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쓰고 말하고 듣고 알고 있는 한글”, 사실 한글이란 표현은 세종대왕이 지칭한 게 아니라 주시경, 한글이로 주한샘이란 분이 수정한 것이다. 한국의 대부분의 문화는 일제강점기와 외침에 의해 사라질 뻔했으나, 조선이란 국운이 강한 것이 아니면 엇갈려 나간 것인지 조선이란 이름으로 아니면 대한민국이란 이름으로 우리 문화가 살아가고 있다. 언어란 사실 대화수단만이 아니다. 그 나라의 민족과 역사를 같이 하는 하나의 삶이다. 언어는 그 문화의 특성까지 반영한 하나의 체계이다. 지식과 소통, 그리고 미래로 이어지는 것이 오로지 언어에 의해서이다. 언어를 모른다면 우리는 과거를 알 수 없고, 미래를 향해 외치지 못한다.

 

언어가 있기에 말이 나오고, 글자가 문자로 기록된다. 글과 말, 언어라는 것이 이토록 위대한 것이다. 게다가 어느 한 국가, 어느 민족이 자신만의 언어를 가지고 지켜가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다. 외침에 의해 민족 자체가 섬멸되거나 또는 강제로 교화될 경우 그 정체성을 상실한다. 남미의 국가는 가톨릭 문화가 제법 침투했다. 과거 그들의 조상의 언어와 문화는 허무하게 사라져갔다. 만일 20세기 그 문화가 있었다면 레비 스트로스 같은 위대한 인류학자가 어떻게든 기록하고 연구하여 보존 및 기록을 할 것이다.

 

 

그러나 남미민족은 정체성은 거의 사라져 버렸다. 북미의 인디언은 사냥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다. 민족이 쓰는 문화 그리고 언어가 사라지는 것은 자신이 존재했고, 자신의 그 이전에 누군가 있었다는 사실조차 없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한글은 살아남았고,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 한글의 원류가 되는 훈민정음”, 단어에서 모음과 자음으로 나누고 나누어 거기에 새롭게 더하고 더한다. 중국의 한문은 알파벳의 단어를 제대로 기록하기 어려우나, 우리는 그 어떤 나라의 말을 한글로 적어갈 수 있다. 언어적으로 발음을 중심으로 전달하기에 타국의 언어를 더 편하게 습득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언어가 존재한지 이제 600년이 되지 않았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언어가 없었다면 21세기 한국은 어떻게 되었을까? 일제에 의해 일어가 표준 언어로 자리 잡고, 나중에 미국에 의해 영어가 자리 잡았을 것이다. 비무장지대 위로 보이는 적이 된 동포의 국가에서는 러시아어가 국가통용어가 되었을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한국어 또는 조선어, 혹은 훈민정음을 모태로 언어를 활용한다. 영화 <나랏말싸미>는 세종대왕이 한글의 원류 훈민정음을 만들어가는 이야기이다. 조선이 건국할 때 태조임금은 자신의 스승 겸 친구로 무학대사를 모셨지만, 그는 조선 최초 또는 마지막 원사였다.

 

조선은 숭유억불 정책을 펼친다. 정치와 종교적 가치관에서 불교는 제정일치 사회지만, 유교는 조금 미묘하게 달랐다. 공맹의 유학은 정치학으로 종교적 범주보단 학문적 영역으로 시작했으나, 주희의 성리학에 의해 유교는 다소 종교적 색채가 더해졌다. 고려가 패망한 이유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삼국시대에서 고려까지 불교의 힘이 강했고, 불교를 토대로 권력을 가진 승려들이 제법 있었다. 고려가 국교로 지정되면서 승려들이 입김이 강했고, 승려들은 불경을 볼 때마다 한자를 익힐 수 있었다. 조선시대 초기 양반은 전체 인구의 10%도 되지 않았다. 게다가 여성들은 글을 제대로 익힐 수 없으니, 실제 한자란 글을 아는 인구는 5% 미만인 셈이다.

 

언어를 아는 것은 권력을 잡을 수 있는 기회고, 권력으로써 지식의 독점권을 행사한다. 불교의 나라 고려가 망한 이유는 권력과 지식의 유착과 부패로 이어진 계기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아니면 정치적 사회적 시스템이 변하는 시기에 탈피하지 못하여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사실은 나라가 망하는 이유는 권력자의 부패와 비리, 그리고 백성에 대한 애정이 없어졌기 때문에 그렇다. 고려는 이성계에 의해 망하고, 조선은 태조와 정종 그리고 태종에 의해 왕권이 강한 국가가 되었다. 태종 이방원은 왕권을 강하게 만든 이다. 그는 조금이라도 권력을 남용하는 이는 용서하지 않았다. 심지어 아들 세종의 장인마다 역적으로 만들어 죽게 만들었다.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었지만, 그는 세종에게 주지 않은 핵심사항이 있었다. 그건 병권이었다. 군사력 통제는 모든 것의 시작이다. 무관으로 시작한 임금이므로 군사정병은 항상 군사 병권력의 장악에서 시작하는 점을 알았다. 세종의 허락이 있어도 상왕의 허락 없이 병력을 움직이거나 국방정책을 펼치는 순간 병조판서는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국문 장에 끌려와 최후를 맞이한다. 세종의 한은 여기서부터 시작이고, 그가 성군이 된 계기도 그러하다. 왕권의 강화와 더불어 사대부부터 더 학문이 높은 왕이기에 그 누구도 세종에게 도전하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유자의 나라에서 왕이란 그들의 군주인지 아니면 사대부의 최고자리인지에 대한 문제가 있었다.

 

백성에게 글을 알려주는 것은 자신의 권력을 빼앗길 위협이 있고, 게다가 아낙네에게 가르치는 것을 대단히 꺼려했다. 영화 <나랏말싸미>는 소외된 자들이 서로 힘을 모아 기득권에 저항하기 위해 만들어진 영화이다. 처음 왜국 승려가 오자 세종은 팔만대장경을 내어주는 것을 거부했다. 그 이유는 종교적 사상이 하나로 모이면 분열된 세력이 통합되어 큰 힘으로 발휘하기 때문이다. 팔만대장경은 외세에 저항하고자 한 고려 민중과 권력자, 지식인이 만들어낸 세계적 유산이다. 그것을 남에게 주는 것은 우리의 얼과 삶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의 유교의 나라이다. 세종은 여기서 고민이었다. 백성들이 잘 살고, 그들의 삶을 이롭게 하려면 뭔가 알아야 하는 것이다. 유럽에서 성경을 충분히 독일어로 볼 수 있었으나 독일 민중을 읽을 수 없었다. 우선 책이 그 당시 상당히 높은 가격이었고, 다른 하나는 기록문자가 라틴어이기 때문이다. 언어를 배우기 어렵고 사용하기란 더욱 어렵다. 오직 귀족과 성직자만 공유하고 그들은 유럽사회를 지배했다. 언어를 아는 것이란 결국 타인의 지배를 위한 수단이 되었다.

 

추후에 훈민정음이 반포해도 혁명은 일어나거나 문제는 크게 일어나지 않았다. 과거의 등용문에서 한자가 중심이 되었기 때문에 여전히 권력의 중추는 한문이었다. 그래도 훈민정음의 등장은 조선시대 큰 도움이 된 것은 사실이다. 가령 병사들에게 훈련을 시킬 때, 교본을 이용해야 하는데, 그림을 넣는 것도 한계가 있고, 글자로 보여주자니 한문을 읽을 수 없다. 훈민정음을 이용하여 병사에게 보여주니 쉽게 습득할 수 있었다. 언어의 힘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게다가 구중궁궐 궁녀들은 한번 들어가면 죽을 때까지 나올 수 없다. 친정의 어머니는 잘 계시는지, 아버지와 동생들은 잘 지내는지, 어떻게 전하려 해도 글을 몰라 못쓰고, 대필해줘도 그들의 가족은 읽지도 못한다.

 

영화 <나랏말싸미>에서 세종은 조선시대 천한 존재들을 대등한 관계로 이어준다. 중전과 신미스님이 같은 좌석에 앉는 모습이 나온다. 여인네와 중놈, 물론 그나마 중전의 자리는 최고의 자리이지만, 소헌왕후는 역적의 딸이란 이름으로 힘들어했다. 불교를 믿어도 신하의 눈치를 보았고, 영화에서는 수양의 집에서 눈을 감는 것으로 나온다. 수양대군이 조카의 왕좌를 찬탈하고, 동생 안평의 생명을 빼앗은 비정한 군주이다. 하지만 영화의 수양은 아버지 세종의 의지를 존중하고, 어머니 소헌왕후를 지극히 모시는 효자이다. 물론 형이 문종과 아우인 안평과 사이는 좋았다. 권력이라는 것은 부모형제조차도 냉정한 것이다.

 

하지만 세조가 왜 그렇게 왕권강화에 신경을 쓰는지 생각하면 답이 나온다. 그는 훈민정음 창제에 많은 도움을 주고, 훈민정음의 보급에 많은 역할을 했고, 한국 불교문화에서도 큰 역할을 했다. 가족에게는 잔인한 사람일지 모르나, 백성의 입장에서 보자면 참으로 군주라고 볼 수 있다. 세종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온다. 영화라고 해도 만일 백성의 삶을 힘들게 하는 왕실이 있다면 그런 왕실은 없어도 된다고 말이다. 신미스님에게 훈민정음 창제와 관련하여 유가와 불가가 충돌하지만, 이렇게 말한다. 네가 중이고 내가 왕이지만, 우리 모두 백성의 지은 쌀을 빌어먹는 놈이라고 말이다.

 

왕의 하늘은 백성이고, 백성의 하늘은 쌀이란 말이 있다. 그래서 세종은 처음 영화에서 기우제를 올리는 모습이 나온다. 그가 왕이란 허례허식을 벗어던지는 순간 하늘은 감응을 했다. 더 자세한 표현으로 백성을 향한 사랑이 그만큼 깊었다는 의미이다. 사람에게 누구나 마음이 있다. 그 마음을 표현하고 싶어도 표현하지 못하는 것은 정말 답답한 일이다. 누군가 보고 싶어도 그 의미에 대한 정확한 표현을 나타낼 수 없다면 매우 슬플 것이다. 말이란 주술과 같은 힘이 있다. 언어에는 누군가 마음을 움직이는 큰 힘이 담긴 것이다.

 

세종의 마음에 훈민정음은 여러 가지가 담겨져 있다. 정말 그럴까 라는 생각은 하나, 훈민정은 서문의 글자 수가 총 108자이다. 108번뇌 불교에서 말한 인간에 내려진 고통과 절망 그리고 업이란 굴레에서 그 가지 수가 108개란 것이다. 불교를 신봉한 아내를 위한 마지막 진혼곡에서 훈민정음의 성과를 궁녀와 승려들이 모인다. 궁녀는 여성으로 가난한 평민 집안의 딸들이 주로 들어오고, 승려는 미천한 신분을 가진 자나, 혹은 역적의 후예가 세상의 뜻을 잃고 그저 마음을 달래기 위해 찾아가는 곳이기도 하다. 신미스님이 중은 사람이 아니라 개로 취급하기에 처음 주상에 대한 예의를 차리지 않는다.

 

조선시대에 그런 불경을 저지르면 역적으로 참형을 당하는 것은 기본이다. 하지만 세종은 신미스님은 역적이라 부르지 않았다. 둘 다 백성의 쌀을 축내는 존재라고 여겼다. 영화에서 훈민정음이란 단순히 백성의 소통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고려가 망해도 고려의 백성들은 아직 대를 이어 계속 살아가고 있고, 새로운 조선의 백성들도 세상에 드러난다. 이 모두가 나라의 백성인 점에서 그들의 삶이 더 나아지기 바란 것은 임금과 중에게서 서로 이해가 맞는 부분이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은 단어가 나온다. 사대부들은 불교를 억압한다. 중은 현재 사대부들을 거부한다.

 

만일 부처와 공자가 만났다면 그렇게 다투었을까? 백성과 중생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기본이 뭔지 안다. 그래도 현실의 세계에 어쩔 수 없는 굴레에서 세종은 사대부와 같이 반포하지 않으면 훈민정음이 살릴 수 없다는 점을 알았다. 하지만 막상 반포하려니 의리로 자신의 겪을 지켜본 정인지만 그 책을 가져가고, 나머지는 모두 외면한다. 어전이란 공간은 정3품 당상관만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이다. 당하관은 그 자리에 들어오지 못한다. 권력을 가진 자는 오로지 권력만 생각하고, 명나라 황제의 눈치만 봤다. 작은 중국이란 소중화가 그들의 자부심이었다. 지금도 그런 소중화가 중국이 아닌 다른 국가로 바뀌어 문제지만, 외교란 백성을 협상이지 자신의 안위를 위한 협상은 결코 아니다.

 

영화 <나랏말싸미>에서 또한 신기한 장면이 나온다. 원래 대군이 부왕을 부를 때 아바마마라고 부르나, 여기서는 아버지라고 한다. 세종도 소헌왕후에게 중전이라 하지 않고 여보라고 부른다. 단어를 보면 우리 언어를 그대로 사용한다. 왕의 위엄을 살리기보단 영화에서 세종이란 그저 어느 인자한 아버지가 왕 자리를 맡아 국정을 운영하는 모습을 강조한다. 세종도 자신을 두고 신하에게 그저 힘없고 늙은 임금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자신이 임금이기 전에 인간이란 사실을 늘 잊지 않은 세종의 모습에서 그가 위대한 임금이란 사실을 충분히 알 수 있다.

 

한국의 존경하는 위인 베스트 3에 항상 들어가는 인물이 세종대왕, 이순신, 정약용이다. 모두 외로운 싸움에서 자신의 존재를 승화한 인물이다. 옆에 누군가 어느 분은 한국에 만일 외계인이 있다면 저 3명이다 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 재능을 보면 충분히 그런 말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훈민정음이 나오고 나서도 사대부들에게 큰 환영을 받지 못했으나, 일부 양반들은 훈민정음을 국문학으로 승화시키고, 또한 민중에게도 보급하기도 했다. 그리고 한글로 되어 조선독립정신과 대한민국의 시작에서 태동이 되었다.

 

전에 TV에서 까막눈 할머니가 글을 배우던 장면을 본 적이 있다. 그 분은 글을 알면 제일 먼저 하고픈 것이 편지를 적는 것이라 했다. 편지에 적은 글은 서툴지만, 의지가 명확했고, 편지를 낭독하는 할머니의 입가는 다른 이들의 눈에서 눈물을 자아내게 했다. 그것은 이미 자신을 두고 세상을 떠나버린 자신의 남편, 할아버지에게 보내는 송사였다. 자신의 마음을 전하고 싶어도 그 말하고픈 사람은 없지만, 그래도 자신이 그런 마음조차 적어내려 갈 수 없는 게 더 슬펐다는 사연을 보고 감동을 받았다. 영화 <나랏말싸미>에서 그런 감동이 나온다. 막내 스님인 학조는 어머니를 몰라도 어머니란 존재를 생각나게 해주는 단어를 들으면 기분이 좋다고 했다.

 

사람이 말하는 것은 그런 따뜻한 마음을 느끼고 싶고, 그 마음을 전하고 싶은 것이다. 세종은 훈민정음이란 글자가 백성 스스로 소통하길 바라는 심정으로 세상을 향해 외쳤다. 단지 영화에서는 신미스님과 다른 스님의 역할이 커서 마치 중들이 만든 것이 아닌가 하는 모습이 되었지만, 산스크리트어나 다른 언어의 참고한 점, 그리고 그런 단어가 불교를 수행한 자들에게 널리 배우는 점에서 인용한 셈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망한 고려가 불교의 나라이든 새로운 나라 조선이 유교의 나라이든 거기에 살아가는 백성은 모두 같은 사람이란 점이다. 결국 영화 <나랏말싸미>는 사람 그 자체에 대한 애정이 담긴 영화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소헌왕후로 등장해 훌륭한 연기를 보여주신 전미선 배우님의 명복을 빕니다. 영화에서 세종 송강호 씨와 신님스님 박해일의 긴장감을 타는 대립 점을 소헌왕후로 통해 해소하고 새롭게 전환시켰던 점입니다. 시나리오 내러티브에서 갈등과 갈등의 최종 국면은 해결이고, 그것은 큰 위기와 절정에서 비롯되는데, 그 어려운 역할을 전미선 배우님이 했습니다. 영화 <나랏말싸미>가 한국사람들이 많이 보시고, 다시금 우리의 언어를 소중히 여기는 시간과 그리고 전미선 배우님의 마지막 연기를 지켜보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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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란1 2019-09-20 09: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만화애니비평 2019-10-04 17:00   좋아요 0 | URL
ㅎㅎ 감사합니당
 


저번 주말 일요일에 어머니가 계시는 본가로 찾아갔다. 결혼 후에도 나는 특별한 일이 없다면 1주일마다 1번은 꼭 집에 가서 어머니와 밥은 먹으려고 한다. 결혼 후에 남편은 아내의 것인지 아니면 아내는 남편의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천륜에 의한 인연은 하늘이 무너질 정도의 일이 아니면 깨질 일이 없다. 그러므로 내가 어머니 댁에 가는 것은 남들의 입장에서 보면 귀찮은 일이기도 하고, 한편으로 당연하기도 하다. 결혼 전의 사람들은 생각해야 할 것들이 있다. 부모님은 적어도 본인의 인생을 위해 30년 전후를 고생한 분이란 점을 말이다.

 

어째든 집에 가면 항상 어머니가 집에만 있는 것만이 아니다. 주말이 되면 외출을 하여 친구 분이랑 종종 모여 마트에 가거나, 운동도 가고 때로는 커피숍에 가서 대화를 나누고는 한다. 그래서 종종 이런 일이 있을 경우 나는 집안에 홀로 앉거나 누워 TV를 시청한다. 문제는 내가 TV를 봐도 뉴스만 보기에 지겹고, 그런다고 오락연예물이나 드라마를 보는 것도 맞지 않는다. 시리즈를 이어가야 하는데, 그게 되지 않으며, 방송 중인 콘텐츠가 아주 친절하게도 제1화부터 시작하지 않는다. 중간에 끼어 들어가서 보는 것도 무리수가 넘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런 나를 위해 케이블TV에는 별도의 시간보내기 콘텐츠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인기가 많이 없거나, 인기가 조금 있더라도 시간이 제법 지난 영화들을 무료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삼국지 적벽대전>이나, 배우 견자단이 나온 작품도 볼 수 있다. 이번에 내가 집에 찾아갈 때 구경한 작품은 <기묘한 가족><가문의 영광4, 가문의 수난>이었다. 처음 <가문의 영광>이 나올 적과 다르게 <가문의 수난>편은 조금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다. 그동안 2편과 3편은 보지 않고, 그대로 4편을 봤는데, 보면서 기분이 영 좋지 않았다.

 

그것은 왜 그런가? 바로 특정지역을 비하하는 영화의 모습들이 고스란히 나온 점이다. 전라도 사투리를 쓰는 사람들은 대부분 무식하거나 또는 조폭이랑 많이 연관된다. <가문의 영광4>은 전라도라는 지역의 특성을 왜곡 그 자체로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들이 처음 나올 때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하는 집안이고, 모두 범죄기록이 있는 전과자란 점도 있다. 무식하고 교양이 없으며, 합리적으로 사고하기보다는 그저 기분 내키는 대로 행동한다. 국제공항 출구 심사대에 들어가는 모습부터 시작해서 기내식을 마구 탐내는 모습, 심지어 화장실에서 담배 피는 모습까지 그렇다.

 

전라도라는 이미지는 딱 그렇다. 생각해보면 그런 점은 여전히 드러난다. 최근 상영한 영화 중에 정우성씨가 출현한 <증인>이란 작품에서 미란이란 인물은 살인교사자에 의해 주인집 아저씨를 살해하도록 강요당한다. 미란이 구사하는 언어는 서울말이 아니고, 전라도 사투리이다. 영화 <증인>의 배경 수도권이다. 수도권에서 남의 집에서 살림을 맡아주는 주방아주머니가 왜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해야 하는지 에서도 다소 의아했다. 이런 모습은 비단 이 영화에서만 나온 것은 아니다. 정우성씨와 조인성씨가 출현한 <더 킹>에서 조인성씨의 배역을 보면, 고향 및 학교출신지가 목포이다.

 

목포에서 깡패 아버지 아래서 성장한 영화 <더 킹>의 조인성씨가 결국 싸움만 하는 문제아라는 점, 그의 친한 친구가 목포출신의 조직폭력배란 점에서 더욱 부각시킨다. 전라남도의 도청은 광주에서 목포로 이전했고, KTX 철도도 목포에서 서울까지 이어진 현실이다. 하지만 여전히 목포 그리고 전라도는 항상 무식하고 폭력적인 도시로 그려낸다. 미디어란 그런 점에서 다소 아쉬움만 남긴다. 다소 영화소재가 진보적인 관점이라 해도 그 틀에서 크게 비켜나가지 못한 점이 문제이다. 그리고 이런 목포와 전라도에 대한 최고의 왜곡은 <목포는 항구다>라는 영화이다.

 

차인표씨와 조재현씨가 출현한 영화에서 약골 형사 조재현씨는 목포의 조직폭력배 수사를 위해 목포로 찾아간다. 이때 택시를 타는데, 운전기사가 전라도 말투로 대화하는 것은 맞지만, 갑자기 다른 동료택시기사를 만나 조직의 큰형님이 출옥하자, 손님을 강제로 하차시킨다. 이에 다른 택시를 타니 이번에 말도 점잖게 하고, 교회성경과 십자가까지 차에 구비한 기사였다. 얌전하고 매너 있는 분이라 생각했지만, 방금 자신을 쫓아낸 택시기사를 만나. 출옥소식을 듣는 순간 태도가 역변 한다. 영화를 보면 느낄 수 있게 바로 전라도라는 지역이 상당히 비하당하고 있다는 점이다.

 

언제부터 이런 게 시작했을까? 역사라는 지점에서 전남지역 특히 광주의 518를 생각해볼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518의 광주는 다른 전남지역을 소재로 내세운 영화에 비해 무식한 사람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범죄의 온상이라 여기지는 않는다. 물론 전남지역 조폭영화에서 광주이야기가 나오더라도 적어도 광주에서의 518의 모습은 다른 영화와 큰 차이점을 보여준다. 지역적 고립, 그리고 정치적 왜곡으로 수모를 당했지 현재에 이르러 세계 유네스코의 문화유산을 가진 민주화의 성지로 거듭나는 도시이다.

 

그렇다면 전라도라는 호남이란 지역은 언제부터 이런 식으로 찬밥을 받아온 것일까? 지금으로부터 약 430년 전 선조가 조선의 군주로 있을 때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1592년 늦은 봄에 일어난 이 미증유의 사건이 발생하기 3년 전, 기축옥사라는 정여립 역모란 의문의 사건이 있었다. 정여립은 천하는 공물이라 여기며, 군주사회인 조선왕조 입장에서는 역적과 다를 바 없는 인물이었다. 정여립은 관군을 피해 도망가다 결국 자결을 하고, 아들 역시 관군에 잡혀 죽임을 당한다. 문제는 여기서 부터이다. 조선의 사림파가 동서로 양분할 때. 정여립은 처음 이이와 친분이 있었지만, 이이가 세상을 뜬 후 동인세력인 이발과 친하게 지냈고, 정여립의 역모사건에 이발을 중심으로 하던 선비들이 죽임을 당했다.

 

남명 조식과 퇴계 이황의 제자이던 최영경이 옥중에서 사망하고, 이발과 이길 형제, 그의 어머니와 어린 아들까지 고문으로 죽고 만다. 조선의 선비 천 여 명이 죽임을 당한 기축옥사의 피해는 특히 호남지역에 심각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전남 강진에 유배 올 때, 호남지역의 명문사대부 집안은 3개 정도만 나열하고, 나머지는 모두 빛을 잃어버렸다고 했다. 그 원인은 바로 기축옥사이다. 기축옥사가 1589년 일어난 일이고, 정약용 선생이 황사영백서로 인해 강진으로 유배를 떠난 시기는 1801년이다. 대략 220년이 지난 시점에 회복되지 않을 정도 큰 화를 당했다.

 

사림세력이 기축옥사로 당한 것도 모자라, 호남지역에 의병이 크게 일어났다. 충무공 이순신이 수군을 지키고 있더라도 육상에 주둔한 왜군을 무찌른 사람은 대부분 의병이었고, 의병장 및 의병을 일으킨 사대부들 중에서 호남사대부들이 많았다. 이때 많은 사대부들이 죽음을 당했고, 임진왜란 이후 복구가 어려울 정도로 쇠락해진 것이다. 기축옥사로 역적의 낙인부터 시작해 임진왜란 피해, 그리고 조선시대 특성상 귀양은 사형 다음으로 높은 처벌이다. 귀양지가 도성 한양으로부터 멀면 멀수록 그 죄가 매우 크다. 특히 북방 여진족이 출몰하는 지역과 왜구가 자주 출몰하는 남해지역, 또한 제주지역은 멀고도 험한 여정인 것이다.

 

유배를 가는 도중에 죽는 사람도 있고, 가서 죽는 사람도 많았다. 낯선 땅에 가면 기후에 적응하지 못하여 병이 들어 고생하는 사람도 많다. 변방의 지역은 유배자들의 눈물이 서린 곳이다. 또한 호남지역은 조선시대부터 시작해 지금의 대한민국에서도 곡창지대이다. 많은 곡식과 축산물이 생산되며, 한국인들의 식탁에서 많은 음식을 제공하는 지역이다. 농민과 어민이 계속 대를 이어가는 지역이니, 문화적으로 낙후되었다. 조선시대 역적과 중죄인이 머물던 곳, 일제 강점시대에는 식량을 수탈당하던 곳, 해방과 한국전쟁을 지나며 근대화로 오면서 빈곤으로 가득한 곳, 그곳이 바로 호남지역 그리고 특히 전남이다.

 

이런 전남지역 그리고 대표적 깡패도시로 영화에 등장하던 목포시가 조금 다른 식으로 전개되려 했다. 물론 고상한 곳은 아니지만, 적어도 변화의 바람을 가지려고 했다. 영화 <롱 리브 더 킹> 목포의 영웅이란 영화는 그렇게 처음 발을 내딛게 되었다. 물론 영화에서 목포지역의 국회의원은 검사출신의 권력자로 조직폭력배와 검찰조직을 이용해서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 게다가 경제권을 동원해 기존 영세상인이 몰린 전통시장을 철거하려 한다. 거기에 대규모 빌딩을 세우면, 토지를 판매하는 자는 엄청난 부동산 수익을 올리고, 목포관광객의 유치가 성공하면 상권의 이익이 보장된다.

 

이권이 보장된 사업에 정치권과 조직폭력배가 만나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기존 가난한 영세상인들은 삶의 터전을 잃게 된다. 그렇다면 여기에 조폭의 도시 목포이니 조폭의 방식대로 폭력으로 해결해야 하는가? 물론 폭력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은 분명 존재한다. 법적인 절차와 일반적인 상식에서 통하지 않는 상황에서 말이다. 영화 <롱 리브 더 킹>은 그런 갈등과 문제점을 중간지역을 제시하는 것으로 해결했다. 주먹으로 해결하기도 하나, 주먹이 아닌 것으로도 해결하는 점이다.

 

지방조직폭력배 두목인 장세출은 우연히 강소현 변호사를 만나고, 그녀의 당당한 모습에 반해 사람이 바뀐다. 기존 조직폭력배라는 모습을 버리고, 한 사람의 목포시민으로 돌아간다. 거기에 더 나아가 배고프고 소외된 이웃을 위해 봉사활동을 하고, 강소현 변호사에 어울리기 위한 인간이 되기 위해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 이때 목포지역에 내려온 재야정치인 황보윤이 영세상인의 힘이 되기 위해 국회의원에 출마하고, 장세출은 황보윤이 운영하던 식당을 관리하게 된다. 하지만 반대세력에 의해 황보윤이 크게 다치자, 이에 국회의원후보자를 장세출로 내세운다.

 

장세출은 우연히 버스를 타다가 교통사고를 당하자, 목숨을 걸고 버스기사를 구해낸다. 그게 이슈가 되어 일약 영웅이 되었고, 그가 유명해지자 과거의 유령이 따라온다. 그는 과거의 유령을 부정하기보단 오히려 당당히 맞서 싸우며, 새로운 인생을 살기 위해 계속 노력한다. 영화의 시나리오에서 비극이 아닌 점에서 분명 장세출이 당선되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당선되고 안 되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 과정에서 보여주는 모습이다. 이른바 조폭영화에서 남자가 두목 내지 조직원으로 등장할 때 상대배역의 여성은 항상 엘리트 사회인으로 등장할 경우가 많다. 서로 티격태격하다 우연히 마음이 맞아 연애를 진행하는 로맨스가 다소 비현실적이며, 또한 억지로 포장한다.

 

영화 <롱 리브 더 킹>에서 장세출은 강소현 변호사의 마음에 들기 위해 꾸준히 그녀 앞에 얼굴을 비추고, 90일 가까이 다른 용역깡패로부터 보호해주기도 한다. 자신이 손해 보는 것을 알아도 사랑이란 우연한 계기로 찾아오나, 그 사랑을 받아주는 상대방은 치고받는 과정에서 우연에 의해 생기는 게 아니라, 진정성에서 시작된 점이다. 단순히 무식하게 기분파의 분위기가 아니다. 하루와 이틀 그리고 이어지는 나날이 계속 이어져가면서 진정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장세출은 변했고, 그는 어느 순간 가진 것 없는 늙은 노인들의 우산이 되어주었고, 영세상인들의 우군으로 변했다.

 

기존 목포를 소재한 영화를 보면 어떨까? 그저 무식한 녀석이 무식하게 주먹으로 휘두르고, 의리도 좋지만, 의리를 제외하면 그저 조폭이 주먹으로 해결했다는 구시대적 낭만에 빠져있을 뿐이다. 시대가 바뀌어 가고 있다. 전남지역을 비롯한 낙후되었던 지역이 그대로만으로 볼 수 없다. Well being 시대 천연의 자연과 식료품이 나오는 지역은 관광지가 되어가고, 문화유산도 보전이 잘 되었기에 우리에게 충분한 가치가 있다. 그래서 더 이상 <목포는 항구다>만이 아니다. <롱 리브 더 킹>에서 조폭 장세출이 신분세탁으로 새로운 사람이 된 게 아니라 꾸준히 자신을 변화시켜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처럼 더 이상 지역 차별적 발상이 영화 속에 투영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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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 머리 앤 (양장) TV애니메이션 원화로 읽는 더모던 감성 클래식 2
루시 모드 몽고메리 지음, 애니메이션 <빨강 머리 앤> 원화 그림, 박혜원 옮김 / 더모던 / 201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아저씨의 죽음을 본 장면은 너무 슬펐습니다. 아직까지 우리에게 앤의 마음을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이 있을까요? 이사오 감독님 제발 좋은 곳에서 앤과 같이 꽃마차를 타고 아름다운 숲을 거닐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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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을 보면 참 슬픔을 느꼈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그런 것은 아닐 터이다. 영화를 보고 나오는데, 내 앞에 젊은 커플이 이게 왜 칸영화제에서 상을 탄 거지? 라는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느꼈다. 이 영화를 정말 제대로 느끼려면 삶이란 그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이란 말이다. 예술을 위한 예술이 있고, 삶이란 인간이 살아가는 현실을 통해 보이는 예술이다. 봉준호 감독은 확실히 후자에 속한다. 영화감독이란 점에서 영화란 대중문화이란 거대한 자본시장에서 출현되는 콘텐츠이다. 미디어란 공간적 설정에서 대규모 자본이 투자되고, 그 투자로 성사된 필름이 영화관에서 상영될 때 자본주의 시장의 완벽한 구조가 이루어진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우습게도 인류의 발전과 퇴보를 모두 가지고 오고, 자본주의로 통해 자본주의를 성장하게 하나, 그 자본주의 자체를 비판하기도 한다. 가령 쿠바혁명가인 체 게바라는 전형적인 코뮤니스트였다. 하지만 체 게바라의 옷을 입는 젊은 친구들도 많고, 체 게바라의 청춘을 그린 <모터사이클>이란 영화도 대중문화에서 살아간다. 체 게바라의 서적도 역시 화폐로 통해 구매된다. 자본주의 시장체계란 그런 곳이다. 자본주의 그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를 암울하게 만드는 사회적 기생충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기생충들은 대부분 부와 명예, 그리고 권력을 소유하는 반면, 사회적 기생충에게 생기를 빼앗기는 대중은 그저 하루가 힘든 소시민들이다.

 

영화 <기생충>이란 바로 그런 소시민들의 이야기이다. 주인공 기택은 가난한 집안의 가장이다. 그는 백수로 살아가고, 반지하 건물에서 아스팔트 골목길이 보이는 열악한 주거환경에서 살아간다. 자녀들은 핸드폰 요금을 내지 못해 통화가 되지 못하고, 게다가 주인집에서 와이파이 공유비밀번호까지 바꾸다보니 인터넷도 할 수 없다. 겨우 화장실에 도달하자 인근 커피가게의 와이파이가 연결되자 거기서 카카오톡 메시지를 받아보는 서글픈 현실이다. 이런 가족에게 하나의 기회가 왔다. 기우의 친구가 유학가면서 자신을 대신하여 과외학생을 지도해달란 부탁을 받는다. 가난해서 진학도 포기하던 기우에게 대학의 문턱은 높다.

 

게다가 포토샵을 해주던 기정은 오빠 기우의 재학증명서를 연세대학교로 바꾼다. 사실 영화를 보면 기우나 기정은 제법 실력을 갖춘 사람이다. 단지 돈이 없어서 대학에 가지 못한 헬조선의 청춘일 뿐이다. 기우가 간 곳은 유명 CEO 박사장의 집이다. 박사장의 아내 연교는 부유한 집의 사모님으로 살아가지만, 아이들의 교육에 늘 불만이었다. 이때까지 잘 되지 않았던 애들의 모습이 기우가 오자 딸인 다혜의 학업능률은 오르고, 다혜는 절실함이 담긴 기우의 과외에 마음을 품는다. 기정은 정서불안인 다송의 태도를 완전히 바꾼다.

 

하지만 연교가 이들이 자식의 교육을 제대로 맡을 수 있는 이유는 바로 학벌의 조건이었다. 국내 유명대학교, 해외 유명대학교 출신이란 말에 모든 것을 혹한다. 결국 학벌이란 존재가 하나의 상품과 이미지로 된다. 현실에서 오히려 그 일에 대한 적성도가 개인의 역량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나, 학벌의 문제로 밀리는 게 안타까운 일이다. 박사장 가족의 마음을 잡은 기우와 기정은 운전기사로 아버지 기택을 부르고, 주방아줌마로 어머니 충숙을 부른다. 그 과정에서 보여준 이들의 모략은 매우 비열하나, 그 모습은 비열하기보단 왠지 모르게 웃음을 자아낸다. 살아나기 위한 이들의 몸부림이다.

 

겉모습은 어떻게 속이고 살아갈 수 있었다. 기택의 운전실력은 발군이다. 박사장은 기택의 운전솜씨를 확인하기 위해 커피 잔을 들고 차 뒷자리에 앉는다. 기택의 운전에서 커피 잔의 커피는 넘치지 않고 조용히 컵 안에서 맴돌았다. 적당히 선을 넘지 않으면서 살갑게 대해주는 기택이 마음에 들자, 기택의 가족은 박사장 가족들과 이상한 공생관계를 유지한다. 박사장의 집에서 기생하던 이들이 오히려 박사장이 이들에게 의지(기생)한다. 그러나 뭐든지 간극은 존재했다. 과거 일하는 아줌마와 그 아저씨만의 문제가 아니다.

 

겉은 속여도 본질을 속일 수 없다는 점이다. 기택의 가족에게 비슷한 냄새가 난다. 구역질나게 만드는 악취, 가끔 지하철을 타거나,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나는 냄새, 이 모든 게 가난과 부를 구분 짓게 하는 인간사회의 본능이었다. 악취(惡臭, 惡趣)와 취향, 전자의 악취는 냄새이나 뒤의 악취는 좋지 못한 비열한 뜻이다. 기생하는 이들은 비열하지 못한 행동을 하는 악취(惡趣)를 저지르고, 여기에 그들은 역겨운 냄새를 낸 악취(惡臭)를 풍긴다. 이들의 악취는 계획적이 아닌 삶에 대한 몸부림이다.

 

기생충은 계획성으로 움직이는 생물이 아니라 살기 위해 움직이는 동물이다. 인간 기생충에게 냄새나는 것은 결국 대부분 삶을 위해 살아가는 가난한 자들의 몸부림이 부자들에게 냄새나는 것으로 여길 뿐이다. 박사장 가족이 모두 캠핑가고 없을 때 이들 기택 가족은 술과 안주를 벌여놓고 파티를 즐긴다. 그러나 갑자기 예전에 일하던 아줌마와 그 남편을 만나 소동을 겪는 와중에 박사장 가족이 다시 집에 돌아간다. 폭우가 내리자, 기택가족은 거실을 정리하고 박사장 가족의 눈을 피한다. 기택가족이 장대 테이블 밑에 숨어 있을 때 박사장과 연교는 이상한 냄새를 맡는다.

 

처음 나는 이들이 술판을 벌인 직후 알콜 냄새를 맡았을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이들은 숨어있는 기택의 몸에서 나는 악취를 맡은 것이다. 그리고 악취와 기택에 대한 험담이 이어진다. 그런 와중에 박사장은 연교에게 애무를 하고, 연교는 윤기사가 해고될 때 팬티이야기를 하며, 마약을 구해달라고 한다. 기정은 사실 윤기사가 박사장 차에서 카섹스를 하는 것처럼 보이려 했지만, 박사장과 연교는 그것을 넘어 차 안에서 마약섹스를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들은 윤기사가 저열한 인간으로 취급했지만, 사실 그들도 더티 섹스에 대한 욕망이 있었다.

 

이들이 이렇게 느낀 것은 기택의 몸에서 나는 악취 덕분일까? 기택의 부부에게 악취가 나지만, 박사장 부부에게 악취미(惡趣味)가 보인다. 악취를 맡는 박사장 가족에게 악취 나는 사람이란 별 볼일이 없고, 사람 대 사람으로 대해주지 않은 사람이다. 아무리 외견을 바꾸고, 말투와 행동을 속이더라도 몸에서 나는 원초적 요소(사회적 경제적 빈곤)는 숨길 수 없었다. 영화를 보면서 나는 봉준호 감독이 피에르 부르디외의 <구별짓기>란 책을 읽었을 것이라 여겼다. 프랑스 사회학자인 부르디외는 본래 프랑스 최고 교육기관인 파리고등사범학교에 입학했다. 그 학교는 대학생을 가르치기 위한 교수를 키우기 위해 만들어진 엘리트기관이다.

 

부르디외는 우수한 학생이지만, 그를 두고 주변 학생들은 무시하거나 외면했다. 그 이유는 그가 파리의 부유층이 아니라 시골의 가난한 집안출신이기 때문이다. 경제적 조건, 부모의 직업과 조건에 따라 계급이 나오고, 이들 조건에 따라 취향과 문화적 간극이 벌어진다. 다행히도 20세기 부르디외가 살 때는 인터넷이 지금처럼 활발하지 못했다. 21세기 한국의 인터넷은 세계 최고이다. 모든 정보가 인터넷에서 홍수처럼 쏟아진다. 그래서 기정이 미술치료사 못지않은 실력을 가지고 다송의 치료를 진행할 수 있었다.

 

아니라면 오히려 밑바닥에서 쌓은 삶의 축척이 그대로 현실에 도움이 될 수 있었다. 단지 학벌이 위조되었을 뿐이다. 사실 생각하면 기택의 가족은 가난한 집안이 아니었다. 내가 어린시절 보이스카웃이란 클럽에 가는 친구들은 어느 정도 집에 여유가 있었다. 가입비와 활동비, 각종 행사비용을 해결하려면 부모의 여유가 있어야 가능했다. 기우는 보이스카웃 활동을 했고, 마지막의 모스신호를 읽을 수 있는 이유도 그렇다. 기택은 원래 사업을 했었다. 우리가 예전에 한참 호황을 누린 대만카스테라, 어느 순간 이 사업은 망했다.

 

많은 이들이 이 사업실패로 빈곤하게 되었고, 중산층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기택의 운전실력은 발레주차와 대리운전으로 만들어진 실력이었다. 문광의 남편 근세 역시 대만카스테라로 망했다. 정신이 이상해진 근세이나, 그가 나온 말을 들은 기택의 눈빛은 근세를 적으로 여기기보단 자신과 똑같은 기생충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소시민이란 사실을 알았다. 아무리 숨기려 해도 숨길 수 없는 현실은 폭우의 현장에서 잘 나온다. 다송은 인디언놀이에 빠져 폭우가 내려도 텐트안에서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텐트 안의 다송은 빗줄기 한 방울도 맞지 않는다. 기택은 집에 가자 동네가 물난리를 겪었고, 기택과 주변이웃은 체육관에 누워 밤을 보내야했다.

 

부자의 텐트와 빈곤한 자의 집은 이미 처음부터 틀렸던 것이다. 이때 집에 가서 찾던 물건들이 인상적이다. 기우는 친구가 준 돌을 집었고, 기우는 천장 위의 담배, 기택은 아내가 예전에 받은 메달이었다. 기택은 가족을 소중하게 여기고, 기택이 부족한 가장이라도 가족들은 그를 따랐다. 물난리를 났을 때 이들이 잡은 물건은 상징적이다. 기우는 돌을 잡은 이유는 부의 성공을 포기하지 않았고, 기정은 순간적 도피, 기택은 가족의 자존심이었다. 성공과 쾌락, 정체성이란 갈림길에서 영화는 그대로 반영된다.

 

근세는 다송의 생일파티에 나와 무차별적 칼부림을 일으킨다. 이때 칼에 찔려 죽어가던 기정 앞을 두고 기택은 고민한다. 다송의 트라우마로 쓰러지자 박사장은 기택에게 차를 몰고 병원에 가자고 한다. 기택은 고민한다. 딸을 살려야 하고, 아내를 위협하는 근세를 말리야 하고, 박사장과 다송을 태우고 병원에 가야 한다. 충숙은 근세를 제압하자, 송강호는 딸을 선택하기 위해 차 키를 박사장에게 던지나 중간에 근세 옆으로 떨어진다. 죽어가는 근세 옆으로 박사장이 차 키를 줍자 순간 악취가 역겨워 하며 코를 감싼다.

 

이때 기택은 칼을 잡고 박사장의 심장에 그대로 꽂아버린다. 기택은 그 칼을 꽂은 이유는 기택의 존재가 방해되는 이유가 있지만, 박사장이 맡은 냄새에서 자신과 근세 모두 같았고, 그 냄새를 지닌 사람을 인간 이하로 무시했기 때문이다. 기택이 병원에 다송을 데리고 갔다면 운전기사라는 직위로 부를 보장받았고, 기우를 지키고 있었으면 딸의 생명을 살릴 수 있었다. 하지만 기택이 선택한 것은 박사장의 죽음이다. 그 죽음은 자신의 정체성을 택한 것이다. 근세는 적대적인 기생충이지만, 그래도 자신과 같은 기생충이었다.

 

기생충이란 존재가 비난받을망정, 그 존재성 자체를 부정 받아야 하는 것에서 기택은 이성을 잃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물론 기택의 선택은 후회의 연속이다. 평생 나오지도 못할 그 곳에서 눈치 보면 생존해야 하는 기생충의 모습으로 살아가야 한다. 기우는 머리를 크게 다쳐 재판장에서도 죽은 누나가 있는 유골단지 앞에서 웃음만 나왔다. 그리고 다시 찾아간 그 집을 바라보면서 기우는 영원히 이룰 수 없는 소망을 빈다. 언젠가 그 집을 사서 아버지가 밝은 태양 아래로 나와 같이 포옹하는 모습을 말이다.

 

기택의 죄는 분명 크다. 사람을 속이고 사람을 죽인 죄는 분명 죗값을 받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기택의 죗값을 치루는 모습보다 그가 영원히 죗값조차 치루지 못한 채 어둠에서 기생해야 한다는 선택에서 큰 슬픔을 느낀다. 거기 내가 있어도 저쪽에 가족이 있어도 영원히 만날 수 없는 운명 아래서 영화 기생충의 블랙코미디는 비극적인 드라마로 다가온다. 코미디는 희극이나 드라마는 비극이다. 비극은 누구나 일어날 수 있는 개연 내지 필연이다. 어떻게든 벗어나려 해도 벗어날 수 없는 우리는 악취냄새로 빈곤의 딱지가 새겨져 있다.

 

사람의 정보 중에 촉각, 시각, 미각, 청각, 후각이 있다. 이중 가장 강렬한 인상을 주는 것은 당연히 촉각과 미각일 것이다. 하지만 음식이 아닌 사람을 대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시각과 청각이다. 말은 어떻게든 속일 수 있다. 처음 기우가 그렇게 했던 것처럼 말이다. 겉모습은 속일 수 있다. 기택이 적당히 양복을 입고 가면 되듯이 말이다. 하지만 냄새는 다르다. 냄새는 그가 살아온 삶의 시간이 담긴 축척세계이다. 누군가에게 어떤 냄새가 나면, 그가 사는 집이나 방에서도 그 냄새가 난다. 냄새는 가장 강렬한 기억과 정보를 준다. 그렇기에 그 냄새를 지울 수 없는 기택에겐 영화 <기생충>은 희망조차 보이지 않은 개미지옥처럼 우리에게 다가 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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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같다면 2019-06-03 23: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사전 지식 없이 보고싶어서 개봉하고 바로 기생충을 보고왔어요

저도 너무나 현실같은 상황과 결말을 보면서 슬픔을 누르기 어려웠어요

만화애니비평 2019-06-05 20:01   좋아요 0 | URL
마지막은 기택의 모습에서 한없이 애처로움을 느꼈습니다...
참 감정이란...
 



학부에서 환경공학을 전공하고 생태환경 관련된 엔지니어 업체에서 근무하는 나로서는 이 영화는 상당히 와 닿는 작품이었다. 자연의 파괴로 인해 환경이 오염되고 새는 떠나고 사람들은 쉴 곳은 잃어간다. 그런데 만일 자연이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영화 <물의 기억>은 그런 마음을 염원하던 자가 이 세상에 없더라도 그 모습이 만들어가는 장면을 찾아내는 영화이다. 보통 5월이 되면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을 상기시키는 해이다. 더구나 518의 슬픔 뒤의 523일이 다가오면 마음이 심란한 사람이 있고, 이에 반해 조롱과 비웃음을 날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는 전자인 사람이다. 518 망월묘역을 보며 그 끔찍한 일들을 스스로 상기시켜 보고, 책을 읽으면서 가족과 친구를 잃은 그들의 분노와 절망에 마음이 심란했다. 올해 4월 시골에 시제(時祭)가 있기에 조상 대대로 살아오던 터전을 찾아갔다. 집안의 문중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문중 제각으로 가기 위해 강진군 칠량면 동백리 벽송마을을 찾아가면 입구 쪽에 작은 안내표지판이 있다. “합수 윤한봉 생가라고 말이다. 집안제각 근처 합수선생의 본가가 있다. 낡은 슬레이트지붕 한옥식 건물은 왠지 모르게 쓸쓸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시골에 있는 문중 사람들은 그에 대해 잊지 않은 모양이다. 그래도 그에 대한 오명과 조작은 여전하다. 합수(合水)라는 말은 물을 합한다는 의미이나, 물은 좋은 것만 오는 게 아니다. 똥오줌 같은 오물도 들어온다. 하지만 그게 없다면 논이나 밭에 천연비료를 줄 수 없으며, 심지어 맑은 시내에 살아가는 생물들의 영양분이 될 수 있다. 물의 힘이란 참 대단하다. 물의 기능을 말하자면 수소원자 2개에 산소 원자가 모여 결합하여 4기준 1L1이란 물리화학적 구조를 가진다. 윤한봉과 노무현은 다른 모습으로 살아갔으나, 그들에겐 물이란 공통적 성상을 가진 것 같다.

 

합수란 물이 모인 곳을 말한다면, 노무현은 강물은 바다를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고 했다. 물이 흘러 최종적으로 흘러 그 종착점은 바다이다. 똥오줌이 결국 비와 강물에 의해 씻기어 나가면 바다로 간다. 물은 생명의 고향이고, 인간에게 없어서 안 될 존재이다. 물이란 문화의 존재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물을 업신여기고 그들을 파괴했다. 그리고 물은 농부에게 소중한 존재이기도 했다. 윤한봉의 아버지는 공무원이었으나, 농민과 함께였으며, 노무현은 농부의 아들이었다. 농부가 농사지으면 무조건 잘 되란 법은 없다. 농부는 언제나 성실하고, 그 성실함에 보답하여 땅을 은총을 내린다.

 

신이 내리는 것은 기상의 이변일지 몰라도, 그 모든 것은 인간의 손에서 달려있다. 영화 <물의 기억>은 인간의 손에 변해가는 자연의 모습을 마치 한 폭의 생명처럼 보여준다. 환경업무를 하다보면 화포천이란 지방하천이 어떤 곳인지 대략 안다. 2008년 봉하마을에 노무현 대통령이 귀향할 때 그곳은 오염으로 심각한 몸살을 겪었다. 각종 폐기물이 하천변을 어지럽게 만들었고, 하천 바닥은 저질로 가득했다. 저질이 가득하면 물 안이 썩어가고, 결국 죽은 강물이 되고 만다.

 

그가 처음 와서 한 업적은 화포천 살리기이다. 화포천에 맑은 물이 되면 농사도 잘 되고, 생명들도 찾아오고, 세계적인 명소가 될 수 있을 것이라 말이다. 2017년 화포천 일원은 습지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던가? 정말 변했다. 봉하마을에 봉사활동가면서 농촌 봉하마을이 자연적으로 잘 관리되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가기 전부터 많은 이들이 그곳을 정리해갔다. 우리가 아는 봉하마을과 다르게 우리가 모르는 그곳이 있다. 동물과 식물이 살아가는 봉하마을을 말이다.

 

영화에서 부지런한 농부는 벼의 꽃을 볼 수 있다고 한다. 벼의 꽃은 단 1시간만 피고 진다. 그 벼는 우리에게 식량이 되고, 논 안의 생태계는 매우 다양한 공간으로 가득하다. 작은 물고기, 곤충, 잡초, 황새와 두꺼비, 이때까지 우리가 잃어버린 생명들이 다시 찾아온다. 나는 조금 놀란 것이 영상에서 긴꼬리투구새우가 발견된 점이다. 멸종위기 2급 야생생물인 이 저서성대형무척동물이 발견된 게 신기했다. 더욱 신기한 것은 멸종위기 1급 야생생물 수달이 나온 것이다. 수달을 직접 본 것은 진주시에 있는 수목원이었다. 수달이 좁은 욕조에서 이리저리 오고가는 모습을 보면서 수달이 귀엽다는 생각보단 가엽다는 생각만 들었다.

 

공작처럼 우아하게 천천히 걸어가는 새라면 모를까, 수달은 아기자기하게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게 훨씬 어울리기 때문이다. 화포천이 이런 생물이 찾아오고 황새가 날아온다. 내가 어릴 적만 해도 동네 뒷산에 가면 무당개구리가 천지였다. 플라나리아를 찾기도 했다. 산가 산책로를 돌면서 산딸기도 따서 먹기도 했다. 어느 순간 그런 자연은 사라지고, 아파트들이 즐비하게 올라섰다. <물의 기억>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후손에게 물려줄 것은 손자가 자연에서 뛰어놀고 할 수 있는 그런 공간이라 했다.

 

내가 어린 시절 내 집 뒷산이나 시골에 가면 자연과 함께 살아갔다. 그러나 지금은 뒷산은 사라지고, 시골에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영원히 찾을 수 없는 하늘로 가버렸다. 그리움만 사무치는 가슴 한편에 그저 머무는 것보다 우리가 그런 자리를 만들어가는 것이란 새로운 안식을 만드는 것이라 여겼다. 노무현 대통령이 가진 꿈은 사람 사는 세상이라 했다. 그곳엔 조금 먹고 사는 것도 어렵지 않고, 더러운 꼴도 안 보고, 하루 좀 신명나게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세상이다. 그런 세상을 만들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우리는 포기할 수 없다.

 

하지만 사람이 살아가려면 사람 사는 세상만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풀 한 포기라도 작은 물고기 한 마리도 소중하다. 그래서 물은 우리가 지켜야 할 존재이다. 물은 우리 모두를 비추는 거울이며, 우리 모두를 담아주는 요람이다. 그곳에 삶도 있고 죽음도 있다. 늘 같은 모습은 아니나, 그런다고 우리가 모르는 모습도 아니다. <물의 기억>은 정화되어가는 봉하마을과 화포천에 살아가는 모든 것들의 이야기이다. 그 이야기를 만든 것은 노무현이란 존재이다. 대통령 노무현도 시민 노무현도 아닌 그저 촌로 농부 노무현의 꿈이다.

 

모든 생명이 공존하고 생존하며 살아가는 아름다운 자연에 우리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인간성을 찾아갈 수 있다. 올해 4월 벽송마을에 갈 때 그곳 역시 논밭과 산자락을 가진 농촌마을이다. 벽송(碧松)이란 말처럼 푸른 소나무가 우리를 반겨준다. 아무 것도 없어 보이는 곳에 오히려 더 많은 것들이 존재한다. 우리는 이런 아름다움을 모른다. 아마 노무현 대통령처럼 그때 어린 시절을 보낸 이들은 가난과 배고픔에 서러워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서러움이 깃든 공간이 없어진다면 더욱 서러울 것이고, 그 공간이 영원히 사라지고, 후예들에게 남기지 못하면 더 서러울 것이다.

 

다행히 최근 웰빙 라이프가 유행이라 공기 좋고 물 좋은 산과 들, 강과 바다에 많은 인파가 북적인다. 하지만 아쉽게도 농촌의 공간은 잘 보이지 않은 건 어쩔 수 없나보다. 윤한봉의 고향에 푸소가 유행이다. 푸소는 'feeling-up, stress-off'의 약자 fu-so로 자연 속에 살아가면 인간 본연의 모습을 찾고, 모든 인간은 자연 앞에 평등하고 서로 공평한 존재로 살아갈 수 있다. 옆에 누군가 힘들면 같이 도울 수 있다. 서로 마음을 합치고 살아가는 그런 공간이 자연인 점이다. <물의 기억>에서 태양의 빛은 그 모든 생명에게 공평하게 간다고 했다. 태양의 하늘 아래 살아갈 수 없는 인간은 오죽할까? 자연의 섭리를 생각하면 나라는 존재가 태어나서 만일 거기에 따라 자연으로 돌아간다면 왠지 조금 더 두려울 것 같았다.

 

자연이란 존재, 물이란 존재는 그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봉하마을에 자원봉사를 할 때 봉하 들녘에 나가 잡초를 뽑았던 기억이 난다. 피를 뽑아내며 봉하마을의 그 모습을 만들어간 기억이 있다. 그때 왕우렁이 알이 생각난다. 벼의 줄기에 붙은 분홍색의 알들이 말이다. 그게 왕우렁이 알인지는 몰랐다. 단지 왕우렁이가 잡초를 먹고, 그 잡초를 먹은 후 배설물이 나오면 벼에게 필요한 영양분이 되는 것은 알았다.

 

왕우렁이가 알을 낳고, 왕우렁이 알에서 새끼들이 탄생할 때의 소리를 들었다. 소리는 분명 존재하나 우리는 들을 수 없는 소리이다. 그것이 들렸을 때 너무 신기했다. 우리 모두 살아가기 위해 몸부림을 친다. 하지만 그것조차 물의 기억이다. 농부가 조심스레 논두렁을 걸어가고, 벼를 심어가는 것도 물의 소리이다. 우리는 자연의 공간에서 숨을 쉬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물은 기억해 줄 것이다. 우리는 분명 오늘 이 순간 살아가고 있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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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26 22: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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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26 22:1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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