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의 변명 외 - 법과 죽음에 대한 통찰 돋을새김 푸른책장 시리즈 13
플라톤 지음, 권혁 옮김 / 돋을새김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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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대화록은 서양문명에서 기본적인 토대가 된다. 그의 사상이 유럽을 지나 전 세계로 퍼져 나가면서 플라톤의 이름과 함께 소크라테스라는 인물의 이름도 퍼져 나간다. 사실 생각해보면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제자라고 할지라도, 그가 언제나 소크라테스의 옆에만 있었을 것은 아닐 것이다. 대화록은 결국 소크라테스를 앞을 내세우고, 주변 인물들과 대화를 하는 것이다. 그 많은 분량을 혼자서 다 기억하여 작성했을까? 아니라면 주변의 이야기를 들어 정리하여 기록했을까? 여전히 그런 부분은 의문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는 플라톤이 적은 글들이 소크라테스의 이야기라고 믿을 수밖에 없고, 소크라테스가 발언한 모든 이야기가 사실이든 아니든 소크라테스가 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2,600여 년 전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가지 않은 이상 그것은 알 수 없다. 플라톤의 저서에서 그는 초기, 중기, 후기 3단계로 구분되어 작성한다. <파이돈>이란 대화록은 소크라테스가 죽기 전에 소크라테스와 주변 친구들이 모여 대화를 나눈 것을 정리한 내용이다. 책에서는 플라톤은 등장하지 않는다. 플라톤은 몸이 아파서 집에서 쉬고 있었으며,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찾아갔다.

 

<파이돈>을 읽으면서 생각할 점은 <파이돈>은 소크라테스가 멜레토스라는 인물에 의해 무고를 당하면서부터다. 관아에서 자신이 고소당한 것을 안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관아로 가는 도중에 <에우티프론>이란 대화록이 시작되고, 다음으로 <소크라테스의 변론>, 사형선고 이후 감옥에서 친구 <크리톤>과 대화를 나눈 것으로 하여 최종적으로 <파이돈>으로 마무리 된다. 그러니깐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안 상태에서 서사적 흐름으로 정리하자면 <에우티프론> → <소크라테스의 변론> → <크리톤> → <파이돈>이란 사실이다.

 

소크라테스가 죽을 수밖에 없던 이유는 펠레폰네소스전쟁 패배 이후 라케다이몬이란 스파르타에 의한 과두정부가 수립되고, 30인으로 구성된 지도자들은 민주정 해체 이후 제대로 된 정치를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독재와 폭력을 일삼고, 수많은 시민을 처형하고 재산을 가로채었다. 그 중에 소크라테스의 제자가 있었고, 그들은 민주정 혁명 이후 권력을 잃고 도망치거나 처형당했다. 하지만 당시 아테네 시민들은 그들에 대한 분노를 참기 어려웠으며,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뭔가 하나의 사건이 필요했다.

 

소크라테스를 죽인 이유는 그런 분위기에서 소크라테스의 제자가 과두제의 위원에 있었다는 이유도 있지만, 그가 평소 바른 말을 너무 많이 하기 때문에 민주정 정부 수립자들에게 상당히 비위가 거슬렸다. 소크라테스가 죽은 이유에서 단순히 그의 제자들이 반역자라서 몰아넣기 식이 아니라, 단지 그가 없어지면 좋겠다는 심리적인 압박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에게 주어진 신적인 영감 그리고 지혜를 찾고자 하는 의욕으로 아테네지역을 돌고 돌았다. 특별한 일이 없다면 평생 아테네에서 벗어난 적이 없는 소크라테스로 봐서는 이 세상에 자신의 무지를 깨우쳐 줄 철인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 시대의 유명한 시인, 철학자, 정치가, 각계 인사들은 소크라테스를 만날 때마다 자신의 논리가 부족한 것이 들통 나고, 소크라테스 때문에 자신의 명성에 흠이 가고, 그로 인해 마음속에 앙심을 품어버린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단순히 정치적 권력에서 비롯되는 숙청보다는 사회적인 여론에 의한 숙청에 가까웠다. 단지 사회적 죽음에서 권력자들이 뒤에서 압박을 가했기에 그의 죽음은 마녀사냥으로 볼 수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소크라테스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인 것일까 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인간에게 죽음과 삶은 무엇인가? 기존의 철학에 대한 역사에서 physics(물리학)는 과학적인 요소를 보았다. 지구는 무엇이고, 만물의 요소는 무엇인지, 살아있는 것은 무엇이고, 운동하는 그 모든 것에 대한 탐구가 바로 과학적인 철학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어떤 현상에 대해 연구하는 것이기에 눈에 보이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단지 돌이 떨어지는 것은 눈에 보이는 현상이라도 돌이 왜 떨어지고, 떨어지는 돌이 어느 경우로 떨어지며, 그것에 작용하는 힘은 무엇인지는 물리학적으로 시각적인 영역보단 비시각적인 수학적 영역으로 도달한다.

 

이런 인간의 사고방식이 눈에 보이지 않은 관념적 존재, 있지도 않은 어느 이미지가 구현된 이데아의 세계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한다. 소크라테스가 철인군주가 있어야 올바른 국가를 만들 수 있다는 <국가론>에서는 플라톤의 사상적 토대를 알 수 있다. 플라톤은 자신의 제자들에게 수학을 모르면 안 되나, 또 하나가 중요한 학문으로 기하학이었다. 기하학은 일반적인 도형과 다르다. 그런 모양이 구상되는 이유는 인간의 뇌에서 사유할 수 있는 세계가 기하학적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머리에서 생각되는 Simulating하는 것은 곧 가상적인 세계를 상상으로 그려 하나의 장치로서 현실에 적용할 수 있다.

 

<국가론>에서 플라톤은 왜 기하학이 중요하고 수학이 중요한지를 알려준다. 전쟁을 하려는데, 적군의 수와 아군의 수를 파악하고, 군부대도 수군인지 육군의 형태로 보고, 전장의 지형과 지리 그리고 아군의 진형을 파악하여 적군하고 싸우는 것이 올바른 것이다. 전쟁에서 이른바 지형과 지리를 보고 진형을 짜서 치는 것은 삼국지에서 제갈량이 흔히 사용하던 방법이다. 수전에서도 파도의 높이나 물의 흐름 그리고 바람의 세기와 방향은 승부의 패배를 결정짓게 하는 요소다. 그런 점에서 현실이 아닌 이데아의 세계가 현실에서 모방되어진다는 점에서 플라톤의 사상은 기존의 physics에서 공간적 층위가 하나 더 올라간 Meta-physics라는 형이상학을 중요하게 여긴 것이다.

 

형이상학은 눈에 보이지 않은 세계를 말한다. 눈에 보이지 않음이란 곧 현실에 있는 것이 아니게 되고, 현실이 아닌 것이 되는 것은 우리 인간의 육체적인 조건보단 정신적인 조건을 중요하게 본 것이다. <파이돈>을 읽을 때 바로 이런 점을 유념해야 하는 이유는 플라톤은 현실이 이데아에 존재하는 것들을 모방했기에 진정한 진리는 현실에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현실에 존재하는 그 모든 것은 언젠가는 모두 사라지고, 오로지 이데아에 존재하는 그 개념만이 영원불멸할 것이란 점이다. 그렇다면 이것을 인간에게 치환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인간은 보통 동물보다 오래 산다.

 

인간이 다른 동물보다 오래 사는 이유는 바로 다른 동물처럼 어릴 때부터 바로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보살핌을 받는 기간이 길기 때문이란 말도 있다. 자연세계의 야생동물은 태어나자말자 걸어야 하고, 새들은 수개월 안으로 날개를 펴고 날지 않으면 살 수 없다. 자연의 세계는 잔혹하기에 그만큼 새끼들이 보호받는 기간이 짧아 충분히 성장해야 하는 기간이 짧다. 우리 인간이 사육하는 소들도 태어난 지 1년도 되지 않아 도축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몸이 다른 동물보다 수명이 길어도 죽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파이돈>에서 소크라테스가 죽는 나이가 70이다.

 

지금의 70이란 수명에 죽는다면 그렇게 장수했다고 볼 수 없으나, 고대 사회에서 70이라면 상당히 장수한 나이다. 죽음이 다가온 나이에 조금이라도 더 살 것이라고 추태를 부리면 그는 오히려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여겼다. 소크라테스가 죽음의 길목에서 왜 그래 두려워하지 않은 것일까? 현대사회는 물질적 요소가 중시되는 사회다. 즉 자본주의의 도래와 그로 인한 산업화, 인간이 하나의 존재론적인 가치로서 보는 것이 아니라 도구의 기능으로 보는 것이다. 인간의 존재적인 가치에서 고대 사회에서는 이미 태어난 순간부터 운명적으로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이 있는 것은 당연했다.

 

현대사회는 피지배계층이 계속 억눌러 사는 것이 부당하게 여기게 되었다. 그런 가치적인 차이는 그 당시의 사회상인 것이다. 운명의 흐름에서 그리스에서 신의 존재를 믿었다. 결단코 제우스께! 라는 말과 여러 올림포스의 신을 입으로 내뱉는 행위는 신은 언제나 자신의 곁에 있기에 거짓을 일체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신이 존재한다고 여기는 세상이기에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비장하게 끝낼 수 있다. 그에게 각종 신과 영웅 게다가 인간지성사에서 큰 활약을 보여준 성현들을 하루라고 먼저 찾아가서 볼 수 있다는 생각이 죽음조차도 두렵지 않았다.

 

죽음은 행복의 축복인가 불행의 저주인가? 실존주의자에 의한 판단에서는 삶과 죽음은 언제나 같이 붙어있고, 나누어지지 않으며, 살아있는 게 죽어가는 것이다. 삶과 죽음이 같이 있다고 한다면 죽음이야 말로 삶의 완성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바로 이런 정신적인 세계가 펼쳐진 영혼의 세계가 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그 두려움을 이길 수 있었다. 소크라테스가 죽음 아래 무난히 친구들과 대화를 나눈 이유는 인간은 죽는 것은 당연하고, 죽음 앞에서 당당하게 보이야 하는 것은 육체는 썩어서 없어지질 모르지만, 영혼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영원한 것이 있다면 영원하지 못한 것이 있고, 좋은 게 있다면 좋지 못한 게 있다. 소크라테스의 변증론에서 찾아볼 점은 바로 대조되는 것이 분명히 있다는 사실이다. 죽어있는 것은 살아있는 것이 반대고, 삶은 죽음에서 나왔다면, 삶 이후에 죽음은 당연한 것이라 말한다. 단지 그가 죽음을 받아들인 과정에서 충분히 삶을 선택할 수 있는데도 그렇지 않은 이유는 <크리톤>을 더불어 참고하면 좋다. 소크라테스는 해외로 망명하거나 탈옥하면 삶을 영위하나, 그 이후 자신에게 떨어진 불명예, 주변에 친구와 가족들이 피해를 당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자신으로 하여금 남에게 피해를 줄 수 없고, 자신이 잘못되었다고 당시의 권력에 소크라테스의 머리를 숙인다면, 소크라테스는 이때까지 거의 1/3에 해당되는 인생을 속인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소크라테스가 그동안 자신을 속이지 않고, 오로지 진실을 구하기 위해 재물과 권력을 멀리했다. 그런데 재물에 의지하여 탈옥하고, 권력에 머리 숙여 목숨을 구걸하면 자신을 고발하던 사람의 책략에 걸리는 것이다. 그들은 소크라테스를 없애고 싶은 마음보다 소크라테스의 비굴한 모습을 보고 싶어 한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선택한 이유는 그들의 권력에 의해 죽더라도 그들의 의지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신념이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고대 그리스의 세계에 위대한 인간을 없애버린 비극이 되었고, 후대 역사에서 소크라테스를 죽게 만든 장본인들은 어리석고 비겁한 인물로 낙인찍혔다. 진심 영혼이 있어 천국과 지옥의 세계에서 재판이 있다면, 소크라테스를 죽인 자들은 평생 지울 수 없는 죄로 영원한 고통을 받을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그런 점에서 자신은 그 영원한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인간에게 영혼이 있고, 육체라는 일시적인 허물은 그저 스쳐가는 나그네인 것이다. 영혼의 불멸이 있으니 오히려 그 영혼을 갈고 닦는 것이 소크라테스의 목적이다. 신의 분부를 따라 지혜를 갈구하는 인간이 결국 마지막에 신과 가장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결국 그것은 자신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이 한 일은 남이 다 알 수 없다. 오로지 아는 자는 신이라면, 신이 눈앞에 보이지 않다면 영혼 즉 관념 속에 세계에 존재한다.

 

자신의 삶에 후회 없는 삶을 사려면 신은 언제나 옆에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는 점이다. 신이 있어 나를 알아주면 내가 현실에 죽어도 현실을 벗어난 다른 세계에서는 충분히 자신을 알아준다는 점이다. 오늘 현실에서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아니면 자신의 착각이나 어리석음으로 주변에 얼마나 많은 민폐를 보여주고 있는 것일까? 모를 수 있다. 모든 것을 인간이 알 수 없다. 단지 그것을 알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야 말로 소크라테스가 추구한 가치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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