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일에 하는 용서 창비시선 487
여세실 지음 / 창비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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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풀리지 않는 분노, 서러움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시집을 묶을 때 그 감정들에 맞서보기도 하고, 무너져보기도 하고, 곱씹어 보기도 하고, 그 감정을 가지고 놀아보기도 하는 마음으로 시집을 꾸렸어요."
라는 시인의 말. 그게 나에게도 와닿았나 하면... 그러진 못한 것 같다.

소소하고 세밀한 일상의 감정들이 너무 광범위한 일상을 말하고 있어서 집중력이 떨어졌다고나 할까.
그래도 다정한 시였다.

- 눈이 쌓이고 난 후의 흰빛이 음악이 된다고 믿었다 눈은 내리고 오래지 않아 더러워 보였다 나는 거기까지를 눈이라고 불렀다 - 후숙 중

- 나를 대체할 사람은 어디에나 있으나 나를 버릴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므로, 의로운 사람의 평화 깨뜨릴 수 있는 사람 언제든 나타날 수 있으나 그 평화 거머쥘 사람 오로지 그뿐이므로, - 당도 중

- 마모될 걸까
나 이전의 나를 헤아려보겨로 한건
망설이고 있어 달싹이고 있지
흔들려보기로 한 거야
그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선택 앞에 - 끝났다고 생각할 때 시작되는 중

- 낭랑하다, 너는 그 말 뜻 중에 어떤 것이 제일 마음에 드냐고 물었다 눈물이 거침없이 흐르다, 나는 그게 좋다고 했다 거침없는 슬픔이나 막힘없는 서러움, 그게 제일 좋겠다고 했다 - 오늘은 다른 길로 가보자 중

- 여름엔 겨울을, 겨울엔 여름을 생각하며
거의 다 왔다고 믿었던 적 있다 - 부정할 수 없는 여름 중

- 구겨졌다고 말하기에는
돌은
너무 많은 모서리를 끌어안은 채
둥글다 - 경유 중

- 일그러진 최선. 일그러진 채로도 아침에 일어나고 밤에 눈을 감는 최선. 하루에 십오분은 자리에 앉아서 소리 내어 책을 읽고, 삼십분씩 햇볕을 쬐며 빠르게 걷고, 플라스틱 용기에 묻은 국물 자국을 씻어 분리수거를 했다. 집에 있는 눈썹 칼을 치웠다. 종이에 손이 베였다. 손을 들고 손바닥을 앞뒤로 흔들었다. 조카가 와서 같이 손바닥을 흔들었다. 반짝 반짝. 포기하고 나서야, 도망치고 나서야 마주 보고 울었다. 아주 큰 소리로. - 생시와 날일 중

2025. jan.

#휴일에하는용서 #여세실 #창비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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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의 노래 - 2023 부커상 수상작
폴 린치 지음, 허진 옮김 / 은행나무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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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2024년 12월 11일에 다 읽었다.
지금까지 리뷰를 남기지 못한 것은 계엄 사태와 상관이 영 없지는 않다.
이 정도로 독재적으로 군림하는 정부의 이야기를 읽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를 심심찮게 받는데, 
현실에서 계엄...이라니 계엄이라니!!! 하고 있는 와중이어서 더욱 그랬다.

해외 문학상 중 가장 취향에 맞고 좋아하는 상이 부커상인데, 그만큼의 기대를 가지고 읽어도 거의 대부분 좋았다. 
이 책도 현실만 아니었으면 좋았다.로 끝나는 감상을 남겼을 것이다.

노동조합 탄압을 시작으로 음모와 음해, 견제와 감시의 분위기로 질식할 것 같은 답답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무너지는 가족을 어떻게든 유지해 보려는 아일리시의 노력이 도저히 해피엔딩으로 이어지지 않을 것 같은 암담함.
노동조합 때문에 연행된 남편, 돌봄과 치료가 필요한 치매 아버지,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위험 속에서 징집 명령을 받은 아들, 아직 어리고 미성숙한 막내.....
국외에 거주하는 여동생의 도움만이 유일한 희망 같아 보이지만,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고 상황을 온전히 전달할 수도 없는 아일리시의 상황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지...

지배하려는 자들은 항상 비슷한 결로 세상을 망치는데,
세상의 정의, 선의, 상식이 제대로 믿음대로 작동하리라는 생각은 언제부턴가 망상의 일종으로 전락되어 버린 게 아닌가 하는 슬픈 체념이 생긴다.

이 책을 읽던 24년 12월이... 더욱 그랬기에, 유쾌할 수 없는 뒷맛이 남았다.

- 제가 잘 알아들었는지 모르겠군요, 그가 말한다, 제 행동이 반란이 아님을 증명하라는 겁니까? 네, 그렇습니다, 스택 씨. 하지만 노동조합원으로서 내 일을 하고 있을 뿐인데, 헌법에 따른 권리를 행사하는 건데 어떻게 반란이 아님을 증명할 수 있지요? - 21

- 사과나무에서 오렌지가 떨어질 수도 있고 벤은 확실히 자기 나름의 남자가 될 것이다. 그래도 아일리시는 아이 안에서 래리와 닮은 점을 찾으면서 아버지에 버금가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지만 모든 남자아이는 자라서 집을 떠나고, 세상을 만드는 척하면서 해체한다는 것을 잘 안다, 그것이 자연의 법칙이다. - 37

- 마이클, 그녀가 말한다, 당신이 래리를 만날 수 없다는 거 말이에요, 내가 이해가 안 가는 건 그거예요, 제가 법을 다 찾아봤어요, 협정도요, 이건 명백한 국제법 위반이에요, 그러니까 말해봐요, 왜 저 사람들은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도 되는 거죠, 왜 아무도 그만두라고 소리치지 않죠? - 50

- 그가 연설하며 사람들의 박수와 미소를 통해 지지자를 골라내는 동안 그녀는 회의실을 둘러보며 그들 사이에 있는 야수를 본다, 야수가 은폐와 위선을 어떻게 내던지는지, 이제 어떻게 드러내놓고 돌아다니는지 바라본다. - 90

- 넌 내가 아무것도 안 한다고, 가만히 서서 네 아버지가 돌아오기만 기다린다고 생각하겠지만 난 지금 우리 가족이 서로 떨어지지 않도록 지키고 있는거야, 왜냐면 바로 지금 우리를 떼어놓으려고만 하는 세상에서 그게 제일 어려운 일이니까, 가끔은 뭔가를 하지 않는 것이 네가 원하는 걸 얻는 가장 좋은 방법이야, 가끔은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일 줄도 알아야 돼, 가끔은 아침에 일어나서 시간을 더 들여 옷 색깔을 골라야 하는 거야. - 96

- 마크가 양손을 펼치고 시선을 피하다가 마침내 입을 열 때 결의가 느껴진다, 목소리가 돌처럼 단단하고 차분하다, 세상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어요, 엄마, 마크가 말한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온 세상이 다 봤어요, 공안부대가 평화 시위대한테 실탄을 쏘고 우리를 쫓아왔어요, 이제 모든 것이 바뀌었어요, 모르시겠어요? 이제 돌아갈 수 없어요. - 124

- 아일리시는 다시 고개를 돌려 아들을 마주하면서 남편에다가 아들까지, 그리고 또 얼마나 더 많이 잃어야 할까 생각한다, 슬픔 위에 슬픔이, 또 슬픔이 쌓인다, 시간 속에 멈춘 듯한 아들을 보며 그 모습을 기억에 새긴다, 마크가 케이크 쪽으로 가 세 번째 조각을 자른다. - 139

- 우리는 이미 터널에 들어왔고 돌아 나갈 수는 없어, 아일리시가 말한다, 반대편 빛이 보일 때까지 그냥 계속, 계속 앞으로 가야 해. - 234

- 왜 여기 남는 것을 선택하셨죠? 그가 말한다, 여기 당신을 위한 것은 하나도 없는데요, 당신은요? 아일리시가 말한다, 당신은 왜 여기 있죠? 난 할 일이 있으니까요, 그가 말한다, 나는 그 일이 끝나거나 관짝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여길 떠나지 않을 겁니다. - 300

- 적당한 말을 찾을 수가 없다, 이제 전하고 싶은 것을 표현 할 말이 없다, 하늘을 봐도 어둠밖에 보이지 않는다, 아일리시는 자신이 줄곧 이 어둠과 하나였음을 안다, 여기 남는 것은 이 어둠 속에 남는 것이지만 그녀는 아이들이 계속 살아가기를 바란다, 아일리시는 아들의 머리를 어루만지고 몰리의 양손을 잡고서 절대 놓지 않겠다는 듯이 힘을 준다, 그런 다음 말한다, 바다로, 우리는 바다로 가야 해, 바다가 삶이야. - 360

2024. dec.

#예언자의노래 #폴린치 #2023부커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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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가 키보드를 밟고 지나간 뒤 문학동네 시인선 226
진수미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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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좋아서 고른 시집인데, 확 사로잡는 무언가가 있었는지는 모르겠고...
그 무엇을 찾으려고 열심히 읽었다.

요즘 골라 읽는 책들....에게서 재미를 찾는 게 좀 어려운데... 시국 탓인가.
피로하고 우울해서일까.

금요일 하루 기분 좋았다는 게 믿기지가 않네 ㅋㅋㅋㅋ 헛웃음만 나고....

테니스 엘보가 심해져서 왼팔을 못 쓰고 있어서 더 그런 거 같고... 

- 이름 붙일 수 없는 망가짐을 보라.
어쩌면 이리도
나는, 나라는 존재는
좋아지기만 하는 걸까.
어느 날 흔적 없이 사라진
원고 파일처럼
지상이라는 무밭에서 솎아지고 사라지길
꿈꾸었던 순간을 기억하며,
이 꿈은 어서 깨도록 하자. - 시인의 말

- 궁극적으로 질문인 세계여 여자, 한복판, 찔렸다...... 무표정한 당신, 사실의 톤으로 만져지는 것들을 묻는다면, 양파의 궤도로써 도는 세계여 지금 당신의 이름으로 벗기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 10번 출구에서 돌아보라 - 강남역에서 중

- 삶이란 모두 잠든 밤
삐걱대는 마루를 디디는 일
발끝을 뾰족 세워도
존재의 기척은 요란하다
당신을 깨우고야 만다 - 센세라는 이름의 고양이 중

- 생은 한없는 모욕
순종과 굴종 사이에서 눈알 굴리는 것 - 처형의 이듬 중

- 삶이란
누군가 한 번은 밟아야 하는
개똥의 다른 이름
젖은 교차로에서
냄새나는 생이
끈덕지게 달라붙는 나의 바닥을
세상 모서리에 비벼 닦는다
스크린도 무대도 없이
아름다운 나의
개똥,
당신들 - 젖어서 아름다움 중

- 하염없이 배제당하는 아이야
하염없이 밀려나는 아이야
그럼에도
삶을 선택하는 아이야
그 끝엔 무엇이 기다리는 걸까 - 개미는 애인이라도 있지 중

<심해어>
내게는
두 개의 눈이 있고

눈을 반쯤 감은 현실이 있고
스크린이 있고

액자처럼
세계를 껴안은 어둠이 있다

어둠은 사라지지 않는다
당신의 이름도 사라지지 않는다

스크린에는
하염없이 이어지는 빗줄기가 있고
납작 엎드린 고요가 있고

우리는
왜 이리 슬픈 일이 많은 건가요?

지층처럼 단단해진 어둠
못생긴 입술이 있고

눈을 감으면
왜 동시에 감기나요?

느릿느릿 어둠을
툭 밀어내는 물음이 있고
(전문)

- 나는 내가 불편해
한없이
아마
이 생 내내 그럴 거야. - 자연광 독서 중

- 괴로움에 사상이 있다고
도스토옙스키는 말했다
당신 문제는
사상이 없었다는 것
괴로움이 너무 많았다는 것
당신은 나의 삶을 예측했다
헤아릴 수 없이 아득했던 그때
욕설 대신
이리도
많은 별을 천장에 새겨주었다 - 천장관찰자의 수기 중

- 고양이가 키보드를 밟고 지나간 뒤
이 책의 모든 문자가 사라졌다
당신이 읽은 문서는
한갓 신기루
그러니까 이미 없는 것들에
잠시 눈이 어지러웠다는 말씀 - 신적인 너무나 신적인 중

2025. mar.

#고양이가키보드를밟고지나간뒤 #진수미 #문학동네시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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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욕 - 바른 욕망
아사이 료 지음, 민경욱 옮김 / 리드비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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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기는... 무슨 호들갑이냐 싶다.

정상 범주? 가 아닌 마이너 한 성욕의 부당한? 취급이 그토록 억울한가? 
사회생활도 어려워, 난 오해 받고 있고, 고립감에 외로워...라고 징징대는 것만 같다.
이건 페도필리아랑은 다른 거라고 말하는(물론 엄밀히 아동이 주 목적은 아니다만...) 그들의 존재를 숙고해 보자는 건지.. 이 이야기가 뭘 추구하는 건지...
취향을 완성하려면 애들 빼고 자기들끼리 모임을 만들던가 하면 되지 않나 생각하는데, 모르겠네. 대체.

물론 작가가 이상 욕구를 인정하자!라고 말하는 건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의 억울함이 너무 대변되어 있다.
왜 이런 이야기를 읽고 앉았는지.... "또" 낚인 소설이다.
돈도 시간도 좀 아깝다.

뭐 통찰은... 다른데 쓰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징징대지 말고.
누가 안 놔뒀냐고...... 싶은 것.

- 그런데 조금씩 깨달았습니다. 얼핏 보면 독립되어 보이는 메시지가 사실은 그렇지 않음을. 세상에 흘러넘치는 정보는 거의 모든 작은 개울이 모이고 또 모여 커다란 바다를 이루듯, 이 세상 전부는 사람들 몰래 설정된 커다란 목표로 수렴되어 간다는 사실을. - 6

- 다양성, 이 단어 속에는 축복과 비슷한 이미지가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자신과 다른 존재를 인정하자. 내가 다른 사람과 다르더라도 당당하게 가슴을 펴자. 나답다는 데 당당해지자. 타고난 속성을 다른 이가 판단하는 건 틀렸다.
가슴이 상쾌해질 정도로 축복이 반짝이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것들은 결국, 소수자 가운데서도 주류에게만 해당하는 말이자 말하는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범위 안의 '자신과 다른 것'에만 해당하는 말입니다. 
상상을 초월한 나머지 이해하기 힘든, 직시할 수 없을 만큼 혐오스러워 거리를 두고 싶어지는 것에는 단단히 뚜껑을 덮는 사람들이 자주 사용하는 말들이죠. (...) 나라는 인간은 사회로부터 확실히 선을 긋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므로. 그냥 놔두길 바랍니다. 그냥 놔두기만 하면 알아서 살 테니까. - 8

- 사회는 날마다 변한다. 가치관, 사고방식, 상식, 어제는 이랬던 게 오늘은 그렇지 않게 된다. 가치관을 재는 눈금이 항상 흔들리는 시대이므로 법 아래의 평등만은 지켜야 한다고 히로키는 생각했다. - 19

- 나쓰키는 슈의 부고를 들었을 때 동창회는 중지될 줄 알았다. 그런 모임은 열 수 없을 줄 알았다. 이런 때일수록 오히려 밝은 모임을 여는 걸 슈도 좋아할 거라는 의견이 많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인간은 생각이란 걸 놓아 버릴 때 종종 '이런 때일수록'이라고 말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157

- "특수한 욕구를 지녔다고 해서 뭐든 해도 된다는 건 아니야."
(...)
"아무리 채우지 못한 욕구를 지녔다고 해도 그것을 사회에 화풀이해서는 안 돼."
히로키는 한 글자 한 글자를 고시카와의 피부에 새기듯 말했다.
"그건 누구나 마찬가지야. 어떤 종류의 욕구를 지닌 인간이라도 법률이 정한 선을 넘으면 벌을 받아야 해."
사회정의를 위해. - 359

2025. mar.

#정욕 #아사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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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번째 천산갑
천쓰홍 지음, 김태성 옮김 / 민음사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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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이 꽤나 흥미로웠던 것에 비해
이번 작품은 너무 관념적이고 추상적 이미지만 가지고 만들어진 이야기라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그래서 솔직히 지루하다.

결국은, 정체되어 있는 로드무비랄까.
이 스토리는 굳이 이 정도 볼륨의 책으로 읽기엔....

어린 시절의 인연으로 서로에게(정말 서로인가?는 차치해두고) 버팀목이 되어주는 두 남녀의 이야기인데.
재밌을 법도 한데 지루하다는 게 특징이다.

그녀가 그에게 의존적이라고 느껴지는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정작 인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살아있는 인간은 그녀였고, 그의 존재는 왠지 실제가 없는 엔피씨 같은 느낌이 든다.

페트리쇼르(Pétrichor)라는 단어가 신선했다는 소득이 있었다. 식물이 가뭄을 만났을 때 분비하는 기름방울이 진흙이나 암석에 스며들었다가 비가 건조한 대지를 적시면 이런 기름이 만들어내는 냄새에 빗물이 섞이는 것. 프랑스어인줄 알았더니 원래 영어 단어에서 온 말이라고.

-  보통은 그가 유일한 관객이었다. 전부 그가 못 본 영화들이었다. 흑백도 있고 컬러도 있었다. 고화질이 아닌 데다 색채가 뒤섞이기 일쑤였고, 걸핏하면 영상이 끊겼다. 주인이 커튼을 들추고 들어와 테이프가 손상되었다고 선포하며 새 영화로 바꿔 주었다. 그러다 보니 적지 않은 영화의 결말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상상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른바 결말이라는 게 정말 있기는 할까. 왜 사람들은 영화를 볼 때 결말을 갈구할까. 사람들은 화해나 파국, 여행의 종점, 도로의 끝, 우기의 끝, 서설의 강림을 기대했다. 지금부터는 즐거움만 있거나 영원히 슬플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가 이해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았을 것이다. 진짜 인생에선 원래 선명한 마침표가 없다. 종종 작별 인사를 건넬 기회를 놓치고, 눈을 뜨건 감건 영원히 못 보는 경우도 있다. - 132

- 죽음에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사바사나 자세를 할 때마다 여러분은 사실을 받아들이게 될 겁니다. 자신이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 말입니다. 우리는 모두 죽음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빠르거나 느리게 빛나거나 암울하게 다들 죽어가고 있지요. 강줄기나 사막, 구름이나 나무뿌리, 빗방울이나 바위도 마찬가집니다. 진지한 자세로 누우세요. 편안하게 몸에 힘을 빼세요. 천천히 호흡하면서 죽음을 연습하세요. - 136

- 모든 등불이 밝은 빛을 쏟아내는 밤이었다. 그는 어쩌다 여기 오게 된 걸까. 줄곧 빛을 피해 왔는데, 어쩌다 이렇게 수정처럼 밝은 파리의 옥상에 오게 된 걸까. - 137

- 기자가 그에게 감동해서 우느냐고, 고진감래라고 생각하느냐고, 마침내 인정을 받았기에 우는 거냐고 물었다. 그는 언어로 자신의 눈물을 해석할 길이 없었다. 이런 순간에 언어는 무용지물이었다. 눈물이 바로 그의 언어였다. 눈물에 자신의 문법과 구두점과 발음과 서사가 있었지만, 사람들은 그의 눈물을 알아듣지도 못하고 읽어내지도 못했다. 그 자신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눈물은 그 순가 그가 줄 수 있는 유일한 언어였다. - 146

- 그녀가 마지막으로 화를 낸 게 언제였더라.
정확히 특정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화를 내는 일이 극히 드물었다. 화를 내려면 진심이 필요했다. 그녀는 자신이 진심이 아니고 성실하지 못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진심을 원하지 않았다. 진심은 너무 위험하기 때문이었다. 분노하기 위해선 온몸의 근육을 다 동원해야 하고, 감정이 격앙되면 자칫 진심의 말이 튀어나오게 된다. - 237

- 마침내 그녀는 준비가 다 되었다. 기다리지 않고 큰 걸음으로 앞을 향해 나아갈 작정이었다. - 480

2025. mar.

#67번째천산갑 #천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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