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앞의 생 (특별판)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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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맹 가리 아니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을 읽는 순간 작가의 이름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본래 로맹 가리는 유명한 문학 작가이도 하고, 연극 각본가이도 하며, 또한 뛰어난 외교관으로 활동한 우수한 인물이었다. 게다가 2차 세계대전에서는 프랑스 공군대위로서 하늘을 길동무를 삼아 전장을 누비었다. 그런 인물이 왜 굳이 에밀 아자르라는 인물로 대중에게 얼굴을 비추었는가? 나는 그의 책은 잘 알지 못했고, 실제 로맹 가리라는 인물이 있었다는 것만은 알아도, 그의 작품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런데 우연히 로맹가리 아니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을 읽는 순간, 그는 로맹 가리라는 실존적인 인물이었으나, 적어도 이 책에서는 에밀 아자르라는 이름으로 나오려는 것은 분명했다.

 

로맹 가리라는 이름으로 어떤 식으로 글을 쓰고, 어떤 내용을 다루고, 그것으로 통해 무엇을 전달하는지에 대해 생각하면 지금으로도 알 수 없다. 단지 소개 편에서 그가 러시아에서 태어나 프랑스에 온 이주민이고, 이후 평생 프랑스의 시민으로서 살아간 점이다. 시민(市民)이란 이름은 서울특별시나 혹은 부산광역시 또는 성남시에 사는 시민인 citizen이기보단 이른바 peoples라는 시민이 어울릴 것이다. 그가 살아온 업적과 그 업적에서 보이는 그의 이야기가 말이다. 하지만 내가 로맹 가리보다는 에밀 아자르라는 이름에 시민이란 peoples이 어울리는 이유는 바로 <자기 앞의 생>이란 책이 그가 바로 시민이란 점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화려한 로맹 가리는 모르겠다. 단지 나는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에서 보인 그의 작품세계만 바라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면서 생각난 영화 한 편이 있었다. 프랑스 빅토르 위고 원작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 <레미제라블(Les Miserables)>이다. 그 영화에서 나오는 판틴이란 아름다운 여성이 떠올랐다. 물론 <자기 앞의 생>에서 판틴이 될 만한 여자가 나오지 않는다. 차라리 판틴 같은 여자가 죽은 후 그녀에게 남은 아이 같은 소년 1명이 나온다. 단지 그 소년은 안타깝게도 <레미제라블>의 장발장을 만나지 못했을 뿐이다. 따라서 이 책은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에서 낭만주의 요소를 제외하여 진행한 작품인 것 같았다.

 

낭만주의 문학에서 벗어나 보이는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고 있는 사실주의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까? <자기 앞의 생>에서 보인 작품은 정말 아름다운 이야기보다는 차라리 혐오스럽고 지저분하고 비천하고 한탄스러운 사연들만 쏟아져 나온다. 문학이 왜 예술로서 인정받는 것인가? 프랑스에서 9가지 예술 중에 해당하기 때문에? 아니면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예술을 사랑하는 아름다운 여신 muse의 9자매에 해당되기에? 혹은 그 이상이라도 있는 것만은 아닌가? 삶이란 것은 언제나 우리에게 기만과 속임수를 강요한다. 눈앞의 현실을 항상 다른 것으로 대체하여 회피하려 하기 때문이다.

 

<자기 앞의 생>에서 보인 인간의 삶은 10살로 알았던 모하메드 아니 모모라는 소년이 알고 보니 14살이란 깨닫는 아이러니한 현실에서 우리는 우리가 항상 피해온 이야기 내지 또는 알고 싶지 않거나 우리와 상관없는 이야기를 마주하고 있다. 인간에게 전해주는 불편한 기분과 마음속에서 움트는 어두운 기분이어야말로 우리에게 항상 새로운 것을 알게 해준다. 원래 있던 것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평범하지 못한 삶을 살아가는 <자기 앞의 생>의 등장인물들은 그 사람들 나름대로 분명 평범한 생활을 하고 있다. 그런 만큼 우리는 이 소설에서 전해주는 이야기 자체가 평범하지 않은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을 보여주기에 우리의 평범한 인간들의 평범한 가치관으로서 도저히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자기 앞의 생>에서 보여준 작품세계에서 작가인 로맹 가리, 아니 에밀 아자르는 불평등한 세계와 부조리한 사회, 그리고 그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계속 그 공간속에서 살아가면서 보여주는 일상적인 부조리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던져준다. 세상은 언제나 아름다운 것들로 채워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우리는 우리의 눈을 현실을 보지 않고 있다. 우리는 항상 화려한 영상만이 나오는 스펙타클의 사회의 열렬한 소외된 군중이기 때문이다. 왜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인가? 내가 왜 에밀 아자르가 시민 peoples로서 보려는 것인가? 그것은 바로 자신이 러시아 출신이면서도 프랑스 시민이지만, 프랑스 시민으로서 살아갈 수 없는 이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이 시작되는 배경은 1970년 전후의 프랑스다. 프랑스의 지리를 잘은 모르나 정상적인 사람들이 살기보단 범죄자, 불법이민자, 마약중독자, 위조된 신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이 소설 주인공 모모는 바로 그런 부조리하고 불평등한 세계에 살아가는 소년이다. 그의 출생은 모른다. 단지 그가 이슬람교의 교인으로 살아있다는 것이고, 그의 출생민족처럼 그는 이슬람교의 문화를 다행히 익히고 있었다. 눈이 아주 나쁘나 아마 이슬람민족의 국가에 가면 성인이 될 수 있다는 하밀 할아버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밀 할아버지는 분명 이슬람문화를 알고 있는 사람이지만, 그는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을 즐겨 읽었으며, 게다가 건강이 너무 좋지 못할 때 모모를 두고 빅토르라고 말할 정도였다.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는 1789년 7월 프랑스대혁명이 1794년 로베스피에르의 테르미도르 반동에 의한 실각, 이후 1799년 나폴레옹의 브뤼메르 18일로 인해 다시 민주주의국가에서 왕정국가로 돌아갔다. 그러면서 장발장이 살던 세계는 온갖 가난과 질병 그리고 비참함으로 들끓는 세상이 되었다. 비참한 사람들이란 <레미제라블>, 그러나 우리가 그 비참함을 다시금 생각해야 할 점은 비참함은 자신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계속 이어져서 자신의 아이들까지 이어지고, 또 그 아이들은 자신의 먼 미래의 아이들까지 이어진다.

 

작가 이름이 에밀 아자르라는 점에서 그가 왜 에밀이란 이름을 사용했을까? Emile이란 이름은 장 자크 루소가 1762년 만든 아동교육철학도서 <Emile>과 같은 철자다. 정말 로맹 가리가 그런 것을 생각하여 이름을 지었고, <자기 앞의 생>에서 빅토르 위고의 책을 생각했다면 그는 분명 인간의 불평등한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자기 앞의 생>은 분명 가상의 인물이기도 하겠지만, 실제 있었던 사건들과 사람들을 토대로 만든 소설일 것이다. 이슬람문화권인 모모로 통해 이런저런 프랑스의 역사적 사실을 말해주는 부분에서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그것은 프랑스가 식민지로 지배하던 알제리란 국가가 나오면서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에서도 뫼르소가 살인사건을 저지른 배경조차 알제리 해변이었다. 알제리는 프랑스에 식민지로 속해 있었지만, 한편으로 독립을 위해 프랑스와 갈등을 빚은 바가 있었다. 프랑스 대표적인 지식인이던 장 폴 사르트르는 알제리가 자신의 국가를 위해 독립전쟁을 벌인 것에 대해 프랑스인(그는 나치가 프랑스를 지배할 때 레지스탕스로 활동했다)이었으나, 알제리의 독립을 지지했다. 로맹 가리가 진실로 알제리의 독립을 지지한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나, 적어도 주인공 모모가 이슬람문화권 사람인 점에서 알제리 사람일 것이며, 혹은 알제리든 유태인이든 세네갈이든 많은 외부사람들에 <자기 앞의 생>에 다룬 것처럼 적어도 프랑스 내의 인종차별 내지 또는 부조리한 현실을 보여주려 한 것은 분명하다.

 

나치 수용소에 갇히어 평생 히틀러의 초상을 침대 아래 숨겨놓고, 자신이 나약해질 때마다 히틀러의 얼굴을 보는 로자 아주머니를 보면서 왜 그들이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는 것인지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일단 에밀 아자르의 <Emile>이니, <에밀> 혹은 루소의 많은 사상중에 <사회계약론>에서 이런 말이 나온다. "그 누구도 타인을 돈으로 살 수 있을 만큼 부유해서는 안 되고, 그 누구도 자신을 팔 수 있을 만큼 가난해서도 안 된다."

 

왠지 내가 적어 놓고도 무안해지고 조금 가슴 아픈 말이다. 루소는 식량이 가격이 저렴한 이유는 인간에게 가장 필요하기 때문이고, 이 세상에서 가장 가격이 저렴한 것은 도시의 사람들이란 점이다. 인간만큼 가장 필요한 존재가 없기에 그들은 언제나 비참한 인간이 되어야만 했다. <자기 앞의 생>에서는 루소의 가르침이 그대로 드러나는 책이라고 생각되는 이유는 모모의 어머니는 정상적인 직업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고, 그녀는 자신의 몸을 파는 창녀였던 것이다. 창녀들의 역사를 보면 고대사회로부터 시작했다.

 

하지만 적어도 고대사회에서 여성은 자연과 같이 보았기에 그녀의 다산성을 존중하고, 제임스 프레이저의 <황금가지>를 보면 북유럽 고대부족 중에 신을 모시는 사당에 일하는 무녀들은 사실 창녀라는 점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몸을 팔아 신에 대한 조공을 받쳤으며, 부족국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다는 점이다. 한국에서 성(性)이란 단어를 성(聖)이란 말로 장난 칠 수 있다. 아마 창녀에 대한 문화적 차이가 발생한 것은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 넘어간 것에 대한 것이라고 보인다. 왜냐하면 수렵을 하던 시기에 식량이 충분하므로 여자들도 몇몇 무리지어 충분히 삶이 가능했다. 풍부한 식량과 자원에서 한정된 식량과 농경사회를 근간으로 하는 도시국가체계는 전쟁이란 필요적인 문명을 만들었다.

 

따라서 과거 성생활은 단순히 인류생명의 연장이라면 현대로 오게 되면서 노동력을 위한 재생산, 그리고 노동력이 목적이 아니라면 쾌락을 위한 목적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문제는 성행위 후 임신될 경우다. 남자는 한 번 사정하면 끝이지만, 여자는 상황이 다르게 된다. 아이를 가지게 되고, 지금과 같이 피임기술 내지 낙태기술이 발달한 것이 아니다. 아이를 낳게 되면 버리거나 혹은 자신이 키워야 한다. 문제는 그대로 빈민구제소나 고아원에 위탁하는 어머니도 많지만, 이에 다르게 아이와 다시 만나 자신만의 인생을 살기 바라는 여자들도 있었다.

 

모모의 어머니는 이미 죽었지만, 모모 주변에 있는 아이들은 어머니가 계속 창녀일을 하면서 돈을 보내오고, 그 돈으로 로자 아주머니는 보육한다. 모모가 사는 동네 경찰서장의 어머니도 그런 인물이었고, 경찰서장은 로자 아주머니로부터 자라났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법의 체계를 수호하는 사람이 알고 보니 법의 체계로부터 벗어난 사람에게 은혜를 받았고, 이제는 그 은혜를 생각하여 로자의 행위를 눈감아준다. 불법체류자에 위조증명서, 게다가 창녀들은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여자로 국법에 정해져있다. 하지만 어머니들은 아이를 위해 살아가고, 그들과 같이 생활할 수 있는 미래를 꿈꾼다.

 

인간에게 주어진 꿈과 미래란 과연 지금의 고통과 현실조차 감내할 수 있는 희망의 메시지인가? 아무튼 그녀들이 보여주는 모성애에 마음이 참 안타깝게 느꼈다. 지금은 물론 다르겠지만, 당시 인간들에게 자신이 수익으로 할 수 있는 직업이 매우 한정적이고, 그러나 딱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인간의 비참함에서 경제적 빈곤은 계속 이어져 간다. 굳이 마르크스의 <자본>을 들이대지 않아도, 그것은 알 수 있다. 자유주의 철학에서도 경제적 성공은 학력이 필요한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런 알 수 없는 희망이 없는 사람들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모모는 어머니가 죽은 것을 알았고, 아버지조차도 발작 증세를 가진 범죄자였다. 그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그나마 자신을 돈 때문에 맡았지만, 이제는 오직 자신의 가족으로 여기던 로자 아주머니만 남았다. 로자의 모습에서 많은 것을 생각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안락사라는 제도를 찬성한다.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게 해주는 것이 오히려 인간으로서 그가 살아가는 마지막을 주는 선물이라 생각한다. 복잡한 병동에서 고통스러운 매일매일 하루를 맞이하는 것도 모자라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산송장처럼 살아있는 것은 가혹한 처사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로자는 불법체류자고 위조된 증명서를 가지기에 병원에 가는 순간 모모는 바로 빈민구제원에 들어가야 한다.

 

프랑스의 빈민구제원이 어떤 공포의 대상인지 모르지만, 모모는 거기만큼은 가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로자를 하루 빨리 생을 마감하는 게 로자를 위한 것이라 보았다. 살아있을 희망도 없이 고통스럽게 약물에 의존하는 것은 비참한 일이다. 만약 병동에 누워있는 사람이 사회적으로 모든 것을 보장해준다면 어느 정도 고려할 수 있으나, 적어도 내가 살아있는 사회에서는 환자 본인이나 가족들에게 큰 고통과 상처다. 가족 하나가 불치병이나 심한 중상에 빠지면 그 가족은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큰 부담을 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레미제라블>이 될 수밖에 없다. 이 책을 보면 모모의 행동이 그래 옳은 것만이 아님은 볼 수 있다. 길가에 물건을 훔치거나 로자 아주머니에게 마약을 놓게 하는 생각을 하거나 또는 뚜쟁이가 될 수 있다는 말을 하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이런 말과 행동을 하는 모모는 그렇게 되고 싶어 된 게 아니라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이 작품에서 그런 비행청소년인 모모가 오히려 다른 인간보다 더 인간처럼 나온다. 죽어가는 로자 아주머니를 지하실에 모셔두고, 죽을 때까지 아니 시체가 부패할 때까지 옆에 있었다. 자신에게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지만 그래도 로자 아주머니가 있었다는 식으로 말이다.

 

인간은 외로운 존재다. 언제나 자신의 고독을 두려워하고, 그 고독을 도망치기 위해 발버둥을 친다. 그래도 고독한 존재는 인간일 수밖에 없다. 그런 만큼 <자기 앞의 생>에서 모모가 예전에 하밀 할아버지가 해준 말을 회상하는 게 인상적이다. “사람은 사랑할 사람 없이는 살 수 없다.” 인간은 정말 혼자서는 살아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모모는 자신의 태생과 자라온 환경, 그리고 주변사람들이 받고 있는 부조리 속에 사회적 가치가 부정적이었다. 하지만 마지막에 “나딘 아줌마는 내게 세상을 거꾸로 돌릴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무척 흥미로운 일이다. 나는 온 마음을 다해 그렇데 되기를 바란다.”라고 말한다.

 

성우로 일하는 라딘은 재생된 화면에 목소리를 더빙한다. 그리고 그 더빙된 화면은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시간이란 비가역적 존재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모는 거꾸로 가는 세상, 즉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점이고,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기를 자신은 바란다. 마지막에 아르퇴르를 좋아할 사람은 없기에 모모는 그것을 걱정해야 하나, 그 아르퇴르를 사랑해야 한다고 말한다. 아르퇴르는 모모가 우산으로 만든 인형으로 우스꽝스러운 모양은 하고 있다. 하지만 그 모습은 모모 자신 그 모습이며, 자신의 우스꽝스러우면서도 부자연스럽고 또한 슬픈 모습(이슬람문화에 따라 얼굴모양을 만들지 않은 것)이다. 자신의 그런 모습이라도 사랑해야 한다. 그래야 남도 사랑해야 한다.

 

어느 애니메이션에 이런 말이 나온다. “타인에게 사랑받지 못한 인간은 남을 사랑할 수 없다.”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타인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결국 나부터 사랑해야 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내 자신이 이기심이 있다고 여긴다. 물론 자기애라는 것은 단순히 생명을 위한 동물적 본능의 자기애로서 이기심일 것이다. 그렇지만 나라는 사람에 대해 내 자신은 그렇게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상당히 세상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다소 냉소주의적인 인간형이다. 그럼에도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는가라고 물어보면, Yes라고 할 수는 있다. 그렇지 않으면 내 이성이 버티지 못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자기 앞의 생>이란 결국 사랑하는 사람, 즉 사랑이란 남녀 간의 사랑, 가족 간의 사랑, 친구 간의 사랑처럼 인간이 행복을 가질 수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적어도 이 작품에서 그런 주제를 던지면서도 계속 불평등하고 부조리한 사회를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유태인이든 이슬람인이든 관계없다는 식으로 말하는 모모가 나온다. 실제 이슬람문화와 유태인문화는 충돌이 일어나고 있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단지 이 자리에서 서로를 위해 같이 웃거나 울거나 또는 짜증낼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도 이 책에서는 모모의 주변사람처럼 부조리한 삶을 살아가는 인생을 보여줌으로 시대적인 상황을 보여준다. 가난과 질병 그리고 비참한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이들로부터 소설이 시작했으니 말이다.

 

마지막으로 덧붙인다면 이 작품 번역가는 좋은 대학교와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것은 분명하나, 그분이 적은 후기에는 단지 비참한 삶을 사는 모모가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고, 인생의 이야기를 하밀 할아버지의 말을 빌려 사용한다. 그러나 나는 이 작품에 대해 단순히 모모의 모습, 로자의 아우슈비츠수용소에 갇힌 창녀만 보는 것은 아니었다. 좀 더 생각하면 왜 이들이 그렇게 되었을까 라는 점이다. 처음부터 창녀는 창녀가 아니었고, 어느 청춘의 여성이 창녀로 되어만 했다. 단순히 자기 허황된 욕심이라면 몰라도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레미자라블>의 판틴 같은 사람에 대해 생각해볼 점이다. 그녀들이 계속 모모와 모모 친구들을 만들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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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가 마왕을 무찌를 때 우리들도 있었다 3 - Seed Novel
맑은날오후 지음, 토브 그림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14년 8월
평점 :
절판




<용사가 마왕을 무찌를 때 우리들도 있었다> 3권을 읽으면서 다시 한 번 이전에 나온 1권과 2권을 읽어보았다. 재차 읽으면서 그동안 론이 자신의 신분을 숨긴 것과 동시에 마왕의 진실, 그리고 론의 무의식적으로 각인된 데우스 엑스 마키나(기계장치의 신)의 시간조작이 보인다. 외전에서 린의 모험에서도 등장한 텐드 역시 론과 같이 노란 머리카락을 가진 어린 소녀를 만난 것이 나온다. 결국 복선의 연장은 단순히 론에 의해서만 보여준 게 아니라 텐드도 역시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손길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전개 속에서 론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가는 단지 자신의 할아버지 48대 용사와 황제의 숨은 공작에 있을 것이다.


공작에는 노엘 인피니피 황비, 론의 동생인 시즈도 역시 끼여 있다. 내가 판단할 수 있는 것은 그 숨은 계획이 세계를 파멸을 이끌어가는 것이고, 그 원인은 알 수 없겠지만, 이종족의 몰락과 매우 긴밀하다는 점이다. 왜 황제와 군대는 붉은여우귀 종족을 몰살하였을까? 그것은 론의 정신을 어지럽게 만드는 것을 사전에 배제하기 위해서인가? 아니라면 공동의 적인 이종족을 몰살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것인가? 인피니티 제국은 모든 대륙에서 최고 강한 제국이고, 용사도 그렇지만, 황제 그리고 황제의 수호대는 사실상 마왕군과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다.


그렇다면 무슨 계획을 세웠기에 론에게 봉인이 붙어 있는가? 전에도 리뷰하면서 생각했지만, 황제와 용사는 바로 신이란 존재 그 자체를 없애고 새로운 신을 만들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물론 나의 추론이기도 하나, 적어도 악령과 언데드들이 득실대는 던전에서 론은 이상한 석상을 발견한다. 신이 인간에게 검을 하사하는데, 그 검이 할아버지에게 받은 검과 매우 똑같은 모습이고, 할아버지는 신이 다룰 수 있는 검을 모두 다룰 수 있는 존재다. 할아버지의 능력은 인간으로서 도저히 능가할 수 없는 신의 영역까지 올라간 존재다. 그런 상태에서 론의 할아버지는 아주 오래된 유물에서 발견한 여인을 론의 아버지와 결혼하게 한다.

유전부터 론은 다른 인간과 다르다는 것은 그가 노엘 인피니티가 봉인한 힘 일부를 해제할 때 악마가 말한 장면이 중요하다. 악마는 론에게 소멸하기 전에 이런 말을 한다. “크크으...이 힘. 그 검은 머리와 눈.... 설마 네놈의 정체는... 웃기는 일이군, 나와 너 중 누가 더 악마란 거냐...” 결국 론의 비밀은 어머니 고대유물에서 발견된 불가사의한 존재란 점이고, 그녀는 유물에 발견된 것처럼 봉인되어 있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결국 흔히 우리가 부를 수 있는 명칭이라면 판도라의 상자라고 보면 될까? 악마보다 더 악마 같은 힘을 가졌다는 것은 론이 이미 태생부터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고, 게다가 론은 인간의 마음조차 버리도록 키워진 것이다.


산적, 현상수배범, 역적과 같이 처벌대상자라도 해도 인간인 그들을 론은 6살부터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목을 베었다. 즉 같은 인간이라도 용서가 필요 없고, 인간을 죽이는 것이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수라의 마음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런 마음을 가졌기에, 론은 할아버지로부터 대를 위해서 소를 희생하는 가르침을 받은 것이다. 대를 위하여 소를 희생하는 것은 결국 전체주의적 발상이다. 론은 할아버지가 제시한 목적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수단과 방법이라도 가리지 않게 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론의 과거, 즉 예전 세계에서 그는 이종족들을 무참하게 죽이는 것부터 모든 비극이 시작된 것이라 여긴 것이다.


신이 거의 소멸하지만, 마지막 론의 소원을 들어줄 수 있는 상황, 결국 론은 인간이 인간으로서 해서 안 될 행위를 한 것이다. 구체적인 것은 작가가 복선과 숨은 시나리오로서 남겨 두었지만, 적어도 론의 행위는 인륜 내지 천륜을 어길 수 있는 것은 3권에서 은근히 내비추었다. 그것은 론의 동생인 시즈의 행동이 다소 지나친 점이다. 시즈는 린과의 전투에 기억을 잃은 론에게 충격요법이라 하여 키스하려고 한다. 제 아무리 오빠와 여동생이 친해도 볼이나 이마 정도 키스도 솔직히 부담스러울 것인데, 론의 입술을 향하여 돌진 한 것이다. 시즈는 린과 티나 그리고 루리를 보면 자신의 오빠는 오직 자신의 것이고, 그 누구도 다가갈 수 없다는 집착을 보인다.


게다가 자신은 할아버지가 말한 계획의 대의를 위해 충분히 그릇이 될 각오는 되어 있다고 한다. 그것도 추후의 일을 위해서 말이다. 할아버지가 말하는 어느 계획과 그리고 시즈가 보이는 과도한 브라더콤플렉스는 근친상간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여동생이 필요 이상으로 남자형제에게 스킨십과 그 형제의 주변 여자들에게 과도한 질투와 경고를 보내는 것을 본다면 결국 시즈의 근친상간의 욕망이 인피니티를 비롯한 세계를 멸망으로 도래하게 할 수 있는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근친상간의 욕망은 오이디푸스의 이야기처럼 그는 어머니와 부부가 되어 자신의 형제요 남매인 딸과 아들을 각각 2명씩 얻었다.


그 죄목으로 테베는 신의 노여움으로 질병이 휩쓸고 사람들은 고통에 빠졌다. 인륜을 져버린 인간의 비극적 종말은 모든 것을 파멸에 이르게 만들었다. 론이 할아버지에 의해 강제로 인륜을 져버린 행동을 했으니 그의 마지막은 후회와 원한만 남을 뿐이다. 그런 상태에서 리셋이 되어 황제의 용사가 아니라 마왕의 간부가 되었다. 이전 세계에서 린과는 용사일행이지만 이제는 린이 용사가 되었다. 언젠가는 자신의 정체가 탄로 나는 것은 시간적 문제일 것이다. 그런 시간적 문제에서 작가는 어떻게 하면 론의 정체가 드러나고, 루리가 마왕이란 사실을 용사일행에게 알려지게 되는 것에 대해 디오니소스적인 방법을 택했다.


디오니소스라는 신은 제우스와 인간인 세멜레 사이에서 태어난 반인반신이다. 포도주의 신으로서 인간은 술을 마시면 기분이 좋아지거나 난폭해져서 인간 그 본래의 모습이 드러난다고 한다. 물론 론이 난폭해진 게 아니지만, 술로 인해 자신의 정체를 숨길 수 없게 되었으며, 결국에 린에 의해 밝혀진다. 술을 마시면 강한 인간이라도 불가항력적으로 자신의 통제성을 잃게 되므로 론의 본 모습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왜 시즈가 린에 대해 경계성을 가질 수밖에 없는가이다. 용사 린은 가슴의 압박에 의해 단추가 날아가고, 단추총알에 맞았던 스팅은 기절을 하고 만다.


린의 가슴이 엄청 큰 것과 미녀, 그리고 좋은 가문이란 점에서 시즈에게 상당히 거슬리는 존재다. 용사라는 직책에서 사회적 지위와 더불어 강력한 힘까지 겸비한다. 하지만 이것만은 아닐 것이다. 론이 술에 취해 방 안에서 정신이 없을 때, 린의 품에 안기게 된다. 그때 론은 린에게 어머니라고 한다. 린이 자신이 어머니가 아니라고 말하지만, 그래도 론은 어머니 알겠어요. 라고 한다. 단순히 린이 몸매만이 아니라 뭔가 론에게 조금 그리운 느낌을 들게 해주는 뭔가가 있다는 점이다. 어머니를 닮은 점에서 론은 린에게 매력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단지 루리의 등장으로 론의 제일 우선하게 되는 것은 루리였으므로 린은 루리의 뒷전이 되어야 했다.


하지만 그나마 시즈가 등장하기 전까지 충분히 마음 편하게 론을 대할 수 있겠지만, 시즈의 등장은 가시 돋친 날카로운 장미가시처럼 론 주변에 날카로운 가시가 둘러싸인 장미나무 숲처럼 되었다. 그런 상태에서 린은 론이 이때까지 있었던 일을 알게 되면서 시즈를 같이 모험에 동행하게 된 셈이다. 시즈의 등장은 린과의 충돌으로 계속 이어지고, 처음에는 무력충돌이 나중에 여자들의 싸움으로 변했다. 어떻게 보면 시즈의 등장은 <용사가 마왕을 무찌를 때 우리들도 있었다>에서 모험적인 요소로서 몬스터와 싸움, 악령과 싸움, 추후에 있을지 모르는 황제와 왕국 혹은 신과의 대결이란 거대한 서사에서 론 일행 사이에 항상 끊이지 않을 티격태격한 요소를 부여한 셈이다.


작품 내에서 개그요소를 부여하더라도 결국 모험물이고, 용사와 마왕이 등장하기에 진부한 개그를 넣기에는 한계성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론 주변에 시즈가 등장하는 것은 질투의 화신이 강림하기에 충분히 개그를 넘어 왠지 생동감 넘치는 개그를 부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지독한 브라더콤플렉스 여동생과 지독한 프라이드를 가진 부잣집 딸의 만남은 도저히 피해갈 수 없는 신경전이 펼쳐질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주변에 있는 루리와 스팅, 티나의 모습은 또 다른 요소로 등장할 것이다.


이번 편에서 조금 인상적인 모습은 무력으로 제압된 세계라면 그 이상의 것은 무엇인가라는 점이다. 결국 그 진실의 결과는 귀여움이었다. 용사는 자신이 좋아하던 팀의 언니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도 역시 그 언니처럼 귀여움에 대한 열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린 린을 무척이나 귀여워해주던 쉐어, 그리고 루리의 볼이 닳을 정도로 비벼대는 린, 심지어 린이 루리에게 천사 고리와 날개를 달아주자 루리는 이에 신나 엉성한 춤을 춘다. 그 모습을 본 용사인 린은 자신이 마왕의 최고의 적이면서도 어린 마왕에게 무릎을 꿇는다.


인간에게 먹고 살아가는 것, 즉 의식주를 해결하는 순간 문화생활을 추구하게 된다. 문화라는 것은 인생을 즐기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즐거움을 느끼기 위해 린이 선택한 귀여움에 대한 열의는 루리로서 그 성과를 맺은 셈이다. 게다가 장수족은 인간의 수명에 비해 거의 10배에 가깝다. 용사가 나이가 들어 수명이 다 되어 죽을 때도 루리는 아직 그 모습에서 크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8세 소녀가 대략 12세 소녀로 될 정도로 말이다.


마지막으로 이 작품에서 황제는 매우 강력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루리가 용사와 더불어 황제의 성으로 가서 황제를 알현한 기회가 있었는데, 황제는 루리가 처음 보자말자 마왕군에 가담한 장수족의 아이라는 것을 알아본 점이다. 그런데도 황제는 마왕군 무리 중에 하나인 루리를 보면서도 아무런 조치나 행동조차 하지 않았다. 이미 마왕군이 매우 약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거나 혹은 루리가 아주 어린 소녀이기에 그런 작은 아이에게 억지로 신경쓸 것도 없다는 식으로 행동했다. 황제는 론의 할아버지 48대 용사와 더불어 공모한 것이 더 중요했을 것이다. 루리가 이종족이란 사실보다 루리가 론의 기억상실에 무슨 짓을 했는지가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용사가 마왕을 무찌를 때 우리들도 있었다> 4권부터는 론의 기억상실과 더불어 원래 목적을 가진 황제와 48대 용사의 계획에 대한 수정조치 내지 손길이 시작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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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이디푸스왕 이야기

오이디푸스의 이야기는 엄청 유명한 이야기고, 인간의 근본과 더불어 정신분석에서 자주 거론되는 왕이다. 그는 테베의 왕인 라이오스의 아들이며, 또한 그의 아내인 이오카스테의 아들이다. 매우 아름다운 이오카스테에서 태어난 오이디푸스는 신탁에 의하면 아버지를 죽이고, 자신의 어머니와 결혼한다는 결과를 받았다. 이런 결과에 의해 아버지는 오이디푸스를 죽이기로 결심하고 신하에게 명령하나, 차마 어린 아이를 죽일 수 없었던지 오이디푸스는 숲 속에 내버려지고, 그 때 우연히 발견한 사람이 이웃 국가의 왕에게 오이디푸스를 건네준다. 당시 이웃집 왕과 왕비는 자녀가 없었기에 오이디푸스를 양자로 삼고 키워주나, 다시 그 부부조차도 신탁에 의하면 오이디푸스의 운명을 알게 되었고, 오이디푸스는 자신을 길러준 이웃 국가의 왕과 왕비를 위해 여행을 떠난다.

 

길을 떠나며 오이디푸스는 건장한 청년이었기에 혈기를 멈출 수 없었다. 우연히 길을 가다가 어떤 행인과 실랑이를 벌이다가 그 행인과 그 행인 옆에 있던 경호원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큰 죄이나, 실랑이를 벌일 때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죽을 수 있다는 위기에 행인 일행은 죽였다. 그런 일이 있으면서 오이디푸스는 계속 여행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테베 쪽으로 가면서 소문을 들었는데, 테베 길가에 스핑크스라는 괴물이 등장하여 행인의 이동을 막고, 만약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지 못할 경우 지나가는 행인은 스핑크스의 뱃속으로 들어간다고 했다.

 

이런 문제로 인해 테베에서는 스핑크스를 처리해주는 사람에겐 테베의 왕이 되는 영광과 더불어 테베 최고의 미인인 이오카스테와 결혼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었다. 당시 왕은 테베에 존재하지 않았으며, 왕이 죽은 후 왕비가 혼자인 점에서 국가가 정상적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왕의 자리가 누군가 맡겨줘야 했다.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에게 찾아가 수수께끼 문제를 해결했으며, 스핑크스는 그대로 자살하고 만다.

 

2. <잔향의 테러>에서 스핑크스와 오이디푸스

<잔향의 테러>에서 숫자 9와 12는 본(VON)이라 하는 계획을 시행한다. 그들이 시행하면서 이상한 가면을 쓰면서 9는 스핑크스 1호, 12호는 스핑크스 2호라고 한다. 하지만 오이디푸스왕의 이야기에 스핑크스는 1마리로 등장하며, 실제 스핑크스는 9이다. 그가 수수께끼 문제를 내고, 거기에 대한 폭탄제조와 전반적인 작전을 지시하고 준비하기 때문이다. 12는 9의 친구로서 같이 연구소에서 자라난 사람으로 9의 옆을 보조해준다. 그들이 스핑크스로 되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오이디푸스는 단순히 스핑크스를 죽이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그저 인간으로서 태어난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란 존재는 자연적인 존재이나, 태어난 순간부터 사회에 귀속되어 억압받는 것 자체가 사회적 인간이 된다. 특히 인간은 사회성을 유지하기 위해 언어를 사용하며, 언어는 사회적인 단어로서 윤리와 도덕의식까지 반영된다. 즉 인간이 언어로서 사회성을 가지는 것은 그 사회의 일원으로서 지켜야 할 법이나 제도를 지켜야 하며, 이것은 곧 하나의 권력이 된다.

 

여기에 그 권력으로 인한 피해자 혹은 다시 스핑크스에 의해 소환된 사람이 있으니, 그는 바로 시바자키 형사다. 유능한 형사이고, 경찰청 내 간부와 상당히 친분이 있는 시바자키 형사는 본래라면 출세의 가도를 달릴 수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이상하게도 경찰청 내 상당히 외진 부서인 문서보관실에서 담배나 피고, 신문이나 읽는다. 머리카락과 수염을 보면 깔끔한 인상보단 마치 격리되어 유배 온 사람처럼 무력해 보인다. 그의 전력은 과거 어느 비리사건을 쫓다가 일본 내 국회의원 중 큰 권력을 가진 마미야 의원의 뒤를 쫓다가 그렇게 좌천된 인물이다.

 

그래서 스핑크스가 시바자키를 두고 오이디푸스라고 하는 이유는 크게 2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말 그대로 오이디푸스왕 이야기에서 스핑크스를 물리친 사람이 실제 오이디푸스라는 점이고, 다른 식으로 본다면 시바자키 형사는 실제 오이디푸스처럼 거세당한 자이기 때문이다. 오이디푸스왕의 이야기에서 오이디푸스는 한 쪽 다리를 제대로 걷지 못한다. 아기이던 자신을 도망치지 못하게 발목을 고의로 상처 낸 것이다. 그래서 오이디푸스라는 단어적 의미는 다리가 부은 사람이란 것도 있다. 다리가 부은 것은 이미 한 번 자신이 거세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신체적 구조에서 결함이 발생한 점, 그것은 아기이던 자신이 어른들에 대해 대항할 수 없는 오이디푸스의 비극이다. 따라서 시바자키 형사가 당한 좌천은 곧 오이디푸스처럼 다리 한 쪽을 다치게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단순히 오이디푸스왕의 이야기는 아버지를 죽이고, 아버지를 죽이는 친부살해 근친상간만 다룬 것은 아니다. 오이디푸스라는 권력적인 관계를 사회적으로 환원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스핑크스의 등장에서 오이디푸스왕의 이야기처럼 아버지를 살해하고, 오이디푸스 자신이 왕이 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시바자키 형사는 왕이 될 생각보다는 엄청난 비리와 부패를 저지른 마미야 의원을 처벌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그런 계기는 자신도 생각하지도 못한 곳에서 튀어나왔으며, 그 계기로 인해 시바자키 형사는 오이디푸스처럼 아버지를 죽일 수 있는 계기가 된다. 그 아버지는 생물학적인 아버지가 아니라 정치적, 사회적인 아버지인 즉 권력이란 것이다. 시바자키 형사가 추적한 마미야 의원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시바자키 형사를 부당한 권력으로 짓누르고, 시바자키 형사가 맡은 사건을 모두 수포로 몰아간다.

 

3. 군국주의의 잔재

스핑크스가 처음에 탈취한 것은 원자폭탄이다. 원자폭탄은 상당히 위험한 물건으로 폭탄이 폭발할 경우 엄청난 고열과 폭풍 그리고 방사능으로 인해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에게 큰 타격을 준다. 일본에 떨어진 2개의 핵폭탄은 2차 세계대전 열세에 몰린 일본이 항복하게 되는 계기가 되고, 핵폭탄의 충격은 일본사회에서 큰 정신적 충격 즉, 트라우마가 되었다. 마미야 의원과 시바자키 형사가 말하는 70년 전이라면 당연히 1945년 8월에 떨어진 핵폭탄에 대해서다. <잔향(残響)의 테러>에서 잔향이란 ‘실내(室內)에 놓여 있는 발음체(發音體)에서 나는 소리가 그친 뒤에도 남아서 들리는 소리’이다.

 

아직까지 없어지고 남아있는 계속 이어지는 것이기에 스핑크스가 테러를 벌이는 것은 결국 아직까지 잊지 말고 계속 기억해달라고 하는 메시지인 것이다. 그런 메시지를 남긴 이유는 스핑크스와 그리고 그들을 추격하는 5는 본래 일본 어느 의학연구기관에서 실험체가 된 사람들이고, 연구실에서 9호와 12호는 탈출에 성공하나, 5호만이 유일하게 살아남은 채 남은 실험대상자들은 모두 죽게 된다. 그들이 비인격적으로 비윤리적으로 받아야했던 과거는 그들의 존재성을 말살했으며, 그것이 잘못된 일임이고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것을 추진하는 자들은 역으로 자신들의 의지가 정당하다고 한다.

 

권력이란 거대한 힘으로서 정의를 말하는 것이다. 정의란 눈으로 드러나지 못하므로, 결국 그 정의라는 이름을 보이게 할 수 있는 것은 힘으로 통한 방법이다. 마미야 의원이 70년 전의 미국에 당한 핵폭탄에 과거 일본의 기상을 잃게 되었다고 한다. 아직까지 일본 내 정치, 사회, 경제 권력자들이 태평양전쟁에서 활약한 가문 후손이 있다는 점과 극단적인 우익성향으로 전쟁에 대한 책임과 반성보단 되레 그 시대를 가고 싶은 자도 있다. 전체주의와 군국주의에 대한 파시스트적인 요소가 다른 이유가 있는데, 전체주의는 권력자의 폭압으로 국민이 고통 받는 독재정치를 말하는 것이고, 군국주의는 국가조직부터 시작하여 모든 국민들이 군사체계가 되는 군사 국가를 말하는 것이다.

 

마미야 의원의 우익적 성향이 문제되는 것은 그의 논리는 군국주의로 환원하여 과거의 일본 제국주의를 되찾아야 한다는 점이다. 일본에서 핵폭탄을 만드는 것은 결국 자신들이 태평양전쟁에서 패배한 이유는 미국이 가지고 있는 강한 핵폭탄과 그것을 운영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여겼다. 따라서 아이들을 강제로 수용소에 가두어 강제적으로 서번트 증후군을 일으켜 아이들을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강제로 뇌의 기능을 활성화하는 것은 정신적으로나 혹은 육체적으로 무리가 뒤따르기에 수많은 실험대상 아이들이 죽게 되었다.

 

4. 스핑크스의 테러리즘

심지어 5호조차도 그 증상으로 인해 오래 살지 못할 것을 알았으며, 스핑크스가 오이디푸스인 시바자키 형사와 마지막 대화를 한 후에 죽고 만다. 이미 스핑크스의 모든 수수께끼를 시바자키 형사가 풀었기 때문에 9호는 안심하고 자신의 생을 마감한다. 스핑크스가 처음 나타난 동기는 신화와 애니메이션은 다르지만, 스핑크스가 가지는 의미는 그 세계에 대한 파멸 내지 위기다. 스핑크스로 활동하던 9호와 12호는 자신들이 부당하게 국가권력에 의해 유린당했으며, 아무리 그런 일들을 폭로해봤자 이 사회에서는 도저히 불가능이었다.

 

만약 그런 제보가 있다면 분명 권력자들이 경찰과 언론을 통제하여 어떤 식으로 입막음을 했을 것이다. 심지어 그런 일은 그 실험 프로젝트를 맡은 책임자가 폭로하기 전에 자살로 위장한 암살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던가? 따라서 2명의 스핑크스가 할 수 있는 방법이란 세상의 안목을 자신들에게 돌리는 것이고, 그들이 원하게 무엇인지 그리고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를 말할 기회를 얻는 것이다. 그들의 폭로는 결국 테러리즘에 입각할 수밖에 없고, 그들의 행동은 아나키스트적인 반국가적 행동에 기인할 수밖에 없었다. 국가라는 조직은 국가라는 존재로 움직이지 않고, 오로지 국가라는 조직에 들어간 있는 인간에 의해 움직인다.

 

그 인간들의 이익과 권력에 부합되지 않은 일이 발생한다면 관료체제의 기득권자들은 분명 진실의 폭로를 곧이 받아들일 수 없는 셈이다. 스핑크스는 단순히 국가를 전복하자는 게 아니라 국가에 의해 잊어지고 버려진 조계를 고발하려는 것이었다. 단지 그 방법을 동원하기 위해서는 국가전체를 흔들 수 있는 테러가 필요했고, 최후 수단은 핵폭탄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인명을 살상하지 않았다. 테러로 인해 무고한 사람들을 죽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자신들의 권력과 허황된 망상에 젖어 사람들을 희생시킨 권력자와 비교할 경우 누가 더 인간적이라고 볼 수 있는가?

 

이와 다르게 일본정부도 그렇고, 일본에 개입하는 미국도 그렇듯이 죄 없는 사람들이 어떻게 되던지 상관없는 마찬가지였다. 스핑크스가 숨긴 핵폭탄을 탈취하기 위해 경찰호송차를 습격하고, 심지어 12호마저 사살하는 행동력, 9호가 핵발전소에 폭탄을 터뜨려도 아무 상관 없다고 말하는 그들의 모습에선 누가 어떻게 되든지 자기들만 무사안위하고 이익을 보면 문제없다고 한다. 국가라는 것은 감정을 가지지 못하나, 국가의 운영하는 인간은 감정을 가지겠지만, 국가라는 이름으로 행동하면 그 감정을 국가를 이용하여 자신의 감정을 버린다. 감정을 버리는 것은 윤리적인 가치관마저 버리는 것과 같다. 즉 이성적인 판단력이 아니더라도 인간은 감정적으로도 윤리의식을 가질 수 있기에 감정을 버리는 것은 결국 자신의 인간성을 버리는 것과 같다.

 

자신들만의 정의라는 것은 곧 모든 것을 그 하나를 위해 어떤 희생과 피해가 일어나도 감내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정의라는 이름은 인간의 보편적 윤리가 아니라 자신들의 권력과 이익에 부합되기에 정의는 윤리가 아니라 힘에 의해 통제되는 것으로 보인다. 마미야 의원이 하려는 행동은 분명 보편적 윤리성에서 벗어났지만, 그는 자신이 애국자인 것처럼 당당하게 행동한다. 시바자키 형사가 오이디푸스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그런 망상에 잡힌 일본의 아버지들을 죽이기 위해 아들인 시바자키 형사가 동원된 것이다.

 

5. 부조리한 현실, 그리고 오이디푸스의 거세

시바자키 형사에 대해 스핑크스 1호는 오이디푸스인 시바자키 형사가 자신들을 찾아주길 원했다고 한다. 딱히 2사람 모두 군국주의 과거 일본에 대해 직접적으로 비판하지 않지만, 그런 의식에 고취된 인간들이 결국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고, 옳지 못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시바자키 형사는 동료와 같이 맥주를 마시면서 자신이 10대 시절에 시위를 하던 사람들이 있었다고 한다. 1969년 도쿄대학 야스다강당 사건이 발생했는데, 당시 신좌파 운동으로 전공투 운동이 있었다. 그 배경은 베트남전쟁의 종식(베트남전쟁의 원인은 통킹만 조작을 미군이 하면서 발생했다)을 원하는 것과 등록금 인상과 각종 사회문제에 대하여 대학생들이 저항한 것이다.

 

세계에서는 당시 혁명과 저항의 역사가 있었다. 1968년 프랑스 파리에서 5월 혁명이 벌여졌고, 미국에서 베트남전쟁의 반대와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 반대, 여성인권 문제 등으로 저항운동이 일어났다. 저항운동은 주로 대학생과 10대 학생에 의해 주도되었다. 프랑스에선 다음해 선거에서 드골정권이 막을 내리나, 미국과 일본은 이내 진압되고 만다. 시바자키 형사가 말한 10대의 저항의식, 만약 시바자키 형사의 10대 모습처럼 스핑크스 역시 10대인 점에서 무엇을 향하여 저항하고 있는가? 일본의 전학공투회의 같은 학생운동은 국가와 사회에 대한 부조리에 저항하던 젊은이들의 외침이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오이디푸스가 되어야 했다. 오이디푸스가 되는 것은 역시 자신들의 발목을 큰 상처를 입은 후에 절룩거리는 인생이 되어야했다. 사회적 부조리에 대항하던 젊은이들이 실패의 역사를 걸었지만, 시바자키 형사는 스핑크스로 통해 그 부조리에 대해 밝혀내었고, 그 부조리를 밝힘과 동시에 자신을 거세하던 마미야 의원을 비롯한 각료들이 역으로 거세를 당하게 된다. 그들을 거세당해야 이유는 무엇인가? 루소의 <사회계약론>에 이런 문구가 나온다. “인민을 정부의 희생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정부를 기꺼이 인민을 위해 희생해야 한다.”

 

민주주의국가에서 최고의 가치를 가지는 헌법이다. 헌법에 의해 국가기관과 조직, 심지어 군대조차도 헌법을 수호하기 위해 존재한다. 헌법이 중요한 이유는 모든 법률이 헌법으로부터 시작하며, 모든 법률이 적용 역시 헌법 위에 올라갈 수는 없다. 일본의 헌법조차도 국민의 자유와 인권을 중시하고 있으며, 그 어떤 경우라도 국민 개인의 인권을 침해받지 못한다고 명시되어 있지만, 현실에서 헌법은 그저 휴지종이처럼 버려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만약 국회의원은 국민의 투표로 인해 선발되는 국민의 대표 중에 하나다. 그렇지만 실제 그들이 하는 행동은 공공의 이익으로서 국민들을 위해 일을 하는지 혹은 자신들만의 이익과 환상에 봉사하는지 알 수 없을 경우가 허다하다.

 

시바자키 형사가 그토록 공공의 선을 위해 노력했음에도 국가권력들은 오히려 그것을 방해하고 은폐했으며, 심지어 스핑크스를 쫓는 과정에서 시바자키 형사를 경찰업무에서 제외시키기도 한다. 이런 피해는 누구에게 가는 것인가? 민주주의국가 정치제도에서 관료체계의 권력과 이익이 우선되는 것은 결국 관료주의 정치형태가 되는 셈이다. 관료주의에서는 어떤 공평한 기준으로부터 누가 먼저 그 혜택을 받아야 하는지를 눈에 쉽게 드러난다. 관료주의 정치는 결국 그 나라의 정치적 현실을 보여주는 것처럼 토크빌의 <구체제와 프랑스혁명>에서는 “그 나라의 정치를 보면 그 나라의 국민의 수준을 알 수 있다.”고 한다.

 

국민의 수준이 거론되는 이유는 바로 리사의 모습이다. 리사는 아주 평범한 소녀처럼 보이나, 적어도 행복한 삶을 살지 못한다. 학교에서는 이지메를 당하고, 어머니는 심각한 집착으로 인해 학교와 가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청소년이다. 청소년이 공간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장소는 학교와 가정이지만, 그녀의 모습은 자유로움과 평화로움이 없다. 그런 리사의 현실을 만든 것은 리사의 본인의 선택인가? 아니라면 누구의 선택인가? 인간은 사회라는 구조 안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자유롭게 태어났지만, 도처의 사슬에 묶여 얽매인 채 살아가기 때문이다.

 

6. 오이디푸스왕 이야기 결론부와 시바자키 형사

부조리한 현실 앞에 사회구조적인 부분들은 개인에게 돌아간다. 물론 과대 해석할 수 있는가라고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하지만 리사가 학생이란 점이고, 학교라는 곳은 ‘사회의 축소판’이므로 그 사회가 병들었다면, 그 사회가 존재하는 학교 역시 병이 들며, 그 학교 안의 학생들 역시 병이 들어간다. <잔향의 테러>에서 그런 부조리에 대한 저항에서 시바자키 형사는 스핑크스를 자살(물론 병이지만)하게 해준다. 스핑크스와 그리고 5호를 비롯한 조계의 고통은 시바자키 형사가 기억해주고 그들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진실을 밝힌다.

 

진실의 밝힘은 관료들의 허황된 욕망과 이데올로기를 벗어나게 하여 지난 과거의 과오를 반복하지 않도록 하는 점이고, 국가의 주인이란 권력자가 아니라 국민에게 돌려주는 것과 같다. 어떻게 보면 인권이란 자연권이란 말처럼 아버지를 거세한 시바자키 형사는 권력보다는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자연권을 돌리는 것을 추구한 셈이다. 대신 시바자키는 오이디푸스와 다른 모습으로 돌아간다. 그것은 오이디푸스왕 이야기 후반부에 테베에 큰 재앙이 터지는데, 그 이유는 신이 인륜을 저버린 어느 죄인이 테베에 살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죄인은 오이디푸스왕이었고, 그는 자신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근친상간한 것에 대한 죄책감으로 두 눈을 찔러 실명한다.

 

어머니이자 아내인 이오카스테는 자신의 죄와 수치 때문에 자살하고, 오이디푸스의 형제자매이자 딸과 아들들은 이후 다른 비극으로 모두 죽고 만다. 오이디푸스는 추후 테세우스라는 영웅으로 통해 안식을 받고 죽는다. 그의 죄는 너무 무거워 그가 유일하게 안식을 찾을 수 있는 죽음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그가 죽은 땅에는 저주가 드리우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에 반해 시바자키 형사는 자신의 형사 자리를 되찾았으며, 마미야 의원으로 인해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의 진실도 밝혀주었다. 오이디푸스왕처럼 두 눈을 멀게 된 것이 아니라 도리어 다른 사람들의 두 눈을 뜨게 해주었다. 하지만 그렇게 시바자키 형사가 두 눈을 멀지 않게 된 이유는 그는 정상적으로 아내와 결혼하고 슬하에 딸 하나를 두었기 때문이다. 그는 결코 인륜을 져버리지 않았고, 오히려 인륜을 되찾았기 때문이다.

 

7. 마무리하면서

<잔향의 테러>에서 스토리 주제는 테러리즘으로 통한 테러리스트가 왜 테러를 일으키는지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테러라는 극단적인 폭력으로 통해 스핑크스가 밝혀내고자 하는 것은 부조리하게 죽어간 친구들과 인간으로서 살아가지 못한 자신들의 존재성을 알리는 것이다. 결국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인정하기 위해서는 타인과의 소통이 되어야 할 것이며, 그 과정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과거에 자신들을 속박한 문제를 다 정리해야 하는 점이다. 하지만 그들은 만약 그런 행동을 할 경우 생존할 가능성이 낮다는 점을 알았으며, 그렇게 죽어도 단지 자신들이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들의 얼굴은 누군가에게 각인되어도 그들의 정보는 어디에도 남겨져 있지 않았다. 그들은 국가의 은폐와 조작 속에서 처음부터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야 할 인간이 되어야 했다. 자신들의 존재성을 알리는 이유는 “왜 있는 것은 도대체 있고 차라리 아무 것도 아니지 않은가?”라는 것이다. 그들은 실존하고 있어도 사람들 사이, 즉 사회적인 공간에서 존재하지 않은 존재다. 자신들의 이름이 없는 것은 사회적으로 존재하지 않은 것이고, 그들이 존재한다는 관념적인 요소가 없다면 그들은 사회에서 없는 것과 같다는 점이다. 자신들이 육체적으로 살아있어도 사회적으로 관념적으로 살아있지 못한다면 그것은 살아있지 못한 것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죽는다는 것은 결국 자신들이 살아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기도 하다. 그러면서 일본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 5호로 통한 미국과 일본의 긴장관계도 보인다. 일본의 극우적 성향은 반미적인 요소를 가진 것이고, 친미적 우파는 정치적(군국주의적 성향)인 요소보다는 자본주의적 성향 즉 경제적 요소일 것이다. 이 작품에서는 경제적인 요소보단 사회에 대한 관념적인 요소, 즉 정치적 성향을 드러냈다. 하지만 주제는 정치적 목적보단 단지 스핑크스의 존재성이었다. 하지만 그 모티브 요소에서 그런 설정을 가지고 온 것은 오늘 날의 일본 사회가 건강하지 못한 것을 알려주는 것과 같다.

 

그러면서도 스핑크스는 VON이란 단어처럼 세상에 희망이 있다고 한다. 자신은 이제 죽어가면서 희망을 외치는 것은 아직까지 시바자키 형사와 같은 사람이 있다는 점이고, 그가 있다면 분명 자신과 같이 억울한 일을 당하는 사람들이 적어질 것이다. 결국 스핑크스가 하고 싶은 일이란 자신들의 존재성을 알림으로서 부조리한 일들이 다시 일어나지 않기 바라는 것과 같다. 그들의 최후의 테러는 핵폭탄을 고공폭발이 아니라 성층권에서 폭발하는 초고공폭발이었다. 핵폭발에서 가장 효과적인 살상능력을 발휘하는 것은 고공폭발이다. 대신 강력한 에너지로 모든 전기기계들은 무용지물이 된다. 그런 엄청난 일을 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인간이 과격해지는 것을 보면서 교수대에 목을 매달아하는 사람들은 죄를 짓는 사람보단 그렇게 짓게 만드는 자라는 것을 우린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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ㅍㅍㅍ 2014-10-18 0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좋은리뷰. 덕분에 작품의 이해가 잘 되네요.

만화애니비평 2014-10-18 10:38   좋아요 0 | URL
아니 애니메이션 리뷰인데...
 
멋진 신세계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2
올더스 헉슬리 지음, 이덕형 옮김 / 문예출판사 / 1998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멋진 신세계>는 중간에 읽다가 잊어버린 듯하나,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라는 서적에서 나온 문구를 존이 말한 것 같다. 일단 <멋진 신세계>를 읽으면서 세계3대 디스토피아 중 예전에 읽은 조지 오웰의 <1984년>이 생각이 났다. 조지 오웰의 소설 풍은 전형적인 전체주의라는 파시스트 정치체계를 비판했다. 특히 관료주의적인 권력자들의 이익이 중시되는 독재정치를 비판하였다. <1984년>은 정치적으로 자유가 없고, 언론의 정신이 상실되었으며, 모든 언어와 지식은 통제되어 일정한 단어 외에는 나올 수가 없었다. 이른바 오세아니아의 언어만이 모든 빅 브라더의 지배 아래 들어간다.

 

빅 브라더! 그 모든 것을 아우르고 모든 것을 통제하는 마치 신의 눈처럼 오세아니아의 대륙을 마치 최고의 유토피아인 것처럼 포장한다. 텔레스크린 너머 모든 것을 감시하고, 모든 것을 감청하는 세계에 진정한 자유란 없다. 어떻게 보면 <1984년>이나 <멋진 신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화두는 자유다. 자유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이고, 그 자유는 철학부터 시작하여 각종 사회과학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간사회에서 흔히 사용되는 말이다.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처럼 “인간은 누구나 자유롭게 태어났다. 하지만 도처의 사슬에 묶여 있다.”와 같이 항상 인간은 자유가 무엇이고 그것을 위해 목숨도 버릴 수 있다.

 

인간의 자유를 속박하는 것은 언제나 세상이란 거대한 세계다. 그 세계 안의 인간은 그저 작고 나약하며 거대한 무리 중에 하나에 불과하다. 그런 대다수의 사람들 속에 자신의 존재는 그야말로 소소한 것이며, 그 안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그 자신과 더불어 그 대다수의 군중 역시 하나의 개인이기도 하다. 개인은 대다수의 군중이기도 하고 군중은 또 다시 개인 그 자체의 존재이기도 하다. 그런 만큼 인간의 자유에 대한 의지는 언제나 사슬에 묶인 노예처럼 방황할 수밖에 없다. 자유를 위해서라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낭만주의적 정신은 물질의 만능과 기술의 발전에 따라 약해진 것은 사실이나 그러나 자유 그 자체에 대한 매력은 여전히 버릴 수 없다.

 

인간의 자유가 성립해야 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인간은 이미 사회에 나온 이상 자기 자신만의 자유는 존재할 수 없다. 끊임없이 속박당해야 하고, 끊임없이 타인의 시선에 존재해야 하며, 더구나 자신의 원하는 길이 타인의 욕망에 의해 자신의 욕망을 사회에 보여주고, 그 욕망으로 대체함으로서 자신의 입지를 세울 수 있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유행의 시대>처럼 계속 새로운 것에 대한 갈증과 더불어 그것을 접함에 따른 고독이 서로 대립되어 새로운 유행의 물결에 휘말려간다. 자신의 존재는 사라지는 이상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보고 듣고 판단해야 하는 것인가?

 

인간의 판단이 중요한 이유는 판단력이란 것은 결국 인간이 가진 이성으로서 사물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행동으로 움직일 수 있다. 나는 내가 생각하고 행동하기에 나라는 존재가 현실에 존재하고, 그것이 없다면 실존적인 자신을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인간의 삶에서 자유는 자신이 하고 싶은 것에 대해 스스로 할 수 있다는 의지로서 표현되는 인간의 행동이다. 그런데 그 행동이 정말 자신의 의지인지 아니면 억지로 주입되어 그것이 하나의 억압인데도 불구하고 자유롭다고 여기는 노예정신인지는 그 자신조차도 깨닫기도 어려울지도 모른다.

 

노예를 부리고 있다고 여기는 고용주조차 자신의 이기심에 의해 본인의 영혼과 정신을 파괴하여 정신적 자유를 망각하고 있다. 로베스피에르가 제 아무리 공포정치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을 바스티유 광장에 설치된 단두대 아래로 보내어도 기본적으로 자유라는 것은 나만이 자유를 가지는 것으로 자유가 되지 않고, 모두에게 자유가 가야지 내 자신이 자유롭다고 한다. 자유로운 공간이 조성되지 않으면 그 자유가 없는 곳에선 자유를 파괴하기 위해 무력을 동원하기 때문이다. 라 마르세예즈(La Marseillaise)가 만들어진 시기는 프랑스대혁명 이후 외국군대가 프랑스로 침입하면서 거기에 대항하던 의용군들이 모이게 되어 만들게 되었다.

 

자유는 자기 자신이 어떤 것이라도 상관없이 자신의 의지로서 행동하는 것이야말로 자유인 것을 보여준 사례다. 물론 그 자유로 인해 자신의 생명이 사라지어도 그들이 자신의 의지로서 그 누구의 노예가 아닌 자신의 주인으로 행동하기에 진정한 자유를 찾은 것이다. 나의 자유로운 의지로서 타인의 자유를 지켜주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자신의 의지로서 자유를 찾는 것은 내가 나로서 행동하고, 그것이 단순히 타인과의 교류를 단절하는 고립이 아니라 그 자신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자아를 형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멋진 신세계>에서는 그런 자아를 가질 수 있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태어나기 전부터 정자와 난자로서 알파, 베타, 감마, 델타, 하등하고 열등한 엡실론이 나누어져 있다. 그것도 각각의 수정체에서도 플러스와 마이너스가 존재하고 있다. 이미 인간은 태어나기 전부터 그 사람의 운명은 정해져 있고, 그 운명을 위해서라면 생명에 대해 무슨 짓이라도 해도 상관없는 그 냉혹함에 <멋진 신세계>는 생명윤리에 대한 어긋난 현실을 지적하고 있다. 당시 작가는 어떠한 사고를 가지고, 어떤 과학적인 사건을 토대로 작성한지는 모르나, 적어도 과학의 발달로 통해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 판단으로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물질의 문명과 과학기술의 운영에 모든 것을 의탁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노동력을 바탕으로 세계를 만들어가기보단 그 자신이 하나의 기계처럼 되어 완벽한 사회계급체계를 만든 셈이다. 가장 끔찍한 것은 신이란 존재가 없다는 것이다. 신이란 존재가 정말 현실적으로 보이고 존재하여 모든 사람들이 그것이 정말 있다고 이성적으로 판단하지 않더라도, 신이란 존재는 자신의 관념 안에서 정신적인 환상에 있다는 것조차도 없다. 그 신이란 이름 대신에 포드라는 글자가 들어가 있다. 포드는 말 그대로 자동차의 황제라도 불리는 포드다. 자동차 상표이름을 만든 거부 포드는 결국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입에 빠진 인간이 결국 자신들의 이기심으로 인간 자체를 기계로 만들어 버리고, 인간이 기계가 되어 이루어진 세계가 바로 <멋진 신세계>다.

 

자본주의는 단순히 자본의 운동과 흐름에 따라 발전하는 것이 아니다. 상품을 제작하여 팔아야 하며, 그 생산과정과 판매과정으로 통해 이윤을 추구해야 한다. 그러나 상품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상품 이전의 물체가 스스로 변화하지 못하듯이, 상품의 등장은 결국 인간의 노동력에 따라 나올 수밖에 없다. 인간의 노동은 결국 물질을 하나의 상품으로 만드나, 인간은 스스로 노동할 수 있는 시간이 한정되어 있고, 그 시간적 한계를 만드는 것은 인간의 육체적 피로와 더불어 정신적인 스트레스다. 그렇다면 그런 소모품이 아닌 인간이 노동만 하는 소모품으로 처음부터 만들고, 그 소모품들이 여러 공정과 업무를 나누어 계속 유지하게 한다면 그 노동력을 바탕으로 여가생활을 영위하는 자들은 상당히 편할 것이다.

 

그런 편한 생활에 빠진 자들은 알파계급, 그 아래 일정지식이 갖춘 자들이 베타계급이다. 알파계급은 다른 계급에 비해 무척 똑똑하고 지성적이며, 상시 자극을 주어 자신 안의 충동을 다른 쪽으로 유도해야 한다. 그래야지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던 것이다. 프로이트의 이론을 나름 생각해서인지 아니면 인간이 가진 리비도(libido)를 자극해서인지 모르나, 적어도 판단할 수 있는 사무적인 것과 모두가 평화롭기만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곧 유토피아고 멋진 신세계가 새롭게 열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겉으로 보일 뿐이다. 감마, 델타, 엡실론은 수 십 명, 아니 수 백 명이 모두 같은 얼굴로 떼를 몰려다니며, 누가 누구인지 전혀 모를 만큼 각자가 보이는 행동도 같다. 같은 유전자로 나온 아기들조차 계속 파블로프의 개처럼 끊임없이 조건실험을 시행하여 그 사회의 톱니바퀴에 어울리는 도구로 만들어낸다. 그들은 늘 세뇌된 상태이기 때문에 그 세뇌당한 가치관과 사고 이외에는 그 어떤 것도 받아들일 수 없으며, 사고할 수 있는 영역이 겨우 어린아이 수준이기 때문에 이성이란 없다. 생명력도 짧기에 그들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언제든지 충당할 수 있다.

 

루소가 <에밀>에서 거론한 것처럼 곡식이 가장 싼 것은 인간들이 가장 필요하기 때문이고, 도시에서 가장 싼 것은 인간의 생명이라 한다. 공장 안에 부품처럼 정확하게 단체로 움직이는 하등계급 인간들은 가장 저렴한 존재다. 누가 죽어도 다른 누군가 눈썹 하나 흔들리지 않으며, 오히려 죽음이란 두려운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당연하기에 죽음의 고뇌조차 초월해 버렸다. 인간은 나이가 먹어도 외모는 전혀 바뀌지 아니하며, 오히려 외모가 바뀌는 일조차도 없다. 그런 세계를 처음 방문은 존의 눈에는 이 완전하게 만들어 버린 곳이야 말로 <멋진 신세계>라고 말할 뿐이다.

 

인간에게 자유의 영혼은 없고, 단지 알파의 리비도의 방임적인 태도, 여성이나 남성이나 모두 자유로운 섹스를 하여 리비도를 분출한다. 인간의 리비도를 계속 충족하는 것은 인간이 자극적인 쾌락에 빠지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게다가 소마라고 불리는 가로와 세로 그리고 높이 1㎜짜리 알약은 1g을 0.5g으로 나누어 1개 내지 다수를 복용하면 아주 기분이 좋아지고 스트레스가 사라진다. 현대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갱단이나 혹은 권태감에 사로잡힌 자들이 섹스와 약물에 빠져 사는 것과 같다. 그런데 섹스와 약물에 찌든 사람은 금방 몸이 망가지나, <멋진 신세계>에서는 그것조차도 권유하기에 문제없이 돌아간다.

 

아무런 문제가 없어야 하고, 항상 완벽해야 하는 <멋진 신세계>는 세상 그 어떤 곳보다 지옥이었다. 존은 자신에게 영혼을 밝혀주는 책이 있었다. 셰익스피어의 비극들은 그에게 새로운 영감을 주었고, 그는 자신의 영혼이 타락하는 것을 거부했다. 문명의 이기심에 빠져들기보단 스스로 쟁기를 잡고 농사하기를 바랐으며, 인간이란 존재가 죄가 있다는 것으로 보고 자신의 등에 채찍을 강하게 내려친다. 그의 행동은 전형적인 성악설에 의거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적어도 그는 인간은 자연적인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인간은 그 누구도 닮은 게 아니라 자신의 영역이 있어야 하고, 약물에 의존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생각해야 하는 점이다. <멋진 신세계>에서 존은 모두의 두려움이기도 하고 신기한 하나의 자극제이기도 했다. 처음 존의 행동에 모두들 놀라움과 충격에 벗어날 수 없었고, 심지어 존이 혼자 살아가려 할 때조차 그의 폭력적인 행동에 두려워했다. 이제는 여러 사람들이 몰려와 그의 행동이 마치 즐거운 쇼로 보였으며, 그가 행동 하나하나 <멋진 신세계>의 재미였다. 심지어 그가 스스로 벌을 주는 고통의 시간마저 촉감영화 소재로 만드니 이것보다 더한 스펙타클의 사회는 없다.

 

존의 사고와 의지가 아니라 그의 행동이 하나의 영상매체로서 강한 자극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존도 처음 촉감영화를 볼 때 입술에 강한 느낌을 받았다. 손에 타고 오는 전기적 신호가 인간의 뇌신경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오로지 자극적인 쾌락과 미디어로 모든 사람들은 길들여져 갔다. 그런 이들과 유일하게 다르고, 이 상황을 알고, 그것을 유지하는 사람은 세계총통이다. 모든 사람들이 평등한 이유는 그 평등한 자 위에 누군가 군림하는 노모스 같은 존재였다. 그도 셰익스피어와 여러 고전을 알고 있었다. 그만이 위험서적을 보유하고 그 지식을 알았지만, 누구에게나 공개하지 않은 이유는 그런 게 위험하다고 판단할 수 있는 기회조차 주지 않은 것이다.

 

곧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은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란 단어조차 존재하지 않은 세계, 아니 그런 단어는 처음부터 실제 존재하더라도 언어적으로 관념적으로 존재하지 않은 세계다. 인간은 모두 포드님에 의해 포드님을 위해 존재할 뿐이었다. 하느님이란 신 대신 포드님이 들어간 모습을 보고 참 쓴 웃음을 짓지 않을 수가 없었다. 기계문명을 만든 인간이 신이 되어버린 세계는 결국 문명의 이기심만 남았다. 모든 자연적인 문화는 소멸되고, 그런 문화가 있는 곳은 야만의 세계가 되어야 했다. 야만과 문명의 사회, 그 차이점은 무엇인가?

 

단순히 과학 기술력이 발달한 문명의 혜택이 돌아가는 곳인가? 아니라면 문명인과 야만인의 차이는 야만인은 인간을 억압하고 폭력적으로 대하는 게 더 맞을 것이다. 존이 야만인이라고 부르는 기술문명국가가 오히려 더 야만의 세계였다. 하지만 야만의 세계는 자신들의 야만성을 스스로 깨닫지 못한다. 그 야만성조차가 하나의 합리성으로 둔갑해 버렸기 때문이다. <멋진 신세계>에선 오로지 효율성과 합리성이다. 논리만 존재하고 윤리는 사라졌다. 사회질서는 논리적인 것만 추구했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서 인간의 논리를 지적하며, 인간이 논리적으로 될 수 있는 것은 그 논리 속에 윤리가 선행되어야 하는 점이다.

 

<멋진 신세계>는 윤리는 없다. 인권도 그렇고, 성윤리의식(여성의 성적 억압을 벗어난 것으로 볼 수 있겠지만, 자궁이란 생명의 공간을 필요 없는 것으로 보기에 여성성 그 자체도 의미가 없고 단지 성행위를 하기 위한 생체조직으로 되었다)도 그렇다. 과학기술의 효율성이란 사슬에 묶인 인간은 결국 노예가 되어버린 채 자신의 인생을 기만하고 있었다. 물론 인간은 무병장수하고, 편한 인생을 원한다. 세계총통은 어느 섬에 20,000명의 인간을 보내 살게 했더니 모두 서로 싸우면 결국 반 이상이 죽고, 추후에 지배를 요구했다고 한다.

 

그 실험이 된 인간들은 알파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과 편리만 추구했지, 상대방에 대한 윤리적 의식은 배제되었다. 따라서 처음부터 윤리의식이 없이 이성적 능력이 알파 플러스를 그 이상을 보내도 역시 그렇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일반의지라는 것은 공공의 이익으로 통해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음으로서 자신의 이익을 침해받지 못하는 기능이 있다. 하지만 그 실험에는 일반의지 대신 전체의지만 남을 뿐이다. 전체의지는 많은 인간들이 자신 내지 그 자신과 부합되는 사람들의 이익에 추구했기에 생긴 의지다.

 

그건 우리 현실에서 타인의 고통과 부당함에 대해 개선하는 것이 오히려 그 사회를 좋게 바꾸고 그것이 자신에게 좋은 삶을 돌아온다는 것을 망각하고 있다. 대신 자신의 부동산 이익이나 차액만 노리고, 일획천금을 노리거나 어떻게든 남들을 밟으면서 올라가는 게 목적인 야만의 세계다. <멋진 신세계>에서 충돌을 피하고, 모든 것은 경직된 것을 추구하나, 사실 진정한 자유와 민주주의가 있는 곳은 충돌과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다. 이 사회가 완벽하지 않은 점과 그 완벽함을 추구하기보단 그렇게 하기 위한 노력만 있을 뿐이다.

 

유토피아라는 환상은 폭력과 통제, 억압이 조건이 되어야 하며, 그 거짓된 혜택은 일부 누군가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는 귀결성이 따른다. 그런 세계에 모두가 자신이란 존재 대신 만인은 만인을 위해 존재한다는 게 홉스의 이론(본래 만인은 만인에 투쟁한다)에 비틀어 버린다면 그것은 환상에 불과하다. 인간은 자아라는 것은 이성과 더불어 자신의 욕망에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것이 되지 않은 세계는 그저 광기조차도 존재하지 않은 무미건조한 세계이다. 존의 마지막 모습은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없다면, 적어도 자신이 인간이라면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있었다는 것으로 마감해야 했다. 물론 이 책을 보며 우리는 그렇게까지 심각한 지경까지 이르지 않았지만, 적어도 이런 <멋진 신세계>가 판을 치는 것을 볼 수 있다.

 

인간의 자신의 의지와 판단으로서 세상과 사회를 바라보는 게 아니라 新파블로프의 개처럼 길들여져 마치 <1984년> 마지막에 2+2=5라고 대답하는 스미스로 되는 게 아닐까 싶다. 물론 스미스는 과도한 폭력과 고문으로 정신적인 히스테리로 된 것이지만, 처음부터 우리는 스미스로 되어야 하는 세계가 아닌가 싶다. 미디어와 언론이 과연 우리의 눈을 제대로 기능하도록 하는가? 마치 촉감영화처럼 자극적인 것만 보여주고, 아무런 사고를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존이 소마를 마구 버릴 때 델타계급은 모두 동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델타계급 같은 외형적 인간은 없으나 델타계급 인간의 정신은 여기저기 보인다.

 

노예로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다면 투쟁하지 못할지라도 그것을 알고 분노하고 어떻게든 머릿속으로 기억하여 자신의 현재를 알고 괴로워하는 것이 오히려 더 인간처럼 보인다. <멋진 신세계>는 단순히 올더스 헉슬리 세계만이 아니다. 현실에도 존재한다. <멋진 신세계>에서 마르크스, 엥겔스, 트로츠키, 바쿠닌 등과 같은 혁명가 이름이 나온다. 그들조차 세계를 바꾸지 못하고 죽어갔다. 그들의 이름은 단지 문제를 일으키는 인간 내지 불완전한 인간으로 나온다. <멋진 신세계>에선 과거에 투쟁하던 이들의 이름을 올리면서도 바꾸지 못한 세상을 말한다.

 

우리는 <멋진 신세계>를 보면서 SF적인 요건에 전혀 현실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두려워하며 읽을지도 모른다. 사실 무서운 재해 수준이 일어나는 자연현상을 멀리서 보면 아름다운 예술로 보일지 모르겠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아주 두렵고 무서우며 모든 것을 앗아가는 재앙이다. 그 재앙을 공상소설로 만들어냈다고 하여 그게 단지 스쳐가는 이야기로 흘러가겠지만, 그의 소설은 분명히 경고하고 있으며, 우리는 그런 경고를 망각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잊으면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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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본적인 조사내용

<모모큔 소드>를 보면서 조사한 것은 다음과 같다. ① 모모큔이란 이름은 모모타로 전설에서 본뜬 점이고, ② 아베노 세이메이는 기원전 10세기에서 11세기까지 활약한 음양사라는 점이다. 그리고 모모타로 이야기는 복숭아에서 태어난 모모타로는 오니가시마에 가서 꿩, 원숭이, 개와 더불어 도깨비를 제압하여 보물을 가지고 온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아베노 세이메이는 일본에서 아주 많은 소재에 등장하는 음양사라는 점에서 <모모큔 소드>는 2가지 신화에 등장하는 주요인물이 등장한다. ③ 마지막으로 카쿠야공주라는 인물이 등장하여 삼천실복숭아를 모우는 이유는 카쿠야공주가 달에 가기 위한 동력으로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 힘을 모우는 것에 있어서 조정과 조정의 신하인 아베노 세이메이 일행하고 같이 행동한다.

 

세 가지의 전설적인 이야기가 하나에 뭉쳐 현대적 감각과 더불어 주인공인 모모코와 모모코의 라이벌인 오니히메가 등장한다. 원래의 전설에 나오는 이야기와 전혀 다른 양상으로 흘러가는 애니메이션이다. 하지만 이것은 기억해야 할 것이다. Animation의 Anima는 영혼이고, Animate는 살아있지 않은 존재에 혼을 불어 넣어 마치 살아있는 존재처럼 만드는 것이다. Anima라는 것이 영혼이란 점에서 인간의 무의식적 공간에서 살아있는 과거와 현재의 이야기다. 스토리텔링은 단순히 이야기만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새로운 이야기를 계속 새롭게 만들고 해석하고 때로는 변모되기도 한다. 한국의 대표적인 문학인 판소리를 보면 그 흐름이 전설과 신화에서 비롯되고, 등장인물조차도 신화나 전설의 인물이다. 가령 심청전의 용왕은 바다의 신이고, 어부들이 생각하는 바다라는 존재를 하나의 인격화한 존재다.

 

 

2. 이야기의 변주곡

그 이야기가 동화로도 되고, 때로는 소설로도 되지만, 현대에 와서 새롭게 각색되기도 한다. 예전에 한국 대표적인 판소리 주제인 춘향전을 소재로 <쾌걸 춘향>이란 드라마가 방영되기도 했다. 이야기하기는 것은 단순히 그 원류 그대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변형되고 탄생하고 왜곡되어진다. 그런 만큼 스토리텔링은 정해진 이야기만이 아니라 수용자가 새롭게 변화된 이야기로서 드러날 수 있다. 전설이나 신화가 계속 등장하는 이유는 경제적으로 혹은 법적으로 저작권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겠지만, 신화와 전설은 통시적인 것이 아니라 공시적인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100년 전이나 200년 전이나 우리 인간은 서로 다른 문화적 조건과 사회적 현상, 정치적 입지가 부여된다. 그런다고 우리가 그 이전 시대의 인간과 다른 문명이라고 해도 그들과 같은 공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야기라는 것은 계속 덧붙이거나 빼거나 또는 이상하게 흘러갈 수 있다. 적어도 이야기가 변모된다는 것은 시대적인 변화와 더불어 그러면서도 과거의 이야기와 접점이 맞물려 있다. 고정된 것과 유동적인 것이 서로 결합하여 부딪혀 새로운 이야기가 탄생하는 것이다. 부딪힘의 미학이란 바로 변증법적으로 서로 대립되겠지만, 서로 대립되기에 기존의 이야기가 전승할 수 있는 것이다. 시대의 흐름을 잊은 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면 결국은 도태되거나 박물관 속에 전시된 유물 수준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모모큔 소드>는 어떤 식으로 해석하고 바라봐야 하는 것일까?

 

 

 

3. 복숭아에 대한 판단

<모모큔 소드>에서 모모큔의 모모는 결국 모모코의 이름에서 애칭으로 불리는 것이다. 모모라는 것은 복숭아, 즉 도화(桃花)에서 나오는 열매다. 복숭아나무에서 나오는 과실 복숭아를 이 작품과 혹은 모모타로 신화에서 어떤 상관성이 있는지 생각해야 할 것이다. 단순히 <모모큔 소드>만의 리뷰만 아니라 좀 더 나아가면 일본의 문화, 그리고 동아시아문화라는 인류학적인 영역에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복숭아는 원산지가 중국으로 한국에서나 혹은 일본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과실나무다. 복숭아의 역사적인 기록에서 한국은 이미 삼국사기에 기록된 이상, 대략 삼국시대 내지 전부터 존재한 것이다.

 

복숭아의 원산지가 중국인 이상, 왜 중국의 나무가 일본으로 갔는가에서 결국은 삼국사기의 문헌정보로 판단해보면 한국의 과거 고대국가에서 일본으로 복숭아가 넘어간 사실이다. <모모큔 소드>에서 가장 생각해야 점은 복숭아라는 점이다. 복숭아가 어떤 기능을 하는가에서 어떤 모티브로 작용하는 점이다. 복숭아가 복사나무라고 불리면서 우리나라에서는 여름에 자주 먹는 과일이기도 하나, 복숭아의 나무인 복사나무는 절대로 제사상에 올리지 않은 게 특징이다. 복사나무의 가지는 귀신을 물리치는 힘이 있으며, 그런 것들은 한국 전설에 등장하기도 한다. 모모타로 원전전설에서 생각할 점은 모모타로 복숭아에서 태어난 점에서 복숭아가 귀신만 아닐 도깨비와 같은 인간이 아닌 존재, 즉 유령이나 귀신, 악귀 등을 쫓아내는 힘이 있던 것이다.

 

한국에서 악령을 내쫓는 것은 팥을 이용하여 동짓날에 죽을 해서 먹는데, 일본도 그런 유사한 풍속이 있다는 점이다. 문화의 유사성에서 복사나무 가지나 팥의 경우 농경문화의 특성이다. 복사나무는 여름에 과일을 맺기에 양기를 많이 받아야 좋은 열매를 가질 수 있다. 양기를 품은 나무인 만큼 음기를 제압할 수 있다는 점이고, 그 양기가 좋은 복숭아만큼 인간의 신체에 매우 탁월한 영양소를 공급한다. 가령 모모타로 전설에서는 복숭아를 먹은 두 노부부가 갑자기 젊어져서 할머니가 젊은 여자처럼 임신할 수 있다고 한 점이다. 복숭아는 다양한 비타민과 무기물질, 그리고 노화에 탁월한 음식이고, 신체 면역력에 매우 좋은 효과를 보여준다.

 

결국 복숭아란 음식은 일본에 존재하지 않았고, 새로 들어온 음식으로 그 효과는 보통 인간들에게 좋은 음식이었다. 하지만 전설에서 복숭아는 일본의 오니가시마 내지 한국의 귀신들을 물리치는데 효과적인 과일이다. 그렇다면 복숭아의 문화성은 무엇인가? 복숭아가 분명 중국에서 한국으로 다시 일본으로 넘어간 점과 복숭아는 다른 과일과 비교하여 좋은 영양소가 많다는 점이다. 그것의 관련성은 천녀(天女)로 이어진다.

 

  

4. 천녀(天女)와 선교(仙敎)

일본의 종교 관념을 보면, 기본적으로 많은 신들이 존재하고, 그 중에서 일본 창조신을 이어받은 천황(天皇)이란 존재가 있다. 21세기에 일본은 겉모습만 민주주의 정치제도를 유지하고 있지만, 천황은 아직까지 존재하며, 소화와 평성으로 이어지면서 천황은 결국 하늘의 황제이다. 물론 일본 천황에 대해 일일이 논할 수 있는 조건과 상황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게 천황을 꺼낸 이유는 천녀대가 존재하는 것은 선교적인 종교가치관이 작품 내에 반영되었다는 점이다. 천녀가 사는 세계는 하는 천상의 세계다. 인간의 세계를 크게 3가지인 하늘과 땅, 그리고 인간이다. 천녀가 하늘, 오니가시마가 땅, 인간은 지상이다. 그렇다면 이런 세계구조는 무(巫)라는 한자와 잘 맞아 떨어진다. 모모타로의 이야기의 간단한 소개로서는 판단하는 것은 섣부를지 모르지만, 기본적으로 천녀대란 존재는 선교라는 인간을 초월한 신선이란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다.

 

복숭아의 시작은 중국이고, 중국에서 시작된 선교에서 복숭아는 자주 나온다. 우리나라 고전을 토대로 제작한 <전설의 고향> 같은 드라마에서 전설에 등장하는 귀신이나 도깨비 또는 선녀 내지 옥황상제 같은 인간을 초월한 존재가 등장한다. 이때 자주 등장하는 이야기가 어느 효심이 깊은 청년이 아직 장가를 가지 못한 채 늙은 어머니 혹은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데, 그의 부모님은 건강이 너무 좋지 않아 청년은 늘 마음이 아픈 모습이 나온다. 이때 청년은 신선을 만나거나 또는 선녀 혹은 꿈속에서 조상님 내지 옥황상제를 만날 때 천도복숭아를 먹으면 병이 깨끗하게 사라져 건강을 되찾을 수 있다.

 

복숭아의 소재가 항상 누군가의 병을 치료하는 점에서 약으로 사용되나, 한편 악귀가 사람에 씌워지거나 또는 이유 없는 병에 시달리는 경우에도 천도복숭아가 거론된다. 복숭아라는 것이 결국 거대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고, 천녀장 스메라기는 삼천실복숭아의 힘이 매우 강력하기 때문에 만약 그 힘이 잘못 사용될 경우 큰 재앙이 발생할 것이란 점을 알고 있다. 그래서 <모모큔 소드>는 복숭아와 천녀라는 존재로서 기존 이야기에 선교 혹은 도교(道敎)적인 가치관이 부여된 점이다. 복숭아의 가진 힘을 인정하는 것은 도교 내지 선교의 종교적 가치를 담은 이야기에서 자주 등장하기 때문이다.

 

  

5. 오니의 존재

오니의 존재는 귀신 내지 도깨비를 지칭한다. 도깨비는 한국이나 일본 모두 존재하는 이야기며, 한국에서는 동굴에서 도깨비가 나오거나 또는 무덤 앞에서 등장한다고 한다. 주로 음의 기운이 강한 곳에서 도깨비란 존재가 나오기에 복숭아로서 도깨비를 퇴치할 수 있다고 민간신앙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모모큔 소드>에서는 복숭아에 대해 오니들이 무서워하기보단 복숭아의 힘을 오히려 노리는 것이 특이하다. 게다가 오니들은 복숭아의 힘으로 카쿠야공주의 우주선을 가동하거나 또는 오니가시마를 움직이기도 한다. 그런 점에 오니의 존재, 그들의 본질적 요소가 조금 의아하다.

 

보통 이런 모험물의 경우 선악의 이분법적인 논리로서 주인공이 정의의 편, 상대편은 강력하고 악랄하며 온갖 못된 행동만 골라서 하는 악의 축이다. 그런데 오니의 존재는 과연 악의 축인가? 라는 의문을 던진다. 처음에 복숭아를 두고 서로 다투는 오니와 모모코의 대립에서 점차 이상한 축으로 흘러간다. 같이 협동하기도 하고, 모모코의 비밀이 담긴 물건을 잃어버릴 때 자코키가 모모코의 물건을 가지고 협박한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본 오니히메가 자코키가 주운 물건을 도리어 모모코에게 준다. 이때 자코키는 자키오에게 오니히메가 한 행동을 고발하지만, 자키오는 의외의 반응을 보인다.

 

그의 딸이라도 오니족의 일원으로서 자키오는 오니히메에게 그 행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는다. 이에 오니히메는 오니로서 긍지를 갖고 행동을 했다고 한다. 그러자 자키오는 그렇다면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한다. 오니히메가 한 행동은 이른바 정언명령, 타인의 선적 가치를 위해 자신의 이익을 포기한 공공선을 넘어 공동선적인 가치다. 정의론적 가치로서 판단한다면 오니히메는 자신이 충분히 모모코의 약점을 가지고 이익을 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행동에 부끄러워하며 정정당당하게 모모코와 겨루기를 바란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오니라는 존재는 교활하고 악랄하며 저주스러운 존재라는 관념적 이분법을 해체하고 만다. 후에 가면 오히려 오니히메는 자신의 정체성을 아버지인 자키오와 대화를 나누면서 알게 된다. <모모큔 소드> 11화 오프닝 후 오니히메가 자키오를 찾아가 자신의 출생비밀에 대해 털어놓고 다음과 같은 대화가 이루어진다.

 

오니히메 : 그럼 왜 절 친자식처럼 키우신 겁니까?

자키오 : 천계가 혐오하고 부정해온 것, 그건 바로 힘과 우리 오니의 존재. 그리고 오니랑 천녀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다. 녀석에게 있어 너 같은 아이는 오니 이상으로 창피하고 혐오스러운 존재지. 그래서 널 주워 길렀다. 널 버린 녀석들을 부정하기 위해서

오니히메 : 단지 그것 때문에?

자키오 : 이상을 위해 버리고 부정한 것들로 인해 멸망한다. 정말 우습지 않느냐?

 

약간 뻔한 스토리와 여성캐릭터의 가슴움직임(버스트 무빙)에 상당히 비중을 두는 <모모큔 소드>에서 이런 대화를 나온다는 것은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김용석 교수의 <서사철학>에서는 이런 말이 있다. 아무리 유치한 이야기라도 그 안에는 분명히 철학적인 담론이 있다는 점을 말이다. 오니히메와 자키오의 대화는 인간의 실존과 본질에 대해 생각하게 해준다. 인간은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고 한다. 본질적으로 오니히메는 오니족 수령의 딸이고 후계자이겠지만, 정체성에서 혼란을 겪는다. 그러나 오니히메는 오니히메라는 자키오의 말과 자신이 이때까지 묶게 만든 사슬이 끊어졌다고 한다.

 

  

이런 말에는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의 문구가 생각난다.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다. 하지만 도처에 사슬에 묶여 있다.” 오니히메에게 진정한 사슬은 없었다. 그 누가 무엇이라 하여도 오니히메는 오니히메였고, 오니히메의 부하이며, 사디스트 마족인 엔키는 오니히메는 그 무엇이라고 하여도 자신의 친구라는 점은 변함없다고 한다. 사회적인 존재로서가 아니라 자연적인 존재로서 오니히메는 친구를 얻은 것이다. 분명 오니히메는 모모코와 라이벌이 되어야 하나, 그 라이벌적인 존재가 서로 목숨을 거는 것이 아니라 목숨을 넘어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줄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 된 점이다.

 

그 누구의 이름이 아니라 그 자신의 이름으로서 말이다. 그런 점에서 일반적인 모험장르 내지 용사마왕장르에서 교과서적으로 악의 축이어야 할 오니히메가 과연 악인가? 라는 질문에서 오히려 악이 아니라 단지 악으로 규정되었을 존재라는 것을 알게 해준다. 어떻게 보면 오니히메의 존재성을 두고 판단하면 진정 악은 누구인가? 판단은 도덕인가 혹은 윤리적인 가치인가로서 판단해야 한다. 도덕이란 것은 그 사회의 권력에 의한 법적 제도적인 규율으로서 단순히 천녀사회에서는 오니는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폭력적인 존재로 각인되었지만, 자키오 입장에서 (설사 오해라고 할지라도) 천녀장조차도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존재로 보인다.

 

선악의 저편으로서 자키오는 적의 우두머리지만, 그가 가진 오니라는 긍지는 과연 악이라고 볼 수만은 없다. 오니히메에게 오니라는 긍지를 가지고 행동했는가? 라는 것은 곧 오니일지라도 자신의 정의에 의해 행동했는가라는 것이다. 신념이란 가치 아래 오니히메의 행동은 윤리적인 가치에서 정말 옳고 정당한 행동을 한 것이다. 단지 오니의 자코키의 입장에서 자신들의 이익에 반하는 행동이다. 그래서 오니의 반역자로서 오니히메를 처벌하려고 했다. 그래서 정의라는 것은 윤리와 도덕이란 입장에서 서로 다른 것을 보이는 것이다.

 

작품 상황 그 자체에서는 오니족이 나쁜 것으로 처음에 판단하겠지만, 작품 후반에 갈수록 오히려 천녀 쪽의 가치가 틀렸다는 알아보게 해준다. 모모코와 오니히메는 쌍둥이 자매이고, 두 사람은 어머니의 유물인 반지를 서로 가지고 있다. 어머니는 천녀사회에서 매우 아름다고 자상하며 천녀 중에 천녀인 분이나, 아버지는 오니족 일원이다. 도저히 섞일 수 없는 존재, 우리는 단순히 하늘과 땅의 위배된 존재로서 보이나, 그 너머에는 인간이 자신들과 다른 존재에 대해 느끼는 배타심을 보여준다. 배타심에 의해 모모코의 부모는 죽임을 당하고, 자신들은 버림 받은 하늘과 땅의 버림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오히려 땅의 지하에 살던 오니족 우두머리인 자키오는 오니히메를 자신의 딸로 삼고, 딸로서 대해준다. 무표정하고 다소 감정이 없는 자키오라도 그가 오니히메에게 보여준 모습은 사랑하는 딸을 위해 행동하는 아버지와 같았다. 천녀사회에서 부정했던 오니히메에 대한 가치를 부정한 그로서는 부정의 부정은 긍정 혹은 부정에서 두 가지 모두를 가지고 간 셈이다. 천녀사회에서 부정한 존재이나, 오니에게는 긍정적인 존재이며, 그것 자체가 상대방에 대해 또 다시 부정이란 가치관으로 대립하기 때문이다.

 

 

 

6. 복숭아의 농경사회

오니족과 모모코의 대결에서 최종적으로 모모코의 승리로 이어지고, 이후 자키오 대신 오니족은 오니히메의 통솔로 들어간다. 재미있는 사실은 오니족은 오니가시마의 붕괴로 인해 땅 밑이나 혹은 동굴 다르게는 인간이나 천녀사회에 의해 포박당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인간과 똑같은 모습으로 농사를 짓고, 평화로운 농경사회 구조를 이룬 것이다. 그런 점에서 문화인류학적인 요소로 그들은 어떻게 바라보는 게 정당할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야기의 결론 자체가 오니족이 오니족으로 살아가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인간처럼 살아가기 때문이다.

 

오니족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우선 모모타로는 오니족을 침범하면서 보물을 모두 가져갔다고 한다. 모모타로의 이야기에서 복숭아는 일본에서 한국 내지 중국에서 유입된 물품이며, 일본은 중국과 교류하기보단 삼국시대의 백제와 교류를 더 많이 했다. 또한 지리적인 조건에서 한국의 고대국가들과 무역을 더 많이 한 일본으로서 천녀사회는 결국 일본으로 유입된 도교 내지 선교 문화이다. 도교 내지 선교 문화는 중국에서 시작하여 한국으로 유입되어 다시 일본으로 넘어간 점에서 (일본 자체는 이런 점을 무척 부정하겠지만) 모모타로 내지 모모코 이야기는 기존 원주민과 유입민족의 대립관계로 볼 수 있다.

 

복숭아라는 것은 인간이 과수원으로 가꾸는 열매이며, 농경사회인 중국과 한국에서 즐겨 먹는 음식이다. 이에 반해 일본은 농경문화보단 어업에 더 가까우며, 오니가시마를 신화적 요소에서 문화인류학으로 본다면 그들은 노략질을 하던 해적에 가깝다는 점이다. 오니가시마의 오니들은 본래 농사를 짓지 않았으며, 그들이 해적일 가능성은 모모타로 이야기에서 오니족들이 보물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노략질을 일삼은 그들이 보물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으며, 자주 주변 마을이나 부락에 폐를 끼칠 가능성이 높다.

 

 

 

고대 일본은 지금처럼 통일된 국가가 아닌 세분화된 점도 그렇지만, 아직까지 일부 농경문화가 정착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스메라기 천녀장부터 천녀대의 의상은 도교와 선교의 의상으로 일본에서 자발적으로 나온 복식문화가 아니다. 따라서 <모모큔 소드>는 기존 해적질을 하던 원주민과 높은 문화(하늘을 나는 천녀)를 가진 부족이 만나 서로 대립하다가 모모코와 오니히메처럼 두 부족의 교류가 처음 이루어질 때 잘 되지 않았거나(혹은 인질로서 서로 결혼하는 방법에서 잘 되지 않았거나) 분쟁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샤머니즘(한국의 전통무속신앙)적으로 본다면 천녀는 하늘이고, 오니는 땅, 인간은 중심이다. 한국에서 천지인에서 하늘은 아버지고, 땅은 어머니이니 그 사이에 인간이 태어난 것처럼(단군신화) 인간은 오니 내지 신선이 둘 될 수 있거나 혹은 그 두 부류로부터 올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래서 <모모큔 소드> 최종 승리자를 보면 천녀이기도 하겠지만, 오니족 역시 멸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농경사회를 보여주는 입장에서 농경사회는 인간만의 문화인 점에서 최종 승리자는 인간이란 점이다. 천녀들은 인간사회에 큰 영향을 주기보단 그저 아이돌처럼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어째보면 아이돌이란 존재는 TV 가상매체에 등장하는 신과 같은 존재다. 신은 원래 현실에 존재하지 않고, 인간의 관념 내지 혹은 환상에 존재한다. 신의 모습이 무언가 특별한 형체를 가지기보단 인간의 모습을 가진 것은 신이 인간을 탄생시키는 것보다 인간이 신의 형태를 만들어 내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을지도 모른다. 천녀들은 신앙적인 대상으로 작품 내에서 인간세계에 직접으로 개입하지 않고, 오히려 아이돌로서만 개입한다. 아이돌이란 숭배의식이 담긴 현실사회의 문화다. 그에 반해 오니는 힘으로서 해결하려고 한다.

  

 

그러나 오니 역시 인간과 같은 모습이다. 인간의 무의식 세계는 힘에 의한 폭력과 지배하기를 바라는 욕망이 있다. 단순히 오니와 천녀를 구분하기보단 그 존재에겐 인간의 모습이 담긴 사실이 더 중요할 것이다. 또한 이 작품은 오니와 천녀들은 서로 적으로 마주하겠지만, 최종 목표는 적이기보다는 서로 통할 수 있는 존재다. 오니히메가 마지막 화에 모모코와 서로 즐거운 표정을 검을 겨눌 때, 두 사람은 미소를 짓고, 모모코의 할머니는 두 사람을 위해 간식을 준비한다. 게다가 천녀대는 두 사람의 결투를 보러 오며, 모두가 누가 이기든 관계없다고 한다. 이게 <모모큔 소드>에서 말하는 작품의 미학적 가치일 것이다. 서로 다르기에 우리는 서로 처음에 싸울 수밖에 없겠지만, 니체는 인간은 서로 싸워봐야 한다고 한다. 그 이유는 그래야지 그 사람과 친하게 지낼 수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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