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이디푸스왕 이야기
오이디푸스의 이야기는 엄청 유명한 이야기고, 인간의 근본과 더불어 정신분석에서 자주 거론되는 왕이다. 그는 테베의 왕인 라이오스의 아들이며, 또한 그의 아내인 이오카스테의 아들이다. 매우 아름다운 이오카스테에서 태어난 오이디푸스는 신탁에 의하면 아버지를 죽이고, 자신의 어머니와 결혼한다는 결과를 받았다. 이런 결과에 의해 아버지는 오이디푸스를 죽이기로 결심하고 신하에게 명령하나, 차마 어린 아이를 죽일 수 없었던지 오이디푸스는 숲 속에 내버려지고, 그 때 우연히 발견한 사람이 이웃 국가의 왕에게 오이디푸스를 건네준다. 당시 이웃집 왕과 왕비는 자녀가 없었기에 오이디푸스를 양자로 삼고 키워주나, 다시 그 부부조차도 신탁에 의하면 오이디푸스의 운명을 알게 되었고, 오이디푸스는 자신을 길러준 이웃 국가의 왕과 왕비를 위해 여행을 떠난다.
길을 떠나며 오이디푸스는 건장한 청년이었기에 혈기를 멈출 수 없었다. 우연히 길을 가다가 어떤 행인과 실랑이를 벌이다가 그 행인과 그 행인 옆에 있던 경호원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큰 죄이나, 실랑이를 벌일 때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죽을 수 있다는 위기에 행인 일행은 죽였다. 그런 일이 있으면서 오이디푸스는 계속 여행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테베 쪽으로 가면서 소문을 들었는데, 테베 길가에 스핑크스라는 괴물이 등장하여 행인의 이동을 막고, 만약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지 못할 경우 지나가는 행인은 스핑크스의 뱃속으로 들어간다고 했다.
이런 문제로 인해 테베에서는 스핑크스를 처리해주는 사람에겐 테베의 왕이 되는 영광과 더불어 테베 최고의 미인인 이오카스테와 결혼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었다. 당시 왕은 테베에 존재하지 않았으며, 왕이 죽은 후 왕비가 혼자인 점에서 국가가 정상적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왕의 자리가 누군가 맡겨줘야 했다.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에게 찾아가 수수께끼 문제를 해결했으며, 스핑크스는 그대로 자살하고 만다.
2. <잔향의 테러>에서 스핑크스와 오이디푸스
<잔향의 테러>에서 숫자 9와 12는 본(VON)이라 하는 계획을 시행한다. 그들이 시행하면서 이상한 가면을 쓰면서 9는 스핑크스 1호, 12호는 스핑크스 2호라고 한다. 하지만 오이디푸스왕의 이야기에 스핑크스는 1마리로 등장하며, 실제 스핑크스는 9이다. 그가 수수께끼 문제를 내고, 거기에 대한 폭탄제조와 전반적인 작전을 지시하고 준비하기 때문이다. 12는 9의 친구로서 같이 연구소에서 자라난 사람으로 9의 옆을 보조해준다. 그들이 스핑크스로 되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오이디푸스는 단순히 스핑크스를 죽이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그저 인간으로서 태어난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란 존재는 자연적인 존재이나, 태어난 순간부터 사회에 귀속되어 억압받는 것 자체가 사회적 인간이 된다. 특히 인간은 사회성을 유지하기 위해 언어를 사용하며, 언어는 사회적인 단어로서 윤리와 도덕의식까지 반영된다. 즉 인간이 언어로서 사회성을 가지는 것은 그 사회의 일원으로서 지켜야 할 법이나 제도를 지켜야 하며, 이것은 곧 하나의 권력이 된다.
여기에 그 권력으로 인한 피해자 혹은 다시 스핑크스에 의해 소환된 사람이 있으니, 그는 바로 시바자키 형사다. 유능한 형사이고, 경찰청 내 간부와 상당히 친분이 있는 시바자키 형사는 본래라면 출세의 가도를 달릴 수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이상하게도 경찰청 내 상당히 외진 부서인 문서보관실에서 담배나 피고, 신문이나 읽는다. 머리카락과 수염을 보면 깔끔한 인상보단 마치 격리되어 유배 온 사람처럼 무력해 보인다. 그의 전력은 과거 어느 비리사건을 쫓다가 일본 내 국회의원 중 큰 권력을 가진 마미야 의원의 뒤를 쫓다가 그렇게 좌천된 인물이다.
그래서 스핑크스가 시바자키를 두고 오이디푸스라고 하는 이유는 크게 2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말 그대로 오이디푸스왕 이야기에서 스핑크스를 물리친 사람이 실제 오이디푸스라는 점이고, 다른 식으로 본다면 시바자키 형사는 실제 오이디푸스처럼 거세당한 자이기 때문이다. 오이디푸스왕의 이야기에서 오이디푸스는 한 쪽 다리를 제대로 걷지 못한다. 아기이던 자신을 도망치지 못하게 발목을 고의로 상처 낸 것이다. 그래서 오이디푸스라는 단어적 의미는 다리가 부은 사람이란 것도 있다. 다리가 부은 것은 이미 한 번 자신이 거세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신체적 구조에서 결함이 발생한 점, 그것은 아기이던 자신이 어른들에 대해 대항할 수 없는 오이디푸스의 비극이다. 따라서 시바자키 형사가 당한 좌천은 곧 오이디푸스처럼 다리 한 쪽을 다치게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단순히 오이디푸스왕의 이야기는 아버지를 죽이고, 아버지를 죽이는 친부살해 근친상간만 다룬 것은 아니다. 오이디푸스라는 권력적인 관계를 사회적으로 환원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스핑크스의 등장에서 오이디푸스왕의 이야기처럼 아버지를 살해하고, 오이디푸스 자신이 왕이 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시바자키 형사는 왕이 될 생각보다는 엄청난 비리와 부패를 저지른 마미야 의원을 처벌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그런 계기는 자신도 생각하지도 못한 곳에서 튀어나왔으며, 그 계기로 인해 시바자키 형사는 오이디푸스처럼 아버지를 죽일 수 있는 계기가 된다. 그 아버지는 생물학적인 아버지가 아니라 정치적, 사회적인 아버지인 즉 권력이란 것이다. 시바자키 형사가 추적한 마미야 의원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시바자키 형사를 부당한 권력으로 짓누르고, 시바자키 형사가 맡은 사건을 모두 수포로 몰아간다.
3. 군국주의의 잔재
스핑크스가 처음에 탈취한 것은 원자폭탄이다. 원자폭탄은 상당히 위험한 물건으로 폭탄이 폭발할 경우 엄청난 고열과 폭풍 그리고 방사능으로 인해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에게 큰 타격을 준다. 일본에 떨어진 2개의 핵폭탄은 2차 세계대전 열세에 몰린 일본이 항복하게 되는 계기가 되고, 핵폭탄의 충격은 일본사회에서 큰 정신적 충격 즉, 트라우마가 되었다. 마미야 의원과 시바자키 형사가 말하는 70년 전이라면 당연히 1945년 8월에 떨어진 핵폭탄에 대해서다. <잔향(残響)의 테러>에서 잔향이란 ‘실내(室內)에 놓여 있는 발음체(發音體)에서 나는 소리가 그친 뒤에도 남아서 들리는 소리’이다.
아직까지 없어지고 남아있는 계속 이어지는 것이기에 스핑크스가 테러를 벌이는 것은 결국 아직까지 잊지 말고 계속 기억해달라고 하는 메시지인 것이다. 그런 메시지를 남긴 이유는 스핑크스와 그리고 그들을 추격하는 5는 본래 일본 어느 의학연구기관에서 실험체가 된 사람들이고, 연구실에서 9호와 12호는 탈출에 성공하나, 5호만이 유일하게 살아남은 채 남은 실험대상자들은 모두 죽게 된다. 그들이 비인격적으로 비윤리적으로 받아야했던 과거는 그들의 존재성을 말살했으며, 그것이 잘못된 일임이고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것을 추진하는 자들은 역으로 자신들의 의지가 정당하다고 한다.
권력이란 거대한 힘으로서 정의를 말하는 것이다. 정의란 눈으로 드러나지 못하므로, 결국 그 정의라는 이름을 보이게 할 수 있는 것은 힘으로 통한 방법이다. 마미야 의원이 70년 전의 미국에 당한 핵폭탄에 과거 일본의 기상을 잃게 되었다고 한다. 아직까지 일본 내 정치, 사회, 경제 권력자들이 태평양전쟁에서 활약한 가문 후손이 있다는 점과 극단적인 우익성향으로 전쟁에 대한 책임과 반성보단 되레 그 시대를 가고 싶은 자도 있다. 전체주의와 군국주의에 대한 파시스트적인 요소가 다른 이유가 있는데, 전체주의는 권력자의 폭압으로 국민이 고통 받는 독재정치를 말하는 것이고, 군국주의는 국가조직부터 시작하여 모든 국민들이 군사체계가 되는 군사 국가를 말하는 것이다.
마미야 의원의 우익적 성향이 문제되는 것은 그의 논리는 군국주의로 환원하여 과거의 일본 제국주의를 되찾아야 한다는 점이다. 일본에서 핵폭탄을 만드는 것은 결국 자신들이 태평양전쟁에서 패배한 이유는 미국이 가지고 있는 강한 핵폭탄과 그것을 운영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여겼다. 따라서 아이들을 강제로 수용소에 가두어 강제적으로 서번트 증후군을 일으켜 아이들을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강제로 뇌의 기능을 활성화하는 것은 정신적으로나 혹은 육체적으로 무리가 뒤따르기에 수많은 실험대상 아이들이 죽게 되었다.
4. 스핑크스의 테러리즘
심지어 5호조차도 그 증상으로 인해 오래 살지 못할 것을 알았으며, 스핑크스가 오이디푸스인 시바자키 형사와 마지막 대화를 한 후에 죽고 만다. 이미 스핑크스의 모든 수수께끼를 시바자키 형사가 풀었기 때문에 9호는 안심하고 자신의 생을 마감한다. 스핑크스가 처음 나타난 동기는 신화와 애니메이션은 다르지만, 스핑크스가 가지는 의미는 그 세계에 대한 파멸 내지 위기다. 스핑크스로 활동하던 9호와 12호는 자신들이 부당하게 국가권력에 의해 유린당했으며, 아무리 그런 일들을 폭로해봤자 이 사회에서는 도저히 불가능이었다.
만약 그런 제보가 있다면 분명 권력자들이 경찰과 언론을 통제하여 어떤 식으로 입막음을 했을 것이다. 심지어 그런 일은 그 실험 프로젝트를 맡은 책임자가 폭로하기 전에 자살로 위장한 암살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던가? 따라서 2명의 스핑크스가 할 수 있는 방법이란 세상의 안목을 자신들에게 돌리는 것이고, 그들이 원하게 무엇인지 그리고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를 말할 기회를 얻는 것이다. 그들의 폭로는 결국 테러리즘에 입각할 수밖에 없고, 그들의 행동은 아나키스트적인 반국가적 행동에 기인할 수밖에 없었다. 국가라는 조직은 국가라는 존재로 움직이지 않고, 오로지 국가라는 조직에 들어간 있는 인간에 의해 움직인다.
그 인간들의 이익과 권력에 부합되지 않은 일이 발생한다면 관료체제의 기득권자들은 분명 진실의 폭로를 곧이 받아들일 수 없는 셈이다. 스핑크스는 단순히 국가를 전복하자는 게 아니라 국가에 의해 잊어지고 버려진 조계를 고발하려는 것이었다. 단지 그 방법을 동원하기 위해서는 국가전체를 흔들 수 있는 테러가 필요했고, 최후 수단은 핵폭탄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인명을 살상하지 않았다. 테러로 인해 무고한 사람들을 죽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자신들의 권력과 허황된 망상에 젖어 사람들을 희생시킨 권력자와 비교할 경우 누가 더 인간적이라고 볼 수 있는가?
이와 다르게 일본정부도 그렇고, 일본에 개입하는 미국도 그렇듯이 죄 없는 사람들이 어떻게 되던지 상관없는 마찬가지였다. 스핑크스가 숨긴 핵폭탄을 탈취하기 위해 경찰호송차를 습격하고, 심지어 12호마저 사살하는 행동력, 9호가 핵발전소에 폭탄을 터뜨려도 아무 상관 없다고 말하는 그들의 모습에선 누가 어떻게 되든지 자기들만 무사안위하고 이익을 보면 문제없다고 한다. 국가라는 것은 감정을 가지지 못하나, 국가의 운영하는 인간은 감정을 가지겠지만, 국가라는 이름으로 행동하면 그 감정을 국가를 이용하여 자신의 감정을 버린다. 감정을 버리는 것은 윤리적인 가치관마저 버리는 것과 같다. 즉 이성적인 판단력이 아니더라도 인간은 감정적으로도 윤리의식을 가질 수 있기에 감정을 버리는 것은 결국 자신의 인간성을 버리는 것과 같다.
자신들만의 정의라는 것은 곧 모든 것을 그 하나를 위해 어떤 희생과 피해가 일어나도 감내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정의라는 이름은 인간의 보편적 윤리가 아니라 자신들의 권력과 이익에 부합되기에 정의는 윤리가 아니라 힘에 의해 통제되는 것으로 보인다. 마미야 의원이 하려는 행동은 분명 보편적 윤리성에서 벗어났지만, 그는 자신이 애국자인 것처럼 당당하게 행동한다. 시바자키 형사가 오이디푸스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그런 망상에 잡힌 일본의 아버지들을 죽이기 위해 아들인 시바자키 형사가 동원된 것이다.
5. 부조리한 현실, 그리고 오이디푸스의 거세
시바자키 형사에 대해 스핑크스 1호는 오이디푸스인 시바자키 형사가 자신들을 찾아주길 원했다고 한다. 딱히 2사람 모두 군국주의 과거 일본에 대해 직접적으로 비판하지 않지만, 그런 의식에 고취된 인간들이 결국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고, 옳지 못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시바자키 형사는 동료와 같이 맥주를 마시면서 자신이 10대 시절에 시위를 하던 사람들이 있었다고 한다. 1969년 도쿄대학 야스다강당 사건이 발생했는데, 당시 신좌파 운동으로 전공투 운동이 있었다. 그 배경은 베트남전쟁의 종식(베트남전쟁의 원인은 통킹만 조작을 미군이 하면서 발생했다)을 원하는 것과 등록금 인상과 각종 사회문제에 대하여 대학생들이 저항한 것이다.
세계에서는 당시 혁명과 저항의 역사가 있었다. 1968년 프랑스 파리에서 5월 혁명이 벌여졌고, 미국에서 베트남전쟁의 반대와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 반대, 여성인권 문제 등으로 저항운동이 일어났다. 저항운동은 주로 대학생과 10대 학생에 의해 주도되었다. 프랑스에선 다음해 선거에서 드골정권이 막을 내리나, 미국과 일본은 이내 진압되고 만다. 시바자키 형사가 말한 10대의 저항의식, 만약 시바자키 형사의 10대 모습처럼 스핑크스 역시 10대인 점에서 무엇을 향하여 저항하고 있는가? 일본의 전학공투회의 같은 학생운동은 국가와 사회에 대한 부조리에 저항하던 젊은이들의 외침이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오이디푸스가 되어야 했다. 오이디푸스가 되는 것은 역시 자신들의 발목을 큰 상처를 입은 후에 절룩거리는 인생이 되어야했다. 사회적 부조리에 대항하던 젊은이들이 실패의 역사를 걸었지만, 시바자키 형사는 스핑크스로 통해 그 부조리에 대해 밝혀내었고, 그 부조리를 밝힘과 동시에 자신을 거세하던 마미야 의원을 비롯한 각료들이 역으로 거세를 당하게 된다. 그들을 거세당해야 이유는 무엇인가? 루소의 <사회계약론>에 이런 문구가 나온다. “인민을 정부의 희생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정부를 기꺼이 인민을 위해 희생해야 한다.”
민주주의국가에서 최고의 가치를 가지는 헌법이다. 헌법에 의해 국가기관과 조직, 심지어 군대조차도 헌법을 수호하기 위해 존재한다. 헌법이 중요한 이유는 모든 법률이 헌법으로부터 시작하며, 모든 법률이 적용 역시 헌법 위에 올라갈 수는 없다. 일본의 헌법조차도 국민의 자유와 인권을 중시하고 있으며, 그 어떤 경우라도 국민 개인의 인권을 침해받지 못한다고 명시되어 있지만, 현실에서 헌법은 그저 휴지종이처럼 버려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만약 국회의원은 국민의 투표로 인해 선발되는 국민의 대표 중에 하나다. 그렇지만 실제 그들이 하는 행동은 공공의 이익으로서 국민들을 위해 일을 하는지 혹은 자신들만의 이익과 환상에 봉사하는지 알 수 없을 경우가 허다하다.
시바자키 형사가 그토록 공공의 선을 위해 노력했음에도 국가권력들은 오히려 그것을 방해하고 은폐했으며, 심지어 스핑크스를 쫓는 과정에서 시바자키 형사를 경찰업무에서 제외시키기도 한다. 이런 피해는 누구에게 가는 것인가? 민주주의국가 정치제도에서 관료체계의 권력과 이익이 우선되는 것은 결국 관료주의 정치형태가 되는 셈이다. 관료주의에서는 어떤 공평한 기준으로부터 누가 먼저 그 혜택을 받아야 하는지를 눈에 쉽게 드러난다. 관료주의 정치는 결국 그 나라의 정치적 현실을 보여주는 것처럼 토크빌의 <구체제와 프랑스혁명>에서는 “그 나라의 정치를 보면 그 나라의 국민의 수준을 알 수 있다.”고 한다.
국민의 수준이 거론되는 이유는 바로 리사의 모습이다. 리사는 아주 평범한 소녀처럼 보이나, 적어도 행복한 삶을 살지 못한다. 학교에서는 이지메를 당하고, 어머니는 심각한 집착으로 인해 학교와 가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청소년이다. 청소년이 공간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장소는 학교와 가정이지만, 그녀의 모습은 자유로움과 평화로움이 없다. 그런 리사의 현실을 만든 것은 리사의 본인의 선택인가? 아니라면 누구의 선택인가? 인간은 사회라는 구조 안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자유롭게 태어났지만, 도처의 사슬에 묶여 얽매인 채 살아가기 때문이다.
6. 오이디푸스왕 이야기 결론부와 시바자키 형사
부조리한 현실 앞에 사회구조적인 부분들은 개인에게 돌아간다. 물론 과대 해석할 수 있는가라고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하지만 리사가 학생이란 점이고, 학교라는 곳은 ‘사회의 축소판’이므로 그 사회가 병들었다면, 그 사회가 존재하는 학교 역시 병이 들며, 그 학교 안의 학생들 역시 병이 들어간다. <잔향의 테러>에서 그런 부조리에 대한 저항에서 시바자키 형사는 스핑크스를 자살(물론 병이지만)하게 해준다. 스핑크스와 그리고 5호를 비롯한 조계의 고통은 시바자키 형사가 기억해주고 그들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진실을 밝힌다.
진실의 밝힘은 관료들의 허황된 욕망과 이데올로기를 벗어나게 하여 지난 과거의 과오를 반복하지 않도록 하는 점이고, 국가의 주인이란 권력자가 아니라 국민에게 돌려주는 것과 같다. 어떻게 보면 인권이란 자연권이란 말처럼 아버지를 거세한 시바자키 형사는 권력보다는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자연권을 돌리는 것을 추구한 셈이다. 대신 시바자키는 오이디푸스와 다른 모습으로 돌아간다. 그것은 오이디푸스왕 이야기 후반부에 테베에 큰 재앙이 터지는데, 그 이유는 신이 인륜을 저버린 어느 죄인이 테베에 살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죄인은 오이디푸스왕이었고, 그는 자신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근친상간한 것에 대한 죄책감으로 두 눈을 찔러 실명한다.
어머니이자 아내인 이오카스테는 자신의 죄와 수치 때문에 자살하고, 오이디푸스의 형제자매이자 딸과 아들들은 이후 다른 비극으로 모두 죽고 만다. 오이디푸스는 추후 테세우스라는 영웅으로 통해 안식을 받고 죽는다. 그의 죄는 너무 무거워 그가 유일하게 안식을 찾을 수 있는 죽음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그가 죽은 땅에는 저주가 드리우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에 반해 시바자키 형사는 자신의 형사 자리를 되찾았으며, 마미야 의원으로 인해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의 진실도 밝혀주었다. 오이디푸스왕처럼 두 눈을 멀게 된 것이 아니라 도리어 다른 사람들의 두 눈을 뜨게 해주었다. 하지만 그렇게 시바자키 형사가 두 눈을 멀지 않게 된 이유는 그는 정상적으로 아내와 결혼하고 슬하에 딸 하나를 두었기 때문이다. 그는 결코 인륜을 져버리지 않았고, 오히려 인륜을 되찾았기 때문이다.
7. 마무리하면서
<잔향의 테러>에서 스토리 주제는 테러리즘으로 통한 테러리스트가 왜 테러를 일으키는지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테러라는 극단적인 폭력으로 통해 스핑크스가 밝혀내고자 하는 것은 부조리하게 죽어간 친구들과 인간으로서 살아가지 못한 자신들의 존재성을 알리는 것이다. 결국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인정하기 위해서는 타인과의 소통이 되어야 할 것이며, 그 과정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과거에 자신들을 속박한 문제를 다 정리해야 하는 점이다. 하지만 그들은 만약 그런 행동을 할 경우 생존할 가능성이 낮다는 점을 알았으며, 그렇게 죽어도 단지 자신들이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들의 얼굴은 누군가에게 각인되어도 그들의 정보는 어디에도 남겨져 있지 않았다. 그들은 국가의 은폐와 조작 속에서 처음부터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야 할 인간이 되어야 했다. 자신들의 존재성을 알리는 이유는 “왜 있는 것은 도대체 있고 차라리 아무 것도 아니지 않은가?”라는 것이다. 그들은 실존하고 있어도 사람들 사이, 즉 사회적인 공간에서 존재하지 않은 존재다. 자신들의 이름이 없는 것은 사회적으로 존재하지 않은 것이고, 그들이 존재한다는 관념적인 요소가 없다면 그들은 사회에서 없는 것과 같다는 점이다. 자신들이 육체적으로 살아있어도 사회적으로 관념적으로 살아있지 못한다면 그것은 살아있지 못한 것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죽는다는 것은 결국 자신들이 살아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기도 하다. 그러면서 일본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 5호로 통한 미국과 일본의 긴장관계도 보인다. 일본의 극우적 성향은 반미적인 요소를 가진 것이고, 친미적 우파는 정치적(군국주의적 성향)인 요소보다는 자본주의적 성향 즉 경제적 요소일 것이다. 이 작품에서는 경제적인 요소보단 사회에 대한 관념적인 요소, 즉 정치적 성향을 드러냈다. 하지만 주제는 정치적 목적보단 단지 스핑크스의 존재성이었다. 하지만 그 모티브 요소에서 그런 설정을 가지고 온 것은 오늘 날의 일본 사회가 건강하지 못한 것을 알려주는 것과 같다.
그러면서도 스핑크스는 VON이란 단어처럼 세상에 희망이 있다고 한다. 자신은 이제 죽어가면서 희망을 외치는 것은 아직까지 시바자키 형사와 같은 사람이 있다는 점이고, 그가 있다면 분명 자신과 같이 억울한 일을 당하는 사람들이 적어질 것이다. 결국 스핑크스가 하고 싶은 일이란 자신들의 존재성을 알림으로서 부조리한 일들이 다시 일어나지 않기 바라는 것과 같다. 그들의 최후의 테러는 핵폭탄을 고공폭발이 아니라 성층권에서 폭발하는 초고공폭발이었다. 핵폭발에서 가장 효과적인 살상능력을 발휘하는 것은 고공폭발이다. 대신 강력한 에너지로 모든 전기기계들은 무용지물이 된다. 그런 엄청난 일을 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인간이 과격해지는 것을 보면서 교수대에 목을 매달아하는 사람들은 죄를 짓는 사람보단 그렇게 짓게 만드는 자라는 것을 우린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