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들이 모조리 사라진다면
리처드 파워스 지음, 이수현 옮김, 해도연 감수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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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 해방권에 대한 잔잔한 이야긴가 싶지만,
결코 가볍지 않다.

세상의 빛이 꺼져가는 일에 온 몸으로 마음아파하는 로빈. 동물권 운동에 헌신하다 먼저 떠난 아내를 그리워 하는 아빠. 이 둘은 세상의 위협으로부터 어쩌면 무방비하게 노출되어 온갖 풍파를 맞고 있는지도 모른다.
전 방향에서 다가오는 아픔에 분노하고 자신을 조절하지 못하던 로빈. 새로운 연구를 통해 조금씩 성장하며 행복해지는 이야긴가 싶었는데....

맥없고, 우울한 맺음이다.
세상이 이렇게나 절망적인 멸종 중인데, 아픔을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능력은 저주가 아닐까.
결국 절멸할 인류 따위 때문에 아픈 것은.

그래서 제목 처럼 어리둥절하다.
그리고 아름답기도 하다.

- 지구의 아름다움을 눈여겨보는 사람들은 생명이 이어지는 한 지속할 힘을 찾아낸다. - 레이철 카슨

- 그러니, 비슷한 이유로 우리는 지구와 태양과 달과 바다와 다른 모든 것들이 유일하지 않으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 중 하나임을 인정해야만 한다. - 루크레티우스 ,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 로빈의 두 번째 소아과 의사는 로빈을 자폐 ‘스펙트럼’에 넣고 싶어 열심이었다. 나는 그 남자에게 이 우연한 작은 행성에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떤 스펙트럼에 속해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스펙트럼이라는 게 그런 것이니까. 인생 자체가 스펙트럼이로 이루어진 무질서이고, 우리 모두가 연속적인 무지개 속 특정 주파수로 진동할 뿐이라고 그 남자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그다음에는 한 대 때리고 싶었다. 아마 그런 기분에 붙는 이름도 있으리라. - 17

- 아내였다면 그 의사들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알았으리라. 아내는 이렇게 말하기를 좋아했다. ‘완벽한 사람은 없어요. 하지만 우리 모두가 너무나 아름다운 방식으로 부족하죠.’ = 18

- 천문학과 유년기는 공통점이 많다. 둘 다 어마어마한 거리를 가로지르는 항해다. 둘 다 자신의 이해를 넘어서는 사실들을 찾으려 한다. 둘 다 엉뚱한 이론을 만들고 가능성이 무한히 증식하도록 놓아둔다. 둘 다 몇 주마다 초라해진다. 둘 다 모르기 때문에 움직인다. 둘 다 시간 때문에 혼란해진다. 둘 다 언제까지나 시작점이다. - 99

- 나는 차를 몰았다.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인간은 지긋지긋했다. 우리는 집 앞에 차를 댔다. 아들이 내 팔에 손을 얹었다.
‘우린 뭔가 잘못된 데가 있어, 아빠.’
또 맞는 말이었다. 우리 둘은 뭔가 잘못된 데가 있었다. 76억 모두에게도 잘못된 데가 있었다. - 175

-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고통에서 해방되기를. - 303

- 로빈이 힘없이 한 손을 들어 올렸다. ‘나 기도문을 바꾸고 싶어,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서 해방되기를.’ - 352

- 그러다가 소리가 멎고, 밤은 다른 음악 소리로 가득 찼다. 로빈이 몸을 돌려 나를 더 세게 붙잡았다. 달빛이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는 그들이 느끼도록 만들어진 모든 것을 느낄 것이니.
‘저 소리 잘 들어 봐.’ 아들이 나에게 말했다. 그러고는 영영 희미해지지 않고 영영 사라지지 않을 말을 더했다. ‘우리가 어디 있는지 믿을 수 있어?’ - 380

- 모두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낼 수 없는 행성이 하나 있었다. 그 행성은 고독 때문에 죽었다. 그런 일이 우리은하에서만 수십억 번이나 일어났다. - 386

2022. oct.

#새들이모조리사라진다면 #리처드파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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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터 쿠키 현대문학 핀 시리즈 시인선 42
이혜미 지음 / 현대문학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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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슬픔이라는 것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의 그것에게 전해주는 시들.

끔찍스러운 하루가 있었다면
이 시집 한권으로 조금의 위로가 될 것이다.

- 인간은 자신 아닌 모든 것을 영원이라 부르지. 미래는 이미 끝나버렸고 옛날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으니까. 일회용 컵을 씻어 물을 마시고 구멍을 뚫어 흙을 채우고 식물을 심으며, 다시 태어날 것을 몰래 믿으며 - 원테이크 중

- 분명하고 깊은 상처라 해서
특별히 더 아름다운 것도 아닌데
마음이 저버리고 간 자리에 남은 사람을
사람이라 부를 수 있나 - 흉터 쿠키 중

- 말을 짓고
그 말을 믿는 일은
아름다운가 끔찍한가 - 라파이티 중

- 어디서 이렇게 얼룩진 마음을 모아왔냐고 묻지 않았어. 한쪽이 더 크고 무거워야 눈사람은 완성되는 거잖아. 동그라미는 구르며 커져간다. 서로 다른 궤도를 맴도는 중얼거림으로. - ㅇㅇ 중

- 시는 어디에서 끝나야 할까. 눈보라에도 마지막 주자가 있겠지. 가장 끝으로 내려온 눈송이는 환대와 배웅을 동시에 받겠지. 눈송이들은 저마다 사라지려는 손을 흔들며 마지막 비생을 마치는데, 문장을 끝내기가 힘들다. 이리저리 굴린다. 시는 녹는다. 질척거리다 진창이 되어간다. 계속 만지면 망치는 줄을 알면서도 손안에서 말을 움켜쥔다. 손끝이 얼얼해질 때까지. 시간이 서락하고 생각이 이어지는 한 끝없이. - 에세이 중

2022. oct.

#흉터쿠키 #이혜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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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가 된다는 것
니콜 크라우스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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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사를 많이 전해 들어 나름 기대를 가지고 읽은 니콜 크라우스의 단편집.
기대보단 뭐....

<에르사디를 보다> 에서 나와 로미가 마주치는 체리향기의 등장인물은 혹시 나도 어디선가 보지 않았을까 싶은 그런 어떤 구체성이 전혀 없는 형상이지 않을까. 살아가다 어느 순간 마주치는 허상과 희망과 집착의 관념체로.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가 등장하는 장면에서 왠지 약간 웃음은 나왔지만....<에르사디를 보다>와 <정원에서>가 인상적이었다.

- 그녀는 외교관의 아들과는 잤지만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알제리 남자에게는 키스만 허락했다. 그가 카뮈처럼 가난하게 자랐다는 이유로 소라야는 그에게 환상을 품었다. 하지만 자신이 나고 자란 곳의 태양에 대해 그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자 마음이 식기 시작했다. 냉정하게 들리지만, 나중에 나 역시도 그런 경험을 했다. 알고 보니 상상과는 전혀 다른, 완전히 미지의 존재인 상대와 너무 친밀해졌음을 깨닫는 순간 두려움과 함께 찾아오는 돌연한 단절감. - 22, 스위스

- 말하는 동안 노아는 아비가 느끼는 경이감과 두려움, 자신에게도 익숙한 그 전율을 감지했다. 어린 시절에 이따금 주변을 돌아보며 먼 미래에는 이 가운데 무엇이 남을까, 무엇이 남아 사라진 믿음, 사라진 희망과 갈망의 의례들을 다시 끼워맞춰 그녀 자신과 주변의 모든 것이 사라진 이유에 대한 수수께끼를 풀 단서가 되어줄까, 하고 생각할 때면 느껴지던 감정이었다. - 116, 최후의 나날

- 아버지는 삶을 고작 몇 주 혹은 몇 달 연장해줄 뿐인 유독한 치료를 중단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존엄하고 평온하게 죽기를 바랐지만, 삶의 소멸을 향한 육체의 여정은 항상 난폭할 수밖에 없어서 실은 그 누구도 평온하게 죽지 못한다. 그런 크고 작은 형태의 난폭함은 그들의 일상을 구성하는 재료였지만 거기에는 늘 아버지의 유머가 섞여 있었다. - 133, 에르사디를 보다

- 일주일 전에 서머타임이 해제된 뒤로 너무 빨리 찾아오는 어둠이 아직도 낯설었다. 아무 경고도 없이 어둠이 내리는 그 첫날에 나는 매번 찌릿한 아픔을 느낀다. 뱃속이 살짝 울렁거리는 그 느낌은 시간의 가차없는 권위를 다시금 깨달을 때, 이제는 이 드넓은 세상에서 살아가는 법을 익혔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방향감각을 상실했을 때 찾아온다. - 151, 미래의 응급 사태

- 그런데 자연이란 평화롭지가 않아. 그는 말하곤 했다. 부드러운 산들바람과 산봉우리 위로 솟아오르는 태양 같은, 동화책에서 자연이라고 묘사하는 그런 것들이 아니란 말이야. 작은 분홍색 꽃봉오리나 초록의 랩소디가 아니라고. (이 나라에서 초록으로 통하는 색이 사실은 검정이라는 걸 자네는 알아차렸나? 무한히 펼쳐진 검은 잎들?) 자연은 잔혹하고 간교해. 그는 나와 둘만 있을 때면, 그런 때가 많았지만, 이렇게 말하곤 했다. 공격적이고 놀라울 만큼 치명적이지. 약자는 죽임을 당하고 - 고통받다 죽임을 당하고 - 강자는 그 부식과 부패에서 양분을 취해. 그러니 자연이 평화롭다느니 어쩌니, 나무를 흔드는 바람이니 귀뚜라미 소리니 하는 얘기는 집어치우라고 해. 귀뚜라미는 외로운 거야. 그렇게 날개를 서로 비벼서 오돌토돌한 시맥을 긁어대는 건 동류의 다른 개체를 불러내 짝짓기든 싸움이든 하고 싶어서라고. 사람들이 귀뚜라미 소리에 대해 떠들거나 장미를 노래하는 시를 읊게 놔두지 마. 꽃을 꺽어서 아름다움을 즐기면 안 된다는 말이 아니야. 사람이 꽃을 꺾어 즐기는 건 꽃의 기획이지 그 반대가 아니라는 말이라고. - 185, 정원에서

- 인생은, 나는 말한다, 아니 말하려 한다. 늘 아주 다양한 층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네요. - 250, 남자가 된다는 것

- 라피는 훗날 제대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 뒤에야 나라를 위해 죽는 다는 것, 죽을 뿐만 아니라 살인도 기꺼이 저지른다는 것이 얼마나 기괴하고 부조리한지 깨달았다. - 265, 남자가 된다는 것

2022. oct.

#남자가된다는것 #니콜크라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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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자를 수선하기
마일리스 드 케랑갈 지음, 정혜용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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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둔지 꽤 지나 먼지가 뽀얗게 앉아 있는 책을 꺼내 읽었는데.
묵직하다.

감정을 절제한 단문 위주의 문장들로 한 청년의 죽음으로 시작해 장기기증을 위한 여정이 폭풍처럼 몰아치는 24시간을 다루고 있다.

여러 등장인물의 시점으로 계속 바뀌지만, 전혀 혼돈스럽지 않은 것은, 아마도 그렇게 흘러가리라는 예상이 가능하기 때문이겠지.

절제된 문장 속에서도 격렬한 감정이 몇차례나 찾아오는데, 삶과 죽음의 그 아슬아슬하고 허무한 경계에 대해 자꾸 생각하게 된다.

조각나는 육신과 새로운 생명의 가능성을 가지고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는 신체의 일부들, 그리고 새로운 첫 심박동을 시작하는 순간들. 이 모든 장면들이 섬세하게 그려졌다.

짧은 글이 아니지만 시작하면 멈출 수 없이 몰입이 된다.

책을 읽는 중에 이 소설이 일인극으로 각색되어 공연되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기회가 된다면 꼭 보고 싶다.

- 레볼은 그런 영상들을 보고 환자의 상태가 어떤지, 앞으로 병세가 어떻게 진전될지를 읽어 낼 수 있다. 그는 그러한 형체들, 얼룩들과 환한 부분들을 알아보고, 유백색의 빛무리들을 해석하고, 그 검은색 흔적들을 판독하고, 기호 설명과 코드들을 해독한다. 그는 비교하고, 확인하고, 다시 검토하고, 철저하게 탐구한다. 그런데 이제 볼 수 있는 건 다 봤다. 끝났다. 시몽 랭브르의 뇌는 파괴되어 가는 중이다. 그의 뇌는 피에 잠겨 있다. - 41

- 마리안도 똑같이 그에게 손을 내민다. 하지만 여기에선 으레 이러는 것인지, 아니면 평범하다고는 하지만 이런 동작이 어떤 의도를, 시몽의 상태가 불러일으킨 배려나 그 밖의 뭔가를 드러내는 것인지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럼에도 아무것도 듣고 싶지 않다.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다. 아무것도, 아직은. <아드님은 살아 있습니다> 이런 확언을 망칠지도 모를 정보는 그 어떤 것도 듣고 싶지 않다. - 62

- 숀과 마리안은 나란히, 어색하게 소파에 앉아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궁금해한다. 그리고 두 개의 주홍색 의자 중 하나에 토마 레미주, 그가 손에 시몽 랭브르의 의료차트를 들고 앉아 있다. 하지만 이 세 명의 인물들이 같은 공간을 공유하고 있고 그 순간에 동일한 시간의 흐름을 타고 있다 하더라도, 지상의 그 무엇도 고통에 잠긴 그 두 존재와, 목적을 품고(그렇다. 목적이 있다.), 그들의 아이의 장기 적출에 대한 동의를 얻어 낼 목적을 품고 그들 앞에 와서 앉은 그 젊은이의 사이보다 더 벌어진 것은 없으리라. - 139

- 그 사람들이 해로운 짓은 하지 않을 거야. 어떤 해로운 짓도 안 할 거야. 마리안의 목소리가 천의 조직에 한차례 걸러지며 들려온다. 그러자 숀이 손을 놓고 그녀를 품에 끌어안는다. 그의 오열은 자연의 숨결의 연장이다. 그가 동의한다. 그래. 이제 그곳으로 돌아가야지. - 181

- 숀과 마리안이 병실에서 나간다. 토마가 거기 문간에서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 두 사람이 입을 벌린다. 말이 나오지 않는다. 말을, 서로 협의한 말을 하고 싶은 모양이다. 토막 두 사람의 말문을 터준다. 하실 말씀이 있으면 제게 하십시오. 그러시라고 제가 여기 있는 거니까요. 숀이 힘들게 소리를 내며 그들의 청을 내놓는다. 들어낼 때, 시몽의 심장, 그때, 시몽에게, 그러니까 정지시킬 때, 심장을, 말해 줘요, 내가, 그 애에게 꼭 말해 줘요, 우리가 있다고, 함께한다고, 우리 모두 그 애를 생각한다고, 우리 모두의 사랑을. 마리아가 뒤를 받는다. 그리고 루와 쥘리에트도요, 그리고 할머니도. 그러더니 다시 숀. 바닷소리, 들려줘요. 그가 토마에게 이어폰과 MP3 플레이어를 내민다 7번 트랙이에요. 맞춰놨어요. 아이가 바닷소리를 듣게요(두 사람의 머릿속에서 두서없이 튀어나오는 생각들). 그러자 토마가 그 의식을 두 사람의 이름으로 완수하겠노라고 다짐한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 199

- 토마가 소독해 뒀던 이어폰을 호주머니에서 꺼내어 시몽의 귀에 끼워 주고 MP3 플레이어를 누른다. 트랙 7. 그러자 마지막 파도가 수평선에 만들어지더니 절벽을 향해 나아간다. 파도가 솟구친다. 하늘 전체를 쉽쓸 기세다. 만들어지고 허물어지는 그 변모 속에서 물질의 혼돈과 회오리의 완벽함을 펼쳐 보인다. 대양의 밑바닥을 긁어 내고 퇴적물을 뒤흔든다. 화석들을 드러내고 묻혀 있던 궤짝들을 뒤엎는다. 시간에 두께를 더하는 무척추동물들을, 15억년 묵은 암몬 조개들을, 그리고 맥주병들을, 비행기의 파편들을, 그리고 권총들을, 나무껍질처럼 하얗게 탈색된 뼈다귀들을, 거대한 쓰레기 처리장처럼 흥미 진진한 해저를 노출한다. 초고감도 필름. 순수 생물학. 파도는 지구의 표피를 걷어 내고 기억을 갈아엎고, 시몽 랭브르가 살았던 그 땅을 새롭게 태어나게 한다(완만한 모래 언덕. 그 언덕이 움푹 팬 곳에서 그는 작은 바구니에 담긴 감자칩을 머스터드 소스를 곁들여 쥘리에트와 함께 나눠 먹었더랬다. 소나기가 쏟아질 때 두 사람이 몸을 피했던 솔밭. 그리고 그 바로 뒤의 대숲. 낭창거리는 40미터짜리 대나무들. 그날 미지근한 빗방울들이 잿빛 모래에 구멍을 냈고 냄새들이, 맵싸하고 짭조름한 내음들이 뒤섞였더랬다. 그때 쥘리에트의 입술 색은 자몽색이었다). 그러더니 마침내 파도가 터져 나가며 사방으로 흩어진다. 튀어 오른 물방울들이 휘날린다. 그건 거대한 충돌, 부서짐이다. 그러는 동안 수술대를 둘러싼 침묵이 두터워졌다. 사람들이 기다린다. 누워 있는 육체 위로 눈길들이 엇갈린다. 발가락은 초조하게 꼼지락거리지만 손가락은 인내한다. 하지만 모두 시몽 랭브르의 심장을 정지시키려는 순간 한 템포 쉬어 가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트랙이 다 돌아가자 토마가 이어폰을 제거하고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간다. 다시 묻기. 클램핑할까요?
“클램핑!” - 296

- 시몽의 심장은 수도권으로 이동했고, 그의 간과 폐는 지방의 또 다른 지역들에 도착했다. 그것들은 다른 육신들을 향해 질주했다. 이렇게 뿔뿔이 흩어지고 나면 그녀의 아들의 단일성에서 살아남는 것은 무엇일까? 그만의 특별한 기억과 이렇게 분산된 육체를 어떻게 결부시켜야 할까? 그의 존재, 이 세상에 비추어진 그의 모습, 그의 혼은 또 어떻게 되는 걸까? 이러한 질문들이 부글거리는 기포처럼 그녀 주위를 맴돈다. 그러다가 시몽의 얼굴이 그녀의 눈앞에 나타난다. 말끔하고 온전하다. 그것은 나뉠 수 없는 것이다. 그게 그 아이다. 그녀는 깊은 안도를 느낀다. 밤이 밖에서 석고 사막처럼 불타오른다. - 309

2022. oct.

#살아있는자를수선하기 #마일리스드케랑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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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그리드 누네즈 지음, 공경희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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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작가들의 언어가 녹아들어있다.
정말이지 취향저격인 작가.

너무 좋은데, 설명할 방법이 딱히 없고...
많은 사람들이 읽어봤으면:)

- 일정한 나이가 된 사람에게는 그것이 합리적인 결정일 수 있다고, 완벽한 선택이, 심지어 해결책이 될 수도 있다고, 젊은 사람이 자살하면 실수일 수밖에 없지만 그 경우와는 다르다고.
한번은 나는 짧은 소설 같은 삶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라는 문장으로 내게 충격을 주기도 했어요. - 12

- 죽음을 설명할 수가 없죠. 그리고 사랑은 그보다 나은 대접을 받아야죠. - 51

- 후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야. 지독한 게으름뱅이나 겁쟁이라서 꿈을 가꾸지 못하고 중도 포기했다는 불쾌한 감정을 자주 느꼈어. 하지만 옳은 결정을 했다는 확증이 필요하면, 썼던 글을 보기만 하면 됐지. 과거에는 극렬한 책벌레였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점점 독서에, 특히 소설에 흥미를 잃었어. 아마 매일 보는 현실과 관계있겠지만, 꾸며 낸 문제들이 넘쳐 나는 꾸며 낸 삶을 사는 꾸며 낸 인물들의 사연에 넌더리 나기 시작했지. - 91

- 책을 다시 읽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지요, 처음 읽고 맘에 들었던 책이면 더욱 그렇죠. 그 느낌이 유지되지 않을 가능성이 커요. 어떤 이유에서든 처음처럼 흡족하지 않을 공산이 크죠. 늘 그런 일을 겪는데(나이 들면서 점점 더), 이런 상황을 접하면 그 여파가 너무 심해서 좋아하는 책을 다시 펼치기가 조심스러워지죠.
산문 문체는 예전처럼 좋았고 위트도 여전히 날카롭고, 무엇보다 스토리가 기억보다 훨씬 더 매력적이에요, 그런데 달라진 게 있어요. 두 번째 읽으니 저자에게 호감이 가지 않아요. 심지어 싫은 구석이 있어요. 여성들을 향한 적개심, 전에는 그걸 놓쳤을까, 아니면 내가 잊고 있었을까? - 96

- 하지만 이건 딜레마야, 그렇지 않아? 특권층은 자기 이야기를 쓰면 안 되지. 쓰게 놔두면 백인 제국주의 가부장제가 심화되니까. 그런데 그들이 다른 집단에 대해 쓰는 것도 안돼. 그러면 문화적인 도용이 되니까. - 224

2022. apr.

#친구 #시그리드누네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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