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815, 그 길고 어두운 절망의 시기에서 벗어 난지 이제 74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번 815 경축행사에서 광복회장과 대통령의 연설은 통일문제를 거론했다. 통일이 되기가 쉬운 일이 아니지만, 통일이란 단어가 힘들더라도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원래 우리는 국가와 민족이 하나였지만, 일제강점기와 이후 신탁통치 그리고 한국전쟁에 깊은 상처와 아픔을 남겼기 때문이다. 그 기나긴 아픔과 현실적 여건, 그리고 타국과 자국과의 득실문제로 외교, 정치, 경제, 군사적 갈등이 오고가는 현실이다.

 

어째든 행사가 마무리 되면서 초대된 귀빈들이 나오는 모습이 나왔다. 일제강점기시대 어린나이에 독립운동을 하시던 어느 할아버지가 보였고, 국무위원과 국회의원도 보였다. 그리고 종교단체 인사들도 보였다. 불교와 천주교, 원불교 같은 익숙한 종교단체 지도자가 보였다. 그런데 이때 어느 여성분이 종교지도자 대표로 나왔다. 이상한 도형이 겹쳐져 있는 의상을 입고 있던 분이었다. 그분은 대종교 현재 최고지도자 분이었고, 개천절 행사 아니면 제대로 눈에 보이지 않을 종교단체였다.

 

그런데 이 대종교란 종교단체가 왜 중요한가? 올해 봄에 영화 <사바하>에 사이비 교주 모습이 나왔는데, 이 사람의 그림이 사실 무단도용된 것도 모자라 왜곡까지 시켰다. 그 교주의 원본은 대종교 창시자 홍암 나철이란 분이다. 대종교 창시자도 그렇지만, 이 사람은 을사오적을 처단하기 위해 암살단가지 만든 독립투사이다. 우리가 아는 유명한 독립투사 중에 대종교와 밀접한 인물이 정말 많다. 김좌진, 홍범도, 이범석, 이회영 같은 무장투사부터 시작해 훈민정음을 한글로 재정립하여 만든 주시경, 역사에서 정인보와 신채호 역시 대종교 신자이다.

 

대한민국 스포츠의 영원한 영웅인 손기정 선수 역시 그렇다. 우리가 아는 많은 분들이 대종교를 믿은 분이나 우리는 잘 모른다. 대종교란 이름은 독립군의 그 자체였고, 민족의 문화와 영혼을 지킨 분이다. 종교적으로 들어가긴 다소 민족주의적인 성향이 강해지만, 그들이 남긴 업적은 이루어 말할 수 없다. 20198월에 개봉한 영화 <봉오동전투>에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봉오동전투>를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이른바 국뽕이란 말을 사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가 국뽕이란 말을 들어도 사람들이 많이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영화의 전후맥락을 어느 정도를 알면 정말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일제치하에서 우리민족의 경제를 지키고, 우리의 독립을 위해 자금을 만든 분들이 많다.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분은 백산 안희제이다. 임오교변 당시 서거한 인물로 대종교로서 순교자이며 민족과 역사에서는 순국자이다. 태평양전쟁 당시 민족 얼을 죽이기 위해 대종교 지도자를 무참히 고문하고 탄압했다. 조선어학회나 독립운동가 역시 많이 연루되어 어떻게든 말살의 대상이었던 분이다. 백산 안희제가 만든 백산상회는 독립운동가에게 필요한 자금의 전체 60%를 제공했다. 안희제와 그 주변 인물이 노력한 성과가 바로 독립운동의 젖줄이 된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의지대로 독립되지 않아 그들의 노고를 억지로 지우거나 저하평가하려는 자들이 많다. 스스로가 일어나서 스스로 걸어가는 게 우리의 길이고 의지이다. 다른 국가와는 협력과 타협으로 대해야지 그들의 노예로 살아가면 평생 우리 민족은 노예의 후예만 될 것이다. <봉오동전투>에서 일본군의 전략은 홍범도 휘하 독립군을 몰살하는 것과 동시에 독립군 자금을 수중에 넣는 것이다. 이때 독립운동자금은 어디서 왔을까? 조선에서 나온 것이고, 그것은 백산상회에서 대부분 나왔다. 영화는 그 자금의 출처는 말하지 않으나, 전후맥락으로 백산 안희제 선생의 노력이 있었다.

 

영화에서 단순히 독립운동부대만이 나왔으나, 홍범도 부대의 북로군정서가 등장했다. 이들 모두가 대종교들이고, 후에 청산리전투에서 승리한다. 영화의 전투장면과 추격 장면 그리고 국뽕적인 승리에 열광하기도 하고, 혹은 그저 그런 영화로 볼 수 있으나, 사실 그 전후맥락을 보면 단순히 여길 것은 아니다. 김좌진의 청산리전투는 군대에서 배우나, 홍범도의 봉오동전투는 제대로 배우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김좌진은 민족주의이고, 홍범도도 민족주의자이나, 당시 중국과 소련의 연합을 하던 시절이다.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난 러시아에서 레닌이 서기장으로 있을 적에 조금 분위기는 좋았다.

 

레닌은 스탈린처럼 일국사회주의가 아니라 혁명은 계속 이어져가야 한다고 여기고, 3국인 조선을 도우기 시작했다. 군자금 제공이나 군사적 협력은 바로 그런 연유이다. 홍범도가 가진 권총은 레닌이 직접 준 총이다. 볼셰비키혁명 지도자, 소비에트의 서기장인 레닌에게 총을 받은 것은 상징적인 일이다. 하지만 동시에 사회주의 세력과 연결된 것도 있다. 홍범도는 스탈린에 의해 강제 이주되나, 추후 제2차 세계대전 때 나치에 저항하다 결국 숨을 거둔다. 이에 반해 김좌진은 스탈린 집권이후 광복군 일원이 스탈린 휘하에 가기를 거부하자, 스탈린의 사주를 받은 자객에 의해 암살된다.

 

김좌진은 독립운동을 하다 일본군에 의해 죽은 게 아니라 같은 동포에 의해 죽은 것이다. 김좌진 장군의 업적은 위대하지만, 홍범도 장군의 업적이 절하될 까닭은 없다. 그래서 영화 <봉오동전투>는 매우 중요한 상징성이 있는 것이다. 단순히 지난 세월의 반공주의 이데올로기를 넘어 그 이상의 조선과 대한민국의 역사성을 담은 것이다.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된 지 이제 100주년이 된다. 국가는 영토와 구성원 그리고 정부가 필요하다. 그리고 근대적 국가는 국회, 정부, 사법부로 삼권분립을 말한다.

 

하지만 국가의 기본은 국민이다. 국민이 없다면, 그리고 국민의 토대가 되는 민족이 없다면 대한민국이란 국호는 의미가 없다. <봉오동전투>에서 일본군과 싸운 후 일본도나 벽면에 대한독립만세라고 적는다. 그 글을 적는 그들의 심정은 어떨까? 황해철은 동생을 눈앞에서 폭탄에 의해 산산조각 나는 것을 보고, 개똥이는 자신의 눈앞에서 부모님이 목이 잘리는 아픔을 겪는다. 마을소녀는 눈앞에서 어린동생이 총에 맞아 죽는 것을 본다. 이들을 보면서 독립군들은 대한독립운동이 단순히 이데올로기적인 요소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원한과 울분 그리고 복수심에 의해 움직인다.

 

민족주의적 국뽕이란 단어로 <봉오동전투>를 평가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이면에 가려진 원한은 과연 광기가 넘치는 민족주의로 볼 수 있는가? 나의 외할아버지는 천수가 뛰어나셔서 현재 100살이 넘어 201910월 탄생 100주기를 맞이한다. 외할아버지는 태평양전쟁 당시 징용에 끌려가서 모진 고생하고, 죽도록 맞았다고 한다. 그리고 여기 계속 있다가 죽을 것 같아 목숨을 걸고 탈출했다.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보면 일제가 자신들의 전쟁범죄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징용자들을 고의적으로 살해하던 기록이 나온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가혹한 노동과 영양실조로 많은 조선인들이 원한에 사라졌다.

 

친가 쪽에 큰할아버지는 징용에 끌려가서 해방을 맞은 그 다음해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나고, 작은할아버지도 징용 때 고생했는지 오래 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우리 할아버지는 몸이 좋지 않아 끌려가지 않았으나. 형제를 잃은 비극을 맞이했다. 요새 일본산 제품 불매에서 여기저기 말이 나오나, 솔직히 피해자의 후예로 본다면 불매가 맞을지도 모른다. 일본을 무조건 배척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나도 일본애니메이션을 즐겨보지만, 그런다고 인간의 기본도리를 져버리는 기업이라면 불매운동은 당연하다. <봉오동전투>에서 일제에 맞서 싸운 자들은 그냥 농사짓고 장사하던 사람이 대부분이다. 누가 그렇게 만들었는가?

 

독립군의 수는 정해지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의지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군은 잔인하게 민족을 탄압했다. 독립운동이 거세지면 조선인 부락을 습격하여 모조리 죽이고, 마을을 불태운다. 이들이 독립군의 비밀기지 또는 군자금 지원을 해주는 곳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은 한국전쟁과 민간인 집단학살에도 써먹던 방법이다. 토끼몰이 토벌작전은 육군사관학교의 전술과목으로 교육되고, 그 교육과정이 제법 재미있었다고 하는 말도 종종 인터넷에서 본다. 이길 수 없는 약한 상대를 궁지에 몰아넣고, 추격하여 사냥하는 방식은 사람이 사람으로 보는 게 아니라 그저 사냥대상물로 보는 비인간적 발상이다.

 

영화 <봉오동전투>는 그런 토끼몰이식으로 가족을 잃은 자들의 복수이다. 왜 독립군들의 얼굴이 분노와 증오로 일그러져 있는가?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는가? 영화 <봉오동전투>는 잊어진 과거의 우리 모습들이다. 외세에 의해 약소국으로 점령당한 것까지 참을 수 있으나, 우리가 그저 당하고 우리의 역사와 정신까지 점령당했다는 것에 용서할 수 없다. 과거 일본제국주의를 숭배하고 찬양하며 그때의 영광을 돌리려는 세력과 거기에 동조하는 무리는 용서할 수 없다. 그런다고 하여 일본 개인 한 사람에게 분노하지 않는다.

 

독립운동하는 분들은 일본군경과 대지주들을 암살해도 일반인까지 말려들게 하지 않았다. 그들은 배척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그들 역시 당시 군국주의에 자신의 자유를 속박당한 자 중에 하나였기 때문이다. 영화 <봉오동전투>에서 황해철은 자신이 잡은 어린 포로를 죽이기보다 직접 끌고 다니며, 그가 바라본 전쟁의 현실, 그리고 억압받는 민족의 분노와 슬픔을 그대로 기억하라고 했다. 일본제국군이 아니라 그저 일본인 한 개인으로 말이다. 처음에 독립군들에게 반항하던 포로였지만, 계속 있으면서 그도 역시 독립군의 의지에 동화된다. 이데올로기란 틀에서 벗어나 인간 대 인간으로 관찰하였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에 갇혀 자신의 존재마저 거기에 합리화하는 야스카와 부대장은 상당히 카리스마를 보여준다. 하지만 거기에 사로잡힌 그가 내 뱉는 말은 인간의 언어라기보단 악마의 언어에 가깝다. 사람의 가죽을 살아있는 채로 벗겨 내거나, 작전에 실패한 장교의 손가락을 망설임 없이 베거나, 어린 포로가 송환되어 그의 심중에 맘에 들지 않자 자살하라고 하는 방식은 그저 전쟁에 미친 미치광이에 불과하다. 피 맛을 본 인간은 또 다른 피를 원하므로 살육을 계속 자행한다. 이미 그가 나올 때부터 호랑이를 그대로 도륙 내는 모습이 나온다. 일제가 처음 조선에 들어와 한 만행 중에 하나가 호랑이 사냥이었다.

 

겉으로 맹수사냥을 통해 치안유지라고 하나, 사실 민족정기를 말살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우리 고유문화나 민담에 호랑이가 자주 나온다. 심지어 옛날이야기도 호랑이가 담배 피던 시절이라 말한다. 담바고로 불린 담배가 들어온 것은 조선 임진왜란 전후이니, 옛날이야기는 조선시대 이야기로 볼 수 있다. 한반도 지도가 토끼 아니면 호랑이로 묘사하고, 민간신앙에서 호랑이는 산신령의 전령으로 여기는 경우가 있다. 게다가 1988년 서울올림픽과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에서 호랑이와 곰이 마스코트로 등장했다.

 

그 이유는 단군신화에서 등장하던 동물이 곰과 호랑이였기 때문이다. 맹수사냥은 단순한 사냥놀이나 치안유지가 아니라 우리를 말살하려던 그들의 방법이었다. 영화 <봉오동역사>에서 등장한 북로군정서에 대해 대종교 신도가 대부분이고, 그 이후 청산리대첩을 승리로 이끈 장군과 독립군 역시 대종교들이다. 그들의 총과 총알은 동포에 의해 모아진 군자금이다. 그들이 활약하여 독립까지 이어지지 않았으나, 그들이 없었다면 광복 이후의 국가재건에서 민족적 정신을 반영할 수 없었을 것이다.

 

대한민국 교육기본법은 우리나라 교육의 토대가 되는 기본 법률이다. 교육기본법의 제2장 교육이념은 과거 폐지된 교육법1조의 내용을 상기해야 한다. ‘교육은 홍익인간의 이념아래 모든 국민으로 하여금 인격을 완성하고 자주적 생활능력과 공민으로서의 자질을 구유하게 하여 민주국가발전에 봉사하며 인류공영의 이념실현에 기여하게 함을 목적으로 한다.’ 이 문장은 194912월에 만들어진 법률이다. 홍익인간(弘益人間)이란 용어는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용어이다.

 

영화 <봉오동전투>가 이른바 국뽕영화라 해도 이 영화가 단순히 그렇게 봐서는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이런 연유이다. 그들이 이긴 일본군과의 전투가 아니라 민족적 의지이다. 민족주의에 함몰되면 파시스트가 되나, 민족주의를 자체를 부정하면 국가와 민족이 사라진다. 미국이란 국가는 다민족 국가지만, 그들은 원래 영국과 유럽에서 이주 온 사람이었고,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노예들의 후예들로 이루어져 있다. 지금은 다양하나, 미국의 시작은 그러했다. 그렇지 않으면 아직까지도 인종차별에 의한 갈등이 있을 이유가 없다.

 

우리가 이 영화를 보고 생각할 것은 단순히 역사적 사실을 기반 하여 적에게 물리적으로 이겼다는 사실만이 아니다. 그들이 무엇을 위해 총을 들고 칼을 휘두르며, 왜 목숨까지 던지면서 악착같이 견뎌낸 것을 알아야 한다. 나는 가끔 생각한다. 내가 대한민국에 태어나면 대한민국 국민이란 국가적 소속이지만, 민족은 조선의 후예라는 것을 말이다. 조선이란 국가는 문제가 많았지만, 그러나 그 조선이란 공간을 부정하면 나라는 존재조차 부정하게 되는 셈이다. 단순히 북한과의 문제만이 아니라 더 나아가 전 세계에 있는 해외교포의 정체성까지 이어진 부분이다. 강제이주와 독립운동으로 많은 분들이 타국에서 숨을 거두고, 그들의 후예는 국가는 달라도 아직까지 고려인이나 조선인이라고 말한다.

 

총과 칼로 싸우는 봉오동전투는 끝이 나도 타국에서 살아가는 교포가 자신의 정체성과 문화를 지키기 위한 노력 역시 전투이고, 현재 경제보복 전쟁으로 총성 없는 전쟁을 치루는 우리 현실도 또 다른 이름의 봉오동전투이다. 부조리한 현실에 타협할 것은 있을지 몰라도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우린 우리 스스로 굴복할 수 없다. 그것이 영화 <봉오동전투>에 담긴 진정한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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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24 11: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8-25 11:3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