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를 지키다
장바티스트 앙드레아 지음, 정혜용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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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대한 대서사시인데....
기대에 못 미치는 이야기다.

계급 차이가 명백한 매력적이고 똑똑한 여자아이와 불구의 신체를 가졌으나 위대한 조각가가 될 남자아이와의 평생에 걸친 동화랄 수 있겠다.

몇 번째 말하게 되는지 모르겠으나 공쿠르상 수상작은 결이 안 맞는다.
늘어지는 세부 묘사가 이유일까...라고 짐작해 보지만 딱히 그것뿐만은 아닌 것 같다.
격변의 세계를 묘사하는데 어울리지 않게 느린 템포의 문장이 걸림돌일까?

일단 아름다운 서사이긴 한데 특이할 만한 신선함이 전혀 없는 클리셰의 향연...
길고 상세하게 서술한 것이 좋은 작품의 조건이 될까?

어쩌면 프랑스어로 읽는다면 좋은 점이 더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정도의 두꺼운 이야기를 끝까지 읽는 데는 크게 무리 없는 쉬운 독서였다.

- 그 시절을 돌이켜 보면 이상하다. 나는 불행하지 않았으니까. 나는 혼자였고, 아무것도, 아무도 없었다. - 42

- 그 지역에 버글대는 명문가들은 지저분한 해안가에서 멀리 떨어진 그곳을 매력적이라고 여겨 예로부터 거기를 영원한 휴식의 장소로 선택해 왔다. 보잘것없는 묘지들과 나란히 늘어선 호화로운 능들은 자신의 거주자들이 누리는 막강한 권력을 찬양했지만, 어쨌든 그 거주자들 역시 살아생전 가졌던 가장 소중한 것을 상실한 뒤였다. 그 누구도 그러한 모순에 개의치 않았다. 죽은 자들은 기만적이다. - 70

- 그 애는 마치 내가 미친 사람이라도 된다는 듯이 내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봤다.
내가 죽은 사람 같아?
지금은 아니지만요.
어쨌든 말도 안 되는 소리. 왜 죽은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어...... 죽은 사람들이니까?
전쟁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죽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해? 길가에 매복하는 사람들이? 너를 강간하고 네게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들이? 죽은 사람들은 우리 친구들이야. 산 사살들을 두려워하는 게 더 나을걸.
나는 입을 헤벌리고 그 아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누군가가 이런 식으로 말하는 걸 들어 본 적이 없었다. - 92

- 비올라는 손을 내밀었고 나는 그 손을 잡았다. 그렇게, 관습과 계급의 장벽이 파놓은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심연을 한걸음에 건너뛰면서. 비올라는 손을 내밀었고 나는 그 손을 잡았다. 그 누구도 말한 적 없는 위업이자 말 없는 혁명. 비올라는 손을 내밀었고 나는 그 손을 잡았다. 그리고 바로 그 찰나에 나는 조각가가 되었다. - 103

- 공부는 해야 하고 너의 부모님은 원치 않는다면, 어떻게 날겠다는 거야?
내 부모는 늙었다고. 나이를 말하는 게 아니야. 그들은 다른 세상 사람들이지. 그들은 앞으로 우리는 말을 타듯이 날게 되리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해. 여자들은 수염을 달고 남자들은 보석으로 치장하리라는걸. 내 부모의 세계는 죽었어. 넌 좀비를 무서워하지만 네가 무서워해야 할 건 바로 그 세계라고, 그 세계는 죽었는데도 여전히 움직이거든. 누구도 그것을 보고 죽었다고 말하지 않았으니까. 바로 그런 까닭에 그건 위험한 세계야. 그 세계는 저절로 무녀져. - 145

- 드디어 나는 탐나는 존재가 되었다. 사람들은 내게 침을 뱉으며 무시했고, 나는 일거리를 구하기 위해 평생 간청해야만 했다. 그런데 하루 아침에 꼭 소유해야만 하는 작품을 만드는 작가가 되었다. 이 모든 것이 새로운 말을 하나 배웠기 때문이었다. 아니요. 이 세 음절의 말이 갖는 권력은 상식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내가 거절할수록, 심지어 차갑게 거절할수록, 사람들은 나를 오르시니 가문의 조각가라고 부르기 시작하면서 나의, 즉 오르시니 가문의 조각가가 만드는 작품을 더더욱 원했다. - 336

- 비올라는 이 기념물 혹은 저 기념물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그에 얽힌 역사를 설명했고, 나는 곧 내가 관광객이 가이드를 따라가듯 비올라를 따라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나는 장서의 힘을 과소평가했지만 사실 장서 덕분에 무지몽매에서 빠져나왔고 심지어 약간의 위안을 누렸었다. 나는 배은망덕했다. 죽도록 취해서는 진정한 삶은 여기, 나를 중심으로 미친 듯이 돌아가는 이 영원의 도시에 있다고 되뇌면서 얼마나 많은 밤 시간을 파티로 흘려보냈던가? 자신의 거처에서 멀리까지 나온 비올라가 새로운 교훈을 내게 줬다. - 진정한 삶은 책 속에 있었다. - 441

2025. aug.

#그녀를지키다 #장바티스트앙드레아 #공쿠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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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창
구병모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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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병모의 신작이라니 지체할 일인가. 바로 읽었다.

최근작들이 판타지나 신화적 요소들이 있었는데, 이런 결은 조금 취향의 범위를 벗어났다.
앞으로 나올 작품들은 이제 이런 길로 가나? 싶은 마음에 조금 서운해하면서
이번 작품은 어떨까 하는 마음으로 읽었는데!

돌아왔다. 취향의 그 구병모.

파과의 무드랄까.

스톡홀름 증후군처럼 보이는 아가씨의 존재에 집중해서 따라가다가 확장되는 이야기에 더더욱 빨려 들어갔다.
외로운 인간 사이의 불가해한 동행이라고 여겨야 할지도 모르겠다.

타인의 상처에 접촉해 타인을 읽어내는 능력이란 게 생각해 보면 이런 범죄의 분야에서나 유용할 법한 능력이 아닌가 생각하게 되면서...

그렇게 공허해지는 인간의 마음을 위로하는 일이 독서, 책을 읽는 일이 된다는 것이 현실적이면서도 비현실적이라고 여겨졌다.

오랫만에 책에 푹 빠져든 독서였다.
강력하게 추천한다.

- 칼로 당신에게 구애하고
상처 입혀서 사랑을 얻어냈지 - 윌리엄 셰익스피어, <한여름 밤의 꿈>

- 비단보로 감싼 은수저도 시나브로 닿은 공기에 검게 변해버리듯이, 사태는 굳이 그것을 훼손할 의도가 없다 하더라도 입을 열어 말하기 시작할 때부터, 펜을 들어 글을 쓰는 순간부터 재구성이라는 명분으로 변질됩니다. 그러나 인간의 머리와 심장이 그리 안전하지도 무결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온 우주에서 제일 불안정한 공간임을 상기하면, 뭐라도 말하거나 쓰는 편이 아무것도 말하지 않거나 쓰지 않기보다는 한 발자국만큼이나마 낫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말로도 하고 글로도 써내려가겠지만 가능한 한 저의 해석과 감정이 그 일들을 덜 변색시키기를 바라는 마음에 몇 겹의 문장으로 감싸게 될 것 같습니다. 어떤 진실은 은닉과 착란 속에서 뒹굴 때 비로소 한 점의 희미한 빛을 얻기도 합니다. - 9

- 말하기와 듣기, 쓰기와 읽기란 비록 그것으로 인해 변하는 실재가 없음은 물론 그것이 거쳐가는 길이 모순의 흙과 불화의 초목으로 닦이고 마침내 도달하는 자리에 결핍과 공허만 남아 영원한 교착상태를 이룬다 한들, 그 행위가 한때 존재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누군가의 영혼이 완전히 부서져버리지 않도록 거드는 법입니다. 언어의 본질과 역할을 두고 명멸하는 무수한 스펙트럼 가운데 그것만큼 괜찮은 구실이 또 있는지, 나는 아직 알지 못합니다. - 41

- 바람직하지 않음이든 재미없음이든 간에 이렇게 무언가를 받아들이고 이해한다는 것, 상대방을 읽고 해석한다는 것은 동음이의어나 관용구, 나아가 표정이나 억양으로도 의미가 전혀 달라질 수 있고, 거듭된 곡해 속에 난파된 말들의 바다 한 가운데서도 뗏목의 파편 하나를 발견하여 올라타는 것을 가리켜 우리는 사람 사이, 즉 인간이라고 부릅니다. - 63

- 천만에, 오히려 반갑지. 그보다 안 하긴 뭘 아무것도 안해, 책을 읽잖아. 지적인 무리는 해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난 지성에 대해서는 허영이란 말 붙이는 거 찬성하지 않아. 그건 뭔가를 성취하고자 하는 사람의 마음을 위축시켜. - 164

- 솔직히 고용된 입장에서는 돈 준다는데 뭘 따질 이유가 없기도 하거니와, 그보다 인간에게는 과잉이 필요한 법이니까요. 무언가를 초과하고자 하는 마음, 잉여를 축적하고자 하는 욕망이 인간을 다른 동물과 다르게 만듭니다. 하물며 배움의 과잉은, 무엇을 배우는지가 때로는 관건이겠습니다만 인간에게 시간이 남아 있는 한 아무리 넘쳐도 해로운 것 없다고 생각합니다. 진학을 위해, 승진을 위해, 그 어떤 실용적인 목적만을 위해서라면 배움은 얼마나 아름답지 않은 것이 되겠습니까. 보스가 애호하는 듯싶은 셰익스피어를 빌려오자면 <리어왕>의 2막 4장에는 이런 대사가 있습니다. 필요에 대해서는 이유를 따지지 말라. 아무리 비천한 거지라고 해도 하찮은 물건일지언정 필요 이상을 가지게 마련이며, 자연이 인간에게 필요 이상의 것을 허용치 않는다면 인간의 삶은 짐승의 그것보다도 가치가 없어진다. - 166

- 책을 읽었다 하여 훌륭한 인간이 된다는 보장은 없으며, 때로는 뱀의 몸통을 손으로 붙잡는 식으로 책을 이상하게 읽고서 오히려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인간이 되는 경우도 없지 않지만, 보통은 책을 읽고 난 뒤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 그게 가장 일어나기 쉬운 일입니다. 무용하면 무용한 대로 다만 이어가는 것, 그것이 읽기 아닐까요. - 205

- 한편 이야기를 익고 나면 그 뒤에 존재하지 않는 속편을 나름대로 생각해보게 되는 재미가 잠깐은 있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건 그만두었어. 나는 누군가의 이야기에서 속편을 없애버리는 데 가담한 사람이니까. 내 이야기 또한 속편이 없어야 마땅하니까. - 274

- "신이라는 건 있잖아, 그냥 하나의 오래된 질문이라고 생각해."
경전을 읽고 기도하는 사람들 가운데 다수가 신을 응답의 존재로 간주하며 신이 대답을, 특히 그중에서도 축복에 가까운 무언가를 내려주지 않으면 멋대로 증오하거나 부정하기 일쑤인데 질문이라니, 그건 좀 사고의 전환같았어. - 285

- 한 권의 책을 펼칠 때 잊지 말아야 할 게 있다면, 세상의 코어를 이루는 것이 반드시 희망 내지 사랑만은 아니며 도저히 화해할 수 없는 인간들과 혹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나 자신과 필연적으로 상종하거나 공존하는 것이 인간의 삶이자 태초부터 운명지어진 비극이라는 사실이지. 그리고 그 비극을 견디는 게 인생의 거의 전부야. 그렇다면 인생에는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인생의 목표라는 게 다 무슨 소용인지 되물을 필요는 없다. 자연은 우리에게 목표를 부여하지 않았고, 우주는 우리의 의미 따위 알지도 못할 뿐더러, 신은 우리에게 별 관심 없으니까. 동양사상으로 예를 들자면, 노자의 <도덕경> 가운데 한 줄을 불러줄 테니 이건 받아 적으렴. 일단은 수업시간인데 한 줄이라도 남겨야지. 천지불인 이만물위추구, 하늘과 땅 같은 자연은 그냥 존재할 뿐이지 딱히 어진 마음을 갖고 있지 않으며, 인간 따위 만물의 입장에서는 짚으로 엮은 개만도 못하다는 뜻이야. 그러니 너의 눈앞에 있는 한 권의 소설은 그 무의미의 운명에 어떻게든 의미 비슷한 걸 부여해보고 죽으려던 예술가들의 오랜 싸움과 필연적인 패배의 흔적이야. - 302

- 상처 없는 관계라는 게 일찍이 존재나 하는 것인지 나는 모르겠다. 상처는 사랑의 누룩이며, 이제 나는 상처를 원경으로 삼지 않은 사랑이라는 걸 더는 알지 못하게 되었다. 상처는 필연이고 용서는 선택이지만, 어쩌면 상처를 가만히 들여다봄으로 인해, 상처를 만짐으로 인해, 상처를 통해서만 다가갈 수 있는 대상이, 세상에는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 344

2025. oct.

#절창 #구병모 #추천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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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수업 교양 100그램 2
변영주 지음 / 창비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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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의에 관한 내용이 꽤 많았다.

퀴어 영화제에 대한 이야기도, 독립영화 제작의 부흥에 대해서도,
노조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여성주의에 관하여서도,
문학에 대해서도..

하나의 문장을 찾는 일에 대해서도.

이 시리즈가 기대에 못 미친다고 이전 두 권을 읽고 생각했었는데
창작수업은 좋았다.

- 나는 우리가 애초에 같은 전선에 섰던 적이 없으며, 조심스럽게 우리의 교집합을 조금씩 확인해 보는 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각자의 깃발을 흔드는 이들에게 누가 당신을 배신한 것이 아니라, 아직은 교집합의 크기가 외로움과 욕망에 비해 작을 뿐이라는 그런 말을 하고 싶습니다. 나아가 결국 우리가 교집합을 키우기 위해 해야 할 단 하나의 일은 '너'의 이야기를 수줍게 듣는 것밖엔 없다는, 그런 이야기를 말하고 싶었습니다. - 5

- 우리 사회와 환경을 더 건강하게 바꾸는 건 결국 스스로를 '일개 무엇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 모두 훌륭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니 함게 무언가를 만들어야 돼'라고 말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 40

2025. jul.

#창작수업 #변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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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월하게 서글픈 자의식
박참새 지음 / 마음산책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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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깊은 우울, 자기 비하에 침잠한 시인.
위태롭다... 라는 위험신호를 받기도 하고
나조차도 위태로워진다는 전염의 느낌을 받기도 하고

그러나 이 글로 어느 정도 위태로움이 해소가 되었으면 하는 염려.

다음 시집을 기대하고 있으므로.

- 슬픔에게 언어를 주오. - 윌리엄 셰익스피어, <멕베스>

- 나는 가끔 내 안의 어떤 부품이 완전히 고장 나서,
뭔가를 전혀 할 수 없거나 느낄 수 없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오래도록. 이런 생각을 오래 하면 이어서 또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혹시 내가 잘못 태어났나, 그 흠결이란 것이 너무나도 미세해서 알아차릴 수도 없을 만큼, 그리하여 긴 세월을 조금 부서진 채로 견디다가 끝에 다다라서야 한계를 느낀 나머지 스스로의 모든 것을 점검해야 하는 정도의, 가느다란 결함. - 8

- 나는 슬픈 사람이다. 이유 없이 슬픈 사람이다. 그 어떤 시절도 사람도 내가 슬픈 이유가 될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모든 슬픔에 이유가 필요한 것은 아니며 아주 많은 슬픔이 이유 없는 채로 우리 사이를 배회하고 있다. 갈 곳 잃은 슬픔들이 매일매일 산책한다. - 8

- 나는 살아 있는 사람의 일기는 조금...... 징그럽다.
왜냐하면 그가 살아 있기 때문이다. 살아 있으니 그의 일기를 읽는 것보다 그가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보는 게 더 쉬울 테다. 게다가 글을 쓴다는 건 가식적인 일이기도 해서 대부분의 일기인들이 일기에 모든 것을 다 적지 않는다. 그러다 보면 실상의 사람과 일기 안의 사람의 차이가 더욱 심해질 텐데, 그 이격을, 자꾸만 벌어지는 이격을 계속해 확인하면서 다시 깨닫게 되겠지 쟤는 살아 있었던 거야, 안 죽었다고. 그래서 나는 산 사람들은 산 채로 보고 싶고 읽고 싶고 그렇다. - 30

- 필요한 감정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내게는 오래되고 낡은 부채감이 있다. 수치심에 가깝다. 그것은 자주 나를 찾아온다.
내가 말을 하지 않을 때.
그러니까, 나 혼자 말하고 있지 않다고 느낄 때
나 홀로 어떤 대열의 맨 뒤로 가 있다는 사실이
나를 부끄럽게 한다. - 36

- 방향을 잃으면 시간이 걸린다. 사람을 잃으면 마음이 걸린다. 하지만 해야 할 말을 잃으면 나는 무엇을 걸어야 할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리고 이것은 나를 아주 오래 슬프게 한다. - 40

- 우리 모두에겐 뭔가가 있어. 그건 너무나 깊이 내재되어 있어서 삶 동안 발현되지 않기도 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마다 크게 다르지 않고, 사실은 조금씩 엇비슷한 크기의 서글픔이라는 걸, 그렇다는 걸 알아서는 아니고 그냥 조금 그렇게 믿어보기로 했다. - 157

- 언어는 머무르지 않는다. 영원히 떠다닌다. 항해하고 선적된다. 여행하며 옮겨진다. 그리고 기꺼이, 그것을 추적하는 사람들이 있다. 언어를 횡단하는 사람들이 있다. - 186

2025.. jul.

#탁월하게서글픈자의식 #박참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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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소설 전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00
이상 지음, 권영민 엮음 / 민음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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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히 알고 있던 소설 두어 편은 아무래도 잘 읽혔다.

처음 접한 소설들은.... 문장과 문단을 읽고 지나가면 그 사이의 구조들이 모조리 해체되는 듯한 기분을 느꼈달까.

전반적으로 하루하루 살이의 서사들이고, 결핍, 빈곤, 체념, 무력감이 느껴지는 관조적인 시대의 시선.
논리라는 지점과는 거리가 있는 듯 무질서하다는 감각이 지배적이었다.
아무래도 근대 문학에는 취약한 독자의 어려움이 있다고나 할지.
파편화 되어 있는 심리의 반영일지도.
당시의 모던보이라는 번드르르한 계층의 허점 같기도.

시대상의 관찰이 유효하긴 하나, 그 지점도 한 성별 한 계층의 시선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상이라는 작가의 아우라 출중함을 무시하고 넘어갈 수 없는 묘한 기분.

- 그저한없이게으른 - 사람노릇을하는체대체어디얼마나기껏게으를수있나좀해보자. - 게으르자.-그저한없이게으르지. - 시끄러워도그저모른체하고게으르기만하면다된다. 살고게으르고죽고 - 가로대사는것이라면떡먹기다. 오후네시. 다른시간은다어디갔나. 대수냐. - 60, 지주회시

- 18가구에 각기 별러 든 송이송이 꽃들 가운데서도 내 아내가 특히 아름다운 한 떨기의 꽃으로 이 함석지붕 밑 볕 안 드는 지역에서 어디까지든지 찬란하였다. 따라서 그런 한 떨기 꽃을 지키고, 아니 그 꽃에 매달려 사는 나라는 존재가 도무지 형언할 수 없는 거북살스러운 존재가 아닐 수 없었던 것은 물론이다. - 87, 날개

- 나는 가장 게으른 동물처럼 게으른 것이 좋았다. 될 수만 있으면 이 무의미한 인간의 탈을 벗어 버리고도 싶었다. 나에게는 인간 사회가 스스러웠다. 생활이 스스러웠다. 모두가 서먹서먹할 뿐이었다. - 91, 날개

- 나는 조소도 고소도 홍소도 아닌 웃음을 얼굴에 띄우고 아내의 아름다운 얼굴을 쳐다본다. 아내는 방그레 웃는다. 그러나 그 얼굴에 떠도는 일말의 애수를 나는 놓치지 않는다. - 95, 날개

- 나는 또 나 자신에게 물어보았다. 너는 인생에 무슨 욕심이 있느냐고. 그러나 있다고도 없다고도, 그런 대답은 하기가 싫었다. 나는 거의 나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기조차도 어려웠다. - 114, 날개

- 우리 부부는 숙명적으로 발이 맞지 않는 절름발이인 것이다. 내나 아내나 제 거동에 로직을 붙일 필요는 없다. 변해할 필요도 없다. 사실은 사실대로 오해는 오해대로 그저 끝없이 발을 절뚝거리면서ㅓ 세상을 걸어가면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까? - 115, 날개

- 속아도 꿈결 속여도 꿈결 굽이굽이 뜨내기 세상 그늘진 심정에 불 질러 버려라 운운. - 127, 봉별기

- '사람이 유희적으로 살 수가 있담?'
결국 나는 때때로 허무 두 자를 입 밖에 헤뜨리며 거리를 왕래하는 한 개 조그마한 경멸할 니힐리스트였던 것일세. 생을 찾다가, 생을 부정했다가 드디어 처음으로 귀의하여야만 할 나의 과정은 - 나는 허무에 귀의하기 전에 벌써 생을 부정하였어야 될 터인데- 어느 때에 내가 나의 생을 부정했던가...... (...)
그동안에 나는 생을 부정해야만 할 아무런 이유도 가지지 않았던가? 생을 부정할 아무 이유도 없이 앙감질로 허탄히 허무를 질질 흘려 왔다는 그 희롱적 나의 과거가 부끄럽고 꾸지람하고 싶은 것일세. 회한을 느끼는 것일세.
'생을 부정할 아무 이유도 없다. 허무를 운운할 아무 이유도 없다. 힘차게 살아야만 하는 것이......'
재생한 뒤의 나는 나의 몸과 마음에 채찍질하여 온 것일세. 누구는 말하였지.
"신에게 대한 최후의 복수는 내 몸을 사바로부터 사라뜨리는 데 있다."고. 그러나 나는 '신에게 대한 최후의 복수는 부정되려는 생을 줄기차게 살아가는 데 있다.' 이렇게...... - 270, 십이월 십이 일

- 너는 또 어느 암로를 한번 걸어 보려느냐. 그렇지 아니하면 일찍이 이곳을 떠나려는가. 그렇다. 그 모닥불이 다 꺼지고 그리고 맹렬한 추위가 너를 엄습할 때에는 너는 아마 일찌감치 행복의 세계를 향하여 떠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 395, 십이월 십이 일

2025. sep.

#이상소설전집 #이상 #민음세계문학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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