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앞의 생 (특별판)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평점 :
품절


로맹 가리 아니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을 읽는 순간 작가의 이름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본래 로맹 가리는 유명한 문학 작가이도 하고, 연극 각본가이도 하며, 또한 뛰어난 외교관으로 활동한 우수한 인물이었다. 게다가 2차 세계대전에서는 프랑스 공군대위로서 하늘을 길동무를 삼아 전장을 누비었다. 그런 인물이 왜 굳이 에밀 아자르라는 인물로 대중에게 얼굴을 비추었는가? 나는 그의 책은 잘 알지 못했고, 실제 로맹 가리라는 인물이 있었다는 것만은 알아도, 그의 작품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런데 우연히 로맹가리 아니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을 읽는 순간, 그는 로맹 가리라는 실존적인 인물이었으나, 적어도 이 책에서는 에밀 아자르라는 이름으로 나오려는 것은 분명했다.

 

로맹 가리라는 이름으로 어떤 식으로 글을 쓰고, 어떤 내용을 다루고, 그것으로 통해 무엇을 전달하는지에 대해 생각하면 지금으로도 알 수 없다. 단지 소개 편에서 그가 러시아에서 태어나 프랑스에 온 이주민이고, 이후 평생 프랑스의 시민으로서 살아간 점이다. 시민(市民)이란 이름은 서울특별시나 혹은 부산광역시 또는 성남시에 사는 시민인 citizen이기보단 이른바 peoples라는 시민이 어울릴 것이다. 그가 살아온 업적과 그 업적에서 보이는 그의 이야기가 말이다. 하지만 내가 로맹 가리보다는 에밀 아자르라는 이름에 시민이란 peoples이 어울리는 이유는 바로 <자기 앞의 생>이란 책이 그가 바로 시민이란 점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화려한 로맹 가리는 모르겠다. 단지 나는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에서 보인 그의 작품세계만 바라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면서 생각난 영화 한 편이 있었다. 프랑스 빅토르 위고 원작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 <레미제라블(Les Miserables)>이다. 그 영화에서 나오는 판틴이란 아름다운 여성이 떠올랐다. 물론 <자기 앞의 생>에서 판틴이 될 만한 여자가 나오지 않는다. 차라리 판틴 같은 여자가 죽은 후 그녀에게 남은 아이 같은 소년 1명이 나온다. 단지 그 소년은 안타깝게도 <레미제라블>의 장발장을 만나지 못했을 뿐이다. 따라서 이 책은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에서 낭만주의 요소를 제외하여 진행한 작품인 것 같았다.

 

낭만주의 문학에서 벗어나 보이는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고 있는 사실주의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까? <자기 앞의 생>에서 보인 작품은 정말 아름다운 이야기보다는 차라리 혐오스럽고 지저분하고 비천하고 한탄스러운 사연들만 쏟아져 나온다. 문학이 왜 예술로서 인정받는 것인가? 프랑스에서 9가지 예술 중에 해당하기 때문에? 아니면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예술을 사랑하는 아름다운 여신 muse의 9자매에 해당되기에? 혹은 그 이상이라도 있는 것만은 아닌가? 삶이란 것은 언제나 우리에게 기만과 속임수를 강요한다. 눈앞의 현실을 항상 다른 것으로 대체하여 회피하려 하기 때문이다.

 

<자기 앞의 생>에서 보인 인간의 삶은 10살로 알았던 모하메드 아니 모모라는 소년이 알고 보니 14살이란 깨닫는 아이러니한 현실에서 우리는 우리가 항상 피해온 이야기 내지 또는 알고 싶지 않거나 우리와 상관없는 이야기를 마주하고 있다. 인간에게 전해주는 불편한 기분과 마음속에서 움트는 어두운 기분이어야말로 우리에게 항상 새로운 것을 알게 해준다. 원래 있던 것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평범하지 못한 삶을 살아가는 <자기 앞의 생>의 등장인물들은 그 사람들 나름대로 분명 평범한 생활을 하고 있다. 그런 만큼 우리는 이 소설에서 전해주는 이야기 자체가 평범하지 않은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을 보여주기에 우리의 평범한 인간들의 평범한 가치관으로서 도저히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자기 앞의 생>에서 보여준 작품세계에서 작가인 로맹 가리, 아니 에밀 아자르는 불평등한 세계와 부조리한 사회, 그리고 그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계속 그 공간속에서 살아가면서 보여주는 일상적인 부조리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던져준다. 세상은 언제나 아름다운 것들로 채워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우리는 우리의 눈을 현실을 보지 않고 있다. 우리는 항상 화려한 영상만이 나오는 스펙타클의 사회의 열렬한 소외된 군중이기 때문이다. 왜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인가? 내가 왜 에밀 아자르가 시민 peoples로서 보려는 것인가? 그것은 바로 자신이 러시아 출신이면서도 프랑스 시민이지만, 프랑스 시민으로서 살아갈 수 없는 이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이 시작되는 배경은 1970년 전후의 프랑스다. 프랑스의 지리를 잘은 모르나 정상적인 사람들이 살기보단 범죄자, 불법이민자, 마약중독자, 위조된 신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이 소설 주인공 모모는 바로 그런 부조리하고 불평등한 세계에 살아가는 소년이다. 그의 출생은 모른다. 단지 그가 이슬람교의 교인으로 살아있다는 것이고, 그의 출생민족처럼 그는 이슬람교의 문화를 다행히 익히고 있었다. 눈이 아주 나쁘나 아마 이슬람민족의 국가에 가면 성인이 될 수 있다는 하밀 할아버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밀 할아버지는 분명 이슬람문화를 알고 있는 사람이지만, 그는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을 즐겨 읽었으며, 게다가 건강이 너무 좋지 못할 때 모모를 두고 빅토르라고 말할 정도였다.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는 1789년 7월 프랑스대혁명이 1794년 로베스피에르의 테르미도르 반동에 의한 실각, 이후 1799년 나폴레옹의 브뤼메르 18일로 인해 다시 민주주의국가에서 왕정국가로 돌아갔다. 그러면서 장발장이 살던 세계는 온갖 가난과 질병 그리고 비참함으로 들끓는 세상이 되었다. 비참한 사람들이란 <레미제라블>, 그러나 우리가 그 비참함을 다시금 생각해야 할 점은 비참함은 자신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계속 이어져서 자신의 아이들까지 이어지고, 또 그 아이들은 자신의 먼 미래의 아이들까지 이어진다.

 

작가 이름이 에밀 아자르라는 점에서 그가 왜 에밀이란 이름을 사용했을까? Emile이란 이름은 장 자크 루소가 1762년 만든 아동교육철학도서 <Emile>과 같은 철자다. 정말 로맹 가리가 그런 것을 생각하여 이름을 지었고, <자기 앞의 생>에서 빅토르 위고의 책을 생각했다면 그는 분명 인간의 불평등한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자기 앞의 생>은 분명 가상의 인물이기도 하겠지만, 실제 있었던 사건들과 사람들을 토대로 만든 소설일 것이다. 이슬람문화권인 모모로 통해 이런저런 프랑스의 역사적 사실을 말해주는 부분에서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그것은 프랑스가 식민지로 지배하던 알제리란 국가가 나오면서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에서도 뫼르소가 살인사건을 저지른 배경조차 알제리 해변이었다. 알제리는 프랑스에 식민지로 속해 있었지만, 한편으로 독립을 위해 프랑스와 갈등을 빚은 바가 있었다. 프랑스 대표적인 지식인이던 장 폴 사르트르는 알제리가 자신의 국가를 위해 독립전쟁을 벌인 것에 대해 프랑스인(그는 나치가 프랑스를 지배할 때 레지스탕스로 활동했다)이었으나, 알제리의 독립을 지지했다. 로맹 가리가 진실로 알제리의 독립을 지지한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나, 적어도 주인공 모모가 이슬람문화권 사람인 점에서 알제리 사람일 것이며, 혹은 알제리든 유태인이든 세네갈이든 많은 외부사람들에 <자기 앞의 생>에 다룬 것처럼 적어도 프랑스 내의 인종차별 내지 또는 부조리한 현실을 보여주려 한 것은 분명하다.

 

나치 수용소에 갇히어 평생 히틀러의 초상을 침대 아래 숨겨놓고, 자신이 나약해질 때마다 히틀러의 얼굴을 보는 로자 아주머니를 보면서 왜 그들이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는 것인지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일단 에밀 아자르의 <Emile>이니, <에밀> 혹은 루소의 많은 사상중에 <사회계약론>에서 이런 말이 나온다. "그 누구도 타인을 돈으로 살 수 있을 만큼 부유해서는 안 되고, 그 누구도 자신을 팔 수 있을 만큼 가난해서도 안 된다."

 

왠지 내가 적어 놓고도 무안해지고 조금 가슴 아픈 말이다. 루소는 식량이 가격이 저렴한 이유는 인간에게 가장 필요하기 때문이고, 이 세상에서 가장 가격이 저렴한 것은 도시의 사람들이란 점이다. 인간만큼 가장 필요한 존재가 없기에 그들은 언제나 비참한 인간이 되어야만 했다. <자기 앞의 생>에서는 루소의 가르침이 그대로 드러나는 책이라고 생각되는 이유는 모모의 어머니는 정상적인 직업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고, 그녀는 자신의 몸을 파는 창녀였던 것이다. 창녀들의 역사를 보면 고대사회로부터 시작했다.

 

하지만 적어도 고대사회에서 여성은 자연과 같이 보았기에 그녀의 다산성을 존중하고, 제임스 프레이저의 <황금가지>를 보면 북유럽 고대부족 중에 신을 모시는 사당에 일하는 무녀들은 사실 창녀라는 점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몸을 팔아 신에 대한 조공을 받쳤으며, 부족국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다는 점이다. 한국에서 성(性)이란 단어를 성(聖)이란 말로 장난 칠 수 있다. 아마 창녀에 대한 문화적 차이가 발생한 것은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 넘어간 것에 대한 것이라고 보인다. 왜냐하면 수렵을 하던 시기에 식량이 충분하므로 여자들도 몇몇 무리지어 충분히 삶이 가능했다. 풍부한 식량과 자원에서 한정된 식량과 농경사회를 근간으로 하는 도시국가체계는 전쟁이란 필요적인 문명을 만들었다.

 

따라서 과거 성생활은 단순히 인류생명의 연장이라면 현대로 오게 되면서 노동력을 위한 재생산, 그리고 노동력이 목적이 아니라면 쾌락을 위한 목적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문제는 성행위 후 임신될 경우다. 남자는 한 번 사정하면 끝이지만, 여자는 상황이 다르게 된다. 아이를 가지게 되고, 지금과 같이 피임기술 내지 낙태기술이 발달한 것이 아니다. 아이를 낳게 되면 버리거나 혹은 자신이 키워야 한다. 문제는 그대로 빈민구제소나 고아원에 위탁하는 어머니도 많지만, 이에 다르게 아이와 다시 만나 자신만의 인생을 살기 바라는 여자들도 있었다.

 

모모의 어머니는 이미 죽었지만, 모모 주변에 있는 아이들은 어머니가 계속 창녀일을 하면서 돈을 보내오고, 그 돈으로 로자 아주머니는 보육한다. 모모가 사는 동네 경찰서장의 어머니도 그런 인물이었고, 경찰서장은 로자 아주머니로부터 자라났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법의 체계를 수호하는 사람이 알고 보니 법의 체계로부터 벗어난 사람에게 은혜를 받았고, 이제는 그 은혜를 생각하여 로자의 행위를 눈감아준다. 불법체류자에 위조증명서, 게다가 창녀들은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여자로 국법에 정해져있다. 하지만 어머니들은 아이를 위해 살아가고, 그들과 같이 생활할 수 있는 미래를 꿈꾼다.

 

인간에게 주어진 꿈과 미래란 과연 지금의 고통과 현실조차 감내할 수 있는 희망의 메시지인가? 아무튼 그녀들이 보여주는 모성애에 마음이 참 안타깝게 느꼈다. 지금은 물론 다르겠지만, 당시 인간들에게 자신이 수익으로 할 수 있는 직업이 매우 한정적이고, 그러나 딱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인간의 비참함에서 경제적 빈곤은 계속 이어져 간다. 굳이 마르크스의 <자본>을 들이대지 않아도, 그것은 알 수 있다. 자유주의 철학에서도 경제적 성공은 학력이 필요한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런 알 수 없는 희망이 없는 사람들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모모는 어머니가 죽은 것을 알았고, 아버지조차도 발작 증세를 가진 범죄자였다. 그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그나마 자신을 돈 때문에 맡았지만, 이제는 오직 자신의 가족으로 여기던 로자 아주머니만 남았다. 로자의 모습에서 많은 것을 생각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안락사라는 제도를 찬성한다.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게 해주는 것이 오히려 인간으로서 그가 살아가는 마지막을 주는 선물이라 생각한다. 복잡한 병동에서 고통스러운 매일매일 하루를 맞이하는 것도 모자라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산송장처럼 살아있는 것은 가혹한 처사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로자는 불법체류자고 위조된 증명서를 가지기에 병원에 가는 순간 모모는 바로 빈민구제원에 들어가야 한다.

 

프랑스의 빈민구제원이 어떤 공포의 대상인지 모르지만, 모모는 거기만큼은 가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로자를 하루 빨리 생을 마감하는 게 로자를 위한 것이라 보았다. 살아있을 희망도 없이 고통스럽게 약물에 의존하는 것은 비참한 일이다. 만약 병동에 누워있는 사람이 사회적으로 모든 것을 보장해준다면 어느 정도 고려할 수 있으나, 적어도 내가 살아있는 사회에서는 환자 본인이나 가족들에게 큰 고통과 상처다. 가족 하나가 불치병이나 심한 중상에 빠지면 그 가족은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큰 부담을 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레미제라블>이 될 수밖에 없다. 이 책을 보면 모모의 행동이 그래 옳은 것만이 아님은 볼 수 있다. 길가에 물건을 훔치거나 로자 아주머니에게 마약을 놓게 하는 생각을 하거나 또는 뚜쟁이가 될 수 있다는 말을 하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이런 말과 행동을 하는 모모는 그렇게 되고 싶어 된 게 아니라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이 작품에서 그런 비행청소년인 모모가 오히려 다른 인간보다 더 인간처럼 나온다. 죽어가는 로자 아주머니를 지하실에 모셔두고, 죽을 때까지 아니 시체가 부패할 때까지 옆에 있었다. 자신에게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지만 그래도 로자 아주머니가 있었다는 식으로 말이다.

 

인간은 외로운 존재다. 언제나 자신의 고독을 두려워하고, 그 고독을 도망치기 위해 발버둥을 친다. 그래도 고독한 존재는 인간일 수밖에 없다. 그런 만큼 <자기 앞의 생>에서 모모가 예전에 하밀 할아버지가 해준 말을 회상하는 게 인상적이다. “사람은 사랑할 사람 없이는 살 수 없다.” 인간은 정말 혼자서는 살아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모모는 자신의 태생과 자라온 환경, 그리고 주변사람들이 받고 있는 부조리 속에 사회적 가치가 부정적이었다. 하지만 마지막에 “나딘 아줌마는 내게 세상을 거꾸로 돌릴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무척 흥미로운 일이다. 나는 온 마음을 다해 그렇데 되기를 바란다.”라고 말한다.

 

성우로 일하는 라딘은 재생된 화면에 목소리를 더빙한다. 그리고 그 더빙된 화면은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시간이란 비가역적 존재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모는 거꾸로 가는 세상, 즉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점이고,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기를 자신은 바란다. 마지막에 아르퇴르를 좋아할 사람은 없기에 모모는 그것을 걱정해야 하나, 그 아르퇴르를 사랑해야 한다고 말한다. 아르퇴르는 모모가 우산으로 만든 인형으로 우스꽝스러운 모양은 하고 있다. 하지만 그 모습은 모모 자신 그 모습이며, 자신의 우스꽝스러우면서도 부자연스럽고 또한 슬픈 모습(이슬람문화에 따라 얼굴모양을 만들지 않은 것)이다. 자신의 그런 모습이라도 사랑해야 한다. 그래야 남도 사랑해야 한다.

 

어느 애니메이션에 이런 말이 나온다. “타인에게 사랑받지 못한 인간은 남을 사랑할 수 없다.”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타인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결국 나부터 사랑해야 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내 자신이 이기심이 있다고 여긴다. 물론 자기애라는 것은 단순히 생명을 위한 동물적 본능의 자기애로서 이기심일 것이다. 그렇지만 나라는 사람에 대해 내 자신은 그렇게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상당히 세상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다소 냉소주의적인 인간형이다. 그럼에도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는가라고 물어보면, Yes라고 할 수는 있다. 그렇지 않으면 내 이성이 버티지 못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자기 앞의 생>이란 결국 사랑하는 사람, 즉 사랑이란 남녀 간의 사랑, 가족 간의 사랑, 친구 간의 사랑처럼 인간이 행복을 가질 수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적어도 이 작품에서 그런 주제를 던지면서도 계속 불평등하고 부조리한 사회를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유태인이든 이슬람인이든 관계없다는 식으로 말하는 모모가 나온다. 실제 이슬람문화와 유태인문화는 충돌이 일어나고 있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단지 이 자리에서 서로를 위해 같이 웃거나 울거나 또는 짜증낼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도 이 책에서는 모모의 주변사람처럼 부조리한 삶을 살아가는 인생을 보여줌으로 시대적인 상황을 보여준다. 가난과 질병 그리고 비참한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이들로부터 소설이 시작했으니 말이다.

 

마지막으로 덧붙인다면 이 작품 번역가는 좋은 대학교와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것은 분명하나, 그분이 적은 후기에는 단지 비참한 삶을 사는 모모가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고, 인생의 이야기를 하밀 할아버지의 말을 빌려 사용한다. 그러나 나는 이 작품에 대해 단순히 모모의 모습, 로자의 아우슈비츠수용소에 갇힌 창녀만 보는 것은 아니었다. 좀 더 생각하면 왜 이들이 그렇게 되었을까 라는 점이다. 처음부터 창녀는 창녀가 아니었고, 어느 청춘의 여성이 창녀로 되어만 했다. 단순히 자기 허황된 욕심이라면 몰라도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레미자라블>의 판틴 같은 사람에 대해 생각해볼 점이다. 그녀들이 계속 모모와 모모 친구들을 만들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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