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슬픈 빌라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신현숙 옮김 / 책세상 / 2001년 6월
평점 :
절판
아무래도 문학상을 받은 작가의 작품은 좀 읽어봐야 하지 않겠나...하는 마음으로.
유럽권의 소설들은 뭔가 조금 심오하게 심심한 면이 없지 않은데,
그런 면은 컨디션에 따라 호오의 기복이 심한 편이다.
얼마전까지 읽고 있던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그런 이유로 잠시 덮어두었는데,
파트리크 모디아노는 그런 상황까지는 가지 않은 책.
일단은 볼륨이 가뿐하다는 잇점이 작용을 했지만,
초반의 지루함과 선명치 않은 부분들은 읽을 수록 마치 퍼즐의 가장 난해한 부분을 완성한 후 처럼 읽히기 시작한다.
프랑스, 독일은 물론이고, 유럽문학은 세계대전의 그림자에서 좀체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이
이 이야기에서도...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타인의 삶들 위에서 부유하듯 살아가는 주인공 나와 그와 인연을 맺은 두 남녀의 이야기인데.
전체적인 톤을 설명하자면, 왠지 밋밋하지만 주인공들은 심각하기 그지없는 프랑스 영화 같기도 하고,
또 어떤 부분에선 빛나던 시절의 헐리우드 영화같기도 한 독특한 매력이 있다.
화자인 주인공의 시점 이외에는 모든 인물들의 내면은 한겹 가리워진 듯 불투명하다.
회상. 이라는 것이 이 이야기 서술의 중심이므로.
자신을 찾지 못해 떠도는 젊은이가 결국 그 기억을 반추하면서 자신을 찾았을까 하는 의문.
결국 아무것도 찾지 못했을 것이라는 추측만...
정말이지, 아는 그때 이 `세계의 운명`에 대해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았다. 원인 모를 이 공포감과 대 참변이 세상을 덮칠 것만 같은 이다지도 절박한 감정을 더욱 부채질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다만 시사성이 없는 문학이라든가, 영화, 패션, 음악 등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싶었다. 커다란 흔들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눈을 감고 온몸의 긴장을 풀고, 특히 몸과 마음의 긴장을 풀고 싶었다. 모든 걸 잊어버리자. 결국 그런 생각은 아니었던가? - p. 24
이러한 기사 옆에는 커다란 사진이 실려있었다. 그 사진은 전날밤 생트 로즈로 우리가 막 들어서던 찰나에 찍었던 것이다. 우리 세 사람이, 이본느와 내가 나란히 서있었고 맹트는 약간 비켜서 찍혀 있었다. 사진 설명으로는 `이본느 자케 양, 르네 맹트 씨, 그리고 그들의 친구인 빅토르 슈마라 백작`이라고 되어 있었다. 연판은 신문 용지인데도 퍽 선명했다. 심각한 표정의 이본느와 나. 미소 짓고 있는 맹트, 그렇게 우리는 지평선의 한 점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이 사진을 나는 다른 기념물들과 함께 정리해 처박아놓기 전에, 여러 해 동안 몸에 지니고 다녔다. 그리고 어느날 저녁 우울에 빠져서 그 사진을 바라보다가 붉은 크레용을 가지고 삐딱하게 다음과 같이 써넣고 말았다.
하루살이 왕들. - p. 145
그녀가 방의 불을 껐다. 내 생의 어느 한 모퉁이를 우회하다가, 그 어떤 우연에 의해 나는 지금 버려진 이 조그만 방에서 그녀 곁에 있게 된 것일까? - p. 197
나는 이본느에게서 아무렇게나 되는 대로 살아가려는 자세를 발견하고 놀랐다. 그러나 모든 것에 대해 방임하는 나의 태도는 사실은, 움직임에 대한 공포, 흘러 사라져버릴까봐, 바뀌어버릴까봐. 모든 것을 그대로 간직하고 싶은 소망 때문이었다. 한 쪽이 벌써 무너져내리고 있는 불안한 모래 위를 더 이상 걷지 않으려는, 어딘가에 나를 정착시키고 돌처럼 굳게 뿌리를 내려보고 싶은 욕망 때문이었다. - p. 225
그런데 이본느는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한 인간의 사라짐에 우리가 가슴 저려 하는 것은 사실 그와 우리 사이를 채우며 존재해 있던 암호들 때문이며, 그의 사라짐과 함께 갑자기 그 암호들도 아무 쓸모 없고 텅 비어버리게 되는 까닭이리라. - p. 238
나는 어느 곳에도 애착을 느끼고 있지 않기 때문에 미련 없이 떠날 수 있을 것이며, 이본느 역시 그녀의 뿌리를 잘라버렸기 때문에 나와 마찬가지 심정일 것이다. 우리는 새로운 생을 시작할 것이다. - p. 2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