게임일 것이다. 게임을 감상하는 자들은 멀리서 비디오를 직접 실시간으로 보고 있거나 혹은 편집되어 주요한 내용과 클라이맥스를 즐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이 작품에서 낯선 섬에 꾸며놓은 무대는 너무 완벽한 세트장이었다. 개미탑처럼 보이는 기둥은 알고 보니 송신기가 있던 것이고, 언덕 위에는 카메라가 항상 게임에 투입된 사람들을 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다고 모든 카메라와 송신기가 대상자를 24시간 포착할 수 있던 것은 아니다. 게임 속에는 가끔 리얼함을 부여하기 위해 게임진행자를 넣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토모 아이, 그녀는 키가 크고 허리가 가늘고, 손발이 긴 여자다. 게다가 그림까지 잘 그리고 오묘한 미모를 가진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게 한쪽 눈이 이상하고, 귀에 보청기를 달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여 눈 하나와 한쪽 귀로도 충분히 상황을 보고 들을 수 있는데도, 그녀의 용모는 처음부터 수상했다. 그녀는 과거에 괴로운 일이 있었고, 그것은 바로 약물투여라고 했다. 내키지 않은 그녀의 과거이야기, 하지만 상황은 그런 것을 따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각 플레이어에게 주어진 게임기, 하지만 그 게임기 속에 부여된 정보는 마치 이 시련이 넘으면 상금이나 행운을 주어주는 것보다 차라리 이 위험의 위기에서 순간적인 그 자체에 대해 풀어가는 것만 제공한다.

 

게임에서 모인 사람은 총 9명, 이들은 중앙센터에 모여 각각의 게임기를 통해 갈 곳은 정한다. 점잖은 신사 2명은 동쪽으로, 왠지 거칠어 보이는 남자는 2명, 그리고 다른 남자 2명과 신경이 날카로운 여자 1명은 남쪽으로 가기로 했다. 여기서 후지키와 아이는 북쪽으로 가기로 했는데, 여기서부터 인생의 갈림길, 아니 삶과 죽음의 기로의 격리가 이루어진 것이다. 서쪽은 위험에 대비할 수 있는 무기가 있는 곳이고, 서쪽은 서바이벌 키트로서 약품이나 생존에 필요한 도구 등이 있었고, 남쪽은 식량이고, 북쪽은 정보였다. 여러 가지 정황을 보면 가장 필요한 것은 식량일 것이고, 가장 최후에 얻을 것이 정보인지 모르나, 아이는 후지키보고 북쪽으로 가자고 한다.

 

어차피 남쪽은 정원이 찼기에 방법이 없고, 후지키는 북쪽에 아이와 같이 간 후에 정보를 얻고 나서 충격을 받는다. 이 게임 안이 결코 무사하게 넘을 상황이 아니라는 점에서 말이다. 과연 그렇듯이 처음에 모두 다시 모여 미묘한 분위기로 넘어가고 있었으나, 곧 상황은 변했다. 처음에 서쪽 팀은 갑자기 난폭해지고, 남쪽 팀은 여자 1명이 보이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그 불안은 위기가 되었다. 남쪽으로 내려간 남자 2명이 맥주와 비스킷을 먹었는데, 알고 보니 그것은 인간의 지방을 과격하게 태우는 약과 각종 환각을 일으키는 호르몬제가 함유된 것이다.

 

인간의 호르몬이 강렬하게 작용하게 오감이 발달하고, 공격성의 증폭에 따른 동물성 지방에 대한 욕망은 인간 스스로 인간이기를 버리게 만들었다. 결국 남쪽에 간 여자는 공포와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이 되어 목이 베어진 채로 땅 위에 놓여 있었고, 손과 발은 뼈가 보일 정도로 깔끔하게 발라져 있었다. 남쪽에 간 2명의 남자가 식인귀가 되어 사람을 먹은 것이다. 이들은 처음에는 지방의 분해에 따른 영양소 보충과 호르몬 각성제에 따른 본능적 행위였으나 차츰 그것은 지방산화제와 호르몬이 아니라 본인들 스스로 필요하게 되었다.

 

게임은 서로 죽이고 죽이는 제로섬으로 보였으나 최후에는 제로섬이 아니라 먹고 먹히는 사냥게임으로 변한 것이다. 결국 게임을 만든 자들은 서로 죽이는 배틀로얄보다 더 리얼한 인간사냥게임을 원한 것이다. 그 목적을 위해 사람을 속이고 납치하여 섬에 가둔 것도 모자라 그들을 가지고 노는 것이다. 심지어 그 섬의 원주민이 있는데도 그 게임에 방해되는 이유로 총으로 저격하여 죽인다. 결국 남은 것은 괴물이 된 2명과 후지키와 아이, 이들은 괴물로 변한 두 명의 식인귀로부터 도망치는 것이다.

 

문제는 인간이 식육을 하게 되거나 혹은 야생 환경에 적응하면 시야가 밝아지고, 아드레날린의 증가로 교감신경이 자극하여 동공확대로 멀리 있거나 밤에도 잘 보인다는 점이다. 신경이 민감하게 되어 냄새나 코, 그리고 귀도 발달하여 1㎞ 넘게 있는 사람을 향해 무기를 발사하는 것이다. 식육에 대한 욕망이 결국 미쳐버려 결국 죽임을 당하지 않기 위해 죽여야 하는 것이 되었으나, 그것은 잡혀 먹히지 않기 위해서다. 그들은 그 섬에 살고 있는 여러 동물들에게 관심이 없던 것이다.

 

물론 최후에는 설치한 부비트랩과 V자 모양의 바위틈에 운 좋게 독사를 자극하여 괴물이 되어버린 남자를 뱀독으로 죽이고 만다. 하지만 후지키 역시 뱀독에 의해 쓰러진다. 게임의 특징은 주인공이 죽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 특히 1인칭 시점보단 3인칭 시점이나 모든 이야기 중심이 후지키로 시작되기에 만약 후지키가 죽게 되면 게임 플레이어가 없어지기 때문에 엔딩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작품은 주인공이 절대 죽지 않는다는 전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 아쉬운 부분이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보이자는 의미는 곧 식인이다. 식인이란 인간이 최후에 선택하는 식사의 방법이다. 고대 사회에서 식인의식은 더러 있었다. 식인의 의미는 단순히 인간을 먹고 싶은 인간의 심리만이 아니라, 그 심리를 하나의 의식적인 요소가 있었다. 가령 어느 부족은 자신의 가족이 죽으면 그 시체를 먹는데, 그 이유는 그 가족의 영혼이 자기에게 깃들게 한다는 믿음이었다. 혹은 다른 의미라면 부족한 단백질을 보충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포로나 희생양을 죽여 단백질을 보충하는 방법이다. 이 경우에는 생존이나 삶의 과정에서 드러나는 식인이라면 크림슨의 미궁에서 보이는 살인이란 그저 인간의 동물적인 본능에 의해서다.

 

인간이 아무 것도 모른 채 고기를 먹는다면 인육이 매우 맛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인간만큼 가장 다양하게 먹는 생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족을 먹는 것은 큰 죄에 해당되고, 그것이 자신들의 즐거움을 위한 하나의 수단이라면 인간은 인간으로서 외적 내적 모습 모두 상실하게 된다. 하지만 정작 그 인간으로서 갖추어야 할 내적 외적 요소는 식인을 했던 두 남자보다 그 상황을 즐기는 자들이다. 물론 세상에 이런 일을 꾸밀 인간들이 얼마나 있을까 하지만, 제로섬을 넘어 서로 먹고 먹히는 생사는 생물학적 사냥을 하는 이 공간뿐만 아니라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사냥을 하는 현실이 있기에 우리가 낯설고 무서워 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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