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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에게 주는 레시피
공지영 지음, 이장미 그림 / 한겨레출판 / 2015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지난 7월부터 읽기 시작해, 아껴 아껴 읽느라 8월에야 다 읽은 공지영 작가님의 요리 에세이 <딸에게 주는 레시피>
그 책에 나오는 첫 번째 요리! '시금치 샐러드'를 며칠 전 드디어 내 손으로 직접 만들어 먹어봤다.
자신이 초라해 보이는 날엔 '시금치 샐러드'
그런 날 있잖아. 별것도 아닌 말 한마디에 가슴이 철렁하는 날, 그 때문에 실은 하루 종일 우울한 날, 갑자기 모든 가능성의 문이 닫히고 영원히 세상의 불빛 밖으로 쫓겨난 것 같은 날. 열심히 노력하면 어찌어찌 손에 잡힐 것 같은 소망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리고 누군가가 네 귀에 이런 말을 속삭이지……. “너무 애쓰지 마, 넌 안 돼. 그건 처음부터 너와는 전혀 다른 부류의 사람들에게 주어진 거야, 넌 아니구.” 뭐 그런 날.
혹은 이런 날도 있어. 화가 머리끝까지 뻗치는 날, 평소에 아무렇지도 않았던 저 사람의 색깔 안 맞는 와이셔츠가 견딜 수 없고, 엄마의 전화 통화 소리도 견딜 수 없고, 그냥 다 그만두고 막 망가져버리고 싶은 날, 그런 날 ………. 그래 누구에게나 그런 날이 있어. 그런 날 엄마가 해줄 수 있는 건 그저 들어주고, 그런 네가 전혀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함께 아파하면서 맛있는 걸 먹자고 제의하는 것뿐이지.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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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날은 엄마의 레시피를 따라 요리를 해보자.
재료는 시금치야. 싱싱하고 예쁜 시금치 한 단. 약간의 올리브유(없으면 포도씨유나 현미유. 유전자를 조작한 옥수수유 같은 것은 권하지 않아. 이왕이면 몸에 좋은 기름은 한 병쯤 마련해두자. 앞으로도 기름은 계속 쓰일 거거든), 파르메산 치즈 가루, 이렇게.
우선 시금치를 깨끗이 씻어. 약간 큰 접시에 시금치를 예쁘게 담아(시금치 한 단을 사서 이렇게 접시에 담아봐. 그러면 아마도 어마어마한(?) 양이 남을 거야. 남은 건 깨끗한 비닐에 넣고 묶어서 냉장고에 넣어. 실은 바로 소금을 넣은 물에 살짝 데쳐 냉장고에 넣으면 좋은데, 오늘 주제는 ‘우울한 날을 위한 레시피’니까 그건 다음 날로 미루어보자. 오늘 요리가 맛있으면 내일 또 그걸 꺼내 먹을 수 있거든). 이미 뽀빠이도 강조한 바 있지만 시금치의 효능은 다 설명하기 바쁠 정도야. 비타민 A.B.C가 풍부하고 이름도 복잡해 정말 몸에 좋을 것 같은 각종 아미노산이 골고루 들어 있어서, 결론은 피부를 윤기 있게 하고 변비를 예방하며 술독을 없애고 눈을 밝게 하고……. 나머지는 먹으며 찾아볼 것!
요리 순서는 이거야. 약간 커다란 접시에 담은 시금치를 한 입에 먹기 좋을 만큼 손으로 뜯어서(칼로 잘라도 되지만 손으로 뜯는 게 더 예쁘고 맛도 좋아) 예쁘게 편다. 잎이 너무 많으면 줄기는 버려도 괜찮을 거 같아. 올리브유를 그 위에 살살 뿌린다. 그리고 파르메산 치즈가루(피자 시켜 먹을 때 같이 오는 일회용 파르메산 치즈 가루를 모아놓았다면 요긴하겠지?)를 ‘성질대로’뿌린다. 끝!
이게 무슨 맛이냐고? 요리하는 데 5분도 걸리지 않으니 한번 해봐. 나중에는 매일 이것만 먹고 싶을걸.
♣ 딸에게 주는 레시피 - 공지영 :p 11~15
싱싱한 시금치와 올리브유만 있다면 매일매일 먹고 싶어지는 근사한 샐러드를 만들 수 있다니! 그것도 5분 만에 뚝딱!
나는 홀랑 낚여서 이 책을 읽는 동안 내내 시금치 샐러드, 시금치 샐러드, 저 시금치 샐러드 만큼은 꼭 만들어 먹어봐야지! 계속계속 생각했었다.
그리곤 짜라란~!!
샐러드 접시 옆으로 살짝 보이는 올리브유까지 "포도씨유나 현미유. 유전자를 조작한 옥수수유 같은 것은 권하지 않아. 이왕이면 몸에 좋은 기름은 한 병쯤 마련해두자. 앞으로도 기름은 계속 쓰일 거거든"이란 말씀에 큰맘 먹고 한 병 구매해놓았고!
공작가님이 알려주신 레시피대로 시금치를 손으로 뜯어서 예쁘게 접시에 담고 그 위에 올리브유를 살짝 뿌리고, 무슨 치즈를 성질대로 뿌리라고 하셨는데, 치즈 이름이 생각 안 나서 치즈는 패스!ㅋㅋㅋ 그 대신 집 냉장고에 있던 발라먹는 치즈?를 티스푼으로 조금씩 떠서 그 위에 흩뿌려 주었다.
그런데, 아으.. 아으.. 아으.. 그 맛이 어찌나 니글니글하고 풀맛만 나던지? 이렇게 맛 없는 샐러드는 내 평생 처음 먹어봤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한 입 한 입, 먹으면 먹을수록 정말 맛없는데? 진짜 맛없는데? 헐;; 내 입맛이 워낙 초딩 입맛이라 그 깊은 맛을 나만 못 느끼는 건가? 설마설마? 하며 한 접시를 다 비우는 동안 내 머릿속에선, 뭔가 먹어서는 안 될. 공업용 기름이나 잡초 따위를 씹고 있는 듯한 기분이 떠나질 않았다. 다 먹고 나서도 그 여운이 어찌나 오래 가던지? 달콤한 포도를 수십 알 까 먹으며 입가심을 했는데도 계속 계속 입 속에 남아 있던 그 니글니글한 잡초맛 ㅋㅋㅋㅋ
아무리 다시 생각을 해봐도 파르메산 치즈 가루가 없어서, 혹은 올리브유를 너무 많이 뿌려서, 혹은 맛이 없는 시금치를 골라 와서 샐러드가 유독 맛이 없었던 것 같진 않다. 역시 시금치는 살짝 데쳐 시금치 무침을 하던지? 시금치 된장국을 끓이던지? 굳이 샐러드로 먹겠다면 꼭 시판용 샐러드 소스를 뿌려 먹는 게 진리인듯. ㅋㅋㅋ
어쨌든. 시금치 샐러드 실패 이후. 그 트라우마로 <딸에게 주는 레시피>속 다른 요리까지, 싹 - 입맛이 가셔버리긴 했지만. 늘 사진으로만, 딱딱하고 정형화된 설명으로만, 접해왔던 요리 레시피를 이렇게 근사하고 아름다운 문학적 언어(?)로 만날 수도 있다니!! 공작가님의 글맛은 너무나도 맛있다. 그래서 갑자기 <딸에게 주는 레시피>와 느낌 비슷한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까지 다시 꺼내서 읽고 싶어졌다.
한국 작가중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공지영 작가님!! (글도 글이지만 나는 공작가님 얼굴 예뻐서 좋아한다ㅋㅋㅋ) 책은 구매하면 늘. 본전을 뽑고도 남는데 이번 책은 특히 여기저기 선물까지 하고 싶어지니 더 실속 있게 느껴진다. 내 오랜 블로그 이웃이신 구름산책 언니는 <딸에게 주는 레시피> 출간되자마자 사서 딸에게 주었다고 하셨는데, 나는 반대로 엄마한테 선물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