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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창
구병모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9월
평점 :
구병모의 신작이라니 지체할 일인가. 바로 읽었다.
최근작들이 판타지나 신화적 요소들이 있었는데, 이런 결은 조금 취향의 범위를 벗어났다.
앞으로 나올 작품들은 이제 이런 길로 가나? 싶은 마음에 조금 서운해하면서
이번 작품은 어떨까 하는 마음으로 읽었는데!
돌아왔다. 취향의 그 구병모.
파과의 무드랄까.
스톡홀름 증후군처럼 보이는 아가씨의 존재에 집중해서 따라가다가 확장되는 이야기에 더더욱 빨려 들어갔다.
외로운 인간 사이의 불가해한 동행이라고 여겨야 할지도 모르겠다.
타인의 상처에 접촉해 타인을 읽어내는 능력이란 게 생각해 보면 이런 범죄의 분야에서나 유용할 법한 능력이 아닌가 생각하게 되면서...
그렇게 공허해지는 인간의 마음을 위로하는 일이 독서, 책을 읽는 일이 된다는 것이 현실적이면서도 비현실적이라고 여겨졌다.
오랫만에 책에 푹 빠져든 독서였다.
강력하게 추천한다.
- 칼로 당신에게 구애하고
상처 입혀서 사랑을 얻어냈지 - 윌리엄 셰익스피어, <한여름 밤의 꿈>
- 비단보로 감싼 은수저도 시나브로 닿은 공기에 검게 변해버리듯이, 사태는 굳이 그것을 훼손할 의도가 없다 하더라도 입을 열어 말하기 시작할 때부터, 펜을 들어 글을 쓰는 순간부터 재구성이라는 명분으로 변질됩니다. 그러나 인간의 머리와 심장이 그리 안전하지도 무결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온 우주에서 제일 불안정한 공간임을 상기하면, 뭐라도 말하거나 쓰는 편이 아무것도 말하지 않거나 쓰지 않기보다는 한 발자국만큼이나마 낫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말로도 하고 글로도 써내려가겠지만 가능한 한 저의 해석과 감정이 그 일들을 덜 변색시키기를 바라는 마음에 몇 겹의 문장으로 감싸게 될 것 같습니다. 어떤 진실은 은닉과 착란 속에서 뒹굴 때 비로소 한 점의 희미한 빛을 얻기도 합니다. - 9
- 말하기와 듣기, 쓰기와 읽기란 비록 그것으로 인해 변하는 실재가 없음은 물론 그것이 거쳐가는 길이 모순의 흙과 불화의 초목으로 닦이고 마침내 도달하는 자리에 결핍과 공허만 남아 영원한 교착상태를 이룬다 한들, 그 행위가 한때 존재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누군가의 영혼이 완전히 부서져버리지 않도록 거드는 법입니다. 언어의 본질과 역할을 두고 명멸하는 무수한 스펙트럼 가운데 그것만큼 괜찮은 구실이 또 있는지, 나는 아직 알지 못합니다. - 41
- 바람직하지 않음이든 재미없음이든 간에 이렇게 무언가를 받아들이고 이해한다는 것, 상대방을 읽고 해석한다는 것은 동음이의어나 관용구, 나아가 표정이나 억양으로도 의미가 전혀 달라질 수 있고, 거듭된 곡해 속에 난파된 말들의 바다 한 가운데서도 뗏목의 파편 하나를 발견하여 올라타는 것을 가리켜 우리는 사람 사이, 즉 인간이라고 부릅니다. - 63
- 천만에, 오히려 반갑지. 그보다 안 하긴 뭘 아무것도 안해, 책을 읽잖아. 지적인 무리는 해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난 지성에 대해서는 허영이란 말 붙이는 거 찬성하지 않아. 그건 뭔가를 성취하고자 하는 사람의 마음을 위축시켜. - 164
- 솔직히 고용된 입장에서는 돈 준다는데 뭘 따질 이유가 없기도 하거니와, 그보다 인간에게는 과잉이 필요한 법이니까요. 무언가를 초과하고자 하는 마음, 잉여를 축적하고자 하는 욕망이 인간을 다른 동물과 다르게 만듭니다. 하물며 배움의 과잉은, 무엇을 배우는지가 때로는 관건이겠습니다만 인간에게 시간이 남아 있는 한 아무리 넘쳐도 해로운 것 없다고 생각합니다. 진학을 위해, 승진을 위해, 그 어떤 실용적인 목적만을 위해서라면 배움은 얼마나 아름답지 않은 것이 되겠습니까. 보스가 애호하는 듯싶은 셰익스피어를 빌려오자면 <리어왕>의 2막 4장에는 이런 대사가 있습니다. 필요에 대해서는 이유를 따지지 말라. 아무리 비천한 거지라고 해도 하찮은 물건일지언정 필요 이상을 가지게 마련이며, 자연이 인간에게 필요 이상의 것을 허용치 않는다면 인간의 삶은 짐승의 그것보다도 가치가 없어진다. - 166
- 책을 읽었다 하여 훌륭한 인간이 된다는 보장은 없으며, 때로는 뱀의 몸통을 손으로 붙잡는 식으로 책을 이상하게 읽고서 오히려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인간이 되는 경우도 없지 않지만, 보통은 책을 읽고 난 뒤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 그게 가장 일어나기 쉬운 일입니다. 무용하면 무용한 대로 다만 이어가는 것, 그것이 읽기 아닐까요. - 205
- 한편 이야기를 익고 나면 그 뒤에 존재하지 않는 속편을 나름대로 생각해보게 되는 재미가 잠깐은 있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건 그만두었어. 나는 누군가의 이야기에서 속편을 없애버리는 데 가담한 사람이니까. 내 이야기 또한 속편이 없어야 마땅하니까. - 274
- "신이라는 건 있잖아, 그냥 하나의 오래된 질문이라고 생각해."
경전을 읽고 기도하는 사람들 가운데 다수가 신을 응답의 존재로 간주하며 신이 대답을, 특히 그중에서도 축복에 가까운 무언가를 내려주지 않으면 멋대로 증오하거나 부정하기 일쑤인데 질문이라니, 그건 좀 사고의 전환같았어. - 285
- 한 권의 책을 펼칠 때 잊지 말아야 할 게 있다면, 세상의 코어를 이루는 것이 반드시 희망 내지 사랑만은 아니며 도저히 화해할 수 없는 인간들과 혹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나 자신과 필연적으로 상종하거나 공존하는 것이 인간의 삶이자 태초부터 운명지어진 비극이라는 사실이지. 그리고 그 비극을 견디는 게 인생의 거의 전부야. 그렇다면 인생에는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인생의 목표라는 게 다 무슨 소용인지 되물을 필요는 없다. 자연은 우리에게 목표를 부여하지 않았고, 우주는 우리의 의미 따위 알지도 못할 뿐더러, 신은 우리에게 별 관심 없으니까. 동양사상으로 예를 들자면, 노자의 <도덕경> 가운데 한 줄을 불러줄 테니 이건 받아 적으렴. 일단은 수업시간인데 한 줄이라도 남겨야지. 천지불인 이만물위추구, 하늘과 땅 같은 자연은 그냥 존재할 뿐이지 딱히 어진 마음을 갖고 있지 않으며, 인간 따위 만물의 입장에서는 짚으로 엮은 개만도 못하다는 뜻이야. 그러니 너의 눈앞에 있는 한 권의 소설은 그 무의미의 운명에 어떻게든 의미 비슷한 걸 부여해보고 죽으려던 예술가들의 오랜 싸움과 필연적인 패배의 흔적이야. - 302
- 상처 없는 관계라는 게 일찍이 존재나 하는 것인지 나는 모르겠다. 상처는 사랑의 누룩이며, 이제 나는 상처를 원경으로 삼지 않은 사랑이라는 걸 더는 알지 못하게 되었다. 상처는 필연이고 용서는 선택이지만, 어쩌면 상처를 가만히 들여다봄으로 인해, 상처를 만짐으로 인해, 상처를 통해서만 다가갈 수 있는 대상이, 세상에는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 344
2025. o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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