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 기원에 관한 시론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17
장 자크 루소 지음, 주경복 외 옮김 / 책세상 / 200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루소의 <언어 기원에 관한 시론>을 읽으면서 루소가 프랑스 철학, 사상, 학문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주었는지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프랑스 현대철학자 중에 유명한 사람이 매우 많으나 몇몇을 가려보라고 한다면 분명 레비 스트로스와 자크 데리다 같은 철학자들이 나올 것이다. 이중에 레비 스트로스는 구조주의 창시자라고 불리는 인류학자이고, 데리다와 같은 경우 해체주의를 정립한 학자이다. 또한 자크 데리다의 경우 프랑스 구조주의 이후 후기구조주의자 중에 대표적인 인물이고,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사상가 중에 하나이다.

 

그런데 이런 두 사람마저 영향을 루소에게서 받았다는 점이 매우 놀랐다. 개인적으로 데리아의 서적이라곤 <마르크스의 유령들> 뿐이다. 그러나 현대철학에서 데리다의 영역이 명확하기에 그의 해체주의 철학이 루소에서 나온 점에서 매우 감탄할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지금으로부터 약 250년 전에 루소가 만든 서적들이 현대 철학과 사상에 엄청난 영향을 주는 점에서 말이다. 당시 봉건주의 사회에서 왕족과 귀족 그리고 성직자가 절대적 권력을 지닌 시기에 지식인으로서 언어마저도 신이 만든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동이나 감정표현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방식은 지구의 천동설이 아닌 지동설이라고 말한 코페르니쿠스 전환만큼 강력하다고 볼 수 있다.

 

루소 자신도 디드로, 볼테르와 더불어 계몽주의 철학자이나, 그는 이성을 중시한 계몽주의 철학자 중에서 이성보단 자연의 본성을 중시했다는 점이 매우 특이했다. 인간에게 자연적 요소를 발견하고, 인간의 불평등은 모든 것은 소유에 대한 욕망인 점에서 이성이란 합리적인 도구가 오히려 자연 본성의 인간을 악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회계약론>에서 밝힌 것처럼 모든 인간은 자연적으로 평등하고 자유로운 존재이나, 인간이 속해진 사회가 있기에 자유를 대신하여 억압이 존재한다. 서로 간의 영역을 위해 사회 일원이 만든 사회계약이란 일반의지는 결국 인간이란 자연적으로 살아갈 수 없다면 이성으로서 살아가야 한다는 전제가 대체된다.

 

<사회계약론>에 대해 생각해보면 인간이 사회적인 존재가 되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은 정치적(사회적) 동물이다.”이라고 거론한 것처럼 인간은 태어나면서 타인과의 접촉을 피하지 못하는 것이다. 언어라는 것은 바로 이런 사회가 존재했기에 계속 존재하는 것이다. 왜 루소가 갑자기 인류학의 창시자라고 레비 스트로스가 말했을까? 그것은 바로 인간의 언어로 통해 문화와 억압, 착취가 생긴 것을 루소가 지적한 것이다. 레비 스트로스의 학문적인 요소는 마르크스, 프로이트, 지질학이다. 그런데 루소의 <언어 기원의 관한 시론>은 구조주의 요소를 상당히 잘 표현했다. 언어에 대한 권력과 사회적인 요소는 미셀 푸코가 지적한 것이다.

 

레비 스트로스의 구조주의에서 소쉬르의 언어학을 받아들임에서 언어학 영역에서 루소가 보여준 문명의 발달과 전개과정은 매우 흥미로웠다. 인간이 자연 상태에 그대로 있을 경우 야생이고, 조금 더 발전한 상태가 야만이고, 그 다음에 문명이라고 말한다. 문명이 생기는 점에서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에서 적은 것처럼 유럽이 문명이 발달한 이유는 환경적인 요건이 매우 크다. 지리학적으로 다른 나라와 가까이 붙어있는 점에서 전쟁이 늘 많았다는 점과 영토규모에 비해 주민들이 많았다는 점이다.

 

야생에서 거주하는 민족들은 문명국가 사람들처럼 식량에 대한 위기가 없었다. 가령 광대한 숲과 강을 가진 어느 지역에 주민 수는 겨우 밴드 하나당 30명이 넘지 않는다. 다른 밴드와 조우할 수 있는 확률은 1주일 1번 정도다. 숲 속에 언제나 나무에서 과일이 맺히고, 벌꿀이 만든 꿀통에서 달콤한 꿀을 찾을 수 있다. 삼림이 넉넉하여 동물들도 많아 사냥을 하여 언제든지 잡아먹을 수 있고, 강가에 물고기도 많아 충분히 잡아먹을 수 있다. 이들의 생활에 특별한 것들은 필요 없다. 단지 짧은 시간에 서로 채집과 사냥을 하여 같이 나누어 먹고 쉬는 것이 전부다. 인간이 수렵과 채집하던 무렵에 키가 크고 영양상태가 좋았다고 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그런 조건에 살아갈 수 없다. 가령 에스키모 인들과 같이 기후가 매우 추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자연적 조건이 워낙 열악하기에 사람들의 성격이 급하고 난폭할 가능성이 높다. 이에 반해 열대지방에 사는 부족들은 넘쳐나는 식량으로 인해 성격을 급하게 굴 필요도 없고, 난폭하게 사람들을 대할 이유도 없다. 그들은 서로 춤을 추고 노래하고 정답게 지내는 것을 원한다. 모든 부족이 그런 것은 아니나, 가령 어느 부족이 “나를 사랑해줘요”라고 인사하면 에스키모 인들은 “나를 도와줘요”가 인사말이란 점을 생각하면 매우 인상적이다.

 

일본에서 누가 다치거나 문제가 발생하면 “다이죠브데쓰까?”라고 한다. 우리 한국말로 대체하면 “괜찮으신가요?”가 문자 그대로 직역하면 “대장부입니까?” 라는 것이다. 왜 괜찮은지 괜찮지 않은가에서 대장부이냐고 묻는 표현은 조금 낯선 느낌이다. 그것은 일본의 자연조건이 열악하거나 혹은 일본의 역사적인 배경을 보면 워낙 전쟁을 많이 한 점에서 언어적인 표현방식이 다르게 될 수 있다. 인간의 생활방식이 하나의 체계화되어 언어로서 표현되는 점은 그 민족과 국가의 구조적인 요소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루소의 야생, 야만, 문명국가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분석은 매우 탁월했다.

 

언어가 있는 이유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이 사는 사회에선 통제와 명령이 필요하기에 언어로서 인간을 조율하는 것이다. 또한 감정이란 것도 직접적인 몸짓도 좋으나, 몸짓으로 표현하고 의사소통하기에는 그 한계범위가 있다. 말로 통해 많은 의미와 상황적 요소를 알리는 것만큼 효율적인 게 없다. 언어는 langue와 parole로 나뉜다. langue의 경우 사회적인 언어로서 언어는 사회적인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것에서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인간의 언어가 사회적인 언어이기 때문에 이성적인 요소로 보는 것이 타당한가?

 

언어야 말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서다. 사실 논객들의 대화가 로고스라는 논리로서 전개해도 한편으로 파토스적인 요소가 보인다. 자신의 입장과 감정을 논리라는 이름으로 오용하는 경우도 종종 본다. 루소는 또한 감정 대신 욕구로서 인간의 언어가 생기지 않는다고 한다. 생각하면 배가 고프면 배를 가리키고, 위험하면 비명을 질러도 자신의 의사가 상대방에게 충분히 전달된다. 그러나 심적인 상황에 대해 전달하기 위해서는 언어가 없으면 힘들다. 상대방이 무슨 생각하고 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대화로 통해 우리는 상대방의 목소리의 높낮이로 통해 감정을 읽을 수 있다. 인간의 감정을 귀로서 더 자극되는 점은 영상기호학 내지 영화서사학에서 충분히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영화예술가 칸단스키에 의하면 인간의 감정은 보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이 대부분이 그 비율이 70% 정도라고 한다. 무성영화보다 차라리 드라마시디로 듣는 것이 더 감정적으로 자극되는 점이다. 그래서 루소는 음악에서 멜로디의 중요성을 알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시라는 노래는 음율시인에 의해 전달되는 경우가 있다. 이들은 이야기에 음악(하프)을 넣고 이야기를 노래한다. 그때 목소리 음 높이와 박자로서 사람들에게 큰 즐거움을 안겨준다. 스토리텔링에서 진정한 기원은 음율시인의 노래가 아닌가 싶다.

 

니체의 <비극의 탄생>에서 아폴론적인 예술인 정형화된 것보다 디오니소스의 형체 없이 계속 바뀌는 예술이 더 강렬함을 준다고 한다. 그림은 공간적인 요소 즉 시각이나, 시와 같은 노래는 결국 시간에 의한 소리이다. 소리는 물질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나 그 강력함은 음악을 들을 때마다 느낀다. 사실 문학이란 것도 결국 신화에서 탄생하고, 신화적인 요소에서 영웅의 이야기는 시인의 입에서 전달된다. 노래가 바로 문학이란 점이고, 한국 전통문학에서도 판소리 내지 가사 등과 같은 예술이 국문학의 시작이란 점이다.

 

노래로서 진행되는 이야기, 서사의 시작은 바로 입으로 통한 상대방에 대한 정보전달 내지 감정이입으로 연결된다. 언어가 가진 놀라운 힘은 현대 영상매체시대에도 중요하다. 이미지만 나오고 소리가 동시에 나오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그 정보를 이용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멀티미디어적인 영상정보매체에서 소리야말로 다시 정보를 제공하는 형태일 것이다. 예전에 대중을 위한 미학 강의에서 인간은 언어의 전달에서 처음에는 말로, 그 다음에 글로 그 다음은 영상이다. 하지만 정보의 제공에서 글이야 말로 이성판단에 도움이 되는데, 영상은 글처럼 이성적 판단이 되지 않고, 대신 영상에서 나오는 소리가 정보 전달로서 효율적이란 점이다. 인간의 귀를 자극하는 소리가 결국 다시 인간의 감정을 자극하는 것이다. 그런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 기원에 대해 적는 루소의 글은 보면서 소쉬르만이 언어학에서 큰 업적을 남겼다고 볼 수가 없었다. 어쩌면 19세기 이후의 사상은 마르크스와 프로이트가 큰 변화를 주었다고 해도 그 이전에는 루소가 있었다. 21세기 사상마저도 루소의 사상이 이어지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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