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자를 수선하기
마일리스 드 케랑갈 지음, 정혜용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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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둔지 꽤 지나 먼지가 뽀얗게 앉아 있는 책을 꺼내 읽었는데.
묵직하다.

감정을 절제한 단문 위주의 문장들로 한 청년의 죽음으로 시작해 장기기증을 위한 여정이 폭풍처럼 몰아치는 24시간을 다루고 있다.

여러 등장인물의 시점으로 계속 바뀌지만, 전혀 혼돈스럽지 않은 것은, 아마도 그렇게 흘러가리라는 예상이 가능하기 때문이겠지.

절제된 문장 속에서도 격렬한 감정이 몇차례나 찾아오는데, 삶과 죽음의 그 아슬아슬하고 허무한 경계에 대해 자꾸 생각하게 된다.

조각나는 육신과 새로운 생명의 가능성을 가지고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는 신체의 일부들, 그리고 새로운 첫 심박동을 시작하는 순간들. 이 모든 장면들이 섬세하게 그려졌다.

짧은 글이 아니지만 시작하면 멈출 수 없이 몰입이 된다.

책을 읽는 중에 이 소설이 일인극으로 각색되어 공연되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기회가 된다면 꼭 보고 싶다.

- 레볼은 그런 영상들을 보고 환자의 상태가 어떤지, 앞으로 병세가 어떻게 진전될지를 읽어 낼 수 있다. 그는 그러한 형체들, 얼룩들과 환한 부분들을 알아보고, 유백색의 빛무리들을 해석하고, 그 검은색 흔적들을 판독하고, 기호 설명과 코드들을 해독한다. 그는 비교하고, 확인하고, 다시 검토하고, 철저하게 탐구한다. 그런데 이제 볼 수 있는 건 다 봤다. 끝났다. 시몽 랭브르의 뇌는 파괴되어 가는 중이다. 그의 뇌는 피에 잠겨 있다. - 41

- 마리안도 똑같이 그에게 손을 내민다. 하지만 여기에선 으레 이러는 것인지, 아니면 평범하다고는 하지만 이런 동작이 어떤 의도를, 시몽의 상태가 불러일으킨 배려나 그 밖의 뭔가를 드러내는 것인지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럼에도 아무것도 듣고 싶지 않다.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다. 아무것도, 아직은. <아드님은 살아 있습니다> 이런 확언을 망칠지도 모를 정보는 그 어떤 것도 듣고 싶지 않다. - 62

- 숀과 마리안은 나란히, 어색하게 소파에 앉아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궁금해한다. 그리고 두 개의 주홍색 의자 중 하나에 토마 레미주, 그가 손에 시몽 랭브르의 의료차트를 들고 앉아 있다. 하지만 이 세 명의 인물들이 같은 공간을 공유하고 있고 그 순간에 동일한 시간의 흐름을 타고 있다 하더라도, 지상의 그 무엇도 고통에 잠긴 그 두 존재와, 목적을 품고(그렇다. 목적이 있다.), 그들의 아이의 장기 적출에 대한 동의를 얻어 낼 목적을 품고 그들 앞에 와서 앉은 그 젊은이의 사이보다 더 벌어진 것은 없으리라. - 139

- 그 사람들이 해로운 짓은 하지 않을 거야. 어떤 해로운 짓도 안 할 거야. 마리안의 목소리가 천의 조직에 한차례 걸러지며 들려온다. 그러자 숀이 손을 놓고 그녀를 품에 끌어안는다. 그의 오열은 자연의 숨결의 연장이다. 그가 동의한다. 그래. 이제 그곳으로 돌아가야지. - 181

- 숀과 마리안이 병실에서 나간다. 토마가 거기 문간에서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 두 사람이 입을 벌린다. 말이 나오지 않는다. 말을, 서로 협의한 말을 하고 싶은 모양이다. 토막 두 사람의 말문을 터준다. 하실 말씀이 있으면 제게 하십시오. 그러시라고 제가 여기 있는 거니까요. 숀이 힘들게 소리를 내며 그들의 청을 내놓는다. 들어낼 때, 시몽의 심장, 그때, 시몽에게, 그러니까 정지시킬 때, 심장을, 말해 줘요, 내가, 그 애에게 꼭 말해 줘요, 우리가 있다고, 함께한다고, 우리 모두 그 애를 생각한다고, 우리 모두의 사랑을. 마리아가 뒤를 받는다. 그리고 루와 쥘리에트도요, 그리고 할머니도. 그러더니 다시 숀. 바닷소리, 들려줘요. 그가 토마에게 이어폰과 MP3 플레이어를 내민다 7번 트랙이에요. 맞춰놨어요. 아이가 바닷소리를 듣게요(두 사람의 머릿속에서 두서없이 튀어나오는 생각들). 그러자 토마가 그 의식을 두 사람의 이름으로 완수하겠노라고 다짐한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 199

- 토마가 소독해 뒀던 이어폰을 호주머니에서 꺼내어 시몽의 귀에 끼워 주고 MP3 플레이어를 누른다. 트랙 7. 그러자 마지막 파도가 수평선에 만들어지더니 절벽을 향해 나아간다. 파도가 솟구친다. 하늘 전체를 쉽쓸 기세다. 만들어지고 허물어지는 그 변모 속에서 물질의 혼돈과 회오리의 완벽함을 펼쳐 보인다. 대양의 밑바닥을 긁어 내고 퇴적물을 뒤흔든다. 화석들을 드러내고 묻혀 있던 궤짝들을 뒤엎는다. 시간에 두께를 더하는 무척추동물들을, 15억년 묵은 암몬 조개들을, 그리고 맥주병들을, 비행기의 파편들을, 그리고 권총들을, 나무껍질처럼 하얗게 탈색된 뼈다귀들을, 거대한 쓰레기 처리장처럼 흥미 진진한 해저를 노출한다. 초고감도 필름. 순수 생물학. 파도는 지구의 표피를 걷어 내고 기억을 갈아엎고, 시몽 랭브르가 살았던 그 땅을 새롭게 태어나게 한다(완만한 모래 언덕. 그 언덕이 움푹 팬 곳에서 그는 작은 바구니에 담긴 감자칩을 머스터드 소스를 곁들여 쥘리에트와 함께 나눠 먹었더랬다. 소나기가 쏟아질 때 두 사람이 몸을 피했던 솔밭. 그리고 그 바로 뒤의 대숲. 낭창거리는 40미터짜리 대나무들. 그날 미지근한 빗방울들이 잿빛 모래에 구멍을 냈고 냄새들이, 맵싸하고 짭조름한 내음들이 뒤섞였더랬다. 그때 쥘리에트의 입술 색은 자몽색이었다). 그러더니 마침내 파도가 터져 나가며 사방으로 흩어진다. 튀어 오른 물방울들이 휘날린다. 그건 거대한 충돌, 부서짐이다. 그러는 동안 수술대를 둘러싼 침묵이 두터워졌다. 사람들이 기다린다. 누워 있는 육체 위로 눈길들이 엇갈린다. 발가락은 초조하게 꼼지락거리지만 손가락은 인내한다. 하지만 모두 시몽 랭브르의 심장을 정지시키려는 순간 한 템포 쉬어 가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트랙이 다 돌아가자 토마가 이어폰을 제거하고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간다. 다시 묻기. 클램핑할까요?
“클램핑!” - 296

- 시몽의 심장은 수도권으로 이동했고, 그의 간과 폐는 지방의 또 다른 지역들에 도착했다. 그것들은 다른 육신들을 향해 질주했다. 이렇게 뿔뿔이 흩어지고 나면 그녀의 아들의 단일성에서 살아남는 것은 무엇일까? 그만의 특별한 기억과 이렇게 분산된 육체를 어떻게 결부시켜야 할까? 그의 존재, 이 세상에 비추어진 그의 모습, 그의 혼은 또 어떻게 되는 걸까? 이러한 질문들이 부글거리는 기포처럼 그녀 주위를 맴돈다. 그러다가 시몽의 얼굴이 그녀의 눈앞에 나타난다. 말끔하고 온전하다. 그것은 나뉠 수 없는 것이다. 그게 그 아이다. 그녀는 깊은 안도를 느낀다. 밤이 밖에서 석고 사막처럼 불타오른다. - 309

2022. oct.

#살아있는자를수선하기 #마일리스드케랑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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