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지소년 5
임진주 지음, 임애주 원작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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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금지소년 5권>을 읽을 무렵에 우연히 소개받은 만화연구도서를 보고 있었다. 남서울대학교 애니메이션학과 권경민 교수가 저술한 <만화학 개론>라는 것으로 만화에 대한 전반적인 학문적 정의와 이론, 그리고 만화장르와 기법연구와 더불어 비평적인 연구론적인 안내도 있었다. 흔히 사람들은 만화를 대하는 것에 의견을 듣는다면 대부분 ‘만화를 본다.’ 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이와 다르게 ‘만화를 읽다.’ 라는 방법도 있다. 이른바 영화 보기와 영화 읽기와 더불어 만화 보기와 만화 읽기도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이다. 만화를 읽는다는 것은 하나의 문학도서처럼 하나의 텍스트로서 간주할 수 있다는 점이다. 만화의 서사적인 요소가 곧 텍스트라는 글자를 이미지로 바꾸어 보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위대한 독일 문학가 괴테의 경우 그의 소설을 읽는 순간, 사람들은 괴테의 글에서 보이는 상황을 머릿속으로 떠올릴 것이다. 그런데 괴테의 소설을 어느 화가 내지 만화가가 그림과 말풍선으로 진행한다고 보자, 그렇다면 그것은 괴테의 작품이 아닌가? 물론 이런 방식은 국내에서 이미 소개된 바가 있었고, 각종 만화연구도서에도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지소년5>과 더불어 <만화학개론>이란 서적으로 통해 만화리뷰 내지 만화비평을 적는 입장에서는 조금 새로운 지평을 열어갈 수 있는 길이란 점이다.

 

왜냐하면 <만화학개론>에서 읽어본 내용을 그대로 <금지소년> 시리즈에 등장하는 캐릭터에 적용하기 때문이다. 흔히 만화, 애니메이션, 라이트노벨 심지어 영화를 포함하여 리뷰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대부분 수용자의 입장에서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취향과 취미가 어느 순간 새로운 호기심과 도전의식,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여 조금 더 심도 있게 자신의 취미를 관철하는 것이다. 문제는 수용자들이 대부분 만화학이나 디자인학을 배우지 않은 사람들이 더 많다는 점이다. 만화를 제작하는 방법이나 기법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이 없을 뿐만 아니라 만화도 영화나 소설과 같은 서사구조를 지니기에 서사적인 요소까지 이해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만화에 대한 연구적인 접근방법보다 오히려 국내는 문화콘텐츠에 전반에 대한 접근방법이 개선되지 않은 점이 더 문제일 것이다. 만약 조금 더 관심을 기울인다면 만화에 대한 다양한 관찰과 담론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금지소년>을 보면서 이때까지 캐릭터에 대한 기호적인 요소를 고려했으나 색감에 대한 고찰요소는 강하지 않은 점을 생각하면 확실히 캐릭터 색채에 반영된 기호적인 요소도 캐릭터 설정에 매우 중요한 점이다. <금지소년 5권>을 보면 포푸리 소녀와 신류아가 서로 같이 가다가 포푸리 소녀가 신류아의 팔짱을 자신이 끼려고 한다. 그것도 부동적인 신류아 신체에서 포푸리의 신체는 역동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신류아는 몸체는 전형적으로 쓰리라인이 좋은 여성으로 묘사되어 있고, 남자들이 입을만한 턱시도양복에 검은 모자를 쓰고 있다. 만약 신류아의 모자를 쓰지 않았다면 신류아의 인상은 너무 남성적일 것이다. 모자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서 여성성을 의미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푸리 소녀의 여성적인 요소가 더 강조되어 있다. 신류아의 모습은 여성이나 남성적인 인상이 강해 중성적인 느낌이 강하다. 중성적 요소에서 모자와 더불어 허리춤에 달려있는 악세사리는 남성성과 여성성의 어울림을 반영하고 있었다. 이와 다르게 포푸리 소녀는 마치 공주님이 쓸 것 같은 머리장식품에 아우한 드레스를 입고 있다. 게다가 푸른색 보석이 달린 목걸이는 포푸리 소녀 옆에 신류아가 아닌 다른 남자였다면 다정한 연인인 인상을 강하게 반영했다.

 

남성인 나운이가 포푸리 소녀로서 보여준 요소는 매우 소녀적인 인상이다. 작가가 여성이란 점에서 신류아의 중성적 요소, 포푸리 소녀의 여성적 요소는 <금지소년 5권>에 강한 인상을 준다. 신류아를 위기로 몰아넣은 신류아의 이복동생 신마루가 전학오면서 포푸리 소녀를 함정에 몰아넣는 장면이 나온다. 포푸리 소녀가 남자임을 들키게 하여 신류아의 친구를 없애려고 했으나, 오히려 포푸리 소녀의 강력한 해딩에 의해 기절한다. 이때 남장을 한 신류아는 완벽한 왕자로서 신데렐라로 연기하는 포푸리 소녀에게 구원의 노래를 부른다. 이때 신류아의 모습은 여자나 남장을 하였기에 그 어떤 남자보다 더 남자다웠다.

 

작품에서 아니마(남성 안의 무의식적인 여성성)와 아니무스(여성 안의 무의식적인 남성성)가 서로 교차되는 장면이 신데렐라 공주 포푸리와 왕자인 신류아다. 남자가 히로인이고 여자가 히어로라는 설정은 TS물(Trance Sexuality) 요소를 완벽하게 잘 묘사했다고 본다. 이때까지 포푸리 소녀가 계속 소녀로서 나타냈고, 신류아는 그저 차갑고 속이 검은 소녀로 등장했다. 남자후배와 여자선배보다는 그저 소녀 2명으로 활동한 것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균형은 신데렐라 연극으로 통해 바뀐 것이다. 물론 그런 계기는 신류아가 납치당해 자신의 안위는 상관없이 온몸이 엉망진창이 될 때까지 싸운 남자 나운이의 용기 때문이다.

 

물론 나운이의 용기도 중요했으나, 이미지적인 기호요소에서는 신류아의 색채는 검정색이고, 나운이와 포푸리 소녀의 색채는 노란색이다. 밝은 성격의 노란색과 부동의 정체성이 느껴지는 검은색은 분명히 대조를 이루고 있는 점이고, 검정색은 항상 비밀을 숨길 수 있는 요소가 많다. 포푸리 소녀의 경우 처음부터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어린 여동생과 함께 살아가는 소년이다. 이와 다르게 신류아는 처음부터 그녀의 설정이 어떤 문제를 안고 있는지 말해주지 않는다. 모든 갈등과 사건의 전개는 신류아의 고민과 문제, 위기에서 시작될 뿐이다. 포푸리 소녀의 조건은 생계와 여장이기 때문에 생계문제와 여장에 대해 들키지 않는다면 모든 갈등이 없다.

 

신류아의 조건은 자신을 좋아해주는 남자들에 대한 처리와 집안내력인 점이다. 집안내력에서 신마루의 등장은 새로운 위기와 갈등을 주는 것이다. 집안이 재벌이란 점과 아버지가 외도로 3명의 남동생이 있다는 점은 큰 갈등관계이다. 어린 시절에 아무 죄도 없는 이복 남동생 3형제에 대해 심하게 굴던 점과 특히 신마루의 이어폰 속에 가려진 흉터는 지울 수 없는 원망과 복수를 만들게 된다. 또한 신마루가 새로운 인물로서 추가되어 포푸리 소녀가 어떻게 하면 신류아의 가족사에 가려진 비극을 희극으로 만들지가 관건이고, 한편으로 궁금한 것은 신수라가 중학교에 전학 가서 홍지우와 같이 자리를 앉는 점이다.

 

모든 학생들과 담임조차도 신수라의 큰 기와 강한 인상에 큰 압력을 느껴도 오직 홍지우만이 마이페이스를 유지한다. 그런 2사람의 관계 역시 작품에서 보여준 재미요소는 분명하다. <금지소년>이란 작품을 보면서 갈등요소나 재미요소의 원인을 생각하면 가족에 대한 부분이 큰 것 같다. 신류아의 성격이 어둡게 된 것도 어린 시절 부모님을 일찍 여의거나 혹은 할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은 점도 있다. 또한 신류아의 이복동생의 출현 그러하며, 홍지우와 그의 누나 역시 부모님이 어린 시절에 같이 지내지 못해 그렇게 되었다. 나운이의 경우 부모의 부재가 가난이란 굴레를 만들어냈다.

 

<금지소년>에서 다른 인물은 몰라도 심각한 갈등과 적대관계를 일으키는 부류를 보면 가족관계에 큰 문제가 있다는 점이다. 그런 점이 왜 재미로 이어지는 것인가에서 나운이의 동생 나솔이가 그린 그림이나 말투가 인상적이다. 그런 강렬한 효과는 신데렐라 이야기를 나솔이가 잔혹한 동화사로 연출했기 때문이다. 물론 신데렐라를 비롯한 동화는 기본적으로 신화를 모티브한 것이 많고, 잔인하거나 때로는 너무 선정적인 요소가 많아 순화된 경우가 많다. 신데렐라의 원래 이야기에서 신데렐라의 계모와 언니들은 왕과 왕자를 속인 이유로 도부수에게 참수를 당하는 것으로 안다.

 

그런 잔혹한 동화사를 재미를 발휘하여 신데렐라의 외모가 화장발이란 이유로 교수형에 처하는 장면이 나온다. 물론 잔혹한 내용이나 밧줄에 묶인 신데랄란 포푸리 소녀의 모습은 매우 귀엽고 재미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런 신데렐라의 잔혹한 비극이 포푸리 소녀에게 하나의 위기의식으로 감지했기에 신마루를 기절시킬 수 있는 재치를 발휘한 것이다. 그러나 신마루는 포푸리 소녀가 나운이란 점을 알고, 신류아에게 유일한 친구가 포푸리라는 사실도 안다. 어떻게든 그의 도전은 계속 포푸리 소녀와 신류아에게 계속 위기만 주는 것이다. 그런다고 반드시 위기만 주는 인물이 아니다.

 

<금지소년 5권> 마지막에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아 화를 내는 신마루가 연극 때 나타난 신류아의 모습을 회상하는 모습이 나온다. 매우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하는 왕자 신류아의 모습이 어린 시절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하던 이복 누나의 모습이 겹치기 때문이다. 신마루는 어린 시절에 멀리서 바라보던 신류아의 모습을 보고 자신을 남동생으로써 다정하게 대해주길 바란 것이다. 신류아의 돈이나 권력이 탐내는 것이 아니라 단지 신류아가 그 집안에서 태어난 것이 죄라고 한다. 자신을 만든 아버지와 그 아버지의 아버지조차도 각박하게 대한 점은 어린 시절에 받은 깊은 아픔과 상처다.

 

아픔과 상처의 치유도 되지 않으면, 같이 그 나락의 끝을 신류아 역시 같이 가길 원했다. 인간이 악마로 되었더니 이제는 악마가 인간이 되어가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신마루 형제의 상처와 아픔은 결국 <금지소년 6권> 이후 어떻게든 풀어나가야 할 숙제이고 흐름이다. <금지소년> 시리즈와 이번 5권을 비교해보면 달라진 것이 있는데, 스토리작가가 에피소드로 그림을 그리는 부분이 나오는데, 이번에는 없다는 점이다. 전형적인 사디스트 요소가 강한 신류아의 여왕모습에 대해 조금 기대했는데, 나오지 않은 것이 조금 아쉬웠다. 또한 <금지소년>에서 연출하는 장면에서 포푸리 소녀의 일러스트는 매우 중요한 것 같았다.

 

“제32화 천사를 만나다.”에서 포푸리 소녀가 매우 수줍어하는 모습으로 치마를 가리나 결국 팬티가 노출된 모습이 나온다. 작품에서 나운이는 키가 작은 편이고, 몸도 마른 편이다. 그런데 포푸리 소녀는 탄력이 넘치는 허벅지를 가진 소녀로 묘사된다. 제32화 일러스트에서 포푸리 소녀는 나운이가 여장하나, 그 이미지 자체는 나운이의 여장보단 그저 포푸리 소녀가 있다는 전제 아래 그렸던 그림에 가까웠다. 줄무늬 팬티(나운이가 포푸리 소녀가 <금지소년 1권>에서 팬티를 도대남에게 보이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때 분명히 남자 사각팬티였다)에 굵은 허벅지는 전형적인 성숙한 소녀의 모습이었다. 이른바 판치라(여성의 속옷이 나오는 모습) 요소에서 일러스트는 여장이 아니라 여자 그 자체라는 점이다.

 

작품을 보면 포푸리 소녀가 나운이의 1인칭의 시점으로 보거나 판단할 때는 남성적인 요소(허벅지가 굵지 않은 점)가 어느 정도 유지하나, 막상 누군가에게 여자로서 당해야 할 때는 여성적인 요소를 강조한다. 155페이지 홍지수가 포푸리 소녀의 허벅지를 만지는 성희롱 부분에서 “이 탄탄한 허벅지 여전한데..”는 역시 나운이가 포푸리 소녀일 때는 여장남자가 아니라 소녀로 되어야 한다는 점이 보인다. <금지소년>의 작가는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판치라나 페티시즘 요소를 서비스해주는 것을 잊지 않는 점에서 다음 6권도 기대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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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기원에 관한 시론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17
장 자크 루소 지음, 주경복 외 옮김 / 책세상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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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의 <언어 기원에 관한 시론>을 읽으면서 루소가 프랑스 철학, 사상, 학문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주었는지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프랑스 현대철학자 중에 유명한 사람이 매우 많으나 몇몇을 가려보라고 한다면 분명 레비 스트로스와 자크 데리다 같은 철학자들이 나올 것이다. 이중에 레비 스트로스는 구조주의 창시자라고 불리는 인류학자이고, 데리다와 같은 경우 해체주의를 정립한 학자이다. 또한 자크 데리다의 경우 프랑스 구조주의 이후 후기구조주의자 중에 대표적인 인물이고,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사상가 중에 하나이다.

 

그런데 이런 두 사람마저 영향을 루소에게서 받았다는 점이 매우 놀랐다. 개인적으로 데리아의 서적이라곤 <마르크스의 유령들> 뿐이다. 그러나 현대철학에서 데리다의 영역이 명확하기에 그의 해체주의 철학이 루소에서 나온 점에서 매우 감탄할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지금으로부터 약 250년 전에 루소가 만든 서적들이 현대 철학과 사상에 엄청난 영향을 주는 점에서 말이다. 당시 봉건주의 사회에서 왕족과 귀족 그리고 성직자가 절대적 권력을 지닌 시기에 지식인으로서 언어마저도 신이 만든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동이나 감정표현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방식은 지구의 천동설이 아닌 지동설이라고 말한 코페르니쿠스 전환만큼 강력하다고 볼 수 있다.

 

루소 자신도 디드로, 볼테르와 더불어 계몽주의 철학자이나, 그는 이성을 중시한 계몽주의 철학자 중에서 이성보단 자연의 본성을 중시했다는 점이 매우 특이했다. 인간에게 자연적 요소를 발견하고, 인간의 불평등은 모든 것은 소유에 대한 욕망인 점에서 이성이란 합리적인 도구가 오히려 자연 본성의 인간을 악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회계약론>에서 밝힌 것처럼 모든 인간은 자연적으로 평등하고 자유로운 존재이나, 인간이 속해진 사회가 있기에 자유를 대신하여 억압이 존재한다. 서로 간의 영역을 위해 사회 일원이 만든 사회계약이란 일반의지는 결국 인간이란 자연적으로 살아갈 수 없다면 이성으로서 살아가야 한다는 전제가 대체된다.

 

<사회계약론>에 대해 생각해보면 인간이 사회적인 존재가 되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은 정치적(사회적) 동물이다.”이라고 거론한 것처럼 인간은 태어나면서 타인과의 접촉을 피하지 못하는 것이다. 언어라는 것은 바로 이런 사회가 존재했기에 계속 존재하는 것이다. 왜 루소가 갑자기 인류학의 창시자라고 레비 스트로스가 말했을까? 그것은 바로 인간의 언어로 통해 문화와 억압, 착취가 생긴 것을 루소가 지적한 것이다. 레비 스트로스의 학문적인 요소는 마르크스, 프로이트, 지질학이다. 그런데 루소의 <언어 기원의 관한 시론>은 구조주의 요소를 상당히 잘 표현했다. 언어에 대한 권력과 사회적인 요소는 미셀 푸코가 지적한 것이다.

 

레비 스트로스의 구조주의에서 소쉬르의 언어학을 받아들임에서 언어학 영역에서 루소가 보여준 문명의 발달과 전개과정은 매우 흥미로웠다. 인간이 자연 상태에 그대로 있을 경우 야생이고, 조금 더 발전한 상태가 야만이고, 그 다음에 문명이라고 말한다. 문명이 생기는 점에서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에서 적은 것처럼 유럽이 문명이 발달한 이유는 환경적인 요건이 매우 크다. 지리학적으로 다른 나라와 가까이 붙어있는 점에서 전쟁이 늘 많았다는 점과 영토규모에 비해 주민들이 많았다는 점이다.

 

야생에서 거주하는 민족들은 문명국가 사람들처럼 식량에 대한 위기가 없었다. 가령 광대한 숲과 강을 가진 어느 지역에 주민 수는 겨우 밴드 하나당 30명이 넘지 않는다. 다른 밴드와 조우할 수 있는 확률은 1주일 1번 정도다. 숲 속에 언제나 나무에서 과일이 맺히고, 벌꿀이 만든 꿀통에서 달콤한 꿀을 찾을 수 있다. 삼림이 넉넉하여 동물들도 많아 사냥을 하여 언제든지 잡아먹을 수 있고, 강가에 물고기도 많아 충분히 잡아먹을 수 있다. 이들의 생활에 특별한 것들은 필요 없다. 단지 짧은 시간에 서로 채집과 사냥을 하여 같이 나누어 먹고 쉬는 것이 전부다. 인간이 수렵과 채집하던 무렵에 키가 크고 영양상태가 좋았다고 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그런 조건에 살아갈 수 없다. 가령 에스키모 인들과 같이 기후가 매우 추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자연적 조건이 워낙 열악하기에 사람들의 성격이 급하고 난폭할 가능성이 높다. 이에 반해 열대지방에 사는 부족들은 넘쳐나는 식량으로 인해 성격을 급하게 굴 필요도 없고, 난폭하게 사람들을 대할 이유도 없다. 그들은 서로 춤을 추고 노래하고 정답게 지내는 것을 원한다. 모든 부족이 그런 것은 아니나, 가령 어느 부족이 “나를 사랑해줘요”라고 인사하면 에스키모 인들은 “나를 도와줘요”가 인사말이란 점을 생각하면 매우 인상적이다.

 

일본에서 누가 다치거나 문제가 발생하면 “다이죠브데쓰까?”라고 한다. 우리 한국말로 대체하면 “괜찮으신가요?”가 문자 그대로 직역하면 “대장부입니까?” 라는 것이다. 왜 괜찮은지 괜찮지 않은가에서 대장부이냐고 묻는 표현은 조금 낯선 느낌이다. 그것은 일본의 자연조건이 열악하거나 혹은 일본의 역사적인 배경을 보면 워낙 전쟁을 많이 한 점에서 언어적인 표현방식이 다르게 될 수 있다. 인간의 생활방식이 하나의 체계화되어 언어로서 표현되는 점은 그 민족과 국가의 구조적인 요소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루소의 야생, 야만, 문명국가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분석은 매우 탁월했다.

 

언어가 있는 이유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이 사는 사회에선 통제와 명령이 필요하기에 언어로서 인간을 조율하는 것이다. 또한 감정이란 것도 직접적인 몸짓도 좋으나, 몸짓으로 표현하고 의사소통하기에는 그 한계범위가 있다. 말로 통해 많은 의미와 상황적 요소를 알리는 것만큼 효율적인 게 없다. 언어는 langue와 parole로 나뉜다. langue의 경우 사회적인 언어로서 언어는 사회적인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것에서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인간의 언어가 사회적인 언어이기 때문에 이성적인 요소로 보는 것이 타당한가?

 

언어야 말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서다. 사실 논객들의 대화가 로고스라는 논리로서 전개해도 한편으로 파토스적인 요소가 보인다. 자신의 입장과 감정을 논리라는 이름으로 오용하는 경우도 종종 본다. 루소는 또한 감정 대신 욕구로서 인간의 언어가 생기지 않는다고 한다. 생각하면 배가 고프면 배를 가리키고, 위험하면 비명을 질러도 자신의 의사가 상대방에게 충분히 전달된다. 그러나 심적인 상황에 대해 전달하기 위해서는 언어가 없으면 힘들다. 상대방이 무슨 생각하고 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대화로 통해 우리는 상대방의 목소리의 높낮이로 통해 감정을 읽을 수 있다. 인간의 감정을 귀로서 더 자극되는 점은 영상기호학 내지 영화서사학에서 충분히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영화예술가 칸단스키에 의하면 인간의 감정은 보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이 대부분이 그 비율이 70% 정도라고 한다. 무성영화보다 차라리 드라마시디로 듣는 것이 더 감정적으로 자극되는 점이다. 그래서 루소는 음악에서 멜로디의 중요성을 알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시라는 노래는 음율시인에 의해 전달되는 경우가 있다. 이들은 이야기에 음악(하프)을 넣고 이야기를 노래한다. 그때 목소리 음 높이와 박자로서 사람들에게 큰 즐거움을 안겨준다. 스토리텔링에서 진정한 기원은 음율시인의 노래가 아닌가 싶다.

 

니체의 <비극의 탄생>에서 아폴론적인 예술인 정형화된 것보다 디오니소스의 형체 없이 계속 바뀌는 예술이 더 강렬함을 준다고 한다. 그림은 공간적인 요소 즉 시각이나, 시와 같은 노래는 결국 시간에 의한 소리이다. 소리는 물질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나 그 강력함은 음악을 들을 때마다 느낀다. 사실 문학이란 것도 결국 신화에서 탄생하고, 신화적인 요소에서 영웅의 이야기는 시인의 입에서 전달된다. 노래가 바로 문학이란 점이고, 한국 전통문학에서도 판소리 내지 가사 등과 같은 예술이 국문학의 시작이란 점이다.

 

노래로서 진행되는 이야기, 서사의 시작은 바로 입으로 통한 상대방에 대한 정보전달 내지 감정이입으로 연결된다. 언어가 가진 놀라운 힘은 현대 영상매체시대에도 중요하다. 이미지만 나오고 소리가 동시에 나오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그 정보를 이용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멀티미디어적인 영상정보매체에서 소리야말로 다시 정보를 제공하는 형태일 것이다. 예전에 대중을 위한 미학 강의에서 인간은 언어의 전달에서 처음에는 말로, 그 다음에 글로 그 다음은 영상이다. 하지만 정보의 제공에서 글이야 말로 이성판단에 도움이 되는데, 영상은 글처럼 이성적 판단이 되지 않고, 대신 영상에서 나오는 소리가 정보 전달로서 효율적이란 점이다. 인간의 귀를 자극하는 소리가 결국 다시 인간의 감정을 자극하는 것이다. 그런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 기원에 대해 적는 루소의 글은 보면서 소쉬르만이 언어학에서 큰 업적을 남겼다고 볼 수가 없었다. 어쩌면 19세기 이후의 사상은 마르크스와 프로이트가 큰 변화를 주었다고 해도 그 이전에는 루소가 있었다. 21세기 사상마저도 루소의 사상이 이어지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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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니면 누가 지키랴 2 - Novel Engine
정진교 지음, 라티세 그림 / 데이즈엔터(주)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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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니면 누가 지키라 2권>을 보는 순간, 나는 조금 다른 생각을 가졌다. 1권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으면서 판단한 것은 이 작품은 단행본으로 나오는 것일까? 아니라면 나오지 않더라도 1권으로 끝이 나도 좋을 만큼 상황을 이어가는 것보다는 끝맺음을 마무리하는 것처럼 보였다. 베히모스 무예가 전학을 가면서 소꿉친구인 민수가 덩달아 같이 가게 되고 난 후로 벌어지는 상황들은 분명히 하나의 서사로서 그 주제가 명확히 나온 것이다. 아니 처음부터 작가의 의도에서 한 가지는 분명하다. 처음부터 끝까지 무예는 민수를 좋아하고 있으나, 민수는 눈치가 너무 느려 그것을 깨닫지 못한 채 엉뚱한 대응을 한다는 사실이다.

 

겉으로 봐서는 상당한 미소녀이나, 알고 보면 무서운 베히모스인 무예는 보통 무기에도 흠집도 나지 않을 정도이다. 겉보기에 예쁜 소녀일지라도 그 정체를 아는 순간 모든 이에게 낯설고 가까이 다가가기 어려운 존재다. 그런 존재에게 민수만이 아주 오랫동안 친구로 남아준 것이다. 어린 시절에 서로의 집에 찾아가서 놀아주고 같은 방에서 낮잠을 자던 친구로서 말이다. 그런 친구가 전학 가서 새로운 환경에 새로운 사람을 만나 새로운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결론은 이미 “무예는 오랜 친구인 민수를 남자로서 좋아하나, 민수는 눈치가 느려 그것을 알지 못해 무예에게 화만 돋는다.”

 

그렇다면 남은 주제들은 무예와 민수의 관계가 아니라 이 2사람을 필두로 하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문제는 민수에겐 좋은 일이 찾아오기 보다는 항상 새로운 사람으로 인한 시련과 고통만 되풀이되는 운명이란 점이다. 왠지 민수를 보면서 동지의식이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지만 현실에서 민수 같은 남자가 과연 미소녀에게 인기가 있을까? 라는 의문에서 라이트노벨이란 장르가 스토리텔링적인 요소에서 재미와 환상을 심어주기에 속성 부여한다면 그럴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본다. 이미 1권에서 민수의 개고생을 본다면 보통 사람이라면 분명 도중에 그만두고도 남은 일들을 다 해결하는 그의 모습은 과연 민수가 아니면 매우 귀찮고 대하기 어려운 신인류를 대할 수 있을까?

 

그런 민수의 서글픈 운명에서 2권에서 새로운 등장인물이 나온다. 이미 표지에서 키메라 휘정이 새로 전학 온 정설영에게 마치 유혹하듯이 손가락을 얼굴을 만지는 장면에서 새로운 흐름을 일으키는 것을 알 수 있다. 게다가 매드 사이언티스트 제갈연광의 등장 역시 만만치 않은 고난이다. 1권과 달리 2권을 보면서 느낀 점은 한국 라이트노벨 특성은 대부분 학교라는 공간에 너무 많은 현실적 요건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아즈마 히로키의 <게임적 리얼리티>라는 서적에서 가리키듯이 사실 실사영상이 아니고 허구의 존재가 나오는 게임, 만화, 애니메이션, 라이트노벨이라고 하여도 그 세계관 자체에 리얼리티한 요소는 분명히 존재한다. 인물이나 영상, 그림체만 비현실이지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생각해보면 5층 꼭대기에 신인류 미소녀 4명과 구인류 노비 민수가 같이 수업을 받는 것은 상황이 맞지 않으나, 매점에서 먹는 것을 구하기 위해 오고가는 노비 민수의 모습은 충분히 가능한 모습이란 점이다. 학교에 미소녀 스타가 나오면 화제가 되어 갑자기 콘테스트를 하는 것은 억지이나, 그런 미소녀가 학교에 있어서 내부적으로 경쟁의식이 학생들 사이에 붙는 것도 가능하다. 리얼리티한 요소들을 생각한다면 단지 캐릭터 인물에 부여된 속성이 그럴 뿐이지 학교 내의 전반적 상황은 충분히 공감이 간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2권에서는 그런 속성을 넘어 개그와 환상적 요소를 확실히 불어 넣는다.

 

<내가 아니면 누가 지키랴> 1권의 서사적 특성을 생각해보면 narrative(내러티브)적인 요소에서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이다. 위기와 절정은 무예와 민수의 관계가 전학 간 학교의 다른 학생들에 의해 균열이 가자 마지막 퀴즈에 서로 처음 만났을 때 민수가 무예에게 한 말을 기억하면서 무예와 민수의 우정(하지만 무예에겐 사랑)에 대해 확인을 한다. 이에 반해 2권은 마지막 부분에 다른 식으로 해소하지만, 조금 다른 전개방식을 보인다. 보통의 서사구조에서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로 끝나는 게 아니라 다른 식으로 전개했다.

 

1권만 봤다는 전제 아래 2권의 상황을 유추해본다면 그저 민수와 신인류 소녀간의 아웅다웅한 비일상적인 현실만을 보여줄 뿐이다. 그러나 2권은 그런 요소를 지니지 않았다. 오히려 신인류의 등장에 따라 구인류 속에 가려진 신화, 민담, 전설의 존재가 등장한다는 속성을 부여했다. 그래서 전반적으로 현실적인 요소를 많이 지닌 한국 라이트노벨에서 조금 비틀어 환상의 공간을 내었다는 점이다. 구인류와 신인류가 있는 것이라면 인류가 아닌 존재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이다. 비인류의 등장에 대한 암시는 나름 조금 재미있었다고 여긴다.

 

서사구조가 단순히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에서 결말 뒤에 새로운 프롤로그를 제시했기 때문이다. 발단의 이유는 비인류 종족 수장의 딸이 겉으로는 종족의 번영과 유지를 위해 제안하는 것처럼 보이나, 실상은 자기의 일종의 목적의식을 거대한 목표를 가리는 것으로 나온다. 뱀파이어 소녀가 무엇을 원하는지 생각하면 전혀 알 수 없다. 그저 알 수 있는 것은 작품 전개를 본다면 주인공 민수가 있는 고등학교에 전학을 와야 한다는 조건이다. <내가 아니면 누가 지키랴>에서 민수가 지키는 존재는 1권에서는 신인류였고, 2권에서는 돈다발 왕이었다. 3권은 당연히 뱀파이어 소녀일 것이다.

 

그러나 계속 오는 인물들이 여학생이고, 게다가 미소녀의 속성을 다들 지니고 있는 점이다. 소청연의 경우 위그드라실이란 신비한 능력과 더불어 뛰어난 외모와 육감이 살아있는 몸매는 많은 남자를 자극하고, 이신아와 같은 하멜른은 키가 150㎝인 작은 키에 앙증맞은 외모까지 소유하고 있다. 윤무예는 전반적으로 균형이 잡힌 몸매에 생머리를 지녔으니, 단짝 친구인 민수에게 옆에 이신아와 소청연이 있는 것에 대해 불만을 느낀다. 그런다고 하여 그들과 친해지는 것을 거부하지 않으나, 그 이상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에 대해 민수에게 응징의 킥과 펀치를 날린다.

 

타격의 규모를 생각하면 턱에 일격을 날려 기절 시킬 정도이니 베히모스라는 신인류의 위력을 서슴없이 보여준다. 그런 윤무예에게 품위가 넘치고 긴 노란머리의 미소녀 뱀파이어가 온다면 분명 민수로선 위기가 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3권은 민수가 지키는 대상은 뱀파이어 소녀라는 점이다. 단지 아쉬운 부분은 눈치가 거의 100점 만점에 5점 수준이기에 무예가 아무리 뒤돌려 말해도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키메라 휘정이가 민수가 교실로 오는 것을 알고 일부로 말을 흘리는 장면에서 윤무예, 소청연, 이신아가 서로를 견제하는 상황이 온다.

 

다른 사람들의 이상형에서 무예의 말은 솔직히 가슴에 조금 뭔가 오는 느낌이었다. 베히모스는 난폭하고 과격하며 상당히 대하기가 어려운 신인류다. 그들의 경이로운 신체능력은 단순히 일상을 넘어 테러나 전쟁과 같은 인간의 생명을 위협할 정도이니 말이다. 베히모스가 어느 마을주민들을 학살할 수 있다는 점에서 베히모스라는 존재가 가장 골치가 아픈 존재다. 15세 이상이 되면 감시가 붙고, 일상을 언제나 자유롭지 못한 베히모스에게 무예에게 등장한 민수란 유일한 빛이다. 자신이 물건을 파손하지 않아도 언제나 베히모스라는 이유로 남들에게 의심을 받는 차별 속에 자신의 담당관이 오자말자 하는 소리가 얼마면 되냐는 말은 베히모스라는 존재는 인간이기보단 그저 괴물이나 쓸데없는 물건에 불과한 것이다.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조건은 소통이다. 물론 소통은 누구에게나 쉬운 일이 아니다. 소통이란 것은 다투기도 하고 화를 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자신이 표현하고나 말하고 싶은 것을 누가 인정해주지 않는다면 소통이란 단어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무예에게 유일한 소통공간은 민수였고, 민수로 통해 일상을 보내고, 전학 간 학교에서 그나마 견딜 수 있는 것이다. 히로인의 설정에서 분명 무예는 주인공 민수로 본다면 히로인 당첨이다. 그러나 그녀는 히로인의 역할로서 부족한 점들이 많다. 얼굴표정변화가 적은 점과 말수가 적은 점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저히 알 수 없을 것이다.

 

사실 따지고 보자면 보호받을 만한 사람은 구인류인 민수인데, 보호를 받는 것은 무예에 가깝다. 단지 그 보호란 인간적 신뢰나 우정일 것이다. 단지 남들과 비교하여 특별히 뛰어난 이유만으로 배척받는 것에서 인간은 더욱 더 배척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된다. 그런 점에서 민수는 무예의 인간성을 열심히 지키고 있다. 단지 인간성이란 다 좋은 것이 아니다. 감정 역시 인간이 가져야 할 조건이기에 윤무예의 킥과 펀치는 여전히 민수의 복무와 정강이를 아프게 한다. 가장 어울린 직업이 전업주부인 민수, 하지만 민수는 도대체 누가 지켜주랴? 그래도 정설영이 언니인 정하영의 공격에서 모두가 도와준 점을 본다면 민수 역시 보호받는 것은 사실이다. 단 조건은 노비로서 온갖 심부름과 수모를 당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점은 민수에 대해 모든 신인류들이 민수를 신뢰하는 점이다. 처음에 등장한 서리그룹의 영재인 설영이 아무리 돈을 쏟아 부어도 민수와 친해진 신인류의 마음을 민수에게서 가져가지 못했다. 사람과 사람이 친할 때 몇 가지가 있는데, 아주 눈치가 빠르고 대화능력이 뛰어나 재미있는 사람이든지 혹은 그저 부려먹기 좋은 마음 착한 사람이란 점이다. 민수는 눈치도 없고 시도 때도 없이 골탕만 당하는지라 한 없이 후자에 가깝다. 결론은 2권을 보면서 여자보단 남자고, 돈보다는 노비가 좋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대한민국은 헌법상으로 자유민주주의국가이므로 신분상 노비가 있으면 안 되는 점과(물론 현실이나 작품 내에서 동의하지 않지만) 동성친구도 좋으나 확실한 이성 친구 그것도 연인이 되고 싶은 사람이 더 필요한 점에서 상당히 동의한다. <내가 아니면 누가 지키랴>에서 나는 민수고, 민수 같은 인물은 작품 내에서 1명이다. 설사 노비제도가 현재까지 이어져 민수가 노비로서 살아가야 한다면 주인은 1명만 될 수 있다. 그렇기에 눈치 없는 민수는 계속 모두의 노비가 되어 괴로운 학창시절을 보내야하는 것이 이 작품이 나가는 주된 설정일 것이다. 그저 민수가 해피한 마무리를 볼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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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스쿨 DxD 13 (잇세 SOS 특별판(BOX)) - Novel Engine
이시부미 이치에이 지음, 곽형준 옮김, 미야마 제로 그림 / 데이즈엔터(주)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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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스쿨 DXD 13권은 외전적인 속성과 같이 전반적으로 서사적인 흐름보다는 중간 사이의 이야기를 재밌게 풀어가는 것이 특징이다. 제일 인상 깊은 부분은 천사, 타천사, 악마 3부족이 평화와 안정을 위해 모두 평화조약을 맺었으나 내부적으로 혹은 심리적으로 불만이 가득할 것이다. 평화를 좋아하고 노는 것도 좋아하고 여자도 좋아하는 괴팍한 아저씨인 아자젤이 평소와 다른 모습이 보인다. 그가 천사시절 연구하던 칼이 아직까지 개발되지 않아 놀림거리가 된 것에 대해 원한이었다. 그것도 천사시절 동료였던 천사장인 미카엘의 입에서 나오니 아자젤의 숨은 마음은 폭발하기 좋은 것이었다.

 

아무리 공통의 목표의식이 있더라도 속에 가려진 배타적인 관계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축제라는 것은 본래 그런 인간의 마음을 표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할 수 있다. 지금도 열리는 세계적인 축제의 의미를 보면, 본래 중세유럽이나 계급체계가 엄격한 신분사회라도 축제기간만큼은 모든 것이 해방되었다. 귀족이나 평민이나 천민이 너나 가릴 것도 없이 단 며칠 동안 미친 듯이 망가지면서 논다. 마시고 먹고 싸우고 있는 동안 마을은 난장판이 된다. 질서가 없어 보이는 이 공간이 과연 어떻게 받아 들이야 하는 것인가?

 

하지만 이런 축제야 말로 질서를 유지시키는 하나의 의식이다. 인간의 내면에 쌓인 불만요소를 발산함으로서 오히려 마을의 단결과 체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축제라는 의미에서 carnival이란 영문단어가 있다. carnival이란 단어를 마빈 해리스의 <식인과 제왕, Cannibals and Kings>라는 서적을 보면 축제의 어원은 바로 식인이란 단어에서 유래되었다. 식인의 의미는 바로 죄의식을 가진 인간이 서로를 용서하고 구원받기 위한 하나의 행사였다. 이른바 아버지 죽이기에서 아버지를 죽이고, 그의 여자를 아들들이 나누어 가지나, 추후 그들 역시 아버지처럼 되어 가면서 자신의 과오를 느끼고, 이에 대한 추모의식을 치른다.

 

그게 바로 축제의 진화과정이다. 축제라는 것은 죄의식부터 시작하여 마음속에 가려진 인간의 감정을 표출하기 좋은 것이다. 축제라는 것은 분명히 말하지만 시작은 결코 즐거움 그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즐겁게 살아가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다. 그러다 보니 하이스쿨 DXD 13권의 삼대 세력의 운동회는 그렇게 즐거운 분위기가 아니다. 그것은 즐거움을 위해 개최되는 것이 아니라 즐거움을 유지되기 위해 개최되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악마 ↔ 타천사 세력, 악마 ↔ 천사세력에서 악마 × 천사 × 타천사 세력구도에서 분명 겉으로는 좋은 분위기라도 내심 불쾌한 것이 없지 않을 수가 없다.

 

바로 운동회가 친목을 위장한 전투놀이로 되는 것이다. 오히려 스트레스와 불만을 표출할 수 있는 하나의 비상구라는 개념 속에서 잇세이는 그야말로 휘둘림을 당하는 것이다. 물론 잇세이가 휘둘림을 당하는 것은 비단 운동회가 아니다. 제일 심한 것은 레비아탄의 특촬영화에서 대본과 어울리지 않은 에드립 상황이 오히려 전환되어 뱀파이어가 주인공이 되고, 잇세이는 레비아탄의 진심어린 연기에 시달리는 모습이 나온다. 언제나 당하고 당하는 모습에 멋있는 모습이 그다지 나오지 않은 것이 개그적 요소다. 오히려 계속 골탕을 먹는 상황에서는 아자젤의 쓸데없는 창작욕구가 더 인상적이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성적인 요소를 바꿀 수 없다. 물론 성형수술로 통해 성기나 각종 체형을 조절할 수 있어도 호르몬 그 자체나 생리적인 구조까지 모두 바꿀 수는 없다. 그런데 아자젤의 장난감을 가능했다. 여자를 남자로, 남자를 여자로 잠시 만들 수 있는 도구를 만든 것이다. 대부분 부실이 여자이기에 모두 남자로 변하자 멋지고 잘생긴 사람이 되었으나, 반대로 남자가 여자로 되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도 관건이었다. 본래 어린 소녀처럼 생긴 남자후배인 캐스퍼는 몸집도 작고 여자로 변해도 절벽 그대로였지만, 키바는 달랐다.

 

본래 미남에 핸섬한 스타일이 여자로 되었을 때, 잇세이는 엄청난 미소녀를 보았다고 하는 점에서 부원 여자 모두가 질투를 느끼는 장면이 나온다. 여자들이 남자가 여자로 변한 모습에 더 질투를 느끼는 것은 본래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여자는 여자가 만들 수 있는 여자가 아니라 남자의 환상이나 욕망 속에서 탄생하는 여자라는 것이다. 장 보드리야르의 <유혹에 대하여>에서도 언급한 것이나 또는 수많은 TS 계통 작품 내지 소재가 등장하는 작품 역시 본래의 여자보다 남자가 흉내 내지 만들어낸 여자가 더 남자의 마음에 드는 것이다.

 

그것은 여자가 만든 여자는 여자의 입장에서의 여자이지만, 남자가 만든 여자는 남자가 원하는 여자인 것이다. 결국 아자젤의 성을 바꾸는 도구는 영구봉인이 된다. 만약 키바가 남자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잇세이는 키바에게 가장 빠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아니 원래 여자인 부원들도 여자로서의 자존심이 금이 가기 때문이다. 이런 이벤트의 등장은 잇세이가 감기에 걸렸다는 것이다. 이벤트 요소에서 여자부원들이 모두(현실에서 존재하지 않고 마치 야한 비디오에서 등장할 것 같은) 간호사 의상을 입고 잇세이를 병간호를 해주나, 문제는 간호의 방법이다.

 

환자는 편하게 계속 쉬게 해주는 것이 의무인데, 달라붙는 것은 둘째 치고 영양식이 문제다. 왠지 알 수 없는 것을 먹이거나 주사를 놓는데, 사람 키만 한 크기인 주사와 거대한 주사바늘은 사람을 쇼크로 보낼 수 있을 정도로 위험했다. 당연히 잇세이가 그런 주사바늘에 찔리는 것은 당연한 흐름이고, 이상한 기운이 맴도는 음식도 먹는 것도 당연하다. 덕분에 잇세이는 감기가 아니라 몸살로 다시 드러눕게 된다. 그렇다고 해도 늘 망신살이만 하는 것은 아니다. 탄닌이란 용왕에게 수련을 받은 잇세이는 왜만한 중급 아니 고급 악마보다 더 강한 힘을 가지게 되었다. 예전에 처음으로 큰 패배감을 서로 맛보게 해주었던 피닉스 삼남이 계속 은둔형 폐인처럼 있자, 잇세이는 그 근성을 고치기 위해 피닉스 저택으로 간다.

 

잇세이를 보자 겁을 먹는 피닉스의 삼남, 그러나 리아스의 가슴에 집착하는 피닉스, 이 엉성하고 라이벌의식이 강한 콤비는 엉큼한 망상을 즐기기 위해 오컬트부 여자부원들이 목욕하고 있는 온천에 침투하는 모습이 나온다. 찌찌 드레곤은 역시 찌지에 모든 것을 바치는 남자이기에 피닉스 삼남의 욕망을 용서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존재하는 성적인 리비도인가? 아니면 삶의 목표를 제시하는 에로스인가? 이 엉성하고 엉큼한 콤비는 라이벌의식을 불태우면서 한편으로 뭔가 닮았다는 생각만 든다.

 

13권이 외전으로 나온 만큼 그동안 조용히 지내던 신룡 오피스의 이야기가 꾸려진다. 오피스는 남녀 성별에서 늙고 어리고의 차이가 없다. 오직 무에 가까운 한 없이 공허한 존재이다. 그런 오피스가 무한의 세월을 나와 유한의 공간과 시간에서 존재하고 있다. 그런 만큼 오피스 역시 현실에서 살아가야 할 존재이나, 그(녀)가 느끼는 세상은 그저 무덤덤하게 보인다. 하지만 잇세이와 적룡제 덕분에 호기심이 발동되어 그저 쿨데레 느낌이 나는 어린 소녀로 나온다. 계속 잇세이와 살아가기 위해서는 사회생활에도 어느 정도 적응해야 했다.

 

매일 같은 옷만 입힐 수가 없으니 잇세이는 리아스와 같이 백화점 쇼핑을 나가는데, 이래저래 돌다가 사람들과 마주치고, 오피스는 그 와중에 길을 잃고 아동보호대기실에 기다린다. 이때 “머리가 붉고 가슴이 큰 어머니. 음흉한 얼굴을 한 아버지, 가슴이 평범한 정도에 긴 금발인 언니, 바보 같은 얼굴에 힘이 세 보이는 언니, 자칭 천사인 언니.” 쉴 새도 없이 잇세이와 리아스 그리고 오컬트부원과 학생회 사람들을 찾는 방송이 나온다. 오피스의 눈에는 리아스는 엄마, 잇세이는 아빠처럼 보였다. 아니 다시 검은 머리에 가슴이 큰 어머니에서 오피스에게 아케노 역시 엄마라고 여겼다.

 

너무 공허한 것인지 순수한 것인지 판단하기 어려울 정도나, 오피스는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생각하고 말하는 오피스의 모습은 너무 오피스 같았다. 대신 아버지와 어머니를 리아스와 잇세이라고 말하는 오피스에서 리아스는 무척이나 행복해 한다. 사람마다 가치 아니 악마라고 해도 인격을 가지고 있으니, 적어도 인간은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과 계속 있으면서 이래저래 시간을 보내는 것을 행복으로 여긴다. 그것은 가족과 친구, 연인처럼 말이다. 가족과 같은 리아스와 잇세이의 하루는 무엇보다 깨어지기 싫은 순간들이다. 그것은 비단 작품 내의 주인공이 아니라 이 작품을 보는 우리 같은 사람 역시 마찬가지 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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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레이] 에반게리온: Q (30p 화보집) - 디지팩 + 화보집 + 아웃박스
안노 히데아키 감독, 하야시바라 메구미 외 목소리 / 아트서비스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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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극장판 에반게리온 Q>를 보면서 생각나는 것은 오이디푸스 왕의 이야기다. 위대한 그리스 시인 호메로스가 만들고 그것을 비극 시로 만든 것은 소포클레스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왕의 비극을 보면 마치 이번 이카리 신지의 앞에서 나타나게 된다. 독일 사회경제학자 마르크스가 프랑스대혁명과 나폴레옹에 대하여 “역사적 사건은 반복되는데, 한 번은 비극으로, 다른 한 번은 희극으로 끝난다.”는 말을 남긴다. 그 의미는 바로 신지가 저지른 그 비극의 씨앗이 이미 한 번은 비극으로 나타났는데, 한 번은 희극으로 끝이 난다로 갈 수 있는가를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파>를 보면서 내가 판단한 내용은 ‘You Can (not) Advance’라는 명제에서 신지가 과연 성장했는가? 혹은 하지 않았는가? 라는 변증법적인 질문이다. 이와 반대로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서>에서는 ‘You are (not) alone’에서 결국 신지의 결말은 alone이 아니게 되었다. 하지만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파>에서는 Advance로 보였으나 그것이 결국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Q>에서는 ‘You Can not Advance’라는 것으로 끝이 났다. 그것은 바로 신지에 의한 서드 임펙트의 시행이다.

  

 

미사토는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파>에서 레이가 사도에게 잡혀먹어 중간에서 고민하던 신지에게 자신의 길을 가라고 했으나, 이상하게도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Q>에서는 신지에 대한 경멸의 눈빛을 감추지 못해 증오가 표출된 정도이다. 그것은 미사토가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파>까지 신지와 레이, 그리고 초호기의 비밀을 몰랐기 때문이다. 신지에게 초호기를 비롯하여 에바에 타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에바 자체가 신지의 어머니인 유이의 몸과 영혼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다른 에바와 달리 유일하게 초호기만 조종석이 LCL 용액으로 가득 차 있다.

 

 

다른 에바 시리즈는 LCL용액이 아니라 뇌파와 에바하고 연결하여 신경조직을 연결한다. 즉 <신세기 에반게리온>부터 시작하여 <신극장판 에반게리온>까지 사이버펑크 장르 유효성은 이어지는 것이다. 문제는 신지가 서드 임팩트의 원인과 결과이다. 신지와 초호기의 비밀을 아는 자는 이카리 사령관, 후유츠키 부사령관 그리고 리츠코 박사일 것이다. 그러나 서드 임팩트가 일어난 후 14년이 지나자 리츠코는 이카리 사령관을 떠나 Wille의 미사토와 합류한다. 즉, 리츠코 박사는 초호기와 신지의 비밀을 알았다고 해도 이카리 사령관이 무엇을 꾸미는지 알 수 없었다.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서>에서도 나오는 장면이고, 먼저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나온 장면 중에서 레이가 영호기 테스트 중에 폭주를 일으키는 소동에서 리츠코 박사는 이카리 사령관이 레이를 소중하게 대하는 것에 대해 질투감을 느끼는 부분이 나온다. 심지어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는 자기 어머니인 레이코에 대한 질투심과 그것에 대한 모방심리 내지 보복심리로서 이카리 사령관과 리츠코는 불륜 관계를 맺는다. 그런 리츠코가 미사토의 Wille에 갔다는 사실은 기존의 에반게리온에 대한 관념을 모두 흔드는 것과 같다. 

 

신지가 우선 에바 초호기를 타고 레이를 구하는 순간 서드 임팩트로 이어지는 것은 결국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부분이었고, 그것을 알고 있던 사람은 이카리 사령관과 후유츠키 부사령관이었다. 신지가 신으로 가는 것에서 레이라는 존재가 왜 나타나는가? 라는 의문에서 바로 고대 그리스 위대인 시인인 호메로스와 그리고 위대한 비극작가인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왕의 신화를 되돌릴 수밖에 없다. 먼저 오이디푸스왕은 자신의 아버지인 라이오스에게 버림받고, 추후 다른 나라의 왕의 양자로 들어가 신탁에서 아버지를 죽인다고 듣기에 자신을 양자로 받아주던 나라에서 떠난다.

 

 

길을 가다가 우연히 어느 남자들과 시비가 걸리고, 그 자리에 있는 남자들의 일행 모두 때려죽인다. 그런 후에 테베이란 나라에서 심한 재앙에 걸렸는데, 몸은 사자 머리는 인간인 스핑크스가 인간을 괴롭혀서 만약 스핑크스의 재앙을 막는 자에게 테베의 왕과 더불어 이오카스테라는 미모의 여왕과 결혼해준다는 엄청난 조건이 따랐다.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모두 풀어 스핑크스를 처단하고, 이오카스테와 결혼하여 2명의 아들과 2명의 딸을 놓는다. 게다가 지혜롭고 용감한 오이디푸스는 덕까지 겸비하여 정치적으로 매우 우수한 왕이었다.

 

 

어느 날 테베이란 국가가 자꾸 재앙이 걸리고, 흉년까지 겹치어 백성들이 몹시 고통을 받았는데, 이때 신탁을 받은 결과 어느 누군가가 천륜을 어기어 신이 노여움을 샀다고 한다. 만약 그 천륜을 어긴 자로 하여금 죗값을 받지 않으면 그 저주는 영원히 이어지게 되어 추후 테베이란 왕국은 멸망한다는 것이다. 그런 와중에 오이디푸스 왕은 그 저주의 원인을 찾다가 그 원흉이 바로 자신이란 사실을 안다. 길 가다가 우연히 만난 일행은 아버지 라이오스와 호위병이고, 여왕 이오카스테는 오이디푸스의 어머니였다.

 

 

이것이 탄로 나자 여왕 이오카스테는 자살을 하고, 오이디푸스는 두 눈을 칼로 찔러 맹인이 되다가 영웅 테세우스의 인도 아래 숨을 거둔다. 하지만 저주는 남아 오이디푸스의 아들 2명은 서로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싸우다 죽고, 그 여동생인 안티고네 역시 오빠의 시체를 장을 치르려다 죽게 된다. 신지의 죄는 바로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윤리인 근친상간이란 죄를 시도하려 했던 것이다. 인간의 문명에는 자연적인 흐름을 거슬려 그것을 파괴하는 것에서 문화는 시작된다. 자연의 존재를 문화로 바꾸는 것은 인간의 노동이다. 인간의 노동이야 말로 진정한 우리 문명을 만든 주체적 에너지다.

 

 

그런데 그 노동이란 것은 현재 국가경제체계처럼 자본주의체계가 아니라 그 이전에 농경사회라도 존재했다. 농경사회는 중앙집권화를 이룬 왕권을 중시한 구체제적인 사회다. 그런 사회에서 임금과 아버지는 동일한 존재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임금과 아버지의 옆에 있는 어머니 내지 여왕을 노리는 것은 무서운 죄인으로 볼 수밖에 없다. 신지가 저지른 죄가 바로 근친상간의 시도라는 점이다. 아야나미 레이가 어머니의 분신조차 몰랐으나, 그래도 2사람은 알게 모르게 서로에게 이끌린다. 신지의 초호기 탑승도 그러하나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서>나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도 이카리 사령관이 다른 인간들은 에바초호기에 타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LCL이란 용액이 어머니의 양수라는 점에서 신지는 에바 초호기가 곧 어머니의 자궁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에바의 에너지원은 물론 코어의 핵이라고 할 수 있으나, 그것을 무한대로 이끌어내는 것은 에바와 조종사와의 싱크로 율이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에바 초호기 S2기관을 가진 이유는 에바초호기와의 싱크로가 400%이고,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파>에서도 필요 이상의 싱크로를 보여준다. 그것은 자궁 속에 있는 태아가 생존본능 내지 투쟁본능과 같은 무의식적인 기질이 결국 에바초호기에 강력한 힘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신지가 에바초호기와 높은 싱크로를 보여주어도 그것은 자궁 안에 있는 아들일 뿐이지 레이처럼 물리적인 육체로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파>에서 신지가 레이에게 손을 뻗어 직접적인 성적 행위가 없더라도 여성의 육체를 지닌 어머니의 클론인 레이를 원했다는 것이다. 레이와 신지가 비로소 손을 잡아 하나가 되려는 순간 카오루가 보낸 롱기누스의 창에 의해 서드 임팩트가 불완전하게 끝이 난다.하지만 적어도 중요한 점은 신지가 하던 것은 인간이 문명사회에 의해 진행되어온 근친상간 발상을 무의식적으로 시도한 것과 인간의 욕망이 신화로서 구전되어도 그 신화적인 욕망을 하나의 사실로 만드는 순간, 신화는 현실의 터부에서 벗어나는 계율을 파괴한 것이다.

 

 

그래서 신지는 꿈의 세계에서 인정되는 신화를 현실에서 실재로 반영하려는 것이 곧 신화의 파괴, 질서의 파괴로 이어진 것이다. 그 질서의 파괴로 인해 기존 세계관은 파괴된 것이다. 다시 돌아가서 오이디푸스왕과 어머니 이오카스테의 관계가 결국 테베의 붕괴로 이어지려 했다. 신지의 그런 행위가 결국 14년 후에 깨어날 때 미사토를 비롯한 전 NERV 요원들에게 증오와 분노를 산 것이다. 그런다고 해서 미사토가 신지에 대해 증오를 하더라도 그 증오가 반드시 신지를 세상에서 말살해야 할 존재로 보는 것이 아니라 애증이 담긴 눈빛이었다. 신지의 목에 폭탄을 달아 얼마든지 죽일 수도 있었는데, 미사토는 새로운 복제 레이가 조종하는 “아담스의 그릇”에게 구출당한 신지를 그대로 보낸다.

 

 

일부러 멀리까지 가는 것을 보고 스위치를 눌러 굳이 신지를 죽일 생각이 없었고, 오히려 신지에게 에바에 타지 말라고 권고한다. 미사토가 신지와 대립적인 관계인 NERV로 간다고 해서 미사토 자체가 신지에 대한 절대적 적대감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런 점들은 아스카로 통해 알 수 있다. 아스카는 신지를 처음 우주에서 만날 때 “빠가 신지!”라고 한다. 정말 적이라고 여겼다면 그런 호칭을 아스카가 사용할 이유는 없다. 그런 점에서 마르크스가 말한 역사적 사건에서 서드 임팩트는 비극으로 끝났으나 포스 임팩트는 희극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 변증법적인 논리다.

 

 

카오루의 역할에서 만약 그가 희생이란 극적플롯이 없었다면 <신극장판 에반게리온>의 개별적 역사적 사건에서 비극이 되풀이된다는 점이다. 만약 되풀이 된다면 그것은 마치 <신세기 에반게리온>과 <End of Eva>에서의 나오코 박사와 리츠코 박사의 최후처럼 될 뿐이다. 나오코 박사는 어린 레이를 교살한 죄책감에 자살하고, 리츠코는 레이에게 질투심을 느껴 이카리 사령관 앞에서 NERV 본부를 자폭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이카리 사령관에게 살해당한다.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Q>에서는 리츠코는 미사토와 같이 있음으로서 어머니와 같은 비극으로 피한다.

 

 

말 그대로 한 번의 비극이 두 번의 비극으로 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번 작품에서 조금 특이한 점에서 인류보완에 대한 부분이다. 이 부분은 조금 나중에 다룰 부분이나, 인류가 리린이 된 것과 그렇지 못한 게 있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선 유이는 인간이 진화하여 새로운 존재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는 점에서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Q>의 예고편에 나오는 수많은 에바들은 결국 서드 임팩트로 통해 인류가 진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거기에 진화하지 않은 것이 바로 리린이 아닐까 한다. 본래의 릴리스의 주변을 보면 수많은 에바의 유해가 있다. 그것은 인류가 진화하는 과정에서 모두가 진화한 것이 아니라 일부만 했다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작품에서 리린의 왕은 이카리 사령관으로 나온다. 그가 한 것은 신의 죽음이다. 본래 안노 히데아키 감독은 기존 관념의 틀을 깨기 위해 많은 시도를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른바 해체주의 미학으로서 당초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신지의 어머니와 초호기에 대한 비밀을 풀어간 것은 미사토가 추적해서 관객으로 하여금 알게 했다면, 이번에는 후유츠키 사령관이 직접 신지에게 설명하여 그 비밀을 폭로한 것이다. 곧 작품의 진행에서 우리가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쉽게 알게 만들어 작품 내에서 주인공에게 비밀이어야 하는 것이 이미 비밀이 아니게 만든 점이다.

 

 

그런 역할을 후유츠키가 맡고, 그것을 하게 한 것은 이카리 사령관의 인격의 불안정이다. 이카리 사령관은 신지가 NERV에 오고 난 뒤로 모든 시나리오를 관여하고 유도한다. 심지어 신지의 탈출과 더불어 카오루의 죽음까지 말이다. 카오루를 죽이게 금 유도하고, 그 카오루의 동일한 존재인 사도까지 죽이게 유도한다. 네메시스의 등장과 분더의 출동, 롱기누스 창과 더불어 한 짝의 창을 같이 뽑아야 하나, 알고 보니 롱기누스의 창만 2개만 있었다. 덕분에 신지는 그것이 어느 창이든 상관없이 자신이 쓸모없는 인간임을 부정하기 위해 혼자 뽑는 순간 카오루는 제1사도에서 제13사도 되어버린다.

  

이때 기존 작품과 다른 점은 <신세기 에반게리온> TVA에서는 인류보완계획에 대해 죽음의 욕망이 아닌 삶의 욕망인 에로스적인 요소를 조금 가미하여 신지가 지금의 세상이 다소 힘들어도 그래도 살만하다고 여기고, <End of Eva>에서는 모든 진화의 최종단계는 타나토스, 즉 죽음의 욕망으로 본다. 제레의 욕망은 바로 타나토스적인 죽음의 욕망이다. 하지만 이카리 사령관은 제레와 같은 시나리오를 가지기보단 유이가 가진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후유츠키와 같이 행동을 한다.

 

 

이미 죽은 유이를 되살리기 위해서는 자연의 모든 섭리, 혹은 그 섭리가 신이란 관념적 존재로 만들었다면 이카리 사령관은 신을 부정할 수밖에 없다. 그런 도구가 바로 에바 시리즈다. 에바로 통해 인간을 진화하고 신을 넘어볼 수 있는 위협성에서 이카리 사령관은 신을 죽이는 남자가 되어야 한다. 신을 죽인 남자로 프리드리히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처럼 신을 정말 죽인 것이 아니라 신이란 존재를 인간의 신화적 욕망에 의해 탄생했기에 그 인간이 가진 관념을 바꾸는 것이다. 리린의 왕이란 것에서 모든 권력적 힘이 이카리 사령관에게 있고, 그의 책략을 모두를 기만하고 속이고,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유도한다.

 

 

이른바 프로파간다라고 하여 군중심리나 유도로서 이카리 사령관은 자신만의 신화를 위해 모든 인물을 하나의 도구로 삼아 버리는 것이다. 희생되는 제물은 당연히 자신의 아들인 신지이다. 서드 임팩트와 더불어 포스 임팩트를 일으킬 수 있는 인간은 신지만 가능했다. 신화적 욕망에 의해 제물로 바치면 제의적 구조에 의해 신화는 은폐로서 새로운 세계를 만든다. 하지만 예고편에서 신의 모습을 따라한 에바가 계속 나온다는 것은 <신극장판 에반게리온>은 별도의 세계관을 형성할 수밖에 없다는 당위성을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이번 주제는 ‘You Can (Not) Redo’이다. 이미 한 번의 비극을 겪은 신지가 다시 할 수 있는가 없는가에서 결론은 나오지 않았다. 그 결론은 다음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시리즈에서 제시될 뿐이다. 작품을 감사하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역시 신지의 손에 들린 워크맨이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선 단지 타인과의 소통을 원하지 않기에 귀를 닫아주는 도구에 불과한 워크맨이 계속 <신극장판 에반게리온>에서 주요한 아이템으로 나온다. 그것은 아버지 이카리 사령관과 아들인 신지를 유일하게 이어주는 도구다.

 

 

신지가 벌을 받은 이유와 죄를 지은 이유는 단순히 그가 오이디푸스왕이 저지른 신화에서 이름을 따온 오이디푸스콤플렉스만이 아니라, 레이에 대한 욕망이 아버지와 다름없다는 점과 같다. 신지가 왜 초호기와 싱크로가 0.00%인 이유는 바로 신지는 어머니를 따른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권위에 따른 것이다. 마음속 깊이 아버지에 대한 불만과 더불어 실생활에선 서로 꺼리는 모습이 나오나, 그 워크맨은 바로 이카리 사령관이 젊은 시절에 자주 사용한 물건이고, 그것만이 유일하게 신지에게 전해준 아버지의 물건이다.

 

 

아버지와의 관계는 오로지 워크맨으로 이어지고,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파>에서는 아야나미 레이가 워크맨을 잡고 신지와 결합하려한 점에서 신지가 아버지와 비슷한 인간이 되어 감을 보여주다.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Q>에서도 역시 워크맨은 나온다. 워크맨을 잡던 신지는 수리 이후 계속 이용하나 에바13호기 파괴 이후 그 워크맨을 버리고 가는 장면이 나오고, 그 모습을 복제 레이가 본다. 아마 직접적으로 나오지 않았으나 레이가 그 워크맨을 줍는 것이 확률이 높을 것이다.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Q>의 레이는 완벽한 인형으로 나오나, 마지막에는 그 인형적 모습에서 탈피한다.

 

 

NERV 본부와 교신이 되지 않아 명령체계를 따르지 못하고, 그런다고 생존적인 조건에서 아스카와 신지하고 같이 활동하지 않을 수 없다. 작품 전개에서 가장 활약상이 뛰어난 인물은 미사토와 아스카다. 초반에 신지는 주인공의 역할보단 그저 보조에 불과하고, 전체 1/3에선 미사토 중심으로 이야기가 흘러간다. 그런 후에 신지가 탈출하여 2/3은 카오루와 관계, 최후 1/3은 NERV와 Wille의 전투로서 이야기가 끝이 난다. 기존의 <신세기 에반게리온>과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서와 파>는 신지가 주인공으로 되어 신지를 바라보는 작품인물이 미사토였다면, 이번에는 미사토가 신지에게 바라보고 있음으로 나온다. 

 

그 외적으로 캐릭터를 보면 아스카의 설정이 돋보인다. 고양이귀를 상징하는 빵모자와 모자 앞면에 2개의 버튼이 달려있다. 하나는 해골무늬에 한쪽 눈을 가리는데, 그것은 자신의 한쪽 눈을 안대로 가리는 것이고, 또 하나는 세 가지의 색이다. Blue, Red, White 이것은 분명 프랑스 국기를 의미한다. 실제로 그런 비슷한 문양을 프랑스에서 사용하고, 특히 1789년 7월에 일어난 프랑스대혁명에서 프랑스시민이 모두 달고 다닌 마크와 유사하다. 딱히 프랑스대혁명과 아스카에게 프랑스 국기의 의미인 자유-Blue, 평등-White, 박애-Red의 요소를 부여한 것으로 보이지 않으나, 캐릭터에 대한 아이템은 기호학적으로 의미가 있음은 분명하다.

 

 

영상연출에서 돋보이는 것은 우선 초반의 우주에서의 신지와 초호기의 수거이다. 로켓엔진이 분사하는 모습은 여전히 <왕립우주군 오네아미스의 날개>처럼 매우 세심한 작업이 보인다는 점과 마치 실제 우주에서 물체가 유영하는 듯한 연출을 보이려 했다는 점이다. 기억이 또 남는 장면은 신지가 심리적 불안에 의해 괴로워하는 점에서 신지의 얼굴을 클로즈업하여 어지럽게 화상이 떨리는 부분과 신지를 중심으로 카메라의 회전으로 왼쪽으로 옮기는 것이다. 이것을 두고 walking-outside라고 하며, 안노 히데아키 감독이 <그남자와 그여자의 사정>에서 사용한 방법이다.

 

 

또 다른 기법으로 서로 다른 화면이 겹치고 겹치게 보이는 프로몽타주 기법이다. 이것 역시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나오고, TVA 25~26회에서 신지의 얼굴에서 다른 영상이 계속 이래저래 바뀌는 모습이 나오는 점에서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Q>는 컴퓨터 그래픽으로 통해 이미지의 연출효과는 좋아졌으나 그 근본적 연출이나 혹은 시나리오에서 보이는 작품세계관은 기존 가이낙스로부터 크게 탈피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모든 생명의 진화는 멸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은 가이낙스에서 제작한 <이 추하고도 아름다운 세계>와 일맥상통한다. 새로운 생명이 존재하려면 기존의 모든 생명은 멸망해야 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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