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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혁명 - 인간적인 기술을 위하여
에리히 프롬 지음, 김성훈 옮김 / 문예출판사 / 2023년 8월
평점 :
우크라이나·러시아의 전쟁을 통해 보는 세계 정상국의 무기 전쟁이 어디로 흘러갈지 불안한 마음이 작지 않다. 최근 뉴스에선 러시아 푸틴과 북한의 김정은이 회담을 가지는 일을 대서특필하고 있고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현재 우리의 시스템에서 가장 심각한 증상 중 하나는 우리의 경제가 무기 생산과 최대 소비의 원리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과학과 기술 발전이 가져오는 딜레마에서 인류는 해방될 수 없을까?
얼마 전 개봉한 영화 <오펜하이머>를 비롯해서 오늘 함께하는 책 <희망의 혁명>까지 함께 생각해 보게 된다.
유럽-북미 기술 사회가 가지고 있는 병폐는 모두 동일한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희망의 혁명>은 인간의 본성과 사회경제 시스템 사이의 관계를 다루며 '낙관'을 통한 더 많은 '진보'를 희망한다.
희망한다는 건은 무엇일까?
무언가를 바라고 소망하는 것이 희망이라면 더 좋은 집, 차, 가전제품 등을 갖고 싶어 하는 것은 희망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 그저 더 많은 소비를 욕망하는 사람일 뿐이다. 우리가 잃어버린 희망은 수동적이고 기다리는 희망이 아니다. 또 의식적으로는 희망에 차 있지만. 무의식적으로는 절망에 빠져 있는 사람이 많다.
희망은 신념과 동반되는 기분이고 희망이라는 기분이 없이는 신념이 유지될 수 없다. 희망, 신념과 연결된 또 하나는 용기, 바로 불굴의 용기이다. 개인적 변화나 사회적 변화가 가능하다는 개념을 통해 인간과 사회는 지금 여기 일어나는 희망과 신념의 행동 안에서 매 순간 부활한다.
문학작품 안에서 우리가 만나는 것들의 소재는 대부분 이러한 것으로 사랑, 각성, 연민의 행동 하나가 모두 부활이다. 그리고 태만, 탐욕, 이기심의 행동 하나하나는 죽음이고 매 순간 존재는 우리에게 부활 아니면 죽음이라는 대안을 제시한다. 매 순간 우리는 선택을 통해 거기에 답한다. 최근에 내가 읽은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에서 소냐를 통한 부활을 이룬 라스콜리니코프를 떠올리게 된다. 그가 느낀 메시아적 희망을 보았다. 빅터 프랭클린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인간이 희망이 없이는 살 수 없고, 희망이 산산이 부서지는 순간 사람들은 더 큰 절망을 맞게 된다.
공통적으로 우리는 어떤 존재이고, 어떤 행동을 하고, 어디를 향해 나아가느냐에 답이 있다.
우리는 지금 어지에 있나?
에리히 프롬은 핵무기가 그전에 인간을 전멸시키지 않는다면 서기 2000년에 우리가 어떤 종류의 사회와 인간이 되어있을지 고민해 보았다. 21세기의 수많은 문제들이 예견되었음이다.
❤️ 이 책의 부제는 '인간적인 기술을 의하여'이고 무엇이 인간적인지를 고찰하고 기술을 인간화한다는 것의 의미를 밝힌다.
- 인간이 된다는 것은 인간다움을 실천하고 타인을 존중하고 배려하며 도덕적으로 선택하고 그 선택에 책임을 지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이 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과 함께 타인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것이다.
P19
우리 한가운데서 망령이 떠돌고 있다. 그리고 그 망령을 똑똑히 바라보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공산주의나 파시즘 같은 오래된 유령이 아니다. 컴퓨터의 지휘 아래 최대의 물질적 생산과 소비에 온 힘을 쏟아붓는 완전 기계화 사회라는 새로운 망령이다. 그리고 이런 사회적 과정 속에서 인간 자신은 기계의 한 부품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잘 먹고, 즐겁게 대접받지만, 수동적이고, 활기 없고, 감정조차 거의 없는 존재로 말이다. 새로운 사회가 승리를 거두면서 개인주의와 사생활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타인을 향한 감정은 심리적 조건화나 다른 장치, 혹은 약물을 통해 조작될 것이고, 이것이 또한 새로운 종류의 자기성찰 경험을 제공할 것이다.
"기술정보화 사회 rechnetronic society에서는 매력과 흡인력을 갖춘 개인이 최신의 통신 수단을 효과적으로 사용한다면 쉽게 수많은 사람의 감정을 조작하고 성을 통제할 수 있기 때문에 조직화하지 않은 수백만 시민의 개별적 기지가 한데 모이는 방향으로 추세가 흐를 듯하다." 조지 오웰의 《1984》와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 같은 소설에서 이런 새로운 형태의 사회상을 예측한 바 있다.
어쩌면 지금 가장 불길한 것은 우리가 시스템의 통제권을 잃어가고 있는 듯하다는 점이다.
인간으로서 우리의 목적은 더 많이 생산하고, 더 많이 소비하는 것밖에 없다. 우리는 무엇도 하려 하지 않고, 하지 않으려고도 않는다. 우리는 핵무기로 멸종의 위협을 받는 동시에, 책임지고 무언가를 결정하는 위치에서 배제되어 수동적인 존재가 되는 바람에 내면에서부터 서서히 죽어갈 위협도 받고 있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자연을 두고 승리의 정점에 서 있던 인간이 어쩌다 자기 창조물의 노예가 되어 자신을 스스로 파괴할 심각한 위험에 처하게 됐을까?
<희망의 혁명>을 읽으며 오늘을 함께 읽으시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