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일이 세트 - 전5권
최호철 그림, 박태옥 글, 고래가그랬어 편집부 / 돌베개 / 2009년 2월
평점 :
품절


문학(文學)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삶을 그대로 적는 게 아니라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나 혹은 일어날 가능성에 대해 적어보는 것도 문학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학소설을 읽어보면 문학이 대가들은 언제나 현실에 대해 다른 관점을 보게 해주었다. 18세기 낭만주의를 이끈 루소의 <신(新) 엘로이즈>는 생 프뢰와 줠리의 이룰 수 없는 사랑의 이야기를 다룬 것처럼 보이나, 그 안에는 당시 프랑스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 역시 담겨 있었다. 어떤 주제와 인물에 대해서는 진행하는 것만이 아니라 문학에서는 거기에 관련된 세계가 반영되어 있다. 문학의 세계는 반드시 이렇다! 라고 말할 수 없으나, 문학이 보여주는 인간의 삶에서 우리는 새로운 영역을 탐구할 수 있다는 점은 사실이다.

 

이번 주 주중과 주말, 나는 도서관 문학 장서판에 꽂혀있던 고(故) 조영래 변호사의 <전태일 평전>을 읽어보았다. 조영래 변호사란 이름을 잘은 몰랐다. 하지만 그가 부천경찰서성고문사건에서 성폭행당한 권인숙이란 여성을 위해 활동한 변호사다. 그녀가 성고문을 당한 이유는 노동자들의 권리를 위해 노동운동을 하다 경찰에 의해 구속되었고, 불법으로 자행된 고문과 구금이 그녀를 악몽의 시간을 주었다. 성폭행이 지금이야 죄를 저지른 자에게 그 대가를 치루는 것이 당연하겠지만(그러나 막상 재판 결과를 보면 어이가 없다), 그 당시에는 성폭행당하는 여성이 일방적으로 피해보는 것으로 끝이 난다.

 

여성들이 많이 몰려있던 피복 공장에서 그녀들의 나이는 대부분 20살 전후였다. 거기에 중고등학교에 다녀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아주 어린 소녀들이 있었다. 그녀들은 가난이란 이름에 의해 어린 시절 꿈도 희망도 없이 공장에 나가 고된 노동과 가혹한 환경에 시달리는 비극적 운명에 울부짖었다. <전태일 평전>에서도 외국에 어느 유명배우가 다른 배우에게 구혼을 받거나 혹은 다치는 일만 발생해도 신문에 나는데, 공장에서 힘겹게 일하다 병으로 쓰러지는 소녀들의 죽음은 아무도 기록해주지 않고, 아무도 찾으려 하지 않는다.

 

예전에 영화 <국제시장>이 나와 흥행했을 때, 나는 그 영화를 전혀 보고 싶은 생각이 없는 이유가 바로 당시 사회에 대해 감독과 제작진이 너무 기만한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아버지가 고생해서 자신이 좋은 삶을 살았다고 해서 그것은 단지 어느 소수의 입장이다. 아버지에게 바치는 영화는 말이 안 된다. 영화 자체는 대중문화이고, 대중문화는 문화콘텐츠사업으로서 불특정 대다수 군중에게 문화적으로 소비된다. 소비되는 문화에서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망각한다. 좋은 모습만 보려하지 불편한 것을 찾으려 하지 않는다. 문학적으로 들어가서 우리는 그 불편한 것을 찾아봐야 한다.

 

불편한 그 이야기가 사실적 관계로 이어지고 우리는 그 사실에 대한 진실성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솔직히 그런 이야기는 정말 재미가 없다. 남의 고통스럽고 불행한 이야기를 주구절절 듣는 것도 일이다. 웃기게도 남에게 나쁜 일이 생기면 왠지 고소하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전태일 평전>과 전태일 수기나 일기를 토대로 만든 최호철 작가의 <태일이>, 제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전태일이란 인물은 한국 노동운동사에서 아주 무거운 이름이다. 책 제목을 전태일이란 이름에 다른 호칭을 집어넣지 않고, 단순히 <태일이>라고 했다.

 

<태일이>, 왠지 듣기에 이름이 뭔가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고, 친근하게 다가온다. 1970년 11월 13일 서울 청계시장 앞 도로에서 몸에 휘발유를 뿌리고 분신자살한 그가 40년 정도 지난 오늘 날에 다시 살아나고 있다.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읽으면서 역사라는 현재와 지난 과거와 계속 대화하는 것이라 한다. 전태일의 역사가 현대에 와서도 역사라는 매개체 아래 계속 대화하고 있는 것이다. <태일이>는 그런 무거운 전태일의 일대기를 만화라는 매체로 통해 쉽게 접근하려 했다. <전태일 평전>을 읽으면 총 5편으로 구분되어 있고, 만화책 역시 총 5권으로 이루어졌다.

 

각 책마다 전태일의 모습이 담겨있다. 글로 보는 전태일의 모습과 다르게 만화책으로 읽는 전태일의 모습은 참으로 마음이 아팠다. 글로 읽는 것을 이미지로 연상하더라도, 시각적으로 만화로 보는 이미지의 흡수는 충격적인 부분이 많다. 게다가 마지막에 와서는 만화가 아닌 사진을 보면 더욱 그렇다. 전태일의 죽음 이후 노동운동에 소극적인 이소선 여사는 직접적으로 개입한다. 아들이 죽자, 노동당국과 공장업주들이 와서 큰돈을 내밀면서 보상금을 줄 테니 그만 하자라고 하는 모습에서 현실의 도덕성에 한숨이 나온다. 자신의 아들이 여공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분신하여 몸을 날리는데, 그것을 해결해주지 않고 오히려 묵살하려고 한다.

 

만약 거기서 돈만 받고 없던 일로 하면 평생 그 짐은 이어 후회만 하는 삶을 살게 된다. 그녀는 줄을 때까지 후회하지 않은 삶을 산다. 단지 아들에게 들은 한 마디가 가슴에 화살을 날리는 기분이다. 전태일의 동생은 오빠가 나가는 모습을 보고, 학비가 밀렸다고 돈을 달라고 했다. 그때 자신이 한 말에 대해 매우 슬픈 후회를 했다고 한다. 전태일은 공장에 가면 막내 동생보다 어린 소녀들이 손에 물집이 잡혀 피가 나올 정도고, 공장에 공기가 통하지 않아 폐암으로 죽고, 게다가 죽어 가는데 치료를 해주는 것이 아니라 매로 때리고 욕설을 하는 모습을 참으로 괴롭다.

 

예전에 들어본 적이 있다. 내가 살던 지역에 규모가 큰 공단이 몇 군데가 있었기에 그 공장에 일하던 여공들의 비참한 삶을 말이다. 재봉기계에서 바느질하다 졸음을 이기지 못해 그대로 바늘이 손가락을 찌르는 것을 말이다. 잠이 오지 않게 하려고 커피나 박카스 정도 먹이는 것은 그야말로 신사적인 행동이다. 강제로 혈관주사를 놓아 밤과 새벽에도 인간을 기계와 같이 돌렸다. 그 어린 소녀들에게 말이다. 배고프다는 것은 엄청 슬픈 일이다. 가난하다는 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런다고 배고픔과 가난 그 자체가 죄가 아닌데, 왜 죄가 되어야 하는 것일까? 전태일이 날린 세상에 대한 분노를 자신과 자신의 주변에서 고통 받는 자들의 한계에 부딪혔기 때문이다. 내가 고생하여 형제와 자식이 성공할 수 있다면 희생하는 것은 우리는 줄곧 보아왔다. 하지만 정작 그렇게 되어도 자신의 몸이 병들고 정신적으로 죽어있다면 성공했다고 볼 수 있는가? 성공한 가족이 있어도 그 가족에게 평생 지울 수 없는 족쇄로 안겨준다. 성공도 아주 일부분이 나머지는 자신의 운명을 되풀이 되는 비극에 처해진다.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에서 늘 가난한 자들은 자신의 운명에서 평생을 벗어나지 못한 채 고통스럽게 죽는다. 오직 자신을 괴롭히는 쇠사슬은 죽음의 순간에 올 때 비로소 풀린다. 죽음이 자신을 자유롭게 해도 그 자신의 마음은 자유롭지 못하고, 그들의 죽음이 있다고 해도 남은 후예들에게 아무런 의미를 주지 못하면 그들은 살아갔다고 해도 살아있었다고 말할 수 없다.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은 채 그저 사라진다면 너무 슬픈 것이 아닌가? 그래서 <태일이>를 보면서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태일이가 몸을 던진 것이 거기서 끝난 게 아니라 계속된다는 점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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