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실격 에디터스 컬렉션 12
다자이 오사무 지음, 오유리 옮김 / 문예출판사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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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이 오사무를 처음 만났다.

많은 출판사의 인간실격 가운데 문예출판사에서 출판된 인간실격을 만났는데

자세히 보니 표지는 책 속의 한 풍경을 담고 있었다. 표지 컬러가 은은하고 책값도 저렴한 데다가 가지고 다니며 읽기 좋다고 말하려다가 덜컥하고 모든 것이 멈추었다. 누군가에게 가장 고독한 순간이었을 그 시간이 엄숙하게 다가오며 다시 제목에 집중해 본다.

책을 통해 또 하나의 세상을 알아버린 기분, 비밀의 문 하나가 열린 기분을 오랜만에 만났다. 크지도 않은 이 책을 4일째 다른 것들을 내려 두고 부둥켜안고 있다.

 

<인간실격>의 많은 문장, 거의 전문이 생생히 남는다. 슬픈 명언이 너무 많네. 직접 읽어보지 않았다면 감이 잘 오지 않았을 테고, 시기적으로 지금이라서 좋았던 것도 있지만 아무튼 이제라도 읽게 되어 다행이다.


읽기 전과 후가 달라지는 책 Best 10에 넣어야겠다. 나처럼 '다자이 오사무'를 만나는 것을 왠지 버거워하며 미루고 계셨던 분들이 계신다면 꼭 읽어 보셨으면 한다.

(소설의 구성이 어떻든 간에 나는 저자인 다자이와 주인공 요조를 거의 동일시하며 읽을 수밖에 없었다. <인간실격>을 좀 간단히 말해볼 수 있다면 좋겠는데 이 책이 건드리는 부분들이 많아서 인물, 사회 배경, 인간관계, 자아성찰, 성장, 순수 등 하나에 초점을 두고 말하기가 어려울 만큼 꽉 차 있어서 두서없이 남겨본다.)






날 때부터 결핍이 없는 배경에서 자란 주인공에게서 너무나 큰 결핍이 느껴지는 아이러니가 아프게 다가온다. 내가 보기에 요조는 피해자다. 보호받고 관심받고 사랑받아 마땅했던 유년 시절을 유린당했다. 요조가 불안과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도움도 청할 수 없었던 비극은 오늘날의 유년들에게도 일어나는 일이기에 가벼이 볼 수가 없었다. 어른들에게 기대하느니 차라리 '우스운 행동'으로 자신을 보호할 수밖에 없었던 요조의 행동이 습관이 되어 어느새 벗을 수 없는 가면이 되어버리는 모습을 보며 우리들의 성장기와 다르지 않다는 것에 강한 공감을 느낀다. 다르다면 요조는 사회가 바라는 평범한 선택을 하기보다 자신에게 충실한 선택을 해간다는 것인데 그럴수록 인간실격이 되어간다.

 

 

 

인간 불신, 누구도 믿을 수 없었을 것이고 그만큼 고독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을 폐인, 광인으로 몰아가는 세상의 잣대는 그를 인간실격으로 평가해버리지만 요조는 그렇게 끝내고 싶지 않았기에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지 않았을까?

 

결국 인간에게 호소하는 건 소용없는 짓이다. 내겐 사실 입 밖에 내지 않고 가슴속에 묻어둔 채 다시 '우스운 행동'을 계속해 나가는 것 외엔 달리 길이 없었습니다.

인간실격 p 25

서로 불신하며 살아가는 인간에게 기대할 수 없는 요조는 허공에 대고 신에게 물어야 했다.



신께 묻습니다. 무저항은 죄인가요?

신께 묻습니다.

순진한 신뢰는 죄입니까?




p 145

나의 불행은

거부할 능력이 없는 자의 불행이었습니다.

인간실격 - 다자이 오사무



독서 후 여운을 되새기다 보니 상반된 두 가지 감상이 남는다.

아무도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 그러나 '요조' 스스로만큼은 수기를 남기며 자신을 완벽히 이해했다는 점에서 매우 완성된 삶이라는 생각이 든다.


반대로는 상대를 배려하느라 내 인생 전체를 '우스운 행동'으로 몰아넣으며 소진시키고 가면을 쓰고 연기하며 '인간에 대한 서비스'를 하는 것으로 정작 나는 돌보지 못하고 바닥까지 소진시켰기에 수기의 시작을 그렇게 했다고 느꼈다.


p 11 부끄러운 생애를 살아왔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심으로써 재가 되어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것을 돌아보며 평생 불씨를 안고 살며 데여온 자신이 재가 되어 함께 소진되었음을 보는 것 같았다.


이제 내겐 행복도 불행도 없습니다.

그저 모든 것은 스쳐 지나갑니다.

인간실격 p 149

 

독자는 요조의 마음도 다자이의 마음도 모두 눈치채며 오래도록 회자하고 있고 <인간실격>이 스스로 생명력을 가지게 된 이유가 되는 것 같다. 마치 고흐의 그림이 사랑받듯이...




겁쟁이는 행복조차 두려워하는 법입니다.

행복에 상처 입을 수도 있는 겁니다.



요조가 여자들에게 쉽게 사랑을 얻는 모습은 누가 봐도 모성애를 자극하기 때문이었지만 이 소설 어디에도 어머니의 사랑 비슷한 것을 언급하지 않는 것으로 철저히 모성애와 멀리 있었던 요조 혹은 다자이를 적랄하게 느낀다. 묵음 처리된 슬픔이 극대화되듯이 말이다.




여성과의 관계에서 쉽게 시작하고 먼저 돌아서기를 반복하는 모습은 자괴감과 죄책감 그리고 상실감을 표현하고 있지만 그래도 그것은 어쩐지 사랑받고 사랑한 기억들이기에 결국 공감하게 된다. 나를 포함한 완성도의 가치보다 나를 제외한 완성도의 가치를 크게 느끼며 인간의 자리에서 스스로를 실격시키며 다시금 행복에서 멀어지는 모습이 가장 안타까웠다.



소설 속 인물 요조는 ‘좌절된 소속감’ 과 ‘짐이 된다는 느낌’으로 구성된 ‘자살을 소망하는 마음’을 갖춘 인물이다. 여기에 앞서 반복된 자살 시도와 알코올과 약물 남용을 통해 습득된 ‘자살을 실행할 수 있는 능력’까지 더해져 요조는 자살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가 살던 시대는 어떠했고,

그는 어떤 생을 살았을까?

무엇이 가장 그를 힘들게 했을까?





그동안 다자이 오사무의 주변을 뱅뱅 돌기만 하고 다가서기에 부담을 느껴왔었는데 한 발 디뎌서 만나본 다자이의 세계는 어마어마했고 많은 면에서 적잖이 충격적이었다.

<인간실격>을 읽으며 지진, 균열을 느낀다.




인간이 그래선 안돼~~~~

인간에 대한 관찰이 너무나 정확해서 같은 인간으로 어쩐지 부끄러움을 느끼는 동시에 덕분에 우리가 늘 챙겨 쓰는 인간 가면에 대한 해방감도 느꼈다.


과연 누가 인간 실격인가.

그것은 누가 결정하는가.

다자이는 뜻대로 살다가 뜻한 바대로 죽었다.


'죄 없는 자 그에게 돌을 던져라'

나도 그를 평가할 수 없음을 느낀다.





<데미안>에서 싱클레어와 크로머의 만남처럼 요조는 어릴 때는 다케이치를 성인이 되어서는 호리치를 만난다.

'나'를 닮았기에 '나'를 들키고만 사람들이지만 가면 없는 나를 있는 그대로 드러낼 수 있는 관계이기에 소중하고도 매우 치명적이었다.

데미안의 두 세계...

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를 더 잘게 쪼개어 인간 심리를 섬세하게 보여주는 것 같았고,

고흐의 자화상을 통한 다자이의 예술성도 느꼈다.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모를 만큼 쓰나미처럼 밀려든 <인간실격> 다시 꼭 만나고 싶다.





이 소설은 수기 형식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는 것은 '나'로 호칭되는 주인공과 요소라는 수기 속 인물이 있다. 다자이는 두 사람을 별개의 인물로 묘사하고 있어서 결국 이 소설은 주인공을 두 사람으로 설정하고 있다.

다자이의 성장 배경은 그의 인생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끼쳤기에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 문학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엄청난 부자 가문에서 태어난 소설가라고 할 수 있다. 다자이 본인에 따르면 쓰시마 가문은 빈농으로 살다가 증조부 때부터 고리대금업으로 가문이 흥했다고 한다. 다자이는 자신의 이런 집안 내력과 풍요로운 현실을 탐탁지 않게 여겼고, 이는 훗날 그의 인생을 파격적인 방향으로 이끈다.

11남매 중 열째로 태어났다. 첫째, 둘째 형은 요절해 사실상 4남으로 자랐다. 3명의 형, 4명의 누나와 3살 연하의 유일한 동생(17세에 요절)이 있으며, 증조할머니, 할머니, 고모와 사촌 누이 4명, 하녀를 포함한 30명에 달하는 대가족 속에서 자라났다. 이 중 3~8살 때까지 다자이를 돌봐 준 14살의 유모 타케는 <추억>이라는 작품에 등장하기도 한다.

어머니에게 보통의 사랑, 그 애정을 받지 못하고 아버지라는 거대한 산 앞에서는 늘 수동적이어야 했던 다자이는 유모가 돌보는 가운데 하인들에게 몹쓸 짓을 당하기도 했기에 성인이 되어서도 가족과의 유대감을 느끼지 못하는 모습이었고 대인기피증 같은 모습으로 여러 면에서 어려움을 겪는다.



P 11

부끄러운 생애를 살아왔습니다.

P 130

신께 묻습니다. 신뢰는 죄인가요.

P 146

인간, 실격. 이제, 난, 완전히,

인간이, 아니게 됐습니다.

 

( 출판사로 부터 책을 무상으로 제공 받아 감사히 읽고 솔직하게 쓴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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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9-23 15: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을 가득 채운 메모들이 인상적이네요. 더불어 좋은 리뷰 잘 읽었습니다. 미루고 미루던 이 책을 저도 곧 읽어야겟다는 생각이 절로 드네요.

mini74 2022-09-23 1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정말 제대로 꼼꼼하게 읽으셨군요 👍전 민음사편으로 읽었어요. 이 책 참 좋아합니다.
 
인간 실격 에디터스 컬렉션 12
다자이 오사무 지음, 오유리 옮김 / 문예출판사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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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실격>의 많은 문장, 거의 전문이 생생히 남는다. 슬픈 명언이 너무 많네. 직접 읽어보지 않았다면 감이 잘 오지 않았을 테고, 시기적으로 지금이라서 좋았던 것도 있지만 아무튼 이제라도 읽게 되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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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쿠다 사진관
허태연 지음 / 놀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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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산 도시의 익숙한 동네와 일상을 떠나 완전히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부딪히며 새로운 일을 하는 나를 가끔 상상해 본다. 혹시 나도 모랐던 내 천직을 발견하지 않을까? 우연하고도 낯설게 만난 사람들이 가족만큼 끈끈해지는 이야기에서 묘한 설레임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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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쿠다 사진관
허태연 지음 / 놀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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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특정 지역에서 '일주일 살기','한 달 살기'프로그램을 공공사업으로 지원하는 '생활관광'을 많이 접하게 된다. 특히 제주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넘쳐나는 곳이다. 오래 산 도시의 익숙한 동네와 일상을 떠나 완전히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부딪히며 새로운 일을 하는 나를 가끔 상상해 본다. 혹시 나도 모랐던 내 천직을 발견하지 않을까? 우연하고도 낯설게 만난 사람들이 가족만큼 끈끈해지는 이야기에서 묘한 설레임이 느껴진다.

하쿠다 사진관, 하와이의 어느 사진관 이름인 줄 알았다. 하지만 제주의 방언 '하쿠다'는 하겠다는 뜻이었다. will do.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하고 싶은 것들을 메모 했다. 이 소설은 뭔가를 꿈꾸고 실천하게 하는 소설이다.

제주의 하쿠다 사진관은 카페도 겸하고 있다. 비쥬얼과 환경이 나쁘지 않고 무엇보다 준비가 잘되어 있는 사장 석영이 있지만 홍보가 전혀 되지 않아 손님이 없다. 그러다가 우연한 만남으로 제비가 사진관에서 일하게 되면서 두 사람의 비슷하고도 다른 재능은 시너지를 얻으며 성장한다. 하쿠다 사진관이 사진과 음식 그리고 사람들의 스토리를 모두 담는 특별한 사진관이 되어가는 모습은 희열을 느끼게 한다.






이 시대의 이야기이자 젊은날의 초상화 같은 소설 [하쿠다 사진관]을 만나는 내내 상상해 본 다양한 삶의 배경은 다채로웠다. 시간이 멈춘듯 느리고 고요하다가도 바이크를 탄 것 같은 스피드를 느끼게 했고 제주 바다를 오감으로 느끼며 제주의 풍경에 흠뻑 빠져 들게 되었다. 이 소설 때문에라도 제주에 가야할 이유가 생긴 사람들이 많을 것 같다.

그리고 전작보다 더 많은 독자층을 흡수했을 것이 확실했다. 제주, 제주여행, 사진, 바이크, 라이딩, 해녀, 스쿠버다이빙, 경찰, 지질학자, 어린이, 부모, 젊지 않은 젊은 날들을 사는 사람들, 방황, 고민, 그리고 비밀, 사람과 사람들의 이야기는 풍성했음으로 즐거웠다.

제주의 풍경과 제주 방언으로 어쩐지 종영된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 생각도 많이 나며 겹쳐 보이기도 했는데 모든 것이 의도된 듯 그리움의 향수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 [연금술사]가 생각난다. 하쿠다 사진관의 사장인 석영과 그곳에서 일하게 된 제비를 보며 크리스털 가게에서 일하게 된 산티아고가 가져온 변화를 보는 것 같았다. 실제로 소설에서 '초심자의 행운'이 언급되는 순간도 있어서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플라멩코를 추는 남자] and [하쿠다 사진관]

전작 소설에서는 굴착기사로 일하면서도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고 플라멩코 춤을 멋지게 추는 날에 대한 로망을 간직하고 있는 60대의 가장은 존재도 모르고 살던 중년의 딸과 재회하게 된다. 그 만남을 기점으로 변화를 맞이하고 진짜 가족이 되는 이야기를 담고있다. 전작도 좋았지만 전작보다 모든게 풍성했던 이번 소설에서는 서울에서 일하던 어린이집과 사진관을 그만두고 훌쩍 제주로 떠나온 여행에서 마지막날의 에피소드로 우연히 들른 하쿠다 사진관에서 일하게 되며 새로운 날들을 맞이하는 제비라는 25세 인물과 제비의 도움으로 변화를 맞이하는 하쿠다 사진관 사장인 34세 석영이 있다. 후반부로 갈수록 외면에 드러나는 이야기보다 내면에 꼭꼭 숨겨둔 이야기들을 나누며 더 끈끈해지는 모습을 보면서 이 소설이 힙하기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들어주세요!

죽을 것 같아요.

누군가에게 말하지 않으면.

제발......

비밀을 털어놓고 가벼워지고 싶은 순간이 있다. 나의 비밀, 나의 치부, 나의 결핍을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으로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모른다.

제비가 떠나온 곳도 다시 정착한 곳도 사진관이라는 것은 같지만, 완전히 다른 사진관에 대한 경험이다. 이곳은 내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곳이니까!

허태연의 소설에는 작은 선택의 순간들이 있다. 그 작은 실행이 켤코 작지만은 않은 결과를 보여준다는 공통점이 주는 변화를 동경하는 내가 있다. 사람과 사람이 섞이며 고인물을 흐르게하는 기적. 그 작은 물줄기가 어떤 변화를 만드는지 보는 재미는 긴장감과 설렘을 느끼게 한다.

이 시간이 잊히지 않고

영원히 기억되게끔 돕는 것


나와 내 삶이지만 스스로는 절대 볼 수 없는 것들은 타인을 통해서만 볼 수 있다. 그런 사진의 매력이 이 소설에 그대로 녹아 있다. 사진은 내가 나를 들여다보는 거울과는 완전 다른 이야기가 될지도 모른다.

사진을 찍고 싶어지는 소설

사람들의 표정을 기억하고 싶은 소설

행복하기만을 바라고 골라낸 포장된 감정에 치여 돌보지 못한 무뎌지고 모난 감정들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소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것들을 점필로 찍어주는 듯한 소설이다.

여러 감정을 섬세하게 어루만지며 발견한 보물들을 잘 기억하겠습니다. 즐거웠습니다.

다산북스 독서지원으로 책을 무상으로 제공받아 감사히 읽고 솔직히 쓴 리뷰입니다


‘난 언제쯤 내 삶의 주인공이 될까?‘​

매일 전철을 타고 퇴근하면서 제비는 그런 생각을 했다. 우연히 본 광고판에 화려한 제주 사진이 눈에 띄었다. 그때, 제비는 결심했다. 비행기를 타기로, 그는 사회생활로 지친 자신의 청춘에 제주 여름을 선물하기로 했다. ‘한 달 살이‘를 할 거여서 지내던 원룸은 계약을 해지했다. 풀옵션 원룸이라 정리할 짐이 많진 않았다. 여행을 하며, 제비는 찬란한 미래를 계획할 생각이었다.
- P14

이제 서른넷. 석영은 자기가 아직 젊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그들만큼 젊진 않았다.​

‘다시 그 시절로 가고 싶어?‘​스스로를 향해 석영은 물어보았다. 기억 속 그의 청춘은 썩은 필름처럼 얼룩져 있었다. 아무리 젊음이 부러워도, 그 시절을 다시 겪을 자신은 없었다. 사진관을 열겠다는 목표 하나로 10년을 달려왔다. 그 흔한 연애 한번 못 해보고, 닥치는 대로 일하며 돈을 모았다. 지금 아름답게 보이는 저들 역시 그런 시간을 견디고 있을 터였다. - P169

"만일 물꾸럭 신이 있어 사람에게 길흉을 가져온다면, 그리고 네가 잠수에 실패해 액운을 당한다면, 그때 너는 후회할 거야.​‘아 물에 들어갔어야 했는데, 무슨 일이 있어도 해냈어야 했는데.‘ 그런 다음 울겠지. 지금처럼 서럽게. 하지만 네가 잠수에 성공한다면, 언젠가 네게 액운이 닥쳐도 후회하진 않을 거야. 그러니까 수영을 배워. 살아보니 그렇더라.

뭔가를 위해 무슨 일을 하다 보면, 계속 하다보면, 그게 언젠가 너를 구하는 거야."
- P200

"세상에는 놀랍도록 다양한 삶의 형태가 있어." 뒷짐을 진 채 남자가 말했다. "형사 일을 하면서, 나는 세상 별별 것을 봤지. 온갖 더러운 것 치사한 것 끔찍한 것을 봤어. 그런 게 세상이라 오래 믿었지. 하지만 오늘……… 이것들을 보니 그 생각이 틀린 것 같아. 아무리 훌륭한 사람도 두들기면 먼지 나는 게 정한 이치라 여겼는데………."

- P206

어떤 남자는 아이의 탄생과 동시에 아버지가 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아이의 성숙 이후에 아버지가 될 수 있다. 또는 그렇게 여겨질 수 있다. 효재에게 성급한 방식으로 아버지가 되기보다, 언젠가 ‘그 사람이 내 아버지였구나.‘ 깨닫는 날이 오면 좋겠다.



- P272

스테판 거츠가 커피를 홀짝거렸다. 잔이 비어가는 걸 보고 제비는 커피를 다시 내렸다. 지질학자는 팔을 뻗어 깍지를 꼈다.

"조금요. 난 뜨거운 걸 좋아하나 봐요. 모든 걸 휩쓸어 가는 용암 같은 것. 주상절리는 그 흔적이죠. 그래서 연구하는 게 아닐까....."스테판 거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흥미로운 얘기군. 하지만 깊이 생각해야 해. 네가 휩쓸려 사라지길 바라는 게 무엇인지 말이야. 왜 너는 스스로 그 힘이 될 수 없고, 지나간 힘의 흔적을 추종하며 들여다보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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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 프로방스에서 보낸 편지 - 마지막 3년의 그림들, 그리고 고백 일러스트 레터 1
마틴 베일리 지음, 이한이 옮김 / 허밍버드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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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가 남긴 것이라면 그림과 편지가 있다.

고흐의 편지가 없었다면 고흐의 그림도 없었을지 모르겠다. 편지의 수령인은 동생 테오, 테오의 부인 요 봉어르, 여동생 빌 반 고흐, 어머니 아나 반 고흐, 폴 고갱, 존 러셀, 아크놀트 코닝, 폴 시나크, 에밀 베르나르, 외젠 보흐, 아를의 여인의 모델이기도 한 아를의 카페 드 라 가르의 주인 부부 등이다.

고흐는 가족과 친구에게 쓴 편지에 자신의 그림을 언급하며 작업중인 그림을 설명하고 작게 그린 스케치를 함께 보내곤 했다. 글을 통해 설명하는 고흐의 색채는 여기에서 저기를 가는 과정을 아우르는 것 같다. 고흐의 글씨를 보는 것 역시 또다른 즐거움이었는데, 강조된 스펠링이 있어서인지 글씨가 그림 같았고 그대로 작품 같았다. 이 책의 묘미는 이 손글씨와 드로잉 작품이기도 하다.




예전에 나는 고흐의 그림을 생각하면 노란색을 떠올리며, 황금빛 들녁이나 일출, 일몰, 불빛, 별빛에 많이 끌렸었다면 이번엔 녹색에 대한 이야기가 유독 크게 들리기도 했다. 아~ 노랑이 있려면 녹색이 있어야 하는구나! 또 자주 등장하는 코발트빛에 매료되고 주황, 적색, 보라색 등 색채는 고흐에게 매우 중요했다. 이글대는 입체감을 간직한 고흐의 채색은 아주 입체적이고 스스로 빛의 명암을 가진다. '고흐는 찢어지는 듯한 삶의 고통을 황홀한 아름다움으로 바꿔놓는다'고 말하는 것을 어디선가 읽었다.



색채를 쓰는 뛰어난 감각을 지닌 고흐는 우리가 모르는 더 많은 것을 보았던 것이 틀림없다.

녹색이 얼마나 다채로운지, 고흐가 보는 자연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리고 고흐가 모델로 담은 소박한 사람들은 언제나 과장되지 않고 꾸며지지 않은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이번에 다시 느꼈다. 고흐에겐 연민의 눈이 있다.


여전히 내가 그리고 싶은 것은

커다란 성당이 아니라 민중의 눈이야......

빈센트

 

나는 붉은색과 초록색을 통해 인간의 끔찍한 열정을 표현하려고 시도했다...

빈센트

 

초록색이 이렇게 많이 보일줄이야! 왜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을까?

<빈센트의 의자>와 <고갱의 의자>는 확실히 밝은 노란색과 짙은 초록색의 차이를 가지고 있다.



자신이 살 곳을 찾아 헤매며 살아가는 운명

고흐는 떠나고 싶어했고 아를에 닿았다.  


봄에 프랑스 남부 지방으로 갈 것 같습니다.

푸르른 빛깔에 생생한 색채가 넘쳐나는 그곳에요 - 빈센트


빈센트 반 고흐 1853~1890

네덜란드 출생, 후기 인상주의 화가로 20세기 미술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900 여점의 그림과 1100 여점의 드로잉과 스케치 등의 유작을 남겼다.


1866년~1888년

260통의 편지 중에서 109통의 편지와 스케치를 포함한 그림 150 여점이 이 책에 실려 있다.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말한다.

'아, 내가 요즘 보는 것들을 너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정말이지 너무나 사랑스러운 것들이 많아서 마음을 빼앗아 간단다. 특히나 그림이 좀 나아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는 더 그렇단다......'

자신이 본 대로 그릴수 있고, 사람들이 자신이 보는 것들을 볼 수 있기를 바라는 고흐의 열정에 깊이 닿는다. 아를을 담은 그림들은 은둔성향이 있는 내게도 그곳으로 떠나고 싶게 한다. 그를 이해하면서도 그를 또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들은 그의 편지로 선명해지는 것 같다.

 

고흐가 경제적으로 캔버스나 물감 값, 방임대료, 음식비 등을 걱정하지 않고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면 어떻게 달라졌을까? 내내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서 힘들었다. 고흐도 사람들과 무슨 대화든 나누고 싶어했다. 누구라도 먼저 친절히 인사라도 해준다면 말이다. 과장되고 가식적인 사람들을 떠나 남부의 조용한 마을에서도 집안에 머무르거나 인적이 드문 곳을 찾으며 은둔적인 모습을 보이지만 예술적 교류 만큼은 누구보다 넓게 유지하며 진심으로 예술을 사랑했던 고흐를 통해 평생 더 많은 것들을 느껴갈 것 같다. 또 만나고, 또 만나며 오해와 편견으로 만났던 것들을 더 진실하고 소박하게 만났으면 하는 바램도 들었다.



1888년 11월 1~2일 B19a/716

친애하는 동료 베르나르에게


오랫동안 생각해 온 건데, 화가라는 우리의 고약한 직업에는 인간이 지닌 손과 노동자의 배고픔이 가장 필요한 것 같아. 파리 거리의 탐미적인 멋쟁이들보다는 자연적인 취향( 사랑하고, 너그러운 기질)이 필요한 것 같다고.



익히 알고 있는 유명한 그림 외에도 고흐가 무엇을 담고자 했는지 늘 언제보다 천천히 걸어보고 싶은 책이다. 그중에도 허밍버드 출판의 이번 책은 고흐가 마지막 3년을 보낸 아를에서 쓴 편지와 그때 그린 드로잉, 습작, 채색을 마친 완성작들을 볼 수 있다. 

고흐의 드로잉이 채색을 거쳐 완성작이 되는 과정이 꽤나 긴 작품들이 많았다는 것도 새삼 알게 되었고 그가 해바라기, 씨부리는 사람 같은 연작을 그리는 고흐를 다시 본다.

 



동생 테오가 보낸 주 50 프랑의 돈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잠시 생각해보았다. 매달 집 임대료를 내고 욕심내서 캔버스와 물감, 그리고 도판과 책을 구하고 나면 고흐의 식사는 비루했고, 커피로 대신 하는 날들도 많았는데 무엇보다 동생 테오에게 지운 경제적인 짐을 하루라도 빨리 벗게 해주고 싶은 마음과 반대로 생전에 딱 한 점의 그림만이 팔렸다니 안타깝기만 했다. 돈을 벌지많으면 독립된 인간이기 어렵다. 지금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화가라는 칭송을 듣지만 그럴수록 더 미안해지는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마음에 드는 노란집에서 자기 방을 꾸미는 빈센트에게서 희망과 즐거움이 느껴기지도 한다. 그러나 집을 구하고도 가구가 변변치 않아서 집에 온전히 들어가서 살기까지 4개월 더 여관에 머물렀다니 고흐에게 넉살과 융통성이 좀 더 있었다면 달랐을까? 그가 좀 덜 힘들었을까? 그런 생각을 많이 했다. 온전한 가정을 꾸려서 사랑하는 사람과 아이를 키우고 함께 하는 것을 고흐도 많이 꿈꾸지 않았을까? 누구의 방해도 없이 또 매섭고 차가운 바람과 비를 피해 온전히 집중할 수 있었던 방 하나의 소중함은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과 비슷한 느낌으로 다가왔고, 이번엔 또 어쩐일인지 고흐와 니체가 너무나 많이 닮아보여서 또 한번 놀랐다.

 

아를의 조그마한 노란 집은 아프리카, 열대 지방, 북쪽 사람들 사이의 간이역이 될 것이다………… 빈센트

 

 

반 고흐, 프로방스에서 보낸 편지

고흐의 드로잉과 그림 그리고 편지  속의 고흐를 읽고 싶어서 쉴 새 없이 눈을 옮기고 다시 읽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책의 여운을 처리하는 방법으로 관련 영화를 보곤 한다. 두 편의 영화에서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볼 수 있는 기쁨을 느낀다.

<러빙빈센트>, <고흐,영원의 문에서>를 다시 보았다. 




(책을 무상으로 제공받아 감사히 읽고 솔직히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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