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피엔스 (무선본) - 유인원에서 사이보그까지, 인간 역사의 대담하고 위대한 질문 인류 3부작 시리즈
유발 하라리 지음, 조현욱 옮김, 이태수 감수 / 김영사 / 2015년 11월
평점 :
절판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가 전국적으로 돌풍을 일으킨 도서라서 한 번 읽어보았다. 그는 유대인이고, 저명한 생물학자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총균쇠>를 감명 깊게 읽은 후 이번 도서가 나왔다. 개인적으로 나는 다이아몬드의 <총균쇠>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유심히 보면 그가 전형적인 백인우월주의적인 면모를 읽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왜 백인은 세계적으로 선진국인데 유색인종은 후진국에 핍박을 받는 것인가? 역사적인 맥락에서 그리고 인류학적인 맥락에서 읽어내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거기에 대한 문제의식과 대안모색 반성정신이 없다면 책이 가진 진정한 의미를 내포할 수 없다.

 

인류학에 대한 보고에서 기존에 레비 스트로스의 <슬픈연대><야생의 사고> 같은 서적을 읽으면 인류학의 관점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단순히 문물의 교환으로 기술력의 차이를 말할 수 있더라도 그것이 인간의 생활에 미치는 문화수준이란 틀에서 우월한지 아닌지를 논하기란 어렵다. 그 책들을 읽고 서평을 작성하는 나는 단지 한국에서 태어난 사람이고, 그 책을 저술한 사람은 유럽 내지 미국 등과 같은 백인 중심문화권에서 태어났을 뿐이다. 게다가 유발 하라리 백인이 아니라도 백인 중심의 문화가 되는 기독교 발생지인 이스라엘에서 살고 있다.

 

어느 것이든 단지 우연에 의해 만들어진 조건이다. 하지만 그 우발적인 우연은 그곳에서 태어난 인간에게 하나의 운명이 된다. 자연적 인간과 사회적 인간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사피엔스를 읽으면 바로 이런 관점을 잘 생각해야 할 것이다. 왜 사피엔스만 현재 인류를 대표하고 나머지 인류는 사라지고 없는가? 네르탈인이나 자비원인 등과 같은 사피엔스와 다른 인류가 과거에 존재했고, 어느 순간 그들은 사라졌다. 분명히 존재했지만, 어떤 경로로 사라지고 없어졌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과거 선사시대 이전에는 기록으로 남겨진 것들이 극히 제한적이다. 남은 것은 인류의 사체에서 뼈 조각 정도이다. 하라리가 사피엔스와 다른 종족은 병으로 죽었는지 아니면 사피엔스의 강력한 힘에 의해 소멸되었는지 알 수 없더라도 적어도 사피엔스가 과거에는 자연에서 매우 약한 동물에서 지금은 모든 동물을 지배할 수 있는 최고의 권력자가 되었다는 점이다. 인류의 역사에서 문화라는 것은 자연을 파괴하여 그 자리를 정복하여 만든 자리이다. 문화는 노동의 산물이나, 문화가 탄생한 시작은 농업시대이다. culture란 단어는 문화를 의미하기도 하나 프랑스어로는 농업이란 의미도 있다.

 

농업 이전에 인간은 많은 무리들이 소수 인원으로 구성되어 움직이면서 사냥과 채집하였다. 식단은 농업사회보다 훨씬 좋았고, 키도 신체조건도 훨씬 좋았다. 인류의 승리는 단순히 두뇌의 발달만 아니라 인류구성원 증감에도 큰 여파가 달려있다. 전 지구에서 어느 동물은 가지 못하는 곳은 인류는 모두 갔고, 심지어 달 표면까지 발자국을 남겼다. 모든 것을 확장시킴으로 자신의 영역을 만들어간 인류, 하지만 이것은 좋은 효과도 있겠지만, 나쁜 효과도 많이 등장시켰다.

 

인류학 서적 특성에서 마지막은 인류의 과잉성장과 욕망에 의한 자연파괴, 환경오염, 경제적 빈곤문제가 늘 등장한다. 사피엔스는 그런 인류학 도서의 흐름에서 그저 흘러가는 1권의 책이라 생각한다. 단지 작가는 생각보다 마르크스주의를 묘하게 드러낸다. 유물론적인 가치에서 경제적, 물질적 하부구조가 되어야 상부구조로 이어지는 점이 말이다. 우리가 구축한 세상은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존재한다. 마르크스는 사상에 대해 논하기를 인간이 사상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사상이 인간을 지배한다고 했다. 하지만 사상이라 이념이나 이상적 가치조차 물질적, 경제적 조건에서 시작되면 어떻게 보는 것이 답일까?

 

물질적 요건에서 인류의 시작은 물질 그자체로 볼 수 있다. 인간은 지금처럼 이성능력이 탁월하지 않더라도 적어도 생존을 위해 활동했다. 생존의 조건은 식량의 비축이고, 식량을 섭취하면 그 다음은 종족의 번식이다. 그러나 인간은 동물에 비해 태어나는 아기들의 조건은 매우 불안하다. 동물은 태어나면서 이미 걷을 수 있고, 조금 시간만 지나도 사냥도 하고, 생식기능을 갖출 수 있다. 인간이 태어나면서 제대로 된 노동력(여기에는 2세를 만들 수 있는 생식기능까지 고려한다면)을 발휘하려면 14세 정도가 되어야 한다. 지금의 14세는 아직 어린편이나, 과거 인간의 수명이 30~40살 정도라고 생각하면 다른 동물과 비교하여 매우 불리하다.

 

이게 인간의 두뇌가 발달된 이유일 것이다. 육체적으로 인간은 팔의 힘이나 다리의 속도나 이빨의 날카로움을 야생동물에게 이길 수 없다. 오직 두뇌의 발달, 사고력의 향상에서 태어난 창의력만이 생존의 방법이었다. 대신 인간은 두뇌와 손기술의 발달로 4족 보행에서 2족 보행으로 살아간다. 정교한 손작업에서 손은 땅을 지지하는 것보다 도구를 이용하는 편이 효율적이나, 직립보행을 하는 덕분에 인류 대부분은 요통을 가지게 되었다. 4발에서 2발로 몸을 지탱하므로 척추와 관절에 부담이 많이 가게 되었고, 다른 신체기관보다 대뇌로 혈액을 많이 보내야 하므로 운동능력이 다른 생물에 비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사피엔스 이외에 다른 인류는 사피엔스보다 더 좋은 신체조건과 체력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사피엔스만 남아 인류의 역사가 되었다.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달리 가지고 있는 능력이 있다. 그것은 시간을 계산할 수 있고, 미래를 바라볼 수 있기에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인류의 전쟁사에서 위대한 영웅들의 작전은 바로 미래를 예지하는 것이 아니라 예상할 수 있는 상상력을 바탕으로 전쟁에서 이길 수 있었다. 사피엔스가 가진 힘이란 바로 생각을 할 수 있는 상상력이었다.

 

상상력의 완결은 사피엔스 인류에 대한 영속적 삶이 아니었다. 사피엔스 내부에서도 거대화로 이루어지면서 이에 대한 새로운 시스템이 구축되어야 했다. 인류는 농경사회를 구축 전에 이동을 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농경사회를 거치고 나자 잉여가 발생되고, 잉여를 지키기 위해 혹은 약탈하기 위해 군대 내지 국가적 시스템이 개발되었다. 시스템 구축에서 통치 권력을 합법화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이념이 필요했고, 그것은 신화라는 매체로 통해 부족과 국가를 하나로 만들 수 있었다. 역사의 시작은 신화의 시작이라 나는 생각한다. 역사는 사실을 말하지만, 신화는 그 역사를 만들어내는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역사는 기록을 남기지만, 기록은 있어도 타 종족에게 삼켜진 종족은 기록은 남아도 신화는 없다. 신화는 가장 먼저 파괴되고 삭제되어야 하는 존재이다. 이 책에서 가장 잘 지적한 것은 서양국가가 아직 세계를 모르는 시기, 그 위험한 도전에 선원들이 배를 타고 항구를 떠난다. 다시 돌아올 시기가 1년일지 아니면 10년일지 혹은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비극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배에는 3가지 직업군이 항상 탄다. 하나는 군인, 둘째는 성직자, 세 번째는 상인이다.

 

침략의 조건은 무력으로 개방하여 피정복자들을 정치사회적으로 순화시키며, 이익창출을 위해 식민지로 삼는다. 하지만 상인이 가장 뒤에 뛰어드는 것처럼 보이나, 사실은 경제적인 이익이 가장 먼저이다. 전쟁 내지 침략의 조건은 자국의 생산력이나 거기서 발생된 잉여물들이 넘치고, 그것이 처분되지 못해 경제적인 위기가 된다. 현대인들이나 15세기 사람들의 의식구조는 비슷하다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경제학적으로 자본가나 기업인들은 이익영업을 위해 상품 판매전략을 짠다. 그들은 모든 상품이 팔리지 않을 것을 전제로 마케팅을 구상한, 현대인들은 상품이 나오면 모조리 다 팔리는 경제구조로 바라본다.

 

상품이 남으면 판매되지 않은 물품은 창고나 혹은 재고처리가 되고, 이익을 창출하지 못해 기업은 망하고, 국가경제는 위축된다. 방법은 확장하는 방법 경제적 침투이다. 현대사회는 금융자본주의가 정착되었으나 불과 20세기 중반까지는 금융자본보단 상품판매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그 이유는 모든 국가가 자본주의 시장체계를 가지지 못했고, 자본주의 시장체계의 정치제도는 민주주의이어야 한다. 모든 사람들이 상품을 구매할 수 있는 조건이 부여되고, 그것을 살 수 있는 여건이 되어야 하는 점이다.

 

국가가 시장과 정치를 독점하면 상품의 진입은 간단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국이 저지른 최악의 악덕이 아편을 중국에 밀매한 것이다. 아편전쟁으로 승리한 영국은 아편을 마음대로 중국에 뿌렸고, 시장개방까지 얻었다. 시장을 침공당하면 자본력이 침식되어 다시 역전하기는 어렵다. 또한 금융자본주의 이전에 경제는 금은 같은 귀금속이 화폐적 가치가 높았다. 과거 미국달러는 은행에 저장된 금과 바꿀 수 있었다. 하지만 금의 보관이나 금의 가치적 문제로 미국은 달러를 금과 동일한 가치로 나두지 않았다.

 

화폐와 금의 등치관계에서 화폐 그 자체로 모든 가치를 척도를 두면서 자본주의시장에서 금융자본이 활성화와 연계된다. 경제적인 이익에서 국가는 전략을 바꾸고, 식민지 정책과 대외 외교정책을 수정한다. 게다가 외교정책에서 경제정책을 잘못 펼치면 망하기도 하는데, 그 대표적 사례가 프랑스대혁명이다. 로베스피에르를 필두로 한 산악파들은 민주주의 열성을 외쳤지만, 그 계기는 국가부도 사태이다. 루이16세 이전 루이14세는 대외외교정책과 식민지정책에서 경제적인 참패를 겪었고, 국가예산의 대부분을 빚의 이자를 갚는데 사용했다.

 

빚을 갚기 위해 세금을 높이고, 중앙집권적 통치는 지방귀족들을 위축시켰고, 지방의 농민은 부조리한 경제적 모순에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이 상황에서 귀족과 성직자는 세금을 내지 않고 시민과 농민만 부담이 가중되자 결국 혁명이 일어난 셈이다. 혁명의 에너지는 가스가 새고 있는 가스배관과 같았다. 단지 도화선을 붙일 수 있는 계기가 필요한 셈이다. 변증법적으로 질량 변환법칙이 있다. 물이 100도를 넘으면 수증기가 되듯이 에너지가 일정수준 올라서면 바로 속성이 변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조차도 경제적 구조이기도 하나, 그 구조가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구성하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 혹은 문화유물론자들 주장하는 경제적, 물질적(문화유물론자는 환경적, 생태적 조건도 본다) 조건에 의해 사회적 변환이 일어난 셈이다. 인류의 혁명 내지 전쟁, 각종 사태는 이런 경제적, 물질적 조건이 따르게 되어 있다. 최근 한국 프로바둑선수인 이세돌 씨가 구글에서 만든 지능성 컴퓨터 알파고와 대국을 두어 14패를 기록했다. 컴퓨터는 단순히 계산만 하는 게 아니라 데이터를 중심으로 예측을 할 수 있게 되었고, 그 예측은 인간을 뛰어넘은 것이다. 나도 업무를 하면서 다른 사람과 프로젝트를 추진할 때마다, 모델링 자료를 확인한다. 대기가 확산 및 이동되면서 대기 중의 대기오염물질이 어떻게 퍼지고 농도는 얼마나 증감하는가를 말이다.

 

인간의 확장은 처음에 동물과 다른 인류는 이제는 인류 스스로에게 이어진다. 하지만 이런 내용은 너무나도 흔하다. 독일 프랑크푸르트학파 일원인 하버트 마르쿠제는 인간이 자연을 착취하고 나면 최종적으로 착취하는 것은 인간 그 자체라고 했다. 자연이 파괴된 지 옛날이고, 인간은 인간 유전자 조작기술을 연구하고, 사이보그 연구를 한다. 과거 아놀드 슈왈제네거가 활약한 <터미네이터>란 작품은 괜히 나온 것은 아닌 듯 보인다. 하지만 인류의 확장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고, 그것에 따른 혜택을 보고 있다.

 

인간의 수명이 30~40살이던 게 지금은 70~80살이다. 하지만 여전히 심각한 빈부격차로 나이가 너무 들면 국가적 재정문제만 아니라 노인에게 주어진 환경조차 가혹하다. 빈곤한 노인은 병원비를 제대로 내지 못해 아픈 몸을 시달리고, 길거리에 손수레를 끌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불어도 돌아다니는 상황이 되었다. 한국도 1960~1970년대 경제성장 주도라고 하나, 경제는 성장했지만, 성장한 것은 국민경제생활이 아니라 경제라는 공간이 팽창했다고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경제가 제대로 성장했다면, 지금 길거리에 손수레를 끌고 밤에 뺑소니로 운명하는 분들을 2번 죽이는 일이 될 것이다. 하라리도 잘 지적했지만, 마빈 해리스의 <문화의 수수께끼>에서 이미 그 문제에 대한 의문을 잘 지적했다. 하루 8시간 노동시간이라 해도 출퇴근 1번에 1시간 넘는 시간을 보내고, 집에 와서 세탁기 및 청소기가 있어도 늘 생활은 빈곤하고 바쁘다. 여유가 있어야 하겠지만, 기술이 발달할수록 오히려 삶의 질을 떨어진다. 부시맨 혹은 원시부족은 하루 3시간 일하고 며칠 동안 계속 놀거나 휴식을 취한다. 기술적 수준은 원시부족이 떨어져도 삶의 질은 그보다 못한 게 우리의 삶이다.

 

삶의 질을 본다면 우리가 그들보다 문화적으로 우월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기술의 발전은 물질적으로 경제적으로 인류를 바꾸고 그것은 정치와 사회적 틀로 변모한다. 외교와 전쟁관계에서도 결국 자국의 생산시스템이 확장되어 더 이상 한도를 지탱할 수 없기에 벌어지는 사태이다. 우리는 이런 욕망의 굴레에서 스스로 억제하기보단 언제나 그 굴레를 수레바퀴처럼 계속 돌린다. 수레바퀴는 그저 같은 반경으로 회전하나, 우리는 눈사태가 난 산처럼, 끝임 없이 눈덩이를 불리고 있다. 기술의 발전은 문명의 혜택이고, 그 혜택은 당연히 빈부격차로 통해 구현된다.

 

세계 인구는 70억을 돌파하여 전 세계가 사피엔스로 가득하나, 한국은 오히려 역으로 인구가 축소되고 있다. 세계의 거대한 흐름이 우리 일상생활을 크게 뒤흔들지는 않으나, 작은 변화가 계속 누적되어 큰 전환을 맞이하고 있다. 이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는 게 옳은 것일까? 하라리는 인류는 계속 확장되고 있는 반면, 반드시 좋은 방향만 향해 가고 있다고 하지 않는다. 좋지 못한 방향도 있기에 그것을 개선하기 위해 새로운 대안이 나온다. 그런 점에서 유발 하라리의 책과 그 책을 읽는 나에겐 변증법적인 상황이 보이는 것 같다.

 

책을 처음부터 끝가지 읽으며, 거대한 이야기가 오는 것처럼 보이나, 막상 무엇이 인상 깊고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내용에서 크게 와 닿는 것은 없다. 이미 이런 맥락은 세계적인 석학들이 오래전부터 내놓은 이야기이고, 유발 하라리는 단지 그 담론 속에서 최근 일어난 일들과 최근 기술로 밝혀낸 과거의 인류와 역사를 보충할 수 있다는 정도이다. 물론 이런 책을 쓴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이 책에서 논하는 담론은 너무 익숙한 점이다. 문명의 발전과 기술의 진보성에 대한 현상은 잘 말할 수 있어도 거기에서 오는 비정상적인 야만의 시간을 제대로 반성하기란 어렵다.

 

그나마 유발 하라리가 다이아몬드보다 더 나은 점은 그는 문명과 역사과정에서 희생된 자들의 입장을 고려했다는 점이다. 우아하게 차를 마시며 저녁에는 파티를 열고, 주말에는 교회에서 경건하게 찬송가를 부르는 많은 착한 시민들은 사실 인도에서 굶주리는 인도인과 아메리카에서 손발이 잘려나가는 인디오 주민들의 고통 위에 있다는 사실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세계는 자연의 파괴, 동물의 학대, 타인의 고통을 기반으로 움직이고 있다. 문제는 이 현상이 계속 유지되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새로운 착취수법이 나온다는 점이다. 사피엔스는 이미 지구를 점령했지만, 1가지 점령하지 못한 것은 타인에 대한 윤리이다. 어떤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형태에서 사피엔스는 자기기만으로 세운 왕국에서 군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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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7-05-30 22: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사피엔스는 자기기만으로 세운 왕국에서 군림할 것이다˝란 말씀에 깊이 공감하며, 그로 인해 곧 멸망할 것이란 저자 2부작 <호모 데우스>에서 중심 주제란 생각이 듭니다. ^^

만화애니비평 2017-05-30 22:41   좋아요 2 | URL
데우스에서 데우스 엑스 마키나...
시계장치의 신이라 등장하는 것일까요?
도서관에 나오면 빌려 봐야겠습니다앙ㅎㅎㅎ

북다이제스터 2017-05-30 22:54   좋아요 1 | URL
<호모 데우스>에서 기계 장치인 마키나가 원인이 된다고 볼 수도 있는데요. <호모 데우스>를 얼핏 읽으면 마키나가 인류 멸망의 원인으로 생각될 수도 있지만, 전 다르게 읽었습니다. ㅎㅎ
그저 우리 문제, 우리 사고와 생각, 우리 기만의 문제였습니다. ^^

만화애니비평 2017-05-31 10:30   좋아요 0 | URL
결론은 저 책을 제가 읽어야 한다는 사실이군요..ㅎㅎ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참으로 많이 바뀐 것 같다. 2012년 대통령 선거 당시를 나는 잊지를 못한다. 내가 살던 부산 영도에서 어느 한 노동자가 자살을 했다. 이름은 최강서 열사, 어느 누구에겐 열사이고 다른 누군가에게 아주 불편한 이름일 것이다. 그가 자살을 한 이유는 당시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된 사람이 문재인 후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만일 문재인 후보가 2012년 대통령선거에서 이겼다면 그는 자살을 하지 않았고, 영도에서 중앙동으로 넘어가는 부산대교에서 그 긴 행렬의 장례행사가 하지 않아도 되었다.

 

노동자의 현실을 사람은 잘 아는지 모르는지 그 자체는 잘 모르겠다. 실로 노동자 본인조차 자신에게 가해진 현실에 대한 부조리에 무지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매일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산업재해로 죽거나 다친다. 만일 그 피해를 당한 사람이 본인의 가족과 친구가 된다면 세상에 대한 부조리에 깊이 좌절한다. 그 좌절의 맛을 본 사람은 세상에 대한 불만과 모순에 원망으로 매우 부정적인 삶의 가치관을 가지게 된다.

 

대통령이 바뀌어 당장 가난한 노동자의 삶이 개선되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극단의 선택을 고르지 않을 수 있는 시스템만 구축할 뿐이다. 그 말은 무엇인가? 억울한 일이 있으면 말할 수 있는 기회도 주고, 전부 해결하기는 어려우나 적어도 그 문제에 대해 깊이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영화 <그림자들의 섬>에서 오늘 내가 본 영화 <노무현입니다>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노무현대통령은 부산에서 노동인권 변호사로 활약하다가 국회로 입성 후 청와대로 들어간 인물이다.

 

노무현은 노동인권 변호사 출신이고, 가진 게 없는 서민이라도 서민의 편이 제대로 될 수는 없어도, 되고 싶어도 그에게 힘이 없고, 알아주는 사람들은 더 없었다. 지난 참여정부를 두고 많은 사람들이 실패한 정부라고 한다. 그런데 정권에서 다른 대통령 2번을 거치고 오면서 이제는 그 말을 바꾸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영국정치가 및 역사학자인 E.H 카를 역사를 두고 과거와 현재가 끊임없이 대화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얼마 되지 않았는지 모르고, 혹은 긴 어둠의 터널을 헤쳐 나온 것일지도 모른다.

 

한국의 역사에서 10년이란 시간은 정말 짧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매우 길고도 힘든 시간일 수 있다. 10년이란 시간을 두고 우리는 무엇이라 이야기를 해야 할까?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과 판단에 따라 서로 다른 말을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나만의 주장을 할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가장 잘 했다고 말이다. 참여정부는 실패했는데 왜 노무현대통령이 1등이란 말인가? 그것은 지난 다른 대통령을 겪으면서 비교가 되기 때문이다. <그림자들의 섬>에서 노동자들의 시선에서 노무현 대통령도 탐욕스러운 자본가들과 뜻을 같이 하는 사람처럼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정말 그런 자라면 퇴임 후에 화려한 생활도 하지 못한 채 1년 조금 뒤 한 줌의 가루가 되어 내 가슴을 적시고 말았다. <노무현입니다>라는 영화는 노무현이란 인물을 과거의 인간이 아니라 현재형으로 등장시켰다. 노무현이란 존재는 참으로 신화(神話)적인 존재이다. 신화란 인간이 아닌 신의 이야기라고 하나, 신은 인간의 심리와 욕망을 대체해 놓은 존재에 불과하다. 인간을 신격화시킨 점에서 노무현은 생물학적으로 사망했지만, 사회적으로 다시 부활한 존재이다.

 

인간의 죽음을 두고 어느 누군가는 생물학적으로 죽은 것이 아니라 인간의 기억에서 완전히 소거될 경우 사망이라고 지칭한다. 그가 남겨놓은 많은 자료에서 노무현은 죽은 인간이 아니라 살아있는 존재로 다가온다. 그가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말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E.H 카가 말한 역사라는 존재는 과거와 현재가 영원히 멈추지 않고 대화하고 있다면 노무현이란 존재는 과거가 있는 자가 아니라 미래진행 상황으로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영화 <노무현입니다>를 보고 깜짝 놀랐다. 영화를 제작하는 감독은 그렇다 하더라도 제작사가 CGV(물론 아트하우스에서 지원했지만)라는 점이다. 대기업이 노무현대통령을 위한 영화를 제작하는 것, 그 시기가 전직 대통령이 탄핵 및 파면 전이란 점이다. 영화 개봉 시기는 525일이나 이미 전주국제영화제에 상영되었다. 전에 내가 본 <무현, 두 도시 이야기>는 독립영화 또는 예술영화를 상영하던 규모가 상영관에서 볼 수 있었다. <무현, 두 도시 이야기>로 전인권의 노래인 걱정말아요가 상당히 흥행했다.

 

<노무현입니다><무현, 두 도시 이야기>를 비교하면 전편은 대통령 경선에 대한 이야기이고, 후자는 2000년 부산 북·강서 국회의원 선거에서 패배한 이야기이다. 두 영화는 서로 다르지만 연결이 된다. 부산 북·강서에서 패배한 노무현은 원래 종로 지역구에서 당선된 국회의원이었다. 유리한 배경과 조건이 있는데도 반대당의 영역인 부산에 내려와 외로운 전쟁을 시작했다. 그 외로운 전쟁은 겨우 지지율 2%인 약소후보를 2002년 대통령선거후보로 만들었다. 사람들은 그저 노무현대통령이 고졸 출신 변호사로 잘 안다.

 

영화 <변호인>에서 송우석 변호사는 노무현대통령을 희화한 캐릭터이다. 고등학교도 경기고, 부산고 같은 명문 인문계열이 아니라 상고출신이었다. 고등학교도 졸업한 사람도 적은 시기지만, 상고출신 가방끈 짧은 변호사에게 세상은 참으로 야박했다. 노무현대통령도 만약 집에 여유가 있다면 부산에 유명한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서울에 있는 법과대학을 나와 사법고시에 붙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난한 농부의 자식은 학교에 다닐 입학금보다 오늘 당장 해결해야할 저녁밥이 걱정이다.

 

가난이란 것은 참으로 슬프고 원통한 것이다. 가난하다는 이유로 멸시를 받고 조롱을 받는 것만큼 서러운 것은 없다. 그리고 더 서러운 것은 그 가난이 나의 대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자식과 후손에게 영원히 이어져 가는 것이다. 노무현은 가진 게 없는 비주류 중에 비주류이다. 가난한 이유로 굶주리며 살아가야 했던 그에게 그 가난이 자신의 적이었다. 비주류가 되는 이유는 간단하다. 가난이었다. 가난이 학교도 가지 못하고, 백도 만들지도 못한다. 가진 게 없기에 상대방과 싸울 때도 늘 밀린다.

 

노무현에게 가난과 그 가난으로 이어진 가방끈의 콤플렉스는 깊은 분노로 만들어진 슬픔이었다. 생각하면 그가 속한 당에 있던 사람은 과거에 야당만 해왔다고 해도, 김근태 의원은 학생운동의 대부였다. 하지만 학생운동을 하던 자들은 대부분 명문대학교 출신이 많았다. 엘리트 세계에 속한 자들이 가진 뛰어난 머리와 양심은 좋지만, 그 한계성이 있었다. 엘리트들은 가난한 사람이 힘들다는 사실은 안다. 하지만 그 힘든 사람들이 어떤 마음으로 힘들게 살아가는지는 모른다.

 

겉으로 드러나는 고통과 드러나지 않은 심연의 고통은 다르다. 지금은 대학을 대부분 가는 것처럼 되어 있지만, 사실 대학교보다 고등학교조차 나오지 못한 사람도 많다. 길가에 가는 어르신들은 초등학교만 나와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가난 속에 숨겨진 세상에 대한 원망과 우울은 아마 노무현대통령의 힘이었던 것 같았다. 노무현대통령 임기 5년은 나에게 군복무 기간과 거의 일치한다. 200312월에 입대하여 20083월에 전역했다. 입대하기 전부터 노무현대통령을 지지했던 나로선 전역 후 주변사람들에게 안 좋은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노무현대통령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나에게 괜한 핀잔을 주는 사람도 있었다. 군복무 중에도 그랬지만, 2008년 봄은 유독 심했다. 그런 분위기는 1년 뒤 2009년 늦은 봄 5월에 잊을 수 없는 비극으로 결말이 되었다. 그가 세상에 마지막 모습을 드러나기 전에도 나도 외로웠다. TV와 신문에는 늘 노무현대통령만 때리는 기사만 나오고, 이른바 소위 진보언론과 진보지식인도 숟가락을 올리며 더욱 심하게 때렸다. 그리고 그가 떠나고, 세상이 허무한 공간이 되었다. 생각하면 진보정당이나 진보언론·지식인에 대한 섭섭한 마음이 심하다.

 

노무현이란 이름을 두고 계속 돌팔매를 날리다가 총선시기가 나오면 노무현의 이름을 우려먹는다. <노무현입니다>란 영화를 보면 한 측근이 나와 봉하마을의 장례행렬을 이야기해준다. 자신과 아무런 면식도 없고 아무런 득도 없는 사람들이 수없이 몰려와 그 빗속에서 장시간 비를 맞으며 참배를 한 모습에서 진정 이것이 노무현대통령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란 것을 말이다. 그래서 노무현대통령을 소재로 한 도서와 영화 그 밖의 매체들은 노무현대통령을 누군지 알려주는 계기도 되지만 한편으로 그를 우려먹는 도구도 된다.

 

노무현대통령은 완전히 신화적인 존재라고 언급했다. 그는 우리의 영웅이었고, 반영웅이 되었다가 다시 영웅으로 소환되었다. 그가 영웅이 된 이유는 무엇인가? 상고 출신 변호사가 노동인권운동을 위해 길 위에서 싸우고, 많은 권력자들에게 맞서서 싸웠다. 우리가 입에서 말하지 못한 것을 그가 대신 속 시원하게 말해준다. 그가 반영웅이 된 동기는 무엇인가? 혼자 들쑥날쑥 설치다 현실의 벽에 걸리거나 또는 그를 믿었는데 우리를 실망시켰다는 이유이다. 이에 대해 그가 처한 입장이나 현실적 시스템에 대해 우리는 그를 제대로 알아주지 못했다.

 

그가 선택한 최후는 극단으로 치닫고 말았다. 지금 젊은이 사이에게 문재인 대통령이 있기에 노무현대통령이란 인물이 누군지 궁금할 것이고, 극우사이트에 접한 많은 젊은 사람들에게 그저 조롱의 대상이 될 뿐이다. 그런데 정작 그가 누군지 제대로 알 수 없다. 자신의 크고 작은 이익을 위해 많은 사람들은 주변인들을 외면한다. 그러나 노무현은 끝가지 외면하지 않는다. 돈을 포기하지 못해도 사람은 쉽게 포기하는 세상, 노무현대통령을 사람들이 다시 그리워하는 이유는 아마 이런 이유일 것이다.

 

영화 제목 <노무현입니다>는 과거 정철 카피라이터 책제목인 <노무현입니다>와 일치한다. 영화제목이 저렇게 만든 이유는 노무현후보는 길거리에 나가 길가의 사람들에게 인사하면서 안녕하세요. 노무현입니다.”라고 말한다. <노무현입니다>를 보면 나라를 통치하는 것은 대통령정부기관이나, 대통령을 만드는 것은 국민이란 생각이 절실하게 든다. 2% 만년 꼴찌가 대선후보 경선에서 승리하여 마지막에 취임식에 간다는 것만큼 드라마틱한 이야기는 없다. 그래서 노무현대통령은 신화가 된 것이다.

 

그의 시작은 서사의 발단이고, 그가 대통령이 되는 과정은 발단이며, 그가 임기 중과 퇴임 후는 위기였고, 그의 죽음 절정이었다. 그리고 그의 죽음 이후는 다시 서사의 발단으로 돌아갔다. 서사는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고, 끝은 모든 것의 종료가 아니라 또 다른 서사의 시작이다. 생물학적 노무현은 이미 없다. 하지만 그가 남긴 노무현이란 이름 세 글자는 다시 시작한다. 그래서 영화 마지막에서 노무현은 이렇게 다시 말한다. “안녕하세요? 노무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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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7-05-28 2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j가 박근혜 정부에게 압박당하고 명량, 국제시장, 인천상륙작전 등 아부성 영화 제작도 했지만 민심을 읽는 마케팅은 정말 잘 아는 듯.
http://www.huffingtonpost.kr/2017/01/16/story_n_14192040.html

만화애니비평 2017-05-28 22:13   좋아요 0 | URL
변호인의 역할이 큰 것 같습니다. 아무리 탄핵정국이라도 이런 행동은 거의 모험이네요. 마케팅도 대단하나 그것을 받아들이는 임원들의 판단도 대단.
 
바보 농부 바보 노무현
김정호 지음 / 생각의길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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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더운 여름날 봉하마을에서 제초와 행사보조를 하였다. 봉하마을서 봉사활동하던 때 언제나 마을을 지키시던 김정호 대표님, 책으로 내셨네요. 5월 23일 봉하마을에 못가서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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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한봉 - 5·18민주화운동 마지막 수배자
안재성 지음 / 창비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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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책이 나올 줄이야. 윤항봉의 자서전인 망명이란 책을 본 적이 있었다. 윤한봉의 생가는 강진군 동백리 벽송마을에 있다. 내가 매년 시제로 벽송에 가는데, 언제나 갈때마다 마을입구에서 윤한봉 생가라는 표지판을 볼 수 있었다. 비록 그의 묘는 광주에 있으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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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의 후반생 - 다산 정약용, 유배와 노년의 자취를 찾아서
차벽 지음 / 돌베개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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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의 후반생>을 보면서 정말 인상적인 의미가 나왔다. 한국은 단군조선 고조선을 포함하여 5,0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긴 시간 속에 무()의 상징은 충무공 이순신, ()의 상징은 다산 정약용이다. 조선의 역사는 600년이고, 긴 왕조에서 많은 문제가 있었지만, 그만큼 대단한 사람들도 많았다. 지금도 한국에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에서 2사람은 절대 놓칠 수 없는 위인이다. 그러나 2사람 모두 공통점이 있다. 시대에 필요한 인물이나 빛을 볼 수 없던 자이다. 정적들로 하여금 죽음의 고비를 계속 넘어온 자들이다.

 

이순신은 원래 하급무관이었으나, 친구인 유성룡의 천거로 상당히 높은 지위까지 올라간 사람이다. 유성룡은 정치적 성향은 동인이었으나, 결국 남인의 영수가 되었고, 이순신의 정적들은 대부분 서인들이었다. 게다가 임진왜란 후반부로 가면 동인에서 시작한 남인과 북인이 서로 갈등을 빚게 되고, 유성룡은 북인에 의해 탄핵당해 평생 안동에서 나오지 않는다. 임진왜란에서 나라를 구한 한 친구는 정치적으로 파면당하고, 그 친구가 파면당한 것을 멀리서 들은 다른 친구는 왜적의 총탄에 서거한다.

 

만일 유성룡이 정승의 자리를 지키고, 선조 옆에서 전쟁 후의 정국을 다스렸다면 분명 이순신을 죽으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차피 승리하여 돌아와도 선조와 서인들에 의해 죽을 운명이다. 자신이 반역죄로 몰려 참수당하면 유성룡 역시 무사하지 못한다. 누가 반역죄로 몰리면 가족과 친척, 친구까지 연좌되어 처벌을 받는 게 조선의 형벌문화였다. 이로부터 200년이 지나 정약용은 천주학쟁이란 오명으로 작은형과 매형 그리고 친구들을 보내야 했다. 게다가 대부분 신유사옥에서 죽은 자들은 남인이었고, 그중에 신서파 내지 시파 계열이었다. 노론 벽파와 남인 공서파는 어떻게든 정약용을 죽이려 했다.

 

비극적 운명으로 살아간 2사람에게 이순신은 죽음 그 자체로 승화했다면, 정약용은 삶을 유지함으로 승화했다. 지금 정약용의 이름을 들으면 실학자, 철학자, 과학자, 정치가 등등으로 알고 있지만, 그가 어떤 삶을 살아가고 어떻게 인생의 마지막을 보냈는지 잘 모를 것이다. 유배지도 다산초당만 기억하고, 그 초당과의 인연, 그 안에서 생활, 초당에 도달하기까지 여정까지도 말이다. <다산의 후반생>은 신유사옥 이후 다산이 처음 강진에 있는 주막에 오고 다산초당에 가고, 그리고 해배되어 마재에서 마지막까지 보낸 것에 대해 저술한 서적이다.

 

처음 강진에 올 때 사암(정약용의 본래 호)을 보고 많은 사람은 마치 괴물이 온 것처럼 놀라 도망치기 바빴다. 담을 허물고, 집을 파하여 도망치는 그 모습에서 유배지의 쓸쓸함과 세상이 모두 자신을 버린 것처럼 여겼다. 귀양살이 하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그 시기, 다행히 주막의 노파는 그를 받아주고, 방안에서 기거해주었다. 귀양살이하면 참으로 괴롭다. 귀양살이하는 사람은 사대부 양반이나, 조선의 양반 모두가 권력을 가진 게 아니다. 권력자의 눈에 거슬리거나 무고를 당해 귀양 가는 일들이 허다했다.

 

신유사옥의 천주교박해에서 정약용은 이미 천주교와 관계를 끊었다 해도 작은형 정약종, 매형 이승훈와 엮일 수밖에 없었고, 이가환과 9촌이 되는 다산의 친구조차 이가환의 친척이란 이유로 귀양을 20년 넘게 했다. 이런 운명에서 귀양살이에서 그 많은 서적을 저술했다는 것은 인간의 영역을 이미 초월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귀양살이에 감시의 눈조차 자유롭지 못했다. 다산의 친구이며 사돈인 윤서유는 신유사옥 때 옥고에 시달렸다. 다산이 신유사옥을 당할 적에 서울에 있고, 친구는 강진에 있는데도 관아에 문초를 받은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그동안 박석무 학장님, 이덕일 작가의 책 이외에도 개인으로 들은 이야기가 참 많이 담긴 것 같았다. 지금이야 다산학술재단이 활발히 연구하고 있고, 강진군과 남양주시가 다산을 소재로 문화사업을 계속 발전시키고 있다. 하지만 조선말기와 일제치하 시절에는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다산초당은 원래 초가집이었으나, 해남윤씨 행당공파(어초은공파)의 소유물이고 건축물 관리를 위해 기와집으로 교체했다. 책에서 이것을 언급했는데, 나는 이 이야기를 아버지로부터 들었다.

 

책을 읽으면서 계속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생각났다. 다산연구자로 유명한 분으로 박석무 학장이나, 체계가 잡히기 전에는 다산초당을 관리하시던 윤재찬 옹이었다. 윤재찬 옹은 작고한지 수십년이 지났지만, 나의 할아버지와 친했던 분이다. 과거의 일화이다. 내가 다도동아리에서 활동하면서 다산초당에 갈 기회가 있어서 초당 아래에 있는 전통찻집 가게 세작 하나를 샀다. 다신계(茶信契)란 가게의 주인은 정약용 선생이 귀양살이 하던 시절에게 초당을 내어준 윤단(윤규로)의 후손이 운영하는 곳이다. 윤재찬 옹은 그들의 후예이다.

 

다산 선생이 초당에 기거하게 된 동기는 학문수준도 높은 것도 있지만, 그들이 외가 집안과 친척이었기 때문이다. 다산의 친모는 해남윤씨 귤정공파(어초은공파) 고산 윤선도 직계 손녀분이다. 다산초당에 기거한 정약용 선생은 외가 방계로부터 생계를 보장받고, 강진군 옆 해남에 위치한 외가 녹우당(綠雨堂)에서 장서를 빌려보고 공부했다. 그리고 한국 최고의 학문그룹인 다산학단을 일으킨 것이다. 시골 강진에 가면 가끔 다산 정약용 선생의 이야기를 듣는다. 목민심서와 경세유표 같은 많은 도서가 다산 혼자서 저술한 게 아니라 제자들과 같이 만들었고, 제자는 스승의 이름으로 책을 세상에 알린 것이라 했다.

 

200년 전의 이야기가 우리 집안에서 구전으로 전해온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다산초당 주인인 윤재찬 옹이 나의 친할아버지와 친구였고, 다산의 사돈이자 친구인 윤서유는 나의 직계할아버지와 친척 사이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내가 하던 일중에 하나가 집안 족보를 확인하는 절차였다. 나의 조카가 족보에 등재되었는지를 확인하고 아버지에 보여드린 것이었다. 병원에서 손자의 이름을 확인하고, 돌아가시기 전 나는 그 족보를 집으로 다시 들고 왔다. 어제 주말 낮에 다시 족보를 확인하면서 색인부분을 찾아봤다.

 

내가 보는 족보는 대동보이고, 집에 있던 족보는 병조참의공파세보였다. 그런데 대동보를 보니 이때까지 우리집안에서 태어난 아들과 딸의 출생을 기록한 것이 어느 책의 몇 페이지에 있는지가 나와 있었다. 거기에 정약용의 3형제의 이름이 있었다. 어머니가 해남윤씨이기 때문에 대동보에 올라가 있던 것이다. 대동보가 아닌 병조참의공파세보에도 정약용의 이름은 올라가있다. 나의 파보에서 정약용은 윤서유의 사돈으로 나온다. 게다가 윤서유가 벼슬하던 중 병으로 작고하자, 그의 묘비에 글을 쓴 것도 족보에 남겨져 있다.

 

아버지가 어린 시절부터 나에게 한 말이 강진 항촌마을에 다산 선생의 따님이 시집왔다는 이야기다. 시집간 집은 나의 아버지가 태어난 집에서 걸어서 10분 내외이고, 옛날 작은할아버지와 큰할아버지 집에 2분도 걸리지 않는다. 명발당이란 이 한옥채에 아직도 사람이 산다. 여기서 다산의 따님이 시집을 왔고, 다산의 따님은 남편, 시아버지, 시할아버지가 묻힌 자리 주변에 잠들어 있다. 이미 태어나는 순간 우리 가족은 다산 선생과 엮이지 않을 수 없는 운명이었던 것이다. 물론 정해창 선생이나 정새균 국회의장 같은 정약용 선생의 직계후손 분도 있지만, 다산 선생을 유배지에서 우러러보고, 해배 뒤에도 잊지 않고 그 뜻을 기린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것 같았다.

 

아버지는 예전에 우리 집(고조할머니)이 불이 나서 모두 없어졌다고 한다. 집이 불타기 전에 엄청난 서적이 있었지만, 모두 소실되었다고 한다. 전후관계로 보자면 목민심서가 동학운동의 토대가 되는 책이란 점이고 다산의 제자들은 동학운동 시기에 억압을 당했다는 뜻이다. 다산이 살아생전에 서학에 의해 박해를 당했다면, 그분이 작고한지 수십년이 지나서는 동학에 의해 박해당한 것이다. 고조할머니가 증조할아버지를 데리고 항촌마을에 이사왔는데, 그 전에는 다산초당 앞 강진포구 건너편에 있는 마을에 살았다고 한다.

 

훈장선생을 하던 할아버지는 배를 타고 강진만을 지나 다산초당으로 갔다고 한다. 책에서도 다산의 18제자 외, 윤정기의 인척 및 양반자제가 초당에서 공부했다고 하니, 인척이라면 분명 맞는 말이다. 아버지가 할아버지 장례식 때 다산계원들이 왔다는 이야기를 했다. 다산도 그렇지만 조선말기 양반들은 모두 잘 사는 게 아니다. 남인 사대부들은 언제 무고에 의해 처형 내지 귀양 당할지 모르는 노릇이고, 힘이 없기에 하루 밥 먹는 일조차 버겁다. 다산 선생은 원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신유사옥과 황사영백서사건으로 더욱 집안은 몰락한다. 정약종의 순교와 정약전의 병사로 남은 조카들을 모아 키워야 했다.

 

강진에서 유배살이 중 아드님 2분이 오실 때 본가에서 마늘을 심고 팔아 여비를 마련했으니 그 초라함이 얼마나 안타까운가? 게다가 제일 큰형의 따님은 황사영백서사건에 연좌되어 제주도 어느 집의 종으로 팔려갔다. 정약용 선생의 큰형은 그런 딸을 생각하면 눈물로 밤을 보내고, 차라리 그때 같이 죽었으면 이런 비참한 생활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 말한다. 다산 선생의 신유사옥부터는 가족들의 죽음에 절망했고, 돌아와서는 가난에 시달렸다. 게다가 다산 선생은 담바고(담배)를 무척이나 좋아했다고 한다. 연초를 준비하는 것도 어려운데, 아내인 풍산홍씨는 얼마나 힘들까?

 

책을 읽으면 다산 선생이 위대한 분이란 사실도 알지만, 그와 다르게 그가 참으로 소박하고 조금 다르게 말하면 조금 얄미운 분이었다. 친구를 좋아하는 남편을 둔 아내는 참 괴롭다. 없는 살림에 손님이 오면 어떻게든 대접해야 한다. 귀양살이하기 전에도 친구와 찾아와서 술과 안주를 내어온다고 하나, 친구들 대부분은 가난했다. 조선시대 양반들은 농사를 짓지 않는다고 하나, 농사를 짓는 양반은 많았다. 실학이 발달된 동기도 남인 사대부들은 권력과 재력이 없기에 스스로 밥벌이를 해야 했다.

 

배고프면 귀천이 필요 없다. 시대의 모순과 적폐는 지식인들에게 고독을 백성들에게 기아를 선사한다. 강진에서 다산은 다산초당이란 좋은 환경에서 공부했지만, 그와 다르게 백성들의 삶을 보고 한탄을 토해내었다. 작가의 서적에서 보이는 사진들은 참으로 아름답다. 다산초당과 백련사로 이어지는 동백숲속 길은 아름답다. 다산초당 옆 정자에서 보는 강진만 포구는 참으로 시원하다. 아름다운 광경 뒷면에 다산의 눈물이 어린 것이다. 정조대왕 붕어 후 자신을 알아보는 자는 양심의 눈과 존경의 눈을 가진 제자와 학자지만, 세상은 너무 무서웠다.

 

자신을 탄압했던 서용보는 정승자리에 올라가 계속 자신을 억누르고, 구중궁궐 안동김씨 세도는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남양주로 돌아와 열수노인으로 학문을 집중하려 해도, 그에게 남은 것은 허무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단지 우리가 다산 선생의 서적과 연구도서를 읽으면 대단한 분이라 여기겠지만, 그가 살아온 발자취를 본다면 그런 생각을 하는 것조차 숙연해진다.

 

내년 2018년은 다산선생이 강진에서 해배된 지 200년이 되는 해이다. 매년 음력 222일은 다산선생의 기일을 지낸다. 차를 올려 제를 올리는 헌다식이 이제는 경기도의 자랑스러운 전통문화가 되었다. 아장 혜장스님께 걸명소란 시를 지어 차를 얻어 마신 다산 선생의 재치, 다산선생의 녹차 제조방법은 200년을 넘어 계속 유지된다. 과거에 있던 위대한 인물과 시기가 있다고 말하기는 쉬워도 그것을 지켜가는 일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집안문중 인터넷 홈페이지를 보았다. 게시자 이름을 보니 과거 아버지와 친구 분이었다. 그분이 시제에 지내는데 집안식솔이 15명 정도 모였다고 한다. 사람이 많고 적음에서 내 글을 보는 사람들은 뭐 대수로운가? 하고 여길 수 있다. 하지만 그분이 모시는 어른은 윤광택(다산선생 아버지의 친구), 윤서유(다산선생의 친구), 윤창모(다산선생의 사위), 윤정기(다산선생의 외손자) 등등이 있다. 여기에 더 보태어 아쉬운 것은 아버지 친구는 다산선생의 외손자를 시제에서 모시지만, 피는 조금 다르다. 직계손이 이어지지 않아 윤광택의 동생 후손분이 대신 입양하여 대를 모신 것이다.

 

그래도 이마저도 다행이 아닌가? 다산선생의 친구와 따님, 외손자 되는 분은 계속 후대에 의해 기억되고 있다. 물론 다산학술재단에서 방산 윤정기 선생의 학문을 연구하겠지만, 그분의 묘를 깎아주고, 제사를 지내주는 것은 후예들의 몫이다. 역사를 잊는 민족에게 미래가 없다고 했던가? 우리의 현실을 보면 역사를 잊는 것보다 역사조차 배척한다. 그러면서 한국인의 특유의 민족주의는 내세우는 형태에서 아쉬움만 남는다. 지켜야 할 것은 그 고집스러운 민족주의가 아니라 우리 민족이 아니라면 자신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이 지키려 했던 것은 무엇인지 한 번 더 생각하면 좋겠다고 여긴다.

 

다산은 분명 한국을 대표할 수 있는 위인이고, 세계적으로 기념될 정도로 훌륭한 학자이다. 하지만 그런 그조차도 지키기 어려웠던 시절이 있었다. 동학혁명 시기에 다산의 서적을 모조리 없애려 했고, 그와 그 제자들의 후손들은 핍박을 받았다. 역사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후손들이 오래오래 유지를 지켜서 가능했다. 책에서 1888년 이가환과 권철신 같은 신유사옥 희생자들의 묘비를 공개했다는 내용에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신유사옥이 1801, 다산서거가 1836년이니 그 노고는 알아주는 게 도리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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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7-05-15 21: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허허.. 요즘 연애생활로 바쁘신 분이 어찌 이리 긴 리뷰를.. 허허..

만화애니비평 2017-05-15 21:47   좋아요 0 | URL
여자친구는 현재 야근하고 퇴근하고 있을 겁니다..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