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봤어? - 내일을 바꾸기 위해 오늘 꼭 알아야 할 우리 시대의 지식
노회찬.유시민.진중권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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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한국사회의 문제와 모순점을 간단히 알려주는 해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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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의 글쓰기 특강 - 유시민의 30년 베스트셀러 영업기밀
유시민 지음 / 생각의길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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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적는 방법을 알려주는 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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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이 만난 예술가의 비밀
진중권 지음 / 창비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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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의 지평을 열어가는 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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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강대학교 만화창작학과 박인하 교수님의 아이유에 대한 사태를 두고 가와이이 미학에 대하여 쓴 글을 보았고, 나는 거기에 대한 덧글을 단 후에 다시 답글을 받았다. 그리고 다른 분의 덧글을 바라보면서 현대사회의 인간이 겪는 모순을 생각했다. 과거 여성에 대한 미디어와 대중의 시선을 보면서 이번 아이유 사태를 다시금 생각한 것은 이른바 “국민 여동생”이란 하나의 스펙타클이었다. 스펙타클은 이미지가 매개되는 사회이고, 이미지라는 것은 있는 그 자체가 아닌 만들어진 가상적 존재이지만, 그 가상의 존재성이 현실의 인간에게 하나의 사실성으로 다가오는 시뮬라크르(simulacre)이다.

 

2004년 <어린 신부>라는 영화가 있었다. 거기 주인공으로 등장한 문근영 씨는 히로인으로 연기했다. <어린 신부>에서 아직 나이가 어린 여고생이 학교의 미술선생으로 오신 소꿉친구 오빠가 남편이 되어야 한다는 운명에서 갈등하는 모습이 나온다. 하지만 결과는 그 오빠는 자신을 무척이나 사랑했고, 자신도 그 오빠를 사랑했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점이다. <어린 신부>에서 보여준 문근영 씨의 연기는 이른바 국민 여동생이라고 불리기 좋은 사례를 보여준 셈이다. 그런데 10년 후의 아이유에게서는 그런 점이 다르게 진행되었다.

 

문근영 씨의 과거는 무척 귀여운 소녀인 점은 분명하지만, 그녀는 아이돌이란 이름으로 영화관에 등장한 게 아니라 단지 연기자 중에서 국민여동생이란 이미지란 타이틀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후 문근영 씨는 꾸준히 연기를 펼쳐 좋은 영화를 선보이고, 최근 개봉한 <사도>에서는 남편을 잃고 아들까지 잃을까봐 노심초사하는 혜경궁 홍씨로 등장한다. 과거에 보이던 어린 소녀의 이미지를 탈피하여 60살 환갑장치에서는 할머니 연기까지 완벽히 소화한다.

 

문근영 씨는 완벽한 연기자이고, 이제는 영화세계는 훌륭한 배우일 수밖에 없다. 아이유라는 존재는 어떻게 이래 되었는가? 아이유 역시 국민 여동생이란 별명을 가졌다. 개인적으로 나는 아이돌문화 그 자체에 대한 사회적 담론에 관심을 가져도 아이돌 그 자체에게 관심은 없다. 여성의 성적인 요소를 이용하여 문화산업을 통해 수익을 거두거나 혹은 그 자신조차도 그런 기회를 노리는 것만을 나쁘다고 하지는 않지만, 그것이 너무 지나치게 강조되어 하나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만약 대중가수 프로그램에 락이 나오고, 발라드가 나오고, 그리고 아이돌이 나와 서로 다양한 모습으로 보여준다면 아이돌이 대중문화에 다양성이 될 수 있을 것이나, 지금은 오히려 아이돌 그 자체가 대중문화의 모든 것이 되어버렸다. 아이돌은 인간이지만, TV매체 혹은 스마트폰과 인터넷 세계에서 하나의 신이 되었다. 신은 반드시 신성한 존재만이 아니라 살아있는 존재도 가능하다. 샤머니즘에서 인간의 군주는 신의 대리인이거나 혹은 신의 후손이라고 자부했다.

 

신의 대리인에게 오는 것은 오로지 복종의 환희만 가능했다. 믿음이란 영역에서 신앙적 요소와 달리 무조건적으로 믿는 것만이 용인되었다. 최소한 신앙의 세계에서는 경전으로 통해 믿음을 요구하지만, 그 믿음과 경전에서 더 나아가 인간이 추구해야할 보편적 가치와 인류애까지 넘어간다. 종교에서 단순히 신앙생활이 믿음만을 강조하는 게 아니라 그 믿음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한 삶의 미학에 이어지는 순간 진정한 종교생활이 탄생한다.

 

아이돌은 종교가 아니지만, 현대적 신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은 대중들의 열광적인 반응이다. 한국에서 아이돌 이전의 아이돌문화로 보자면 조용필 씨를 시작하여 이승철, 이승환, 김현식, 임재범 등과 같은 보컬리스트(락문화)에서 서태지와 아이들, 듀스, 지오디 같이 남성가수, 이제는 대부분은 여성가수로 되었다. 여성가수에 대한 광적인 반응은 남성에게는 성적인 판타지를 여성에게는 자신도 아이돌여성이 되고 싶다는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타인에 대한 욕망이 다시 타인으로 투영되는 것으로 그들만의 커뮤니티 즉 사회성을 획득한 것이다.

 

아이돌가수, 그 중에서 왜 아이유만이 이런 독특한 아이덴티를 가지게 된 것인가? 아이유가 국민 여동생이란 칭호가 그렇다. 아이유는 김광석이란 포크송 가수를 좋아했고, 그의 노래를 좋아하여 많이 따라 부른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그녀가 부르는 곡은 팝적인 요소가 많으며, 다른 아이돌가수처럼 날카롭거나 혹은 모델 같은 여성의 모습이 아니다. 국민 여동생이란 단어는 결국 친숙성을 대중들이 받아들이게 한 이미지다. 아이유란 사람이 실제 어떤 인간이고, 무슨 가치관과 생각을 하는지는 주변에 같이 사는 사람이 아닌 이상 우리는 알 수 없다.

 

오로지 미디어에 의해 그녀를 그런 모습으로 보여주게 만든 콘텐츠제작자의 의도로서 우리는 받아들이는 것이다. 국민여동생이 되어야 했던 아이유, 그리고 대중의 호의는 긍정적인 요소와 더불어 부정적 요소까지 만들어내었다. 대중은 국민 여동생이란 단어에서 자신만의 공간에 있어주길 바라는 것, 자신이 지켜주고 싶은 것으로 보려고 했다. 박인하 교수님이 가와이이 미학처럼, 아이유는 가와이이에서 귀엽다는 것이 아니라 가지고 싶고 소유하고 싶다는 의미로 보면 된다. 남성이 단순히 여성을 여자 친구나 애인으로 삼고 싶다는 것 이상으로 내가 지키고 보호하겠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런다고 하여 전국의 수많은 팬들이 그런 생각을 해도 아이유가 만일 결혼을 하거나 애인을 사귄다면 단 하나의 남성일 뿐이다. 여러 남성과 복잡한 관계가 되면 그 이상의 치명적인 상황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저 팬들이나 혹은 대중들은 아이유는 그렇게 보여주었으니 앞으로도 역시 그래야 한다는 스펙타클을 끊임없이 생산한 것이다. 수동적으로 이미지 메이킹을 한 아이유의 모습에 곧 관객조차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고, 그 수동성을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생산된 것이다.

 

최근 장기하 씨와 일에서 자신들만의 세계에 균열을 발생한 팬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게다가 제제의 일에서 일화가 만파하다. 만약 최근 유행하는 섹시아이콘의 아이돌이 그런 대사를 했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아이유라는 이미지에서 그런 가사를 제작한 점에서 대중과 팬들을 용납할 수 없다. 최근 아이돌에서 여성댄스그룹은 팜 파탈 이미지가 강하다. 강렬한 화장과 의상, 그리고 몸동작은 남성들에게 성적인 매력을 주기도 하겠지만, 그 강렬함에 남성들은 거부감 내지 위축성을 느낀다.

 

이와 다르게 아이돌로서 아이유는 그런 팜 파탈 이미지가 배제된 인물이다. 팜 파탈의 이미지가 강한 아이돌에게 남성은 능동적인 존재가 되지 못하고, 배제된 존재로 이어진다. 하지만 팜 파탈이 없다면 그런 불안 심리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강박의식에 벗어난 가수에게 예상하지 못한 가사의 등장은 분명 불안한 요소를 재발견하게 된 것과 같다. 익숙해야 할 것이 익숙하지 못한 것으로 보이게 되어 섬뜩하게 여기는 언캐니적인 요소가 등장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인간이 익숙한 것에 의존하려는 것은 대부분 선호하는 것은 분명하나, 이런 일이 일어난 계기는 현대사회의 남녀관계에 대한 전반적인 변화에 따른 것이라 볼 수 있다. 과거 50년 전만 해도 한국은 과거의 시대를 많이 따라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급격히 변화하자 관계성이 무너졌다. 아직도 한국에서 여성이 사회적으로 많은 불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남성 역시 그 불리한 요소를 가지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일부 소수들의 권력과 자본의 독식으로 그 외의 인간들은 소외된 점이다.

 

단순히 이런 문제를 남자가 바라보는 여성상으로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왜 남성이 그렇게 되었는지에 대한 사회적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현대사회에서 경제적 조건에서 임금이 남성이 높다고 하나, 최근 직업군에서 남성만 할 수 있거나 여성만 할 수 있는 일의 직종은 점차 줄어든다. 사무직이나 서비스직종, 기술, 하부관료에서는 오히려 여성들의 강한 진입을 보여준다. 20~30년 전만 해도 가정의 모든 경제적 생계수단은 아버지로부터 가능했지만, 이제는 아버지 혼자서도 힘들고, 남녀 모두 맞벌이 하지 않으면 생계가 유지하기 어려운 시대로 접어들었다.

 

그러는 와중에 많은 남성들은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많은 여성들도 기존 사회에서 불편함을 느끼고 있는 불리함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생각하면 그것은 남녀사이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라는 커다란 구조에서 벌어지는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한국의 많은 남성들은 군대를 2~3년 보낸 후에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간다. 그러면 자신과 동갑인 여성이 자신보다 훨씬 높은 직급에 위치하고 있다. 주민등록증으로 동갑이라도 회사에서는 엄연히 직상상사이고, 선임이다.

 

자신의 위치와 현실적 조건에서 느끼는 간극에서 대중문화와의 관계성에서 아이유의 인기에서 국민 여동생 이미지는 남성들이 느끼는 불안 심리와 보상 심리에 의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심리적 안정성을 추구하려던 그들에게 균열이 온 셈이다. 가와이이 미학이란 요소에서 본다면 남성들은 자신들이 아주 예전부터 가지고 있던 자신감을 다시 되찾지 못하여 그것을 대체할 그 무엇을 찾으려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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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lia 2015-11-09 07: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쨌든, 동녘 출판사 측으로선 광고 효과는 크게 보는 것 같습니다. 즉 동녘 측에서 의도했든 안 했든 아이유라는 대형 아이돌 스타를 통한 일종의 “스타 마케팅” 효과를 보고 있는 것도 사실이라는 얘기죠. 저는 이런 측면에서 (야유의 형식을 빌려 진중권도 지적했지만) 동녘이 아이유 사태에 유감 논평을 냈을 때 좀 의아스러웠고, 약간 의심스럽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마치 시/소설/문학작품을 사지선다형 문제 풀이식으로 가르치는 한국 국어 교육의 박제화된 논리가 저기에도 여전히 관철되고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습니다.

이윤 추구를 제1 목표로 삼는 기획사 체제로 돌아가는 한국 대중문화/대중음악계에서 한 개인이 자신의 자유로운 창작 욕구와 독자적 작품 세계를 온전히 유지하면서 활동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자기만의 은둔 공간에선 가능하겠지만 말입니다. 철저하게 상업적 논리/방법론/목표로 아이돌들을 ‘픽업’하고 조련해 하나의 대중문화상품으로 제작/판매하는 기획사들이 그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섹스 칸셉트(혹은 섹시 칸셉트)를 노골적으로 적용하는 게 이제는 한국 대중문화/대중음악의 보편적 양식이 되어가고 있다고 봅니다. 21세기 초반 한국 사회를 규정하는 하나의 일정한 세태/풍조로 자리잡아 가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런 와중에 혹은 이행의 과정에서 아이유 사태가 불거진 것이라고 볼 수 있을 듯합니다. 결국 이런 생각도 만화애니비평 님의 위 진단과 비슷한 얘기라고 할 수 있겠지요?

만화애니비평 2015-11-09 10:28   좋아요 0 | URL
한국 기업형 자본주의 윤리는 인간적 가치를 다루는 게 아니라 기업주와 회사의 이익을 위해 성과를 내는 것이 목표입니다. 그러다보니 인간이 인간으로 보는 것보다 상품으로 가고, 특히 여성성을 이용한 성적인 전략에서 아이유는 역으로 이용하는 컨셉으로 갔다는 것이죠.

아이유가 솔직히 하나의 인간이고 여성인데, 자신의 감정과 마음조차도 미디어에서는 매도당해야 하는 운명이죠. 아이유는 그래야 한다는 식은 어찌보면 당연할 수도 아닐 수도 있습니다. 대중문화의 한계성은 자신의 개성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호감이나 취향을 적용하기에 그 미적선택의 범위가 좁고도 좁은 한국사회의 단편적인 이질감이라고 말하기에 님의 질의는 정확하게 맞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5-11-10 1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대중의 지적이 신경질적이라고는 보지 않습니다. 정확하게 본 것이지요. 확실히 이번 앨범은 로리타 취향을 저격했습니다. 문제는 나이죠. 그 로리타 취향의 대상이 5살이냐 혹은 13세 이상이냐에 따라 다르지 않을까 싶습니다. 5세를 저격했다면 그건 정말 추하죠. 그건 소녀에 대한 판타지가 아니라 말 그대로 범죄적 요소이니 말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5-11-10 17:17   좋아요 0 | URL
아이유 연세가 23살이면 엄연한 성인이고, 게다가 연애를 해도 무방하고, 자신의 의지로서 결혼도 할 수 있죠. 대중이 그런 아이유에게 언제까지나 소녀라는 이미지를 원하는 욕망이 보인다는 점이죠. 오덕 사이에서 로리지온 누님연방이란 영원한 라이벌이 있으니..
 
처형 6일 전 엘릭시르 미스터리 책장
조너선 래티머 지음, 이수현 옮김 / 엘릭시르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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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형 6일 전>을 읽으면서 예전에 에르네스트 만델의 <즐거운 살인>이란 서적이 생각났다. 이 도서가 생각난 이유는 미국의 소설에서 유독 범죄소설이 1930년대 전후로 급격히 증가했다는 점이다. 이런 일들을 제공해준 원인들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세계의 자본주의화의 급격한 변동에 의해서라고 볼 수 있다. 우선적으로 종이의 보급화가 중요한 시점이다. 18세기 후반 책 1권 가격이라면 보통 프랑스 가족이 2주 정도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금액이었다. 한 가정이 2주 정도 생활이 가능하다면 그 가치는 현대사회에서 우리가 흔히 생각할 수 있는 사치품과 비교할 수 있을 정도로 책은 귀한 것이다.

 

19세기에 넘어오면서 인쇄술이 발달하고, 특히 신문의 보급이 활성화되었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으로 진입하면서 아직까지 사진기나 영상기기의 보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19세기부터 20세기 초반가지는 전형적인 문자문화가 형성되었다. 글자를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이 19세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많이 없었지만, 19세기부터는 급격히 늘어난다. 그 이유는 18세기에 자본주의 산업체계가 들어와도 근본적 산업구조는 농경사회이기 때문이다.

 

농경산업이 중심일 때는 화폐의 가치나 상업적 교역이 개개인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자신의 능력으로 충분히 땅을 정리하면 식량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15세기부터 영국에서 양모 산업으로 인해 인클로저 현상이 발발하고, 많은 농민들이 농촌에서 벗어나 도시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도시로 이주하는 농민이 많을수록 도시는 빈곤문제에 큰 골칫거리를 만든다. 게다가 기존 빈민과 거지와 합세하여 도적이 되는 경우도 많았다.

 

산업사회가 점차 진행되어 도시가 대규모로 조성되면 될수록 농촌에서 유입되는 인구는 더욱 가속화되었다. 그런 인구를 내포하기 시작하면서 서구국가들은 많은 경제적 성장을 거두었다. 도시에 많은 인구가 모이면 공장의 규모가 커지고, 대량생산이 된 상품이 다시 또 대량소비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재화는 늘 필요하고, 소비되며, 자본의 이윤을 거기에 따라 올라갔다. 에르네스트 만델의 <즐거운 살인>을 조금 생각하면 내가 이런 문장들을 쓰는 이유가 나온다. 농경산업 중심 때는 범죄의 유형이 생계적인 부분보다는 국가적인 형태(전쟁, 폭동, 권력다툼)나 또는 그 사회의 본질적 문제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면, 자본주의와 산업화 시대는 개인의 생계에 의해 범죄가 이루어지기 시작한 점이다.

 

도시로 유입된 빈민들이 당장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가진 돈과 식량이 떨어진 순간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방향은 도둑이나 강도, 혹은 굶어죽거나 또는 경찰에 붙잡혀 모진 감옥살이를 할 뿐이다. 일할 수 있는 직장이나 혹은 벌 수 있는 금액은 한정적이고, 거기서 미국과 같이 원래 원주민들이 세운 국가가 아닌 유럽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에게는 많은 이민족들이 자신들의 조상들처럼 몰려오기 시작했다. 이미 기존에 넘어온 세력들이 토대를 잡아 경제적 이권을 지니고 있었고, 많은 하층민들이 매일매일 힘든 노동에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흔히 마피아라고 하면, 이탈리아인들이 생각난다. 마피아들은 스스로를 칭할 때 마피아라는 것보다 파밀리아라는 칭호를 사용한다. 파밀리아는 패밀리, 즉 가족이란 단어이다. 집단적으로 미국으로 넘어온 이들에게 미국은 기회의 땅이기도 했지만, 그 기회는 정당한 방법이 아니라 부당한 방법으로 기회를 잡아야 했다. 그들이 하는 업무는 매춘, 도박, 마약, 밀주 등 범죄와 언제나 연결고리가 묶여 있었던 것이다. 미국의 1930년대는 매우 심각한 고비를 넘기던 시대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세계열강의 그 세력판도에 큰 변화가 있었다. 전쟁에서 러시아가 차르 황제와 무능한 정부로 인해 수백만에 이르는 러시아군인들을 전쟁터에서 죽게 만들었다.

 

식량과 옷감 그밖에 많은 생활용품의 부족, 세금의 부적절한 운영, 무너지는 산업체계는 러시아에서 2번의 혁명으로 이어진다. 러시아혁명이 일어날 때, 세계는 제2차 세계대전이 종료되어가고 있었다. 패전국들은 엄청난 빚을 지고, 승전국조차도 자신들이 투자한 군자금, 그리고 전쟁터 내보낸 군인들의 전사자 명부로 큰 혼란을 빚던 시저이다. 예전에 유명한 소설을 원작으로 만든 영화 <위대한 개츠비>는 그런 시대를 지내온 미국의 모습을 보여준다. 군대를 입대하여 참전 후 상이용사는 훈장을 주렁주렁 달고 길거기에 누비지만, 그들의 모습은 처량하기 짝이 없다.

 

왜냐하면 전쟁 중에 다리나 혹은 팔을 잃어 온전한 신체적 기능을 발휘할 수 없었다. 훈장달린 군복을 입은 채로 돌아다녀도 알아주지 않았던 시대, 미국에서 그런 사람들은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처형 6일 전>은 그 암울한 시대를 배경으로 살인사건을 추적하는 추리소설이다. 국내에서 몇 번 번역되어 최근 20156월에 개정본이 발간되었고, 원본은 1935년에 나왔다. 에르네스트 만델의 <즐거운 살인>에서 제시한 것처럼 미국은 자본주의가 우세한 국가이기도 했지만, 그 체계로 인해 범죄는 어떤 사회적 문제로 인한 우발적인 사건보다는 고의적으로 이익을 노리기 위한 지능성 범죄가 늘어가고 있음을 알려준다.

 

1929년 미국에서 대공황이 일어나고, 경제적으로 큰 침체를 맞이한다. 주인공인 웨스틀랜드는 엄청난 재산을 가지고 있지만, 그가 범죄의 음모에 노출된 것은 그런 시대적 배경과 함께 한다. 주인공 중에서 탐정이나 동료들을 보면, 흔히 대령이라 불리는 남자가 있듯이 전쟁에서 한 번 크게 굴러본 인간들이고, 암울한 미국 경제에서 화려한 도시의 거리는 이율배반적인 현실을 보여준다. 인간의 욕망이 살아있는 곳, 거기에서 한 청년은 전기의자에 앉기를 기다리는 입장이 된다.

 

전기의자에 죽는다는 것은 아주 차가운 의자에 따가운 전력이 온 몸을 감싸, 신경이 타서 아주 고통스럽게 죽는 것이다. 고통의 처형에서 인간은 처음에 아무 생각 없이 시간을 보내다가 그 운명의 순간이 점차 눈앞에 다가오면 모든 것이 무너진다. 웨스틀랜드는 자신이 억울한 누명을 쓴 것도 모자라 죽어야 한다는 것에 매우 부당한 일이다. 그때부터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탐정을 고용하고, 그들을 통해 일을 처리한다. 당시 사회는 매우 엇갈려 있었고, 도덕성은 추락했다. 만 달러의 돈은 지금도 제법 비싼 돈이다. 하지만 1930년대라면 더 말할 것도 없이 큰 금액이다.

 

자신의 무죄를 위해 탐정을 고용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조력을 받기 위해서는 교도소의 소장과의 커넥션이 필요했다. 억울한 일이 있든 없든 단지 죄가 그에게 지정되어 있다면 그에게 변호할 권리조차 주지 않고 죽을 수 있던 시대인 것이다. 이 소설은 부조리한 세상에서 부조리한 일을 당한 인물로부터 시작한다. 추리소설에서 피해자는 기본적으로 억울한 일을 당하고, 최악의 상황에 놓여있다. 그리고 해결사는 많은 위기와 고난을 넘어 사건을 해결한다. 단 여기에 등장하는 위기는 마피아나 깡패와 같은 악당보다는 오히려 주변인물이란 점이다. 이 소설을 볼 때부터 범죄를 구상한 자는 처음부터 있었던 셈이다.

 

웨스틀랜드가 무죄라고 편지를 보낸 자가 살해되는 순간, 비밀을 누가 내보낸 것이다. 에르네스트 만델의 <즐거운 살인>처럼 돈에 대한 탐욕이 범죄를 일으킨다. 그리고 항상 피해자 주변에 흥청망청 대는 가까운 친척이 있고, 그가 마치 꾸미는 것처럼 보이나, 범죄자는 의외라고 보이면서도 아니다. <즐거운 살인>에서 말한 것처럼 그저 그런 추리소설, 범죄소설에 가까운 형태다. 이런 소설이 발전한 동기는 물론 재미다. 신문이 보급되고 도서가 시장경제에 활성화되자, 많은 작가들은 범죄소설을 아주 싼 가격에 시중에 내놓았다.

 

범죄소설을 읽는 것은 재미를 위한 하나의 오락거리이다. 읽을 때마다 내용의 깊이나 전해주고자하는 의미는 없다. 보는 내낸 배신과 음모, 그리고 기묘한 발상을 이용한 증거 찾기를 어떻게 보여주는 것일까? 하는 것이다. 거기서도 은근히 여성의 관능미를 찾는다. 웨스트랜드의 아내는 어떤 사람인지 잘은 모르나, 소설에서 보이는 용의자 여성과 탐문대상이 되는 여성은 다들 허리가 날렵하고, 엉덩이라인은 마치 산처럼 퍼져 성적인 매력을 계속 강조한다. 다리라인이나 가터벨트의 색, 그리고 가운 속에 속옷, 브래지어 위로 보이는 가슴골 등이다.

 

사건의 마무리는 물론 웨스틀랜드의 무죄석방이다. 처음부터 그 주제는 던져 있었고, 그가 아내를 죽이지 않았다고 스스로 다짐하는 점에서 서사의 순번은 정해진 패턴이다. 그러나 웨스틀랜드의 무죄, 그에게 함정을 파던 주변 사람들에 대한 부분만이 전부는 아니다. 탐정은 마지막에 엄청나게 섹시한 여인과 사랑의 여행으로 보상받으려 한다. 돈에 대한 탐욕으로 일어난 범죄가 이제는 성적인 매력이란 탐욕으로 보상받는다. 물론 우리 사회 역시 그런 탐욕의 세계이다. 탐욕에 빠질 수밖에 없는 인간이라고 한다면, 그 탐욕 중 어느 것에 비중을 주는 것이 더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게 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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