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의 변명 외 - 법과 죽음에 대한 통찰 돋을새김 푸른책장 시리즈 13
플라톤 지음, 권혁 옮김 / 돋을새김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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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대화록은 서양문명에서 기본적인 토대가 된다. 그의 사상이 유럽을 지나 전 세계로 퍼져 나가면서 플라톤의 이름과 함께 소크라테스라는 인물의 이름도 퍼져 나간다. 사실 생각해보면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제자라고 할지라도, 그가 언제나 소크라테스의 옆에만 있었을 것은 아닐 것이다. 대화록은 결국 소크라테스를 앞을 내세우고, 주변 인물들과 대화를 하는 것이다. 그 많은 분량을 혼자서 다 기억하여 작성했을까? 아니라면 주변의 이야기를 들어 정리하여 기록했을까? 여전히 그런 부분은 의문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는 플라톤이 적은 글들이 소크라테스의 이야기라고 믿을 수밖에 없고, 소크라테스가 발언한 모든 이야기가 사실이든 아니든 소크라테스가 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2,600여 년 전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가지 않은 이상 그것은 알 수 없다. 플라톤의 저서에서 그는 초기, 중기, 후기 3단계로 구분되어 작성한다. <파이돈>이란 대화록은 소크라테스가 죽기 전에 소크라테스와 주변 친구들이 모여 대화를 나눈 것을 정리한 내용이다. 책에서는 플라톤은 등장하지 않는다. 플라톤은 몸이 아파서 집에서 쉬고 있었으며,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찾아갔다.

 

<파이돈>을 읽으면서 생각할 점은 <파이돈>은 소크라테스가 멜레토스라는 인물에 의해 무고를 당하면서부터다. 관아에서 자신이 고소당한 것을 안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관아로 가는 도중에 <에우티프론>이란 대화록이 시작되고, 다음으로 <소크라테스의 변론>, 사형선고 이후 감옥에서 친구 <크리톤>과 대화를 나눈 것으로 하여 최종적으로 <파이돈>으로 마무리 된다. 그러니깐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안 상태에서 서사적 흐름으로 정리하자면 <에우티프론> → <소크라테스의 변론> → <크리톤> → <파이돈>이란 사실이다.

 

소크라테스가 죽을 수밖에 없던 이유는 펠레폰네소스전쟁 패배 이후 라케다이몬이란 스파르타에 의한 과두정부가 수립되고, 30인으로 구성된 지도자들은 민주정 해체 이후 제대로 된 정치를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독재와 폭력을 일삼고, 수많은 시민을 처형하고 재산을 가로채었다. 그 중에 소크라테스의 제자가 있었고, 그들은 민주정 혁명 이후 권력을 잃고 도망치거나 처형당했다. 하지만 당시 아테네 시민들은 그들에 대한 분노를 참기 어려웠으며,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뭔가 하나의 사건이 필요했다.

 

소크라테스를 죽인 이유는 그런 분위기에서 소크라테스의 제자가 과두제의 위원에 있었다는 이유도 있지만, 그가 평소 바른 말을 너무 많이 하기 때문에 민주정 정부 수립자들에게 상당히 비위가 거슬렸다. 소크라테스가 죽은 이유에서 단순히 그의 제자들이 반역자라서 몰아넣기 식이 아니라, 단지 그가 없어지면 좋겠다는 심리적인 압박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에게 주어진 신적인 영감 그리고 지혜를 찾고자 하는 의욕으로 아테네지역을 돌고 돌았다. 특별한 일이 없다면 평생 아테네에서 벗어난 적이 없는 소크라테스로 봐서는 이 세상에 자신의 무지를 깨우쳐 줄 철인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 시대의 유명한 시인, 철학자, 정치가, 각계 인사들은 소크라테스를 만날 때마다 자신의 논리가 부족한 것이 들통 나고, 소크라테스 때문에 자신의 명성에 흠이 가고, 그로 인해 마음속에 앙심을 품어버린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단순히 정치적 권력에서 비롯되는 숙청보다는 사회적인 여론에 의한 숙청에 가까웠다. 단지 사회적 죽음에서 권력자들이 뒤에서 압박을 가했기에 그의 죽음은 마녀사냥으로 볼 수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소크라테스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인 것일까 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인간에게 죽음과 삶은 무엇인가? 기존의 철학에 대한 역사에서 physics(물리학)는 과학적인 요소를 보았다. 지구는 무엇이고, 만물의 요소는 무엇인지, 살아있는 것은 무엇이고, 운동하는 그 모든 것에 대한 탐구가 바로 과학적인 철학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어떤 현상에 대해 연구하는 것이기에 눈에 보이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단지 돌이 떨어지는 것은 눈에 보이는 현상이라도 돌이 왜 떨어지고, 떨어지는 돌이 어느 경우로 떨어지며, 그것에 작용하는 힘은 무엇인지는 물리학적으로 시각적인 영역보단 비시각적인 수학적 영역으로 도달한다.

 

이런 인간의 사고방식이 눈에 보이지 않은 관념적 존재, 있지도 않은 어느 이미지가 구현된 이데아의 세계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한다. 소크라테스가 철인군주가 있어야 올바른 국가를 만들 수 있다는 <국가론>에서는 플라톤의 사상적 토대를 알 수 있다. 플라톤은 자신의 제자들에게 수학을 모르면 안 되나, 또 하나가 중요한 학문으로 기하학이었다. 기하학은 일반적인 도형과 다르다. 그런 모양이 구상되는 이유는 인간의 뇌에서 사유할 수 있는 세계가 기하학적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머리에서 생각되는 Simulating하는 것은 곧 가상적인 세계를 상상으로 그려 하나의 장치로서 현실에 적용할 수 있다.

 

<국가론>에서 플라톤은 왜 기하학이 중요하고 수학이 중요한지를 알려준다. 전쟁을 하려는데, 적군의 수와 아군의 수를 파악하고, 군부대도 수군인지 육군의 형태로 보고, 전장의 지형과 지리 그리고 아군의 진형을 파악하여 적군하고 싸우는 것이 올바른 것이다. 전쟁에서 이른바 지형과 지리를 보고 진형을 짜서 치는 것은 삼국지에서 제갈량이 흔히 사용하던 방법이다. 수전에서도 파도의 높이나 물의 흐름 그리고 바람의 세기와 방향은 승부의 패배를 결정짓게 하는 요소다. 그런 점에서 현실이 아닌 이데아의 세계가 현실에서 모방되어진다는 점에서 플라톤의 사상은 기존의 physics에서 공간적 층위가 하나 더 올라간 Meta-physics라는 형이상학을 중요하게 여긴 것이다.

 

형이상학은 눈에 보이지 않은 세계를 말한다. 눈에 보이지 않음이란 곧 현실에 있는 것이 아니게 되고, 현실이 아닌 것이 되는 것은 우리 인간의 육체적인 조건보단 정신적인 조건을 중요하게 본 것이다. <파이돈>을 읽을 때 바로 이런 점을 유념해야 하는 이유는 플라톤은 현실이 이데아에 존재하는 것들을 모방했기에 진정한 진리는 현실에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현실에 존재하는 그 모든 것은 언젠가는 모두 사라지고, 오로지 이데아에 존재하는 그 개념만이 영원불멸할 것이란 점이다. 그렇다면 이것을 인간에게 치환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인간은 보통 동물보다 오래 산다.

 

인간이 다른 동물보다 오래 사는 이유는 바로 다른 동물처럼 어릴 때부터 바로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보살핌을 받는 기간이 길기 때문이란 말도 있다. 자연세계의 야생동물은 태어나자말자 걸어야 하고, 새들은 수개월 안으로 날개를 펴고 날지 않으면 살 수 없다. 자연의 세계는 잔혹하기에 그만큼 새끼들이 보호받는 기간이 짧아 충분히 성장해야 하는 기간이 짧다. 우리 인간이 사육하는 소들도 태어난 지 1년도 되지 않아 도축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몸이 다른 동물보다 수명이 길어도 죽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파이돈>에서 소크라테스가 죽는 나이가 70이다.

 

지금의 70이란 수명에 죽는다면 그렇게 장수했다고 볼 수 없으나, 고대 사회에서 70이라면 상당히 장수한 나이다. 죽음이 다가온 나이에 조금이라도 더 살 것이라고 추태를 부리면 그는 오히려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여겼다. 소크라테스가 죽음의 길목에서 왜 그래 두려워하지 않은 것일까? 현대사회는 물질적 요소가 중시되는 사회다. 즉 자본주의의 도래와 그로 인한 산업화, 인간이 하나의 존재론적인 가치로서 보는 것이 아니라 도구의 기능으로 보는 것이다. 인간의 존재적인 가치에서 고대 사회에서는 이미 태어난 순간부터 운명적으로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이 있는 것은 당연했다.

 

현대사회는 피지배계층이 계속 억눌러 사는 것이 부당하게 여기게 되었다. 그런 가치적인 차이는 그 당시의 사회상인 것이다. 운명의 흐름에서 그리스에서 신의 존재를 믿었다. 결단코 제우스께! 라는 말과 여러 올림포스의 신을 입으로 내뱉는 행위는 신은 언제나 자신의 곁에 있기에 거짓을 일체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신이 존재한다고 여기는 세상이기에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비장하게 끝낼 수 있다. 그에게 각종 신과 영웅 게다가 인간지성사에서 큰 활약을 보여준 성현들을 하루라고 먼저 찾아가서 볼 수 있다는 생각이 죽음조차도 두렵지 않았다.

 

죽음은 행복의 축복인가 불행의 저주인가? 실존주의자에 의한 판단에서는 삶과 죽음은 언제나 같이 붙어있고, 나누어지지 않으며, 살아있는 게 죽어가는 것이다. 삶과 죽음이 같이 있다고 한다면 죽음이야 말로 삶의 완성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바로 이런 정신적인 세계가 펼쳐진 영혼의 세계가 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그 두려움을 이길 수 있었다. 소크라테스가 죽음 아래 무난히 친구들과 대화를 나눈 이유는 인간은 죽는 것은 당연하고, 죽음 앞에서 당당하게 보이야 하는 것은 육체는 썩어서 없어지질 모르지만, 영혼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영원한 것이 있다면 영원하지 못한 것이 있고, 좋은 게 있다면 좋지 못한 게 있다. 소크라테스의 변증론에서 찾아볼 점은 바로 대조되는 것이 분명히 있다는 사실이다. 죽어있는 것은 살아있는 것이 반대고, 삶은 죽음에서 나왔다면, 삶 이후에 죽음은 당연한 것이라 말한다. 단지 그가 죽음을 받아들인 과정에서 충분히 삶을 선택할 수 있는데도 그렇지 않은 이유는 <크리톤>을 더불어 참고하면 좋다. 소크라테스는 해외로 망명하거나 탈옥하면 삶을 영위하나, 그 이후 자신에게 떨어진 불명예, 주변에 친구와 가족들이 피해를 당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자신으로 하여금 남에게 피해를 줄 수 없고, 자신이 잘못되었다고 당시의 권력에 소크라테스의 머리를 숙인다면, 소크라테스는 이때까지 거의 1/3에 해당되는 인생을 속인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소크라테스가 그동안 자신을 속이지 않고, 오로지 진실을 구하기 위해 재물과 권력을 멀리했다. 그런데 재물에 의지하여 탈옥하고, 권력에 머리 숙여 목숨을 구걸하면 자신을 고발하던 사람의 책략에 걸리는 것이다. 그들은 소크라테스를 없애고 싶은 마음보다 소크라테스의 비굴한 모습을 보고 싶어 한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선택한 이유는 그들의 권력에 의해 죽더라도 그들의 의지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신념이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고대 그리스의 세계에 위대한 인간을 없애버린 비극이 되었고, 후대 역사에서 소크라테스를 죽게 만든 장본인들은 어리석고 비겁한 인물로 낙인찍혔다. 진심 영혼이 있어 천국과 지옥의 세계에서 재판이 있다면, 소크라테스를 죽인 자들은 평생 지울 수 없는 죄로 영원한 고통을 받을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그런 점에서 자신은 그 영원한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인간에게 영혼이 있고, 육체라는 일시적인 허물은 그저 스쳐가는 나그네인 것이다. 영혼의 불멸이 있으니 오히려 그 영혼을 갈고 닦는 것이 소크라테스의 목적이다. 신의 분부를 따라 지혜를 갈구하는 인간이 결국 마지막에 신과 가장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결국 그것은 자신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이 한 일은 남이 다 알 수 없다. 오로지 아는 자는 신이라면, 신이 눈앞에 보이지 않다면 영혼 즉 관념 속에 세계에 존재한다.

 

자신의 삶에 후회 없는 삶을 사려면 신은 언제나 옆에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는 점이다. 신이 있어 나를 알아주면 내가 현실에 죽어도 현실을 벗어난 다른 세계에서는 충분히 자신을 알아준다는 점이다. 오늘 현실에서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아니면 자신의 착각이나 어리석음으로 주변에 얼마나 많은 민폐를 보여주고 있는 것일까? 모를 수 있다. 모든 것을 인간이 알 수 없다. 단지 그것을 알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야 말로 소크라테스가 추구한 가치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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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동무 - 만화가 10인의 마침표 없는 인권 여행 창비 인권만화 시리즈
정훈이 외 지음, 국가인권위원회 / 창비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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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이란 무엇인가? 사람의 권리, 사람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적정범위, 아니라면 인간이 태어나면 이 이상으로 보장받지 못한 비참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절대적인 가치기준 등 인권에 대해 생각하면 정의내리기가 쉬우면서도 어렵다. 지난 인류의 역사란 되돌아보면 인간의 투쟁에 대한 기록이다. 투쟁이란 자연적 조건 혹은 사회적 조건에 따라 일어나는 경우가 허다했다. 자신이 살아가는 지역에 식량이 부족하거나 또는 날씨가 춥거나, 집에 너무 좁거나 월급의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인간의 불평등은 어찌 보면 장 자크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제시한 바와 같이 자연적 혹은 신체적 불평등보단 사회적 혹은 도덕적 불평등이 심하게 자리 잡고 있다.

 

우리 사회는 이른바 대한민국 헌법 아래 국민의 정치적 권리를 주장하는 민주주의 국가로 보고 있다. 하지만 민주주의 국가에서 헌법은 참으로 애매하다. 헌법은 어찌 보면 국민과 그 국민이 선출한 국가기관의 정부요직 또는 공무원들이 제일 먼저 지켜야 하나, 오히려 헌법이 더 뒤에 있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은 헌법의 가치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다. 맨날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와 정의를 말하는 인간들을 보고 난 뒤에 헌법 조항을 비교대조를 해보면 바로 코미디도 그런 코미디가 없다.

 

대한민국이 인권의 나라, 자유와 평등의 나라가 되려면 헌법의 정신적 가치를 새겨보는 것이 옳으나, 헌법이 사라지고, 대신 입맛에 맞는 각종 법들이 좌지우지한다. 법만이 아니라 법 아래에 있는 지침과 규정들도 임의로 관료사회집단의 입장에 따라 계속 바뀌어간다. 인권을 말하는 것은 마침표 끝내는 대신 물음표로 항상 질문해야 한다. 여기가 지금 제대로 사람들을 위한 장소인지 제도인지, 그리고 얼마나 제대로 혜택과 보장이 돌아가는지 말이다. 10월 8일 최호철 유승하 부부 만화작가의 강연을 들으면서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 중에 인상 남는 일화가 지하철역에 있는 엘리베이터였다. 다리가 심하게 불편하지 않은 이상, 나이가 제법 있으신 어르신들도 충분히 계단을 올라가고 내려올 수 있다. 그런데 다리가 불편한 장애인이나 산모, 병을 앓은 사람들에게 너무 힘든 영역이다. 레드 제플린의 유명한 곡 Stairway to Heaven, 천국으로 가는 계단만큼이나 멀고 험한 길이다. 장애우 한 분이 오랫동안 계단을 오르기가 불편하여 사회에 호소하였고, 나중에 지하철역마다 엘리베이터가 생겼다.

 

남들은 그것이 언제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고, 자신들의 편익을 위해 탑승한다. 그러나 그 장치가 생기기까지 걸린 시간은 너무 길고도 힘들었다. 말이야 쉽지? 이런 말은 바로 여기서 부터인 것 같았다. 우리는 우리의 눈을 속이거나 외면하지만, 세상에 너무 힘든 사람이 많다. 그들을 돕는 일이란 그저 길가나 지하철에서 구걸하는 거지에게 동전 하나를 주는 것보다 사회적으로 관심을 가지는 것이 옳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우리 국민에게 세금을 수금한다. 하지만 그 용도가 제대로 된 것보단 오히려 이상한 방향으로 자주 쓰이는 경우가 많다.

 

정작 사용할 곳은 어디인지? 그것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지? 또한 그것을 제대로 관리감독 및 시행을 누가 잘 할 수 있는지 고려해야 한다. 우리 개인 하나는 어떻게든 타인 한 사람이라도 제대로 돕기도 힘들다. 아침부터 나가 저녁까지 일을 하는 직장인에게 월급봉투는 너무 잔혹한 숫자이며, 학생에게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자신의 시간과 공간조차도 없다. 마치 억지로 시작도 끝도 없이 저 황무지를 걸어가야 하는 나그네처럼 우리는 항상 불안한 운명에 허덕인다. 그렇다면 이보다 더 약하고 힘든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사방이 사막으로 둘러싼 죽음의 모래언덕에서 발을 움직이려도 해도 다리조차 들어 올릴 힘도 없다. <어깨동무>에서 그런 사람이 나온다. 핵가족화로 인해 가족이 해체된다. 노인 혼자 집에 살고 있고, 옆에 강아지 하나만 있다. 아들 내외는 언제부터인지 소식이 닿지 않고, 옆에 늙은 강아지만 열심히 그 상황에서 주변에 알린다. 하지만 사람들은 개소리에 시끄럽게 여기고 그 이상으로 여기지 않는다. 마지막에 개가 짖는 소리마저 없어지자, 그 할머니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오늘 아버지와 이야기하면서 주변 친척 중에 오랫동안 결혼하지 않겠다고 버틴 조금 먼 친척의 이야기를 들었다. 촌수로 대략 6~8촌 사이 정도랄까? 나이가 60 넘은 여자 친척이 혼자 사는 이야기를 했다. 한 분은 자신의 집이 37평, 상당 넓은 아파트에 살고 있는데, 그 분의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옆에 아무도 없게 되었다고 한다. 옆에 오빠나 동생이 있더라도 언제까지 챙겨줄 수 없었다. 그분의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의지할 곳이 없는 외톨이가 된 것이다. 최근 노인들의 고독하게 죽는 일들은 종종 뉴스에서 본다.

 

사람이 죽는 것은 축복일 때도 있다고 하나, 대부분 고통이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더 고통스러운 일은 죽을 때 자신의 죽음조차 기억해주지 않은 세상이다. 내가 이 세상에 정말 태어나서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가? 물론 가족이 있는 사람들도 슬픈 현실에 처해져있다. 최규석 작가가 그린 편에서는 조금 충격적이었다. 최규석 작가가 매우 사실주의적인 작품을 그리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특히 극화 같은 그림체는 등장인물에 대해 캐릭터를 부여하는 것보다는 현실의 인물을 보여주는 강렬한 인상을 심어준다.

 

아파트 재건축 사업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죽었는지가 나에게 큰 충격적이었다. 건물 철거 중 건물 안에 사람이 있는지 모르고 작업하다 죽은 사건이나, 철거민들이 철거용역업체에게 저항하다 소화기를 뒤통수를 맞고 죽은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억울함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고, 재산권 침해이란 이름 아래 오히려 외면당한다. 이게 대한민국의 현실이고, 우리의 인권주소이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그런 일이 닥치지 않았으며, 그런 것과 무관하므로 모두 외면한다. 말해도 그런 신경 쓸 필요 없다거나 혹은 너나 잘하라고 한다.

 

그러면서 자신은 마치 좋은 사람인양 착실하게 살아가는 소시민인 것처럼 보여주는 행동에서 과연 그들도 자신에게 다가올 수 있는 지옥 같은 세상을 벗어날 수 있을까 여긴다. 차라리 이런 세상을 알고 무엇이 문제인지 알고, 억울한 일을 당해도 뭔가 돌파할 수 있는 방안을 찾을 수 있겠지만, 전혀 생각하지 못한 상태에서 일을 당하면 판단할 수 없을 정도로 혼란해진다. 개인이 이 사회를 바꿀 수는 없다. 전태일이 1970년 11월 휘발유를 몸에 뿌릴 때 권력은 변화하지 않았다. 그래도 사람들은 전태일의 죽음 아래 많은 것을 느꼈다.

 

사회가 힘들게 되면 개인에게 어렵게 되니, 결국 개인 모두가 문제의식을 느끼어 연대의식을 나누거나 혹은 끊임없이 자신의 의지로서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 인간은 작은 이익에 눈이 먼다. 그것에 시선을 고정할 때 이미 자신은 노예가 되었다는 사실조차 망각한다. <어깨동무>에 등장하는 우리의 이웃은 원래부터 그런 사람이었기보단 어쩔 수 없이 그런 상황으로 치닫게 된 경우가 많다. 열심히 살아도 도저히 바뀌지 않는 불안한 오늘, 내일이란 이름은 과연 자신에게 빛으로써 비추어줄까?

 

인권은 참으로 오래 전부터 이보다 더 심한 일이 있었다. 노예가 엄연히 존재하고, 여자는 사회적인 존재로서 권리가 박탈당하고, 인종차별과 종교전쟁이 늘 테러와 전쟁으로 이어져갔다. 결국 인간이 말하는 정의라는 것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왜 나는 되는데 남은 되지 말아야 하는가? 인권을 위해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은 타인이란 존재를 위한 것도 되지만, 결국 나에게 큰 이익이 된다. 약자를 위한 시설이 있다면, 언젠가 나나 주변사람이 이용할 수 있고, 보장이 잘 된 복지라면, 내가 무슨 일을 당해도 마음 편하게 지낼 수 있다. 지금에 눈앞에 있는 당근을 먹으러가지만, 그 당근을 땅에 심으면 수확물이 열린다. 우리는 땅에 심어야 할 최소한의 당근마저 뿌리를 뽑고 있다. 우리에게 미래 과연 어떤 것으로 다가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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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날 수 없는 사람들 - 또 다른 용산, 집을 잃은 사람들의 이야기 평화 발자국 8
김성희 외 5인 글.그림 / 보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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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만화책을 읽으면서 예전에 본 영화 2편이 생각났다. 하나는 <두 개의 문>이고 다른 하나는 <소수의견>이었다. 영화는 실제 사건인 용산참사사건을 토대로 제작했다. 영화에 대한 비교에서 전자는 사실과 영화의 편집을 했다면, 후자는 순전히 가상의 인물과 이야기로 만들었다. 전자는 그래도 르포르타주 형식을 어느 정도 차용했다면, 후자는 영화라는 특성인 엔터테인먼트적인 요소를 반영했다. 후자의 편이 카메라 앵글의 이동과 shot by shot의 전환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재미를 위한 요소에서 추리와 대립이란 플롯구조 장치도 잘 배치하였다.

 

약간의 재미를 주었는지 혹은 재현성에 대한 부분을 중시했는지 위의 영화들은 철거민들의 입장에서 보이는 현실에 대한 부당함을 제3자의 관점을 바라보았다. 카메라의 시선이 결국 어느 대상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면 어쩔 수 없이 주인공 위주로 돌아가는 것은 사실이나, 위 영화는 주인공의 성공보다는 오히려 실패에 초점을 두고 있다. 하나의 영웅 신화 서사를 반영한 게 아니라 영웅은 현실에서 나올 수 없거나 혹은 영웅은 나약한 존재로 그린다. 이길 수 없기에 패배적 상황은 오히려 이야기의 비극성을 드러내고, 여기에 대한 관객의 반성의식을 촉구한다.

 

문제는 관객은 영화를 영화로 볼 뿐이지, 그 이상을 기대하는 부류는 그다지 많지 않다. 이상하게도 드라마의 가상으로 조형된 세계에 빠져들어도 불편한 이야기는 뒤로 담아두지 않는다. 단지 자기들의 입맛에 어울리는 반찬만 찾는 현실이다. 불편한 현실에서 인간들은 불편함에 대한 배타의식이 잠재적으로 숨어있다. 배타적 반발감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인간은 자신에게 편리한 것만 추구하려고 하는 이기적인 욕구가 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인간에 대한 이타적인 정신은 이런 모순적 관계에서 인간이란 존재가 참으로 부조리하다는 것을 알려준다.

 

세상의 부조리, 자신이 느끼는 인식의 부조리, 이것들을 찾아 보여주는 것이 예술의 의무인 것 같다. 현대미술과 현대만화는 이미지로서 수용자에게 전달된다. 그러나 미술의 예술성에서 한계는 표현과 사유의 확장이지만 서사의 확장은 없다. 미술이 대중들에게 외면 받은 이유는 바로 서사가 없고, 서사는 없는 것은 공감대를 형성이 어렵다는 점이다. 공감대의 형성에서 만화는 그 힘이 강력한 정도가 아니라 전환점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물론 전환점을 불러도 다 바꾸는 행운까지 이어지지 않지만, 적어도 뭔가를 말하여 소통의 세계로 인도하는 노크까지 발전한다.

 

<두 개의 문>과 <소수의견>의 시나리오는 바로 기존 철거민들이 농성하는 상태에서 들이닥친 경찰병력과 대치하다 큰 변을 당한 것을 다루고 있다. 그런데 철거지역에서 거주하던 주민들이 대치하던 것은 경찰만이 아니었다. 그동안 주민들에게 각종 협박과 폭행을 시행하던 철거용역 깡패도 있었다. 개인적으로 업무상 아파트 재건축 현장에 돌면서 철거업체 관계자와 만난 적은 있어도 그렇게 난폭하거나 위험한 사람들은 없었다. <떠날 수 없는 사람들>에서 등장한 철거업체는 조금 달랐다.

 

조직폭력배는 아니지만, 마치 조직폭력배처럼 신속하게 주민들을 내쫓는 모습은 참으로 끔찍했다. 이 원인은 무엇인가? 예전에 사무실에서 점심을 먹으면서 물가가 상승하는 이유가 부동산 지대의 상승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부동산 가격이 상승하여 임대받은 상가가 자신의 기존의 이윤과 임대료를 해결하기 위해 상품의 가격이 오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런 말을 하자 말의 의미를 알 수 없다거나, 혹은 다른 친구와 전화통화하면서 물가의 상승이 그것이 아니라 복합적인 요소가 아니냐고 들었다. 물론 물가의 상승은 복합적이지만, 갑자기 임금이 상승하지 않고, 자재도 갑자기 올라가는 일도 드물다.

 

원자재조차도 처음에 가격이 상당히 오르다가 갑자기 등락하는 경우도 종종 본다. 그러나 부동산 가격은 계속 오르는 추세에 신도시단지 계획이나 주택재건축사업이 발표되면 갑자기 그 지역의 부동산이 폭등한다. 1년 사이에 그 부동산의 가치가 30% 이상 증가한다는 점은 무척이나 위험한 일이다. 부유한 자들에게 오히려 자신의 자산가치가 늘어나고 투자의 기회가 증대되지만, 중산층에게 부동산 시세 따라 자신의 집을 팔고 이사하는 부류가 아닌 이상 독이 된다.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부동산의 가격이 오른다고 이사를 늘 갈 수 있는 상황조차도 불가능하다.

 

자신의 생계는 부동산업으로 통해 주택매매가 아닌 임금을 받거나 장사하는 사람이라면 역으로 손해다. 재산세의 증가와 취득세의 증가는 역으로 세금납부가 부담된다. 그러나 제일 걱정인 부류는 세를 들어오거나 집을 구해야 하는 입주자들이다. 그들에게 돌아가는 부담은 주택매매를 통해 이익을 보려는 자들의 호주머니 속에 돈이 오르면 오를수록 심각해진다. 갑자기 증폭된 부동산가격 이전투구처럼 달려드는 투기바람, 한국의 헌법은 인간의 재산권과 생존권에서 안타깝게도 재산권에 손을 들어준다. 예전에 생존권을 찾아 떠난 사람이 어느 순간 재산을 가지게 되면 생존권이 위협받는 이들을 차갑게 외면한다.

 

세입 들어간 사람이나 혹은 그 집을 소유해도 반강제로 철거당할 입장에 놓인 주민에게 이런 사업들은 정말 무서운 일이다. <떠날 수 없는 사람들>은 그 입장에 놓인 사람에 대해 만화작가가 현장에 가서 취재하고 지켜본 작품이다. 르포르타주의 장르인 이 만화책, 한국에서 만화와 애니메이션은 이상하게도 나쁜 쪽으로 바라보고 있다. 운 좋게도 르포르타주의 장르의 만화책들은 도서관에 배치되거나 시민단체의 애용품으로 들어온다. 그것이 아니라면 웹툰으로 제작된 콘텐츠이다.

 

코믹스와 같은 재미가 아니라 사실성을 보여준 <떠날 수 없는 사람들>이기에 화폭에 담겨진 철거민들의 아픔은 매우 사실주의적으로 그려내었다. 그림체는 만화에서 종종 볼 수 있는 것일지 몰라도 이야기의 흐름과 상황적 묘사는 매우 사실적이다. 피해를 입은 주민들이 겪고 있는 아픔, 현실 앞에서 무력한 약자, 가해자가 오히려 피해자로 변신해 고소장을 날리는 현실, 용역깡패에게 폭행당해 경찰에게 도움을 요청해도 외면당하는 부조리, 이게 바로 우리의 현실이다.

 

만화로 그려낼 수밖에 없는 우리 생활 주변에 정보를 제공하는 방법은 TV, 라디오, 인터넷 매체 같은 매체로 전달된다. 그러나 그 매체가 그들의 입장과 상황을 외면한다. 오히려 자그마한 소식지로 폭력적이고 이기적인 주민으로 몰고 간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이를 임신한 임산부에게 폭행을 가하거나 저항할 힘도 없는 70대 노인에게 다수의 용역직원이 폭행하는 모습에서 이것이 과연 인간인가? 라는 생각으로 세상에 대한 환멸감을 느꼈다.

 

우리 사회는 최근 몇 년 사이 상당히 인심이 흉흉하게 변했다. 계속 인명사고가 끊이지 않은데 그 근본적 원인은 해결하지 않은 채 그냥 그대로 계속 빨리 흘러간다. 문제의 원인을 찾아 의문을 제기하면 다른 호기심거리와 분쟁거리를 내세워 문제의 안건을 물 타기 식으로 흘러 보낸다. 오늘도 <떠날 수 없는 사람들>은 계속 그 자리에서 현실의 벽과 싸우고 있을 것이다. 이것을 보고 우리가 당장 도울 수 방법은 없다. 그러나 이것을 보고 우리가 기억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 역사에 대한 기억은 잘못된 현실에서 미끄러지는 미래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시작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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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일이 세트 - 전5권
최호철 그림, 박태옥 글, 고래가그랬어 편집부 / 돌베개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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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문학(文學)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삶을 그대로 적는 게 아니라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나 혹은 일어날 가능성에 대해 적어보는 것도 문학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학소설을 읽어보면 문학이 대가들은 언제나 현실에 대해 다른 관점을 보게 해주었다. 18세기 낭만주의를 이끈 루소의 <신(新) 엘로이즈>는 생 프뢰와 줠리의 이룰 수 없는 사랑의 이야기를 다룬 것처럼 보이나, 그 안에는 당시 프랑스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 역시 담겨 있었다. 어떤 주제와 인물에 대해서는 진행하는 것만이 아니라 문학에서는 거기에 관련된 세계가 반영되어 있다. 문학의 세계는 반드시 이렇다! 라고 말할 수 없으나, 문학이 보여주는 인간의 삶에서 우리는 새로운 영역을 탐구할 수 있다는 점은 사실이다.

 

이번 주 주중과 주말, 나는 도서관 문학 장서판에 꽂혀있던 고(故) 조영래 변호사의 <전태일 평전>을 읽어보았다. 조영래 변호사란 이름을 잘은 몰랐다. 하지만 그가 부천경찰서성고문사건에서 성폭행당한 권인숙이란 여성을 위해 활동한 변호사다. 그녀가 성고문을 당한 이유는 노동자들의 권리를 위해 노동운동을 하다 경찰에 의해 구속되었고, 불법으로 자행된 고문과 구금이 그녀를 악몽의 시간을 주었다. 성폭행이 지금이야 죄를 저지른 자에게 그 대가를 치루는 것이 당연하겠지만(그러나 막상 재판 결과를 보면 어이가 없다), 그 당시에는 성폭행당하는 여성이 일방적으로 피해보는 것으로 끝이 난다.

 

여성들이 많이 몰려있던 피복 공장에서 그녀들의 나이는 대부분 20살 전후였다. 거기에 중고등학교에 다녀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아주 어린 소녀들이 있었다. 그녀들은 가난이란 이름에 의해 어린 시절 꿈도 희망도 없이 공장에 나가 고된 노동과 가혹한 환경에 시달리는 비극적 운명에 울부짖었다. <전태일 평전>에서도 외국에 어느 유명배우가 다른 배우에게 구혼을 받거나 혹은 다치는 일만 발생해도 신문에 나는데, 공장에서 힘겹게 일하다 병으로 쓰러지는 소녀들의 죽음은 아무도 기록해주지 않고, 아무도 찾으려 하지 않는다.

 

예전에 영화 <국제시장>이 나와 흥행했을 때, 나는 그 영화를 전혀 보고 싶은 생각이 없는 이유가 바로 당시 사회에 대해 감독과 제작진이 너무 기만한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아버지가 고생해서 자신이 좋은 삶을 살았다고 해서 그것은 단지 어느 소수의 입장이다. 아버지에게 바치는 영화는 말이 안 된다. 영화 자체는 대중문화이고, 대중문화는 문화콘텐츠사업으로서 불특정 대다수 군중에게 문화적으로 소비된다. 소비되는 문화에서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망각한다. 좋은 모습만 보려하지 불편한 것을 찾으려 하지 않는다. 문학적으로 들어가서 우리는 그 불편한 것을 찾아봐야 한다.

 

불편한 그 이야기가 사실적 관계로 이어지고 우리는 그 사실에 대한 진실성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솔직히 그런 이야기는 정말 재미가 없다. 남의 고통스럽고 불행한 이야기를 주구절절 듣는 것도 일이다. 웃기게도 남에게 나쁜 일이 생기면 왠지 고소하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전태일 평전>과 전태일 수기나 일기를 토대로 만든 최호철 작가의 <태일이>, 제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전태일이란 인물은 한국 노동운동사에서 아주 무거운 이름이다. 책 제목을 전태일이란 이름에 다른 호칭을 집어넣지 않고, 단순히 <태일이>라고 했다.

 

<태일이>, 왠지 듣기에 이름이 뭔가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고, 친근하게 다가온다. 1970년 11월 13일 서울 청계시장 앞 도로에서 몸에 휘발유를 뿌리고 분신자살한 그가 40년 정도 지난 오늘 날에 다시 살아나고 있다.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읽으면서 역사라는 현재와 지난 과거와 계속 대화하는 것이라 한다. 전태일의 역사가 현대에 와서도 역사라는 매개체 아래 계속 대화하고 있는 것이다. <태일이>는 그런 무거운 전태일의 일대기를 만화라는 매체로 통해 쉽게 접근하려 했다. <전태일 평전>을 읽으면 총 5편으로 구분되어 있고, 만화책 역시 총 5권으로 이루어졌다.

 

각 책마다 전태일의 모습이 담겨있다. 글로 보는 전태일의 모습과 다르게 만화책으로 읽는 전태일의 모습은 참으로 마음이 아팠다. 글로 읽는 것을 이미지로 연상하더라도, 시각적으로 만화로 보는 이미지의 흡수는 충격적인 부분이 많다. 게다가 마지막에 와서는 만화가 아닌 사진을 보면 더욱 그렇다. 전태일의 죽음 이후 노동운동에 소극적인 이소선 여사는 직접적으로 개입한다. 아들이 죽자, 노동당국과 공장업주들이 와서 큰돈을 내밀면서 보상금을 줄 테니 그만 하자라고 하는 모습에서 현실의 도덕성에 한숨이 나온다. 자신의 아들이 여공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분신하여 몸을 날리는데, 그것을 해결해주지 않고 오히려 묵살하려고 한다.

 

만약 거기서 돈만 받고 없던 일로 하면 평생 그 짐은 이어 후회만 하는 삶을 살게 된다. 그녀는 줄을 때까지 후회하지 않은 삶을 산다. 단지 아들에게 들은 한 마디가 가슴에 화살을 날리는 기분이다. 전태일의 동생은 오빠가 나가는 모습을 보고, 학비가 밀렸다고 돈을 달라고 했다. 그때 자신이 한 말에 대해 매우 슬픈 후회를 했다고 한다. 전태일은 공장에 가면 막내 동생보다 어린 소녀들이 손에 물집이 잡혀 피가 나올 정도고, 공장에 공기가 통하지 않아 폐암으로 죽고, 게다가 죽어 가는데 치료를 해주는 것이 아니라 매로 때리고 욕설을 하는 모습을 참으로 괴롭다.

 

예전에 들어본 적이 있다. 내가 살던 지역에 규모가 큰 공단이 몇 군데가 있었기에 그 공장에 일하던 여공들의 비참한 삶을 말이다. 재봉기계에서 바느질하다 졸음을 이기지 못해 그대로 바늘이 손가락을 찌르는 것을 말이다. 잠이 오지 않게 하려고 커피나 박카스 정도 먹이는 것은 그야말로 신사적인 행동이다. 강제로 혈관주사를 놓아 밤과 새벽에도 인간을 기계와 같이 돌렸다. 그 어린 소녀들에게 말이다. 배고프다는 것은 엄청 슬픈 일이다. 가난하다는 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런다고 배고픔과 가난 그 자체가 죄가 아닌데, 왜 죄가 되어야 하는 것일까? 전태일이 날린 세상에 대한 분노를 자신과 자신의 주변에서 고통 받는 자들의 한계에 부딪혔기 때문이다. 내가 고생하여 형제와 자식이 성공할 수 있다면 희생하는 것은 우리는 줄곧 보아왔다. 하지만 정작 그렇게 되어도 자신의 몸이 병들고 정신적으로 죽어있다면 성공했다고 볼 수 있는가? 성공한 가족이 있어도 그 가족에게 평생 지울 수 없는 족쇄로 안겨준다. 성공도 아주 일부분이 나머지는 자신의 운명을 되풀이 되는 비극에 처해진다.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에서 늘 가난한 자들은 자신의 운명에서 평생을 벗어나지 못한 채 고통스럽게 죽는다. 오직 자신을 괴롭히는 쇠사슬은 죽음의 순간에 올 때 비로소 풀린다. 죽음이 자신을 자유롭게 해도 그 자신의 마음은 자유롭지 못하고, 그들의 죽음이 있다고 해도 남은 후예들에게 아무런 의미를 주지 못하면 그들은 살아갔다고 해도 살아있었다고 말할 수 없다.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은 채 그저 사라진다면 너무 슬픈 것이 아닌가? 그래서 <태일이>를 보면서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태일이가 몸을 던진 것이 거기서 끝난 게 아니라 계속된다는 점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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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평전 - 신판
조영래 지음 / 아름다운전태일(전태일기념사업회)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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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몇 년 전에 이소선 여사가 세상을 타계하셨다. 아마 하늘 위에서 한국 땅을 바라보는 그분의 아들인 전태일을 만났을지도 모른다. 한국인에게 죽음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돌아가는 것이라 하여 귀천(歸天)이라 한다. 죽어서 사라지지 않았다면 분명 세상 밖의 어디서 바라보고 있다면 자신이 살아온 삶의 흔적에 부끄러운 일을 남기면 후회하게 된다. 나라고 그렇게 올바르고 좋은 삶을 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세상에 부끄러운 짓을 하지 않으려 하고, 만약 했었다고 느끼거나 주변에서 충고를 들으면 거기에 대한 반성을 조금이라고 실시하려 한다. 죽음 그 자체는 무서우나, 더 무서운 것은 죽음 이후의 세상이다.

 

나는 육체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나, 타인의 정신 안에서는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읽은 <전태일 평전>은 여러모로 가슴을 아프게 만드는 책이다. 전태일이란 이름을 중고등학교 시절에 들어본 것 같았다. 당시 상당한 연기력을 가진 홍경인 씨가 드라마가 아닌 영화촬영을 한 것이다. 홍경인 씨가 연기한 배우와 영화 제목이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었다. 아직도 기억난다. 전태일의 연기를 하기 위해 스턴트맨이나 대역 없이 홍경인 혼자서 했었다고 한다. 전태일의 모습을 재현하려면 가장 어려운 고비가 남았다.

 

전태일은 비참한 노동환경에 한탄하며, 이 세상의 부조리와 모순에 절망하였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몸에 휘발유를 뿌린 후에 불을 붙여 스스로 화형을 거행하였다. 노동근로기준법을 손에 잡고, 법전이 있어도 아무런 쓸모없는 그 책을 부여잡고 자신의 몸과 같이 불길 속으로 타올랐다. 홍경인 씨가 연기할 때 그 장면은 무척 위험했다. 하지만 그 장면이 가장 인상적이고 모든 것의 의미였다. 더 이상 이 세상이 변하지 않는다면 내가 희생하여 변할 수밖에 없는 것인가? 죽음조차 불사할 수밖에 없던 한 노동자의 슬픔은 우리 사회에 깊은 파동을 넘긴다.

 

사실 한국의 노동문제만이 아니라 인권문제는 여전히 심각하다. 그러나 노동문제가 매우 심각한 이유는 인간은 하루에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옷을 입고 다니지 않으면 삶을 영위할 수 없다. 결국 삶의 목적을 위해 우리는 일을 해야 하고, 일을 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경제적인 조건이 성립되어야 한다. 경제적으로 현재 우리 사회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구분되어 임금에 대한 갈등이 생기고, 최근 임금피크제도라는 이름으로 신구 간의 갈등이 일어난다. 자신이 일하는 곳이 자신의 가게가 아니라 대부분 고용되어 일을 한다.

 

일을 하면 임금에 의한 인건비가 기업으로서 많은 지출비용에 해당된다. 그래서 대부분 기업은 비정규직을 선호하고, 그들에게 장기계약보다 단기계약을 원한다. 퇴직금이나 휴가, 각종 복리후생 규정에서 비정규직에게 들어가는 비용이 훨씬 저렴하기 때문이다. <전태일 평전>을 읽으면서 그나마 현대에 개선된 점은 아동노동이다. 그러나 아동이 현재 가혹한 노동을 하지 않을 뿐이지, 그들이 성장하면 가혹한 노동현장에 투입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자신의 자녀들을 좋은 근무조건에 일하게 하고 높은 수익을 받기 원하여 많은 부모들은 현실의 문제를 뒤로 한 채 자녀들에게 공부를 강요한다.

 

아무리 강요해도 일부 누구는 어려운 환경에서 분명히 일을 해야 한다. 지금은 일부일지 몰라도 전태일이 살던 시절에는 대부분이 그래 했고,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앞으로 미래에 그런 일이 되풀이 될 가능성이 높다. 임금의 문제가 계속 사회적으로 문제되어 근본에 대한 해결안이 나오지 않으면 나중에 피해보는 것은 힘이 없는 약자이다. 자신이 겪은 배고픔을 자식에게 주지 않겠다며 공부시켜도 결국 다시 돌아오게 되는 구조다. 이런 세상에 희망이란 무엇이고 행복이란 무엇인가?

 

나는 어린 시절 전혀 몰랐다. 하지만 그런 불편한 현실이 나에게도 일어났다. 경제적인 임금보단 노동환경에 대한 부분이다. 아버지가 선원 노동자로 일하면서 나이가 연로하여 비정규직으로 일을 하기 시작했다. 퇴직금도 못 받는 일도 생기고, 일하던 중에 다쳐도 산업재해로 인정하지 않았다. 온 몸에 상처와 바늘자국 그리고 눈에는 세상에 대한 환멸감이 가득한 것을 볼 때가 있다. 노동자의 몸은 과연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근로조건은 그의 노동력을 구매하는 것이지 그의 인생과 인간성까지 사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라면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라고 생각하면 가슴이 막막하다.

 

그러나 세상은 자신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것을 외면하고, 설사 그것에 대한 문제를 이야기하면 시끄러운 잡음만 들릴 뿐이다.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을 것이니 앞으로 그런 일을 없을 것이라 믿으면서 세상의 흐름에서 바닥에 내려오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친다. 더 무서운 것은 자신에게 그것이 끝난 게 아니라 계속 영원히 되풀이는 된다는 점이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으나, 주변의 도처에 쇠사슬에 의해 묶여 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카를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에서는 “프롤레타리아에게 잃은 것을 쇠사슬 밖에 없다.”라고 했다.

 

인간은 분명 자신의 생명을 가지고 존엄하게 살아가야 하나 이미 세상은 불평등으로 가득하다. 선천적 자연적 불평등은 어쩔 수 없다. 이미 태어날 때부터 장애를 가지거나 또는 특별한 신체능력을 가졌다면 누구를 탓할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도덕적 사회적 불평등은 분명 문제다. 사회적 도덕적 불평등은 고의적인 요소가 너무 심하기 때문이다. <전태일 평전>을 읽으면서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이 생각났다. <자본>에서 영국 공장 감독관이 작성한 기록이 나온다. 다행히 공장 감독관은 당시 암울한 공장노동자의 현실을 자세히도 기록했다.

 

대부분 공장에 어린 소녀들이 옷을 만드는 작업공정에 투입되었다. 이들에게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노동을 시켰으며, 하다못해 잠을 못 자게 하여 다음날 아침까지 강제노동을 시킨 적도 다분했다. 이제 5살 정도 되는 남자아이들은 기계의 사이 끼여 있는 불순물을 골라내기 위해 추운 날 맨손으로 쉴 새 없이 일을 한다. 환기가 좋지 않아 신선한 공기도 흡입하지 못하고, 음식도 볼품없다. 게다가 일을 조금이라도 늦추면 온갖 욕설과 심지어 구타까지 일어난다.

 

이게 인류가 발전했던 원동력 중에 하나이다. 그 과정에서 발생된 성과의 열매는 모조리 기득권에게 돌아갔다. 이것이 우리의 인류의 역사였고, 그 비극은 한국에서도 일어났다. 1960년대 산업화란 이름으로 공장에서 모터가 돌아가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모터도 가열되면 고장이 나므로 쉬는 시간은 노동자들도 쉴 수 있는 시간이었다. 모터가 돌면 노동자도 돌고, 모터는 기계로 이루어졌지만, 노동자는 그 모터의 부품 중에 하나였다. 사람이 휴식을 취하지 않고 일만 하면 몸에 병이 든다.

 

병자를 두고 가련하다고 말 한 마디로 못해줄망정, 그들에게 온갖 야유와 조롱을 퍼붓고, 그런 병자들은 낡은 골방에서 혼자 외롭게 죽어간다. 위선으로 넘치고 폭력적인 권력 그리고 아무도 도와주지 않은 비정한 현실에 자신과 세상을 저주하면서 사라진다. 전태일이 자신의 눈앞에서 입에 피를 토하며 죽어가는 여공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제 나이가 중학교에서 예쁜 교복을 입고 친구들이랑 수다 떨며 지내야 할 그 소녀들이 입에서 피를 닦지도 못한 채 눈을 감아버렸다.

 

이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이제 그런 노동은 한국사회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이어졌다. 외국에서 온 노동자 그것은 여성노동자에게 그때보다 설비와 제도가 발전했다고 해도 무서운 세상의 욕심에서 한도 끝도 없는 억압에 시름한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가? 전태일과 친구들처럼 당장이라도 거리에 나가 시위를 하거나 몸에 휘발유를 뿌리라고 권하지 않는다. 단지 이것을 읽고 무엇이 옳고 그릇된 것인지 생각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런 세상이 과연 아름다울 수 있을까? 이런 세상에 자신이 올바른 사람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가! 세상은 언제나 비참한 최후의 비극을 맞이한 후에 깨닫는다. 우리의 앞날에 그런 비극을 되풀이 되지 않기 위해서 전태일이란 이름을 가슴에 새겨 두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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