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된 관객 컨템포러리 총서
자크 랑시에르 지음, 양창렬 옮김 / 현실문화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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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된 관객>은 왠지 모르게 이때까지 내가 읽은 책들을 다시 되짚어 보는 기회가 되는 도서인 것 같았다. 물론 여기에 등장한 다른 저자나 책들 모두 읽은 것은 아니나, 많은 부분이 인용되고 연구된 점에서 랑시에르가 제시하는 현대적 미학이 무엇이냐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랑시에르의 책 중에서 과거 <무지의 스승>이란 책을 읽은 적이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랑시에르의 책은 쉽지가 않다. 제법 난해하고 어려운 개념이 등장하고, 번역자 입장에서 전공자이겠지만, 타 전공자 입장에서 매우 힘든 책이다.

 

그래도 읽는 이유는 이런 책들을 도전해야지 새로운 것들을 익히고 다른 것들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이 전해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솔직히 랑시에르의 <해방된 관객>은 내 사고에는 이중적인 판단이 내린다. 하나는 해방된 관객이란 결국 대중문화를 소비하는 대다수 인간을 말하고, 그들이 바로 새로운 문화적 주체자로 되어야 하는 점이다. 그리고 여기에 반대되는 의미는 이 책이 너무 적혀진 것이다. 랑시에르가 말한 지적인 권력에서 이미 이 책도 제법 지적인 권력이 담겨있다.

 

이런 모순 속에서 계속 우리는 모순과 역설적 관계로서 세상을 대할 수 없다. 만일 대중들이 일반적인 패턴에 익숙해진 이상 그들은 여전히 같은 모습과 같은 이야기를 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만화, 애니메이션, 라이트노벨 등과 같은 Sub-culture 계통 콘텐츠를 좋아한다. 대중문화에 최근 웹툰의 약진과 웹툰 원작을 바탕으로 영화와 드라마의 재구성에서 새로운 문화적 조류를 일으키는 것이 Sub-culture이다. 하지만 왜 Sub-culture의 등장이 중요한가?

 

과거 한국만화사 연구에서 문학비평가이신 김현 선생님은 만화란 민중을 위한 예술이 아니라 민중에 의한 예술이라고 말했다. 그분이 말한 것처럼 만화는 누구나 쉽게 만들고 접하고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술이란 인간의 삶을 하나의 굴절된 빛으로 보여주는 것이기에 인간이 가진 모습을 직접적으로 간접적으로 전해줄 수 있다. 반드시 예술이 예술가의 자신만의 세계에도 있을 수도 타인의 모습에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예술은 시각과 청각으로 구성된 매체로 제작됨에 따라 남에게 보이기 마련이다.

 

바로 여기서부터 이 책의 가진 의문과 검토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 책을 읽기 전에 그나마 다행인 게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의 사회>를 읽어봤다는 점이다. 아이러니하게 <해방된 관객>은 현실문화연구 출판사 직원 분에게 운 좋게 받은 도서이다. 내가 <스펙타클의 사회>를 본 것 사실 현실문화연구에서 나온 도서이나, 그 책은 절판되고, 대신 <울력의 책>에서 재출간 되었다. 스펙타클에 대해 쉽게 말하자면, 우리는 관객이고, 관객은 자신의 의지와 판단으로 상황을 맞이하는 게 아니라 그 상황에 의해 조작되는 것이다.

 

이른바 프레임에 갇혀서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프레임이란 상황에 묶인 것이다. 그래서 드보르는 상황주의자로서 그 상황을 타파하는 새로운 시도를 했던 것이다. 그들이 하는 행동들은 유쾌하거나 괴짜다. 가령 책을 전시하는 책장에 자신들의 책을 나두는데, 그 책의 표지는 사포로 되어 있어서 다른 책 커버를 손상시킨다. 야간에 에펠탑의 빛이 강해 잠을 잘 수 없으니 폭파하겠다는 협박을 한다든지 그렇다(물론 환경공학 전공자 입장에선 최근 경관위락에서 조명에 의한 수면부족 및 생태환경 변화는 무시할 수 없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 미디어의 이미지에 얽매이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그것에 탈출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드보르는 스펙타클은 이미지가 매개가 되는 사회이고, 이미지는 고정된 게 아니라 시시각각 변화한다. 따라서 스펙타클의 전복은 시시각각 변화하는 이미지에 의해 붕괴되고, 또 다른 이미지로서 스펙타클의 재정립이 시작된다. 스펙타클은 멈추지 않고 계속 새로운 죽음과 탄생이 반복되는 영원한 굴레이다. 이미 현대인들은 TV, PC, 인터넷, 스마트폰으로 스펙타클에서 탈출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수동적인 인생에 대해 생각하자면 내 가치관의 시작점인 장 자크 루소에서 생각할 수 있다. 루소의 <달랑베르에게 보내는 편지>를 직접 읽은 것은 아니나, <루소의 사상>이란 책에서 루소가 말하는 연극에 대한 글을 연구하는 파트를 보았다. 시간이 몇 개월 정도 지났기에 모든 것을 기억하지 않았으나, 연극이 가진 문제를 비판했다. 연극에서 권선징악적 요소에서 건전한 사회라면 좋은 작품이나, 그렇지 못한 세계에 나쁜 작품이라는 것이다.

 

즉 관객에겐 하나의 구경거리로 제공되고, 연극에서 나쁜 역할을 맡은 자는 관객에게 야유의 대상이 되는 것이라 보면 된다. 즉 관객이 그런 나쁜 역할을 맡은 사람들 중에 하나의 표본이 될 수 있겠지만, 나쁜 사회는 그런 반성은 없는 것이다. 루소의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를 읽으면 루소의 반계몽주의적 요소를 볼 수 있다. 학문과 예술이 인간에게 도움 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인간을 지배하고 억압하는 도구로 되는 것을 설파하다. 이런 점은 추후 푸코의 <감시와 처벌>과 같이 지배계급이 지식이란 권력을 이용하여 통제시스템이 이루어지는 사회를 분석하는 것과 이어진다.

 

대중문화는 일반 대중을 위한 미디어일 수 있겠지만, 그 안에는 담겨있는 내용은 대중에게 보여주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대중을 위한 여가생활보다는 대중으로 하여금 같은 사고를 자아내게 하는 하나의 도구에 불과하다. 드보르의 <스펙타클의 사회>가 책에서 나중에 영화로 나온다. 다양한 영상들이 짜 맞추어 육성에서 나오는(나는 불어를 모르니 무슨 말인지 모르고 영어도 잘 몰라 자막의 영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자세히 모른다) 내레이션을 따라가면 책을 읽은 것을 상기하며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각종 미디어에 집착하게 만드는 구조라는 점이다.

 

그러나 <해방된 관객>에선 재미있는 말이 나왔다. 어떤 군인의 돌격하는 장면을 두고, 우리에게 그것을 비판하기보다는 아방가르드의 반미학 운동가들의 유쾌한 논조가 상당한 아이러니로 다가왔다. 전장의 군인처럼 우리도 이 현실에 대한 수동적인 삶에 대하 돌격하자는 것이다. 우리 스스로 돌격하자는 것은 우리 삶의 주인이 우리란 점을 만들기 위해서 관객 스스로 뛰어들어야 한다는 점이다. <스펙타클의 사회>와 걸맞게 점심시간 돼지국밥 한 사발을 하는데, 뉴스에서 재미있는 기사가 나왔다.

 

연극을 하는 장소에 관객석이 없다. 관객이 위치하는 곳은 연극이 이루어지는 무대 위에 작은 빈 공간, 10명 정도 되는 관객은 자신의 몸에 하얀 천을 가린다. 마치 그 모습은 소포클레스의 비극을 보면 코러스가 뒤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관객이 이제 무대 위의 소품 내지 혼자 등장인물이 되었다. 급박한 상황을 구경하고 놀라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을 대변해주는 유기적인 존재가 된 것이다. 연극을 몇 번 본적이 있었다. 무대를 멀리서 혹은 가까이에서 말이다. 연극이나 공연은 무대 위의 사람만이 하는 것이 아니다 청중이 있어야 가능하다. 하지만 청중조차 연극에서 필요한 소재로 된 것이다.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의 브레히트의 연극에 대한 글을 보았다. 일반적인 연극이 아니라 연극을 보는 대중에게 충격을 주는 요법, 아방가르드란 반미학적 가치관에서 예술은 어느 일정한 목표를 향해 가는 게 아니라 그 목표와 별개로 각자에게 그 목표로 가라고 한다.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에서 아방가르드가 미치는 영향이 크다고 한다. 어차피 프랑스 후기구조주의 이전 모더니스트 단계에서 전환되는 과정에 아방가르드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우리 대중은 우리 시선을 자극하는 것에 치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이야기가 무엇인지 생각해야 하는게 아닌가?

 

작년문화예술 강의를 듣고, 어느 작은 아트갤러리에서 전시회 관람과 강연을 들었다. 여러모로 재미있는 추억이다. 다양한 사람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술도 마시고, 내가 살아가는 일상에서 볼 수 있는 인간관계가 아니라 더 많은 인간과 대화할 수 있었다. 그때 내가 돌아다니면서 어느 예술프로젝트를 보았냐면, 서울 홍대처럼 사람이 많은 곳에 이동식 포차를 움직이는데, 그 포차는 이상한 오브젝트로 구성되어 있으며, 거기서 안주와 소주 1잔을 돈을 받아 판다는 점이다.

 

오브젝트를 이용하는 많은 사람들은 돈을 주고 술을 마시고, 안주를 먹었다. 술을 나누는 포차가 하나의 예술적 기능은 무엇인가? <해방된 관객>에서도 비슷한 관점, 아니 우리보다 앞선 관점이 등장한다. 전시회를 여는데, 그 곳은 사람들이 잠도 자고 밥도 해먹을 수 있으며, 소파에 앉아 다양한 사람이 대화까지 나눈다. 인간이란 한자어를 보면 사람의 사이다. 결국 사람들이 모여 자신과 타인의 대화를 나누며 교감이 이루어지는 게 진정한 예술의 세계가 아닌가? 나는 예술의 최종목적을 두고 말한다면 결국 교감이다.

 

교감은 서로 가지고 있는 자신만의 의사와 판단을 나누는 곳이다. 개인의 의사와 판단은 사회적 고정관념과 편견에 휘말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대화를 나누면서 서로 간의 입장을 돌아보면 다른 가치관으로 이어진다. 예술의 기능을 두고 다양한 말이 있지만, 예술이 필요한 이유는 새로운 소통방법, 새로운 가치관, 기존 사회의 앞으로 다가온 사회의 대화라고 본다. 물론 나는 기존의 모든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지금 현재 모습이 있는 이유는 기존의 역사적으로 진행된 인간들의 축척이 존재했기에 가능하다고 본다. 과거가 없다면 현재도 없다. 단지 미래를 위한 것이란 현재를 어떻게 구성하는가이다.

 

랑시에르가 말하는 관객이 해방된다는 것은 자기 삶을 무엇을 보고 있느냐이다. 19세기 노동자의 삶에 대해 랑시에르는 생각한다. 자신의 집이 아닌 노동자가 그 집이 아름답게 빛나는 것을 보고 기뻐한다는 사실, 그것은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을 고생이 아닌 하나의 예술(물론 본인은 예술이라 여기지 않는다)을 만드는 과정이라 느낀다. 자신이 만들어내는 가치가 결국 그 자체를 만들어내는 하나의 과저이라면 예술은 어디에 구속된 것이 아니라 주변에 손을 뻗어 어디든 잡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해방된 관객>에선 자꾸 대중에게 자신에게 갇혀진 세계에 나오라고 한다. 가령 베트남전쟁을 보자. 아직도 한국에서 베트남전쟁을 두고 이데올로기적인 가치관으로 평가절가 하려고 한다. 하지만 막상 통킹만사건이나 고엽제 같은 일을 보면 공정성은 보이지 않은 것 같다. 어째든 현대전쟁은 주로 폭격과 화생방 작전이 많이 수행되었다. 미국의 어느 부유한 가정에 어느 한 베트남 남성이 목숨을 잃은 딸을 안고 절규하는 장면이 나온다. 포토몽타주, 즉 서로 다른 사진을 이어 붙여 만든 작품이다.

 

우리는 이것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해야 하는가? 사실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에서도 전쟁은 진짜 이루어진 전장보다 우리가 보는 헐리웃 영화의 전쟁영화가 더 실감나는 전쟁이란 말을 한다. 대중이 보는 매체가 그렇게 만들어 현실적인 비극을 마치 산파극의 정당한 내러티브로 전환해버린다. 해방은커녕 자신이 현재의 스펙타클에 얽매인 사실조차 알기 어렵다. 그런다고 관객이 새로운 눈을 가지도록 하는 일은 멈출 수 없는 일이다. 다양한 가치관과 인간들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대중은 한 가지 틀에 갇힐 수 없다. 누가 그랬던가? 모든 시민은 자신이 예술가와 작가 그리고 비평가가 되어야 한다고 말이다. 그래야 우리는 진정으로 해방이 된다고 말이다.

 

물론 책을 보고 현실을 돌아본다면 무척 어려운 조건이란 것은 안다. 어렵다고 자신 스스로의 해방이란 단어란 말처럼 간단한 일은 아니다. 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처럼 배우는 사람들, 즉 우리 대중은 무엇을 위해 그것을 배우는지 모른다. 그저 권력의 관계성에서 자신이 모르기에 단지 그 이유로 수동적인 삶을 받아들인다. 그게 곧 대중으로 이어지고, 우리에겐 스스로의 삶보단 통제된 삶을 강요하여 현재로 이어진 것이다. 그것을 멈추기 위해선 누가 강요할 수 없다. 칸트의 철학이 모든 게 맞을 수 없더라도 칸트는 계몽이란 자신이 스스로 그 알을 깨고 나와야 한다고 했다. 우리는 과연 스스로의 알을 깰 수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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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빠 2017-04-10 2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사게 하는 리뷰네요. 멋집니다.

만화애니비평 2017-04-11 08:44   좋아요 0 | URL
아이고 감사합니다.
아이디가 참으로 인상적이네요...
팔루스의 기표.....읽다말은 라캉이 생각납니당...
 

이제 드디어 서브컬처 사태가 트위토와 페이스북, 블로그에서 신문기사와 TV뉴스에 나왔다. 누가 그랬던가? No! Cut!가 이제 드리어 Yes! Cut!로 되었나는 사실을 말이다. 하지만 Yes Cut는 바로 웹툰작가들이 시초를 열었다. 이번 넥슨사태와 메갈리안 개입에서 나는 처음부터 사회구조적인 부분의 문제 특히 남여간의 문제를 단순히 남여문제로 감정대립을 하는 현실태에 대해 우려를 했다. 이건 단순히 남여간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인 구조에서 시작된 것이고, 이것은 한국사회의 문제가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사이의 대립이 이제는 남여의 사이의 프레임으로 변환되었다.


즉 이제부터 마녀사냥이 시작되는 것이다. <캘리번과 마녀>를 내가 자주 인용하는데, 이 책의 저자는 마르크스주의인 페미니스트이다. 여성이 고대로부터 희생당한 것을 생각하면, 프레이저의 <황금가지>도 좋다. 하지만 모든 것은 변증법적인 관계에서 전진과 퇴보 그리고 그리고 서로간의 충돌로 인한 변환운동이 발발한다. 이번 일에 대해서 가장 큰 원초적인 문제를 뭐라고 할까? 그 꼭대기 층에 남자 있는 것은 분명하고 사실이다.


하지만 남자라고 해서 한국사회 모든 남성이 아니라 그렇게 만든 남성 권력층이다. 그리고 여성들도 사회적인 높은 입지를 차지해서 남자들도 거기에 대한 박탈감을 느끼고 있다. 하지만 나라면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그런 높은 위치나 특권을 누릴 수 있는 자리는 남자라서가 아니라 여자라서 아니라, 단지 그들이 그렇게 될 수 있는 조건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 결혼문화에서 신데랄라 이데올로기나 온달신화가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비슷한 계층이나 권력, 자본력을 가진 자들이 서로 계속 연속적으로 관계성을 맺는 것이다. 어디에 남자가 유리하거나 여자가 유리하다거나는 단지 그런 자리에 올라갈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더 맞는 말이다. 전에 도서모임에 가서 다른 회원분들과 이야기했다. 대부분 결혼한지 오래되신 분들이다. 그분이 남성이 경제적으로 여성에게 빼앗길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어 현실적 대립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질문에 나는 다르게 답변을 했다.


"이미 경제적인 위치에 여성이든 남성이든 자리를 잡았다. 아주 높은 자리나 계층은 일반사람이 갈 수 없고, 아주 극소수다. 문제는 경제적으로 올라간 여성이 자기보단 못한 남성이라도 함께 해줄 것인가?이다.", 직업이 여자만 하거나 남자만 할 수 있는 직업이 아닌 이상 어디든 남여가 같이 있다. 내가 일하는 엔지니어링 설계관련 업무도 여성의 진출이 많고, 분야에 따라서는 남성보다 여성의 중심이 될 떄도 많다. 이미 경제적인 대립은 늦었다. 


지금 임금수준에서 여성이 낮다고 해도, 그것은 20~30대가 아니라 40대 이상의 노동인력이다. 식당이나 공장의 여성임금 수준은 매우 낮다. 하지만 전문인력은 학위와 자격증으로 충분히 올라갈 수 있다. 기계의 발전, 프로그램의 진보에서 육체적인 업무는 정신노동으로 변환된다. 즉 여성과 남성에 대한 혐오대립은 이제는 남여의 관계성이 아니라 사회적 조건에 따른 경제적 현실이다. 문제는 아직까지 회사 내 높은 자리는 40~50대 남성이 많고,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도 40~60대 남성이 주류를 잡고 있다.


하지만 20~30대 남성이 주류를 잡은 것은 아니다. 특권을 잡은 남성이 잡았다고 남성이 잡은 것은 아니다. 이런 부분을 간과하고 있으니 남여간의 대립각은 이상한 조류로 흘러간다. 서로 피해의식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여성의 입장에서 남성중심 사회가 불만이고, 남성에선 똑같이 대학에 갔는데 2~3년의 차이로 임금과 직급에서 불이익을 받는다. 사회구조에 의한 현실이 상대방에게 화살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대립의 각에 놓인 사람들은 주로 미혼이거나 학생인 남여들이다. 내가 결혼하신 분들하고 대화하는 것과 인터넷으로 보는 그들의 관점은 너무 다르다. 결혼하기 전에 여성에게 남성의 임금과 비교하면 부족하면 불만이 생기겠지만, 결혼한 여성에게 남편의 임금이 적으면 불만이 생긴다. 대부분 웹툰과 넥슨사로 대립각을 세우는 부류는 미혼인 경우가 다반사다. 한국 웹툰 소비자 중심이 누구일까?


남성도 많으나, 여성도 많다. 계층으로 보면 학생과 20~30대 직장인이다. 그나마 30대 세대는 한국만화가 제법 융창할 시대의 사람이다. <슬램덩크>나 <후르츠 바스케> 등 스포츠 및 소녀만화 쪽을 많이 접한 세대다. 지금 20대들은 웹툰이 시작된 시대에 같이 자라온 세대다. 10대들은 이미 구축된 콘텐츠를 즐기는 시대다. 그런 조건에서 한국의 웹툰은 한국 만화가들의 노력과 그들을 마지막까지 기다려주는 팬들이 있어서 생긴 것이다.


그런데 넥슨사건 이후 팬들과 넥슨사, 웹툰작가 그밖에 서브컬처 콘텐츠 내부관계자에 큰 파동을 일으킨다. 이 문제는 한국 서브컬처만 아니라 정치적 영역까지 이어지고, 이제는 혐오 사이트의 마녀사냥 명부까지 작성했다. 오늘 뉴스를 보니 분명 성적인 부분으로 작가를 매도하는 것은 문제이다. 본인은 그 메일을 보낸 자의 숫자에 따라 상처를 받으나, 그 작가는 자신의 한 말에 수많은 웹툰 향유자를 상처받게 했다. 그런데 지금은 웹툰작가 편에서 방송했다.


물론 관점에 따라 방송하고 이야기할 수 있다. 문제는 자기에 반대하면 너는 일베니 메갈이니 하는 사태가 드디어 방송에 나온 것이다. 이번 문제에 대해 나는 신속히 정리하길 원했다. 만약 이게 넷이 아니라 대중매체를 타면 어떻게 될 것인가? 자체정화가 되지 않아 대중문화 영역에 넘어가면 그야말로 국내 서브컬처는 공격의 대상이다. 예전에 화성인 바이러스 씹덕후의 별명이 붙어진 이진규 씨로 인해 국내 서브컬처 향유자들이 받은 상처는 이루어 말할 수 없다.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이유로 이지메와 가혹행위를 당하고, 사회적으로 성숙되지 않은 부진아로 낙인 찍힌 것이다. 웹툰의 약진과 웹툰의 영화와 드라마화는 한국 서브컬처 힘을 다시금 찾게 해주는 것 같이 보였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은 안녕이라 말해야 하나? 현재 웹툰작가에 대하여 불만을 말하는 자는 극우성향 사이트만이 아니라 그렇지 않거나 전혀 무관한 자들까지 있다는 사실이다. 처음에 남여간의 대립각을 세우는 게 이제는 한국의 서브컬처 생산자와 소비자의 대립으로 이어졌다. 어둠에 숨어 조용히 지내야 하는 자들이 겨우 숨통을 열 수 있었는데 말이다.


여기에 가중된 문제는 미디어의 공정치 못한 방송이다. 진짜 이 문제가 어디서에서 시작되었는지 말하지 않고 단순히 프레임에 갇히게 만드는 상황만 만들었다. 1970년대 유산으로 인해 한국만화는 그야말로 검열과 폭력에 시름을 앓았다. 그때 그런 정부시책을 앞선 언론사들이 이제는 서브털처 소비자에게 정론의 언론사로 통한다. 전에 정부의 심의기준 강화에 반발하던 자들이 말이다. 


인터넷의 도서사이트 글을 보면 아쉬운 것들이 있다. 그분들의 논리나 상황파악은 나보다 훨씬 탁월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오타쿠란 존재에 대해 잘 모른다. 그들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말이다. 어쩌다 만화책 한두권이나 애니메이션(그래보았자 미국이나 미야자키 하야오 수준) 한두편 보는 사람들은 그 상황에 처한 사람들의 기분을 잘 알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10~30대들이고, 기본적으로 학생이 많다. 내가 매일 챙겨 보는 일본애니메이션, 가끔 구매하는 만화와 라이트노벨은 대부분 10대 고등학생과 20대 대학생들이 많다. 


도서사이트의 탁월한 지성을 가진 분들이 만일 10~20대 학생을 대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 아니 처음부터 10~20대들에게 기존 사회의 남성권력의 부조리를 말할 수 있는 것인가? 그들은 지금 이 상황이 불쾌하고, 지금까지 믿은 것을 배신당했다고 믿을 뿐이다. 물론 어느 정도 사회학에 대한 기본지식이나 수준을 갖추면 충분히 대화와 토론이 가능하다. 그런데 현상황에서 그게 얼마나 통용될 것이라 보는 것인가? 박가분씨나 하지율씨가 아무리 글을 잘 적어도 그것은 자신들만의 이야기로 끝날 수 있다. 아는 사람들은 이해가나, 대부분 독자들이 이해갈 정도로 풀어쓸 수 있어야 하는 게 배려라고 생각한다.


독자에게 굴레를 씌우지 말자. 그들은 권력층도 아니고, 남녀 서로간에 사회적인 압력을 준 사람도 없다. 그들은 그저 사회적인 약자이다. 한국사회의 모순과 부조리, 그리고 그걸 이용한 강자가 만들어낸 프레임에 놀아나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물을 엎지른 상태이다. 이번에 부천국제만화축제 가지 못한 것이 다소 아슀다. 내일 미국의 유명한 만화학자인 스콧 맥클라우드가 부천국제만화축제의 컴퍼런스 초빙인사로 오신다. 


한국의 토론과 진행을 청강대학의 박인하 교수님, 그리고 비평가라는 선우훈씨가 맡는다. 선우훈씨가 해놓은 트위터를 넷 상에 보며 참으로 답답했다. 비평가라면 논리적으로 해결해야지 공인으로서 보여서는 안될 글을 적었다. 항의차원에서 부천국제만화축제 운영단에 보냈으나 안 올 것이란 점을 안다. 내일 컴퍼런스 참 걱정된다. 웹툰시장에 대한 소비자의 불신은 부천만화규장각에서 실시하는 부천국제만화축제와 부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까지 악영향이 간다. 


행사에 유명작가를 초빙하여 사인회나 전시회를 하는데, 이번 일이 터지니 어떻게 될 것인가? 독자들도 지나치게 비난이나 욕설을 금지해야겠지만, 웹툰작가들이 자신이 말하고픈 글들을 보고 충격받았다. 제발 극히 일부이길 바란다. 이때까지 수면 아래 가려진 모든 폭발물이 동시다발적으로 계속 터지고 있다. 과연 누가 가장 피해를 볼까? 웹툰시장의 규모는 축소되고, 한국 서브컬처 콘텐츠 향유자는 한국 것을 포기하고 외국으로 눈을 돌린다. 일반인들은 역시 오타쿠들은 안되라고 할 것이다. 여기서 일베와 메갈은 어느 순간 비난의 대상과 영웅의 대상으로 교차할 것이고, 한국 서브컬처는 그야말로 최악의 인간만 모여 정신적 자위만 하는 장소로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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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이번에 터진 웹툰 사건만의 문제가 아니지만, 뭔가 조금은 관계성이 있어 보인다. 2014년인가? 부산대학교에서 한국만화애니메이션학회 정기세미나가 열린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참석하여 수많은 만화애니메이션학과 교수님, 그리고 부산경남권의 웹툰작가들을 만났다. 물론 2013년 부산CT교류대회에서 몇몇 웹툰작가들과 만났고 가끔씩 마주치는 때도 있다.


그당시 내가 지금도 만화애니메이션학회의 학회장으로 계시는 장동렬 교수님께 아주 무례한 발언을 했다.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즐기는 소비자를 조금 더 알아주면 좋겠습니다. 만일 만화애니메이션학과 교수님들이 그들을 무시하면 그들은 한국 만화애니메이션을 포기할 겁니다. 그러면 교수님들의 제자들이 졸업하면 나갈 길이 없을 겁니다."라고 말이다.


이 말은 재작년 7월 서울 SICAF에서도 다른 교수님들과 2차로 호프집으로 가서도 발언했다. 그들의 눈엔 그냥 지방에서 평범한 회사에 다니는 오타쿠 나부랭이가 학회에 논문 1~2편 집어넣어 뭐하는 인간인가 싶을까 하는 마음도 들었다. 그러나 그게 현실이다. 오타쿠 소비계층은 한국에서 2000년대 신세기 에반게리온 열풍에 따라 당시 10대들이 20~30대로 진입하고 그들은 상당한 경제력을 가지고 있다.


일본에서 구매되는 각종 문화콘텐츠를 생각하면 우리 만화애니메이션 학회나 산업은 무엇을 보고 느끼야 하는지 알아야 할 것이다. 지금 웹툰시장은 진짜 말하자면 초기의 웹툰작가 혹은 웹툰 이전의 만화작가들이 노력한 시장이다. 도서가 전자매체로 변화하면서 책이 인터넷 웹으로 변화한 것이다. 만화책들이 이제 웹에서 컴퓨터 화면으로 볼 수 있다. 웹툰 역시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있다.


그러면 플랫폼의 변경에 따라 콘텐츠 그 자체는 변화하는 것인가? 담겨지는 틀에 변해도 그 안에 담고 있는 이야기는 언제나 작가의 몫이다. 그리고 작가를 알아주는 것은 독자의 선택이다. 고맙게도 디시인사이드 한국애니메이션 갤러리는(다른 갤러리와 비교는 하지 마세요) 아직까지 희박하고 열악한 한국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위해 응원한다. <고스트메신저>가 나오기 전에 이들은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극장이 나올 때 서로 먼저 극장에 가서 감상했다는 인증을 남겼다.


그 작품이 성공하든지 안 하든지 제작자 입장에서 자신들을 응원해준 팬들이 있다는 점은 상당한 행운이다. 현대사회가 아무리 자본주의 시장겨제로 인해 인간의 물화되어버렸다고 해도, 그래도 소비자 주권시대는 유효하다. 작가의 사상은 자유이고, 그들이 원하는 것을 누리는 것은 권리이다. 하지만 자유와 권리는 타인에게 상처입힐 권리는 없다.


그리고 남자가 하면 용납되고, 여자가 하면 용납되지 않는다는 말은 더 더욱 어이 없다. 생물학적으로 남녀의 차이점은 분명하나, 사회적인 영역에서는 서로 용납될 수 없다. 진짜 그 티가 미혼모, 소녀가장, 성폭행 피해자를 돕는 금액으로 간다면 좋은 일이나, 남에게 피해를 주거나 범죄를 일으킨 사람을 위해 소송비로 나가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다.


문제를 일으킨 사람을 보고 거기에 대하여 반성하는 게 아니라 도리어 그것이 억울하여 우리가 도와주겠다는 식은 스톡홀룸 증후군의 말기 현상에 가깝다고 본다. 현재 작가에 대해 협박메일을 보내는 것도 문제고 트위터나 페이스북에 욕설하는 것도 문제다. 하지만 욕설하는 사람이 있다면 왜 욕설하는가에 대한 의문은 없는가? 


어느 분들은 이 문제가 한국의 페미니즘 발전에 어떻게든 도움이 될 것이라 보는데 사실 나는 그 말에 비관적이다. 광우병사태로 인해 일베가 탄생하고, 그들은 애국서사를 내세우고 네오-메카시즘을 일으켰다. 세월호 유가족에게 조롱을 퍼붓고, 518희생자와 유가족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주었다. 그런 그들에게 애국서사 탄생은 한국사회에 일반화로 자리잡았는가? 일반여성들에게 불쾌감을 안겨주는 일베를 일반남성 역시 불쾌감을 느낀다.


메갈리안 사이트가 일베의 미러링이 되었고, 그리고 그들은 페미니즘을 말한다. 처음부터 논조에서 일베의 미러링의 방법이 틀렸다. 과격파가 되어 사람들에게 쇼크를 주어 인식의 전환을 준다는 전략이 있겠지만, 그 전략의 사용이 영국의 서프러제트 운동(1910년대 영국여성선거권 획득운동)과는 전혀 다르다. 영국의 여성들은 정확한 이념과 목적의식이 있었다. 사람들이 대화를 나누려고 하면 그들은 대화를 하면서 서로 풀어가려 했다. 지금은 대화조차 되지 않는다. 


내 생각이 옳다고는 볼 수 없고, 그런다고 무작정 오류라 볼 수는 없다. 내 생각에도 구멍이 있고, 저들의 논리에 구멍이 있다. 하지만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행동 자체에 구멍 밖에 없다. 아래는 미디어투데이 이선옥 기자의 글이다. 도대체 우리는 어떤 시야를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는 게 옳은 것인가? 내가 대학교 수업 수강 시 시간이 남아돌아 여성학 수업을 우연히 들었다. 교양수업을 하시던 여자교수님의 말을 듣는 것과 현실은 별개로 돌아간다. 

 

http://www.mediatoday.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13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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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학 원리 2 - 사회철학에 대한 응용을 포함하여 나남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277
존 스튜어트 밀 지음, 박동천 옮김 / 나남출판 / 2010년 8월
평점 :
품절


존 스튜어트 밀의 <정치경제학 원리> 1권에 대한 서평을 적으면서 어느 분이 재미있는 의견과 조언을 주셨다. 그분이 주신 코멘트 중에서 인상 깊은 것 중에서 존 스튜어트 밀은 고전적인 자유주의자가 아니라 사회자유주의라는 단어를 남겼다. 생각해보면 밀의 정치적 자유주의는 이근식 교수의 <진보적 자유주의>와 같이 일반적인 자유주의하고 조금 다른 점이 있었다. 일단 <정치경제학 원리> 2권째를 읽으면서 느낀 점은 존 스튜어트 밀이 자신의 아내인 해리어트 테일러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점이다.

 

존 스튜어트 밀이 단순한 자유주의자가 아니라 사회주의적인 자유주와 페미니스트적인 자유주의자로 될 수 있던 원인은 해리어트 테일러의 영향이 컸다. <자유론>이나 <여성의 종속> 같은 책을 읽어봐도 밀의 자유주의 논조는 단순히 개인만의 자유를 강조한 게 아니라 타인의 권리와 인격을 존중했다. 어느 누군가 문제를 일으키면 문제자가 속한 사회는 그에 대한 책임을 추궁하는 것도 중요하나, 그 이상으로 그가 다시는 그런 문제를 일으키지 않도록 예방과 도움을 주는 것도 중요하다고 했다.

 

즉 한국처럼 누가 잘못을 저지르면 사회적 단절로 이어지는 게 아니라, 만약 그가 진정으로 죄를 인정하고 용서를 바라며 좋은 삶을 원할 경우 사회에서 도움과 기회를 준다는 점이다. 밀이 추구하는 사회적 가치관은 공리주의적 요소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의 아버지의 동료인 벤담과 다르다. 벤담은 양적인 공리주의, 누군가 다름이 없이 모두 같은 것을 줘야 한다면, 밀의 경우 그 상대방이 처해진 상황과 조건에 따라 다르게 대해야 한다는 점이다.

 

민주주의 국가사회에서 전부 국가적으로 권리를 지니고 있다고 해도 그 누군가에 따라 필요한 인프라나 서비스는 다르다. 그렇기에 사회적인 영역을 공공성의 여부를 가려 정책을 펼친다면 결국 국가나 민간에서는 자본이 이용된다. 정치적인 상황에서 경제적 조건을 따라가기에 경제학은 단순히 수학식으로만 볼 게 아니라 전반적인 사회적 흐름과 여건을 보는 것이 옳다. 존 스튜어트 밀의 <정치경제학 원리>를 읽으면서 생각나는 것은 그의 경제에 대한 관점은 바로 대다수로 이루어진 농민이나 노동자의 생활 그리고 그들을 움직일 수 있게 하는 자본과 토지 등을 판단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존 스튜어트 밀이 살던 시절에 영국 런던에 카를 마르크스가 와 있었고, 마르크스는 코뮤니즘 즉 공산주의 이론을 1848<공산당 선언>으로 통해 발표했다. 물론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을 읽으면 마르크스 말고도 공산주의라는 이름의 유령을 말한 것을 보면 마르크스 혼자 공산주의를 논한 것도 아니고, 당시 생시몽, 오웬, 푸리에 같은 사회주의자들도 활동했다. 마르크스가 아마도 밀의 경제학에 대해 다소 공격적 반응을 보인 이유는 <정치경제학 원리> 2권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밀은 생시몽과 친분이 제법 있었던 모양이었다.

 

생시몽의 이론을 제법 책 시작부에서 많은 고찰을 했으며, 국민경제와 관련하여 어느 경제적 관점이 좋은지에 대해 논하고 있다. 어느 것만이 좋고 나쁘다고 밀은 판단하지 않는다. 그 효용성에 대해 언젠가는 다시 확인해야 한다는 가능성을 열고 있다. 밀이 살고 있을 무렵은 경제학은 전형적으로 부르주아 경제학이었다. 즉 자본가를 위해 만들어진 정치적 제도, 경제적 구조가 있었던 것이다. 밀의 <정치경제학 원리>를 읽으면 밀의 정치사상이 어느 정도 이해가게 된다.

 

밀은 인간의 비참한 생활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인구에 대한 고찰과 인구조절을 위해서는 식량이 중요한 점을 검토했다. 그리고 식량과 더불어 인구증가를 단순히 국가적 사회적 차원에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라 인구정책을 체계적으로 해야 한다고 밀은 주장한다. 밀이 페미니즘 관점에서 적시한 부분은 너무 많은 아이를 낳으면 나중에 그들을 양육할 능력이 되지 않아 일부 아이들은 병으로 죽게 되거나 먼 미래 아이들은 가난으로 인해 결혼하지 못한다고 했다. 가난으로 인해 식사를 제대로 할 수 없고, 약을 구할 수 없으며, 재산이 없으면 자식들이 새롭게 시작할 수 없다.

 

아이들은 2명 정도, 혹은 병이나 사고로 죽을지도 몰라 3명까지만 존재하는 게 맞는 것이다. 밀의 생각은 현재 한국이나 일본 사회에서도 놀랍게도 적용된다. 한국의 인구출산 비율이 1.2인에서 다운되었다고 한다. 앞으로 여성 2명 중 1명만 자녀를 가질 것이고, 출산을 해도 몇몇은 사고나 병으로 죽는다면 인구유지는 1.1인으로 될 것이다. 인구의 감소는 경제적 생산력 축소와 경제활동 영역이 축소된다. 경제력이 축소되어 시장경기가 퇴보하면 나라는 극심한 빈곤으로 치닫게 된다.

 

밀도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 교육이 필요하고, 교육을 위해서라면 사적인 투자와 공적인 투자가 있지만, 공적인 투자는 누가나 지원할 수 있기에 그런 직업을 가진 자는 넉넉한 임금이 오지 않은 점을 말했다. 이에 반면 사적인 투자, 즉 집안에 여유가 있는 사람이라면 의사나 법조인으로 선택할 수 있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에서 변호사 수임료가 그토록 비싼 이유는 변호사가 되고 싶으나 되지 못한 사람의 몫까지 챙기기 때문에 비싸다고 했다. 결국 직업의 선택적 사항이 상황적 유리함과 불리함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정치경제학 원리>는 경제학에 대한 책이기도 하나, 사실 매우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부분도 강하게 반영되었다. 솔직히 책 앞부분을 보면서 장 자크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학문과 예술에 대하여>가 생각나기도 했다. 정치경제학자인 밀의 입장에서 보자면 국민들의 생활이 여유롭지 못하고 빈곤과 질병으로 시달리고 있다면 분명 심각한 문제다. 그 모든 것은 임금을 받는 노동자와 농사를 짓는 농민의 상황을 제대로 고찰했기 때문이다.

 

본 서평에서 언급한 것처럼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현재 수준 이상의 인구가 필요하고, 재생산이 되려면 결혼 내지 남녀 간의 동의 아래 자녀가 태어나야 한다. 하지만 그 아이들의 양육비와 교육비가 제대로 구비되지 않을 시 사회가 유지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는다. 재생산의 기능을 위해서는 임금을 받는 노동자가 충분한 생활비가 받아야 하고, 농민은 자신에게 돌아갈 수확물이 있어야 한다.

 

특히 농민과 같은 경우 밀은 자작농의 활약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자신이 밭의 규모가 작아도 그들 스스로가 노력하면 좋은 결과를 받을 수 있기에 성실하게 일을 한다. 농지를 가꾸는 것은 어렵다. 유럽의 토지는 대부분 척박하고, 석회질이 많은 토질이 많기 때문에 시비관리나 수자원관리가 어렵다. 황무지개간을 하고 나서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곡식을 수확할 수 있다. 그러나 농민이 자기 땅을 조금이라도 가지면, 애정을 가지고 농지를 개간하고 수확물을 거둔다.

 

지주가 있는 땅을 빌려 차지농으로 일을 한다면 그 농지는 제대로 관리되지 않는다. 농지를 관리하려면 계속 땅을 갈아야 하고, 잡초를 뽑아야 하며, 시비관리도 해야 한다. 토지의 양분을 위해 가축을 사육하여 가축분뇨를 퇴비로 이용해야 한다. 만일 자기 땅이 없다면 굳이 농민을 농지를 개선해야 할 의무는 없다. 또한 농민이 지주에게 땅을 빌릴 경우 지대를 지불해야 하는데, 당시 영국에서 지대를 납부하면 농민에게 돌아오는 소득은 거의 없었다. 때로는 내년 파종을 위한 씨앗까지 먹어야 하는 상황이 일어나기도 한다.

 

지금이야 식량생산이 기계화 농업으로 어느 정도 해결될 수 있고, 부족하면 수익 농산물을 대량 구매하면 문제가 없다. 그러나 그때는 무역을 위한 교통수단이 크게 발달하지 않았고, 대량으로 운반하기에도 기술력이 부족했다. 자작농을 육성하면 자신의 노력에 따라 생활이 안정될 뿐만 아니라 가족들에게 충분한 생계유지를 통해 농업을 보전할 수 있었다. 하지만 대규모 차지농이나 농노의 경우 자신에게 돌아갈 양은 매우 한정적이기 때문에 일을 열심히 할 수 없다. 같은 땅의 규모로 차지농과 자작농의 생산규모는 어마어마하다.

 

이것을 현대에 두고 생각하면 굳이 농사만이 아니라 소규모 상업시장을 보면 생각할 수 있다. 각자의 가게를 가진 사람들이 밀집한 지역과 어느 큰 백화점 내 점포로 들어간 것에 대해 생각하면, 경제적 이용에서 소비자에게 나가는 금액은 큰 차이가 없다. 하지만 소비자가 사용한 금액이 배분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대규모상점 백화점에는 대기업에게 큰 이윤이 돌아가고, 직원으로 고용된 자에겐 단지 근무시간에 따른 임금만 지급된다. 만일 상점가의 개인상점들이 모인 곳에 같은 금액이 소비되었다면, 그 이익이 돌아가는 비율은 전혀 다르다.

 

소규모 운영되는 자작농이나 자영업자들이 줄어들면 그들은 임금노동자로 속해지고, 기존 임금노동자와 관계에서 임금인하에 따른 고통을 받게 된다. 즉 대규모 운영되는 상가에서는 인력을 최소운영인원만 필요하기에 많은 인원이 노동을 원할 경우 경쟁이 생기는 바람에 임금의 저하가 따른 것이다. 밀의 <정치경제론 원리>를 보면 영국에서도 농지에 대한 지대로 많은 농민들이 경쟁했다. 전임 차지농이 당초 자신이 대여한 가격과 비교하여 몇 배로 비싸게 다른 농민에게 파는 경우도 많았다.

 

밀이 경제적으로 자본을 얻는 경로는 임금, 이윤, 지대이다. 고전경제학부터 시작하여 심지어 케인즈의 거시경제학과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에서도 통용되는 기본이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 부동산이 기능하는 지대의 무서움을 모르는 것 같다. 아무리 농지에서 생산력이 증가해도 지대가 너무 높을 경우 농민에게 돌아가는 수확물은 얼마 되지 않는다. 전에 EBS 자본주의 특별4부작에서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이 현대 자본주의와 비교하여 크게 다른 것이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을 이어 마지막 고전주의 경제학자이면서 색다른 경제학을 보여주는 존 스튜어트 밀의 경제학 역시 마찬가지다(1권을 보면 20세기 초반에 경제학과 학생들의 교재로써 밀의 <정치경제학 원리>가 탁월하다고 했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은 국가에 살고 있는 대다수 사람들이 잘 먹고 잘 사는 것에 대해 연구하는 도서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잘 먹고 잘 살려면 무엇을 보고 생각해야 하는가? 스미스의 고민을 밀도 역시 똑같이 생각했을 뿐이다. 단지 추가한 부분으로 리카도와 멜서스의 이론을 접목했다. 마르크스는 멜서스를 경멸했지만, 후에 문화유물론을 내세운 문화인류학자 마빈 해리스는 멜서스의 인구론을 중요하게 여겼다. 식량이나 혹은 현대로 따지면 식량 같은 재원이 인구를 조절하는 수단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일 중요한 것은 경제라는 것은 필요한 것을 구하고 이용해야 하는 것인데, 대다수 국민들이 필요한 것을 구하기 위해서는 임금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현재의 경제학은 단지 숫자만으로 결정짓는다. 도서 모임에 경제경영학 전공자에게 경제학에 대해 전반적으로 물어봤다. 그 분이 말하기를 현대 경제학은 수학논리로 움직이는 반면 보통 사람들은 수학적으로 움직이지 않기에 경제학의 공공성이 없는 것이 한계성이 높다고 했다. 밀의 <정치경제학 원리> 1권에서 왜 후대 학자들은 존 스튜어트 밀의 서적을 높이 평가했을까? 경제학 속에 철학을 반영했기 때문이다. 철학이 없는 경제는 결국 어느 대통령의 성공신화에 군중은 매몰된다.

 

성공한 기업가는 나라의 부를 올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입지와 기업을 성장시킨 것이다. 물론 기업 활동이 임금을 받는 노동자에게 중요하지만, 기업의 목적은 기업이익증진이나 국가경제에서 국민생계수단을 걱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산업화시대 자본주의 시장이 확실히 성장한 것은 사실이나, 경제규모가 성장했을 뿐이지 정치경제학에서 말하는 국민생활 현실을 지금 확인해보면 과연 우린 성장했을까? 철학이 없는 정치는 큰 죄악이다. 정치적 행위로서 정부의 운영은 예산이 움직이고, 예산은 경제성으로 움직인다. 아마 돈에 관심이 경제를 찾아가는 사람에게 밀의 <정치경제학 원리>는 아무 매력이 없을 책이나, 나라경제를 조금이라도 걱정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 접해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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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평소에 공부를 하고, KOSCAS 논문을 제출하려던 주제 중에 하나가 "마녀사냥"이다. 마녀사냥에 대한 마녀프레임은 단순히 魔女에서 여성만이 아니라 그 누구도 될 수 있는 불특정다수 중에 어느 소수자를 골라내는 것이다. 마녀사냥이 이루어진 광기의 유럽에서 희생자는 처음에 고관대작이나 성직자로 시작했으나 점차 아래로 평민이나 농노로 이어진다. 뒤로 점차 가면서 노동력과 생산력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은 노인여성에게 큰 타격을 가한다.


영국의 인클로저 정책은 공유지를 없애는 것이고, 그 공유지가 대부분 삼림, 숲이 우거진 곳이란 점에서 재력이 없거나 의지할 곳이 없는 사람들은 숲으로 들어가 과실을 먹고, 식물을 채집하며 특히 약초를 연구하여 자신들의 병을 치료했다. 마녀가 숲에 살고 이상한 약물을 만든다는 속성은 바로 이런 과정이 전도된 오류이다. 마녀사냥의 목적은 지배계급의 이익을 위해 피지배계급을 착취하면서, 피지배계급인 농민이 가진 분노의 칼날을 우회하기 만든 시스템이다.


시스템이란 것은 결국 사회적 구조에 의한 것이고, 인간은 그 시스템을 이해하지 못함으로써 어리석은 스펙타클러가 된다. 스펙타클러란 가장 열정적으로 행동하나, 그 행동에 아무런 의지나 사고방식도 없으며, 반영구적으로 인형놀이의 광대로 활동한다. 파시스트에 물들인 자들이 자신들의 활약을 보여주는 것이어야 말로 그런 스펙타클의 사회에서 영웅으로 등극한다. 물론 그들이 도중에 제거되면 사라지는 소모품에 불과하다.


지금 서브컬처 비극은 게임성우, 웹툰작가, 번역자 등 다양한 분류가 있다. 극우성향의 사이트에 대한 미러링이란 대항마라 하나,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그들도 극우성향의 사이트 회원 못지 않은 폭력단원이다. 폭력이란 단순히 물리적인 영역만이 아니라 인터넷 사이버 세계나, 말과 퍼포먼스로도 가능하다. 폭력이 무서운 이유는 폭력을 가하는 자들의 사고방식 자체가 너무 위험기 때문이다. 폭력의 정당성은 군중심리와 집단광기와 관련되어 있다.


16~18세기에 줄기차게 이어진 마녀사냥은 집단광기와 군중심리에서 비롯되는 현상이다. 실제 우리 사회에서 역사를 들여다보면 여성들이 고생했고, 세계 인류학 서적이나, 몇몇의 페미니즘 학자들의 책을 봐도 안다. 지금 일어난 현상과 세계의 저명한 페미니즘 도서 저자(존 스튜어트 밀과  해리어트 테일러 부부, 매릴린 옐롬, 닉 테일러, 실비아 페데리치 등등) 작품을 읽어보면 지금 한국사회에 대한 부분이 이해가지 않는다. 내가 여성이 아니라 하지만, 글에 나온 서양의 시선인지, 아니면 우리가 동양에 국한되어 그런지 알 수 없다.


단지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말하는 여성인권 범주에는 진짜 여성이 없다는 점이다. 어느 극단적 성향의 자의 말을 빌려 그들만의 나라를 세우고 싶다면,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든다. 왜냐하면 그들의 나라를 만들면 국가정부가 생기고, 관료체계가 생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국가를 운영하려 경제구조와 사회적 인프라가 우선이다. 국방군사, 산업, 의료, 교통 등등이다. 바보 같은 점은 어떤 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해 중요한 점은 시설물이다. 구조물이 올라가는 공간에서 시설이 없으면 살아가지 못한다.


집이 있어야 잠을 자고, 집을 지으려면 건설장비가 필요하며, 건설장비를 만드려면 기계기술자가 필요하다. 게다가 토목과 건축기술자가 필요하며, 노동을 할 수 있는 기술자가 있어야 한다. 자재를 운반하려면 선박이 필요하고, 선박을 운영하려면 선원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그 노동력을 어디서 구해야 하는 것일까? 


언젠가 종로 유진식당에서 조촐하게 막걸리를 마시면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눌 때 옆 자리에 계신 분이 나보고 노동결정론적으로 세상을 본다고 했다. 물론 그런 관점은 누구마다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지만, 노동할 수 있는 범위와 범주, 그리고 능력이 사회적 시스템으로 움직인다. 사회적 시스템에서 문제가 있는 것들은 교정하고 논의해야 하나, 막상 저들의 논리는 언더도그마로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준다.


성우가 교체되니, 거기에 미친광이처럼 몰려들어 한 목소리를 내고, 이제 그 성우가 충분히 대가도 받고 정식적으로 해결되었다고 하니, 이제는 다른 곳으로 칼날을 돌린다. 단지 그런 부류는 다른 누구의 권리를 옹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자신들의 이상한 불만을 논하고 싶을 뿐이다. 불만과 불리한 감정이 하나의 정의감이 되어 집단적 광기로 폭력을 부를 때 그걸 집행하는 자들은 정의를 수호한다고 말한다.


특히나 대다수 국민여론이 아니라 다수로 이루어진 소수정예요원인 경우 특히 그렇다. 투사와 광인은 다르다. 투사는 타인에게 공감과 사유를 전해주지만, 광인은 타인에게 불쾌와 반발심만 전해준다. 그들리 말하는 주장에만 일절의 윤리와 논리는 없으며, 오히려 그걸 부정하는 요소를 도리어 논리성으로 보여주려 한다. 그리고 그것이 틀리면 나 모르오 라는 태도로 임한다. 


한국에서 게임과 웹툰은 서브컬처를 넘어 청소년의 여가생활이고, 일반대중의 오락이다. 나는 저들의 행동에 대해 강경하게 대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들의 행동범위는 문화콘텐츠로서 이른바 문화적 향유로 대중을 접하기 떄문이다. 따라서 공공성이란 영역에 발을 들이고 있으며, 특히 웹포탈 사이트인 다음이나 네이버 등과 같은 공중매개체로 대중들과 접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뭐가 문제고, 무엇이 잘못되어 그것을 조금이라고 느낀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무용이다. 예전에 어느 극우성향 사이트 회원이 아이들의 젖꼭지 병을 물고 있는 사진이 노출되자, 소비자들은 불만을 제기하고 그 회사에 항의했고, 회사의 이미지는 실추되었다. 그렇다면 그 회사 입장에서 보자면 자신들의 경영에 큰 손해를 준 것이다. 그래서 그 직원은 강제로 해직되었다. 


지금 레진코믹스는 그런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다. 국내 만화문화콘텐츠 산업의 선두자가 무참하게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각종 만화관련 학회나 세미나를 참석하면서 레진의 힘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고, 만화관련 대학교 교수들의 강연에서도 레진의 힘이 필요하다고 했다. 만화작가들이 제대로 대우받고 계약조건이 탁월한 곳이 그나마 레진이었는데, 이런 상황에 놓였다. 레진 입장에서는 경영문제와 더불어 만화문화에서 보자면 그들의 행동은 큰 치명적 타격이다.


만일 여성에 대한 성희롱이나 성폭행, 혹은 노동착취나 임금체불, 회사 부조리 신고에 보복으로 저항했다면 당연히 납득해야 겠지만, 오히려 그것과 무관한 일로 파시스트로 가고 있다. 사람은 실수할 수 있고, 오해할 수 있으나, 적어도 그런 것에 대한 명료한 답변을 들으면 스스로 생각하고 인정해야 한다. 그런 게 없다면 답은 없다. 


이것과 무관하나 어제 뉴스기사에서 마음이 아프고 씁쓸한 기사를 보았다. 어느 미혼모 여성이 아기가 죽자 모텔에 숨기고 나와 결국 경찰에 잡힌 이야기다. 무책임한 남자친구는 나몰라라 하고, 미혼모의 부모는 그녀를 집에서 내쫓았다. 물론 그런 무책임한 남자와 아무 생각없이 같이 보낸 그녀의 마음가짐에도 아쉬움이 있겠지만, 적어도 태어난 아기에겐 죄가 없다. 일단 아기가 태어난 이상 미혼모를 사회적으로 보호해야 하겠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또 다른 이야기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만날 수 있는 마트의 계산원들, 마트에 가면 내가 불편하게 보이는 광경 중에 하나가, 계산대에 의자가 없다는 점이다. 하루에 몇 시간에 가만히 일어서서 계산대에 있다는 것은 다리와 허리에 무리가 간다. 그런 사람들 중에 편모로서 아이를 키우는 여성이 임금문제나 대우문제로 영업주에게 항의하다 불리한 일들을 당하는 경우다. 영화 <위로공단>을 보면 이 나라의 약자들이 누군지 알 수 있다.


광기에 젖은 그들은 이런 분들을 제대로 보려고 할까? 이런 분들이 고생하는 것은 사회적 불평등과 모순이다. 권력을 가진 자에겐 진심으로 저항하지 않으면서, 우리 일상주변에 존재하는 평범한 사람에 대하여 독수를 날리는 인간을 보면, 마녀사냥을 조작되는 게 아니라 스스로 재생산하는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다. 남에게 상처를 주고 난 후 자신에게 만일 불리한 처우가 온다고 해서 그들은 불만을 제기할 수 있는 권리나 의무는 없다. 타인의 입장을 인정하지 않은 자에겐 그건 허울 좋은 망상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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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ㅈㅈㅇ 2016-07-22 2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왕자가 필요 없다˝는 티셔츠 입었다고 성우가 교체된 것 자체가 있어서는 안 되는 미친 짓인데 그 얘기는 쏙 빼놓고 잘난 척하고 있네. 여기다 좋다고 눌러댄 인간들이나.

ㅈㄴㄱㄷ 2016-07-25 16:08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휴.. 여기도 몰려드나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