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리언이라는 인물을 보면 우리 주변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는 그다지 유별나다고는 할 수 없는 캐릭터.
분란과 불안을 생산하는 사람.
관계에 있어 우위를 점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자들, 그런 관계는 역사와 깊이를 감안하더라도 인간관계에서 빼는 것이 현명한 일이다.

클라라의 눈부신 재능에 질투의 늪에 빠져가는 피터의 모습은 이미 처음부터 어느 정도 예견되었던 일.

아니와 장기의 관계에도 변화가...
이 때만 해도 상당히 응원했었는데...(최근작까지 다 읽은 상태)

마을로 귀환한 올리비에도 마을에 적응 중.

정말 사건사고 투성이인 마을아닌가.
스리 파인스의 사람들은 여전히 정겹고, 그 와중에 살인 사건은 계속 일어나고. ㅋ

여전한 루스. 그리고 루스의 로사. 이 이야기 속 멋진 동화.

- 관찮아fine. 클라라가 말했다.
개판 치고fuck up 위태롭고insecure 전전긍긍하며neurotic 자기중심적egotistical인 상태? 가브리가 물었다.
잘 아네. - 13

- 빛이 환한 곳은 그림자도 짙은 법 - 괴테

- 안녕, 머저리. 루스 자도가 가느다란 팔을 장 기 보부아르의 팔에 끼면서 말했다. 어떻게 지내는지 말해 봐.
그것은 명령이었다. 루스 말을 무시할 수 있는 불굴의 정신을 소유한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어떻게 지내는지 루스가 안부를 챙기는 사람도 그때까지 거의 없었다.
잘 지냅니다.
헛소리. 나이 든 시인이 말했다. 아주 형편없어 보이는데, 수척하고 창백해. 주름도 자글자글하고.
본인 얘기를 하시네요, 주정뱅이 할머니.
루스 자도가 낄낄거렸다. 사실이야. 당신은 못돼 먹은 늙은 여자처럼 보여. 그리고 그건 칭찬 같지만 아니야.
보부아르는 미소 지었다. 그는 사실 루스를 다시 보길 고대했었다. 지팡이에 의지하고 있는 키 크고 마르고 연로한 여인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짧게 자른 루스의 머리칼은 희고 가늘어서 두상이 그대로 드러났다. 보부아르에게는 그게 온당하게 보였다. 루스의 머릿속에 있는 것 중 드러나지 않거나 표현되지 않는 건 없었다. 그녀가 감추는 건 마음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녀의 시를 통해 나타났다. 어쨌든 보부아르는 어떻게 루스 자도가 시로 총독상을 수상했는지 추측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중에 그가 이해할 수 있는 시는 한 편도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루스는 직접 만나면 훨씬 해독하기 쉬웠다. - 46

- 당신이 재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요. 가브리가 말했다. 올 때마다 스리 파인스에 시체가 있으니.
날 만나고 싶어서 당신이 시체들을 준비한 것 같은데요. 가브리와 다정하게 악수하며 보부아르가 말했다. - 69

- 그 여자, 감정 뱀파이어 같은데. 마침내 머나가 입을 열었다.
뭐?
상담하면서 그런 사람을 어지간히 많이 만났어. 말라비틀어질 때까지 다른 사람을 빨아먹어. 우린 그런 사람들을 알아. 상대하고 나면 진이 다 빠져서 나가떨어지지. 뭐 딱히 이유도 없이.
클라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스리 파인스에는 그런 사람이 없었지만 그녀는 몇 명 알고 있었다. 루스조차 그런 유형은 아니었다. 그녀는 오직 진열장의 술만 빨아먹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클라라는, 그 미치광이 늙은 시인을 만난 뒤에는 생기를 되찾게되고 기운이 났다.
그러나 자신에게서 생기만 쭉 빨아먹을 뿐인 이들도 있었다.
릴리언이 그중 하나였다. - 136

- 보부아르 경위가 그녀를 쏘아봤다. 그의 경험상 어리석은 사람들은 결코 무해하지 않았다. 그들이 최악이었다. 어리석음은 분노와 탐욕만큼 많은 범죄를 일으키는 사유였다. - 328

- 지난 가을 남쪽으로 날아간 그녀의 오리, 로사. 그리고 다른 새들과 함께 돌아오지 않았다. 둥지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루스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 398

- 스리 파인스. 클라라가 말했다. 어쩌면 형사님들이 스리 파인스인지도 모르겠네요.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 주는.
확실히 엉망진창으로 만들었지. 루스가 말했다. - 486

2022. sep.

#빛의눈속임 #루이즈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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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도시의 사랑법
박상영 지음 / 창비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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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 당시 구입해놓고 좀 늦게 읽었다.
그 즈음의 독서 무드와 왜인지 자꾸 엇나가서였는데,
오히려 묵혀두길 잘했다 싶게.
딱 지금 읽으니 좋았다.

무겁거나 쳐지지않는 산뜻한 이야기다.
요즘 한국문학의 지나친 불안과 고립감이 덜 드러나서 마음이 편했달까.
물론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인물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그 마다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 그리고 우리 대화는 언제나 하나의 철학적 질문으로 끝났다.
우리 왜 이렇게 태어났냐.
무르지 나도. - 46, 재회

- 한참 동안 의미 없는 메시지를 주고받다보면 갑자기 바람빠진 풍선처럼 모든 게 다 부질없어지곤 했는데, 그가 나에게 (어떤 의미에서든) 관심이 있는 게 아니라 단지 벽에 대고서라도 무슨 얘기든 털어놓고 싶을 만큼 외로운 사람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나는 그런 외로운 마음의 온도를, 냄새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때의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 90, 우럭 한점 우주의 맛

- 너 유치원 다닐 때였나. 한번은 너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어. 애가 유치원이 끝난 지 한참이나 지났는데 집에 오지 않더라. 전화해보니 유치원 버스에도 타지 않았다고 하고. 친구 집에 간다고 했대. 난리가 났지. 신발만 대충 꿰어 신고 나와서 유치원에서부터 허겁지겁 너를 찾는데 멀리 네 뒷모습이 보였어. 나는 가만히 네 뒤를 따라갔다. 네가 두발쯤 걷다 자꾸만 멈춰 서기에 뭐 하나 봤더니, 거리에 있는 모든 가게 앞에 서서 일일이 들여다보고 관찰하고, 때로는 만져도 보고 그러고 있더라.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로. 그 모습을 뒤에서 보는데 화가 나는 게 아니라, 덜컥 무섭더구나. 네가 더이상 내가 아는 아이가 아니라는 생각에. 네가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네가 걷고 싶은 길을 너의 속도로 걷는 게, 너만의 세계를 가진 아이라는 게 그렇게 섭섭하고 무서웠다. - 175, 우럭 한점 우주의 맛

- 그러거나 말거나, 너였으니까.
그래서나 그러나 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그러거나 말거나, 너였다고. 나는 그 말이 좋아서 계속 입 안에 물을 머금듯이 되뇌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 228, 대도시의 사랑법

- 사랑이라는 감정이, 말이 얼마나 부서지기 쉬운지 너무나 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시금 주먹을 꽉 준 채 이 사소한 온기를 껴안을 수밖에 없다. 내 삶을, 세상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단지 나로서 살아가기 위해. 오롯이 나로서 이 삶을 살아내기 위해. - 작가의 말

2022. sep.

#대도시의사랑법 #박상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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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없는 나의 기억들
리베카 솔닛 지음, 김명남 옮김 / 창비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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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카 솔닛의 회고록 성격의 에세이.
그간 저작들의 바탕이 되는 경험들.

매번 솔닛의 책을 읽고 말하는 것 같지만,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문장은 아니다. 아무래도 조금 구불구불 돌아가는 듯한 스타일이랄까.
걷기에 심취하는 사람의 글다운 구석이 있다.

그러나 빼놓고 읽을 수는 없는 작가.

뮤즈가 아닌 작가가 되고자 하는 사람, 미드센추리 여성혐오자들의 문화적 배경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 명료한 글을 쓸수도 있으나 구불구불 오솔길 같은 글이 쓰고 싶은 사람.

읽다보니 내가 왜 윌리엄 버로스를 싫어했는지 명백하게 드러나는 에피소드도 있었다. ㅡ.,ㅡ


- 포르투갈 시인 페르난두 페소아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길에 돌이 있다고? 나는 그것을 일일이 주워 간직한다. 그랬다가 언젠가 성을 지을 것이다.” 이 책은 내가 걸려 넘어진 돌들로 지은 성입니다. - 9

- 하루가 태어나고 죽는 무렵에, 오팔색 하늘은 가끔 뭐라고 묘사할 언어가 없는 색깔이 된다. 황금색이 녹색을 거치지 않은 채 어느새 파란색으로 변한다. 타오르듯이 따스한 색깔은 정확히 살구색도 진홍색도 금색도 아니다. 빛이 시시각각 달라지면서 하늘에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파란색들이 나타나서, 해가 있는 지점부터 저 멀리 다른 색들이 나타나는 지점까지 서서히 옅어지면서 이어진다. 우리가 잠시라도 한눈을 팔았다가는 어떤 색을 놓치게 되지만, 묘사할 언어가 없는 그 색 역시 다른 색으로, 또다른 색으로 변한다. 색깔들의 이름은 가끔 거기 속하지 않는 것들까지 담고 있는 철창과도 같다. 이것은 언어 전반에도, 이를테면 여자, 남자, 아이, 어른, 안전함, 강함, 자유로움, 진실됨, 검은색, 흰색, 부유함, 가난함 같은 말들에도 종종 적용되는 이야기다. 우리에게는 언어가 필요하다. 하지만 언어란 늘 넘치고 깨지기 마련인 그릇들이라는 점을 알고 써야 한다. 너머에는 항상 무언가가 더 있다. - 19

- 젠더폭력의 트라우마를 논할 때, 사람들은 그것이 단 한번의 끔찍하고 예외적인 사건이나 관계였던 것처럼 묘사한다. 마치 별안간 물에 빠지기라도 한 것처럼 묘사한다. 하지만 사실은 우리가 평생 물속을 헤엄쳐왔다면 어떨까? 뭍이라고는 눈 씻고 봐도 없었다면 어떨까? - 67

- 그것은 일종의 집단적 가스라이팅이었다. 주변 사람 누구도 전쟁으로 인식하지 않는 전쟁을 치르며 사는 것은... ‘미칠 노릇이었다’하고 말할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그 표현은 쓰고 싶지 않다. 사람들이 여자의 증언 능력과 여자가 증언하는 현실을 깍아내릴 의도로 그를 미친 여자로 몰아붙이는 경우가 하도 많으니까. 게다가 이 경우에 미치겠다는 말은 견디기 힘든 괴로움을 완곡하게 표현한 말일 때가 많다. 그런 뜻이라면 나는 미칠 것 같지 않았다. 다만 참기 힘들 만큼 불안했고, 골몰했고, 분개했고, 지쳤다. - 72

- 분노가 이런 사업의 추진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평생 활동가들과 함께한 경험으로 내가 확신하는바 대개 활동을 추진하는 힘은 사랑이다. 사유화된 우리 사회가 사람들의 트라우마에 대해서 내놓는 치료법은 개인적 차원의 것일 때가 많지만, 우리는 종종 타인을 위해서, 타인과 함께, 우리를 해친 환경을 바꾸는 일을 함으로써 연대와 힘을 경험할 수 있고, 그럼으로써 트라우마의 핵심인 고립감과 무력감을 극복할 수 있다. - 283

2022. oct.

#세상에없는나의기억들 #리베카솔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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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언어를 위해서 쓴다 - 융합과 횡단의 글쓰기 정희진의 글쓰기 5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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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의 글쓰기 다섯번째.
시리즈를 다 읽어야 하냐 묻는다면 1,2,3권을 조금 더 추천한다.
시간의 여유가 있다면 물론 다 읽어보면 좋은 글들이다.

- 대립적인 상황이 아닌데 대립으로 문제를 풀려니 해결될 리 없다. 그런 점에서 최근 한국 사회의 특징이 된 엉뚱한 대립 구도나 이분법은 큰 문제이고, 이 문제에 약자들이 대응하는 양상이 우려스럽다. 특히 약자는 이러한 이분법적 상황이 절대적으로 불리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기존의 언어는 약자의 입장을 대변할 수 없기 때문이다. - 13

- 독자들에게 새로운 여정journey, 변화metamorphosis, 프레임 조정framing, 변환transform, 횡단transverse, 문턱넘어서기threshold, 경계선 안팎 넘나들기bordering, 협상tuning, 직면facing, 온몸의 재구성re-membering, 거리낌 없는 수용embracing, 매사를 다시 생각하기rethinking, 자신에게 다시 돌아오기re-flection의 과정이 되길 바란다. - 24

- 니체, 데리다, 버틀러를 ‘잇는’ 현대 철학의 가장 큰 성과는 인간의 본질이란 것이 없음을 밝힌 것이다. 인간은 단지 자기 행위로서 구성 중인 존재다. 사는 대로 생각하자. 그것이 나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든 변화할 수 있다. - 33

- 궁극적으로 자아는 극복되어야 할 개념이다. 즉 ‘내가 누구다’라는 자의식은 타인을 부정하거나 외부와 경계를 설정함으로써 만들어진 골치 아픈 문명의 산물이다. 외로움도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는 데서 온다. 안정적인 자아, 자율적이고 합리적인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생은 인과 관계로 설명할 수 없다. 연속적이지도 않고 일관적이지도 않다. 실존주의와 불교는 말한다. 고통은 ‘내 안의 어린아이’ 때문이 아니다. 세상은 본디 고해다. - 72

- 문해력은 자신의 가치관과 무지에 대한 자기 인식의 문제다. 그러므로 문해력 향상의 첫걸음은 에포케이다. ‘나는 모른다’는 자세가 공부의 시작이다.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이해력부터 의심해야 한다. 물론 우리 몸에는 이미 많은 의미들이 축적되어 있기 때문에 자신이 무지하다고 가정하는 데는 굉장한 노력이 필요하다. 공부가 중노동인 이유다. - 98

- 백인과 유색인종,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관계가 대칭을 이루지 않는 것처럼 남성과 여성도 대칭적이지 않다. 단지 가부장제가 인간을 남녀로 구분했기 때문에 여성이 인구의 반이라는 현실이 만들어졌을 뿐이다. 타자 중에서 가장 큰 집단이기에 대칭적으로 보이기 쉽다. - 182

2022. sep.

#새로운언어를위해서쓴다 #융합과횡단의글쓰기 #정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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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시체를 묻어라 아르망 가마슈 경감 시리즈
루이즈 페니 지음, 김연우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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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난 사건을 겪은 후 트라우마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는 가마슈의 팀.
올리비에를 여전히 믿고 있는 가브리의 편지를 매일 받는 와중에, 휴양차 지내는 곳에서는 또 다른 시체가 발견된다.

가마슈 시리즈가 전형적인 코지 미스테리가 아니구나 확실하게 각인시켜주는 이야기.
모렝 형사와 24시간 통화하는 장면이 어찌나 드라마틱하고 눈앞에 선하게 펼쳐지던지...

루스 자도는 여전히 최고의 캐릭터이고, 너무나도 모범적인 노인이라 본받고 싶다. :)
보부아르와 티격태격하며 대화할 때도 그랬지만, 결정적인 절망속에 있을 때 곁에 있어주는 든든한 사람.

- 친애하는 아르망
기운을 좀 차렸기를 바라요. 우리 모두 경감님 이야기를 자주 해요. 또 당신이 조만간 찾아 주길 바라고 있어요. 루스가 당신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면서 렌 마리를 데려오래요. 하지만 당신에게 안부 전하라고 했어요. 꺼지라는 말도 했지만. - 31

- “나는 장님인가 보네, 못 찾겠더군.”
가마슈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는 모르지만 지도를 만들 때 빠졌나 보더군요.”
“그럼, 사람들은 그 마을을 어떻게 찾아가는 건가?”
“모르겠습니다. 그냥 나타나는가 보죠.”
“보는 눈이 없었으나 이제는 보인다?” 에밀이 인용했다. “자네같이 길 잃은 자에게만 나타나는 모양이지?” - 39

- 퀘벡 시는 마치 이제야 영국계들이 내내 거기 있었다는 사실에 눈을 뜬 것처럼 보였다.
“어떻게 우리가 있다는 걸 여태 모를 수가 있지?” 엘리자베스 어깨 너머로 기사를 읽고 있던 위니가 말했다.
엘리자베스도 같은 아픔을 느꼈다. 용의자나 위협적인 존재로 비방을 당하는 일, 심지어 적으로 여겨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에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아예 존재조차 인식되지 않아 왔다는 데에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 218

- “간신히 비스트로에 왔군.” 그녀는 클라라를 아래위로 훑어보며 콧방귀를 뀌었다. “품위가 죽으러 오는 곳이지.”
“품위뿐이 아니죠.” 보부아르가 대꾸했다.
루스가 껄껄 웃었다. “시체를 또 찾았나?”
“전 시체를 찾으러 다니진 않습니다. 일 말고도 제 삶이 있거든요.”
“이런, 벌써 지겹군.” 시인의 말이었다. “들을 만한 말을 좀 해 봐.”
보부아르는 너그러이 참겠다는 듯 루스를 보며 침묵을 지켰다.
”그럴 줄 알았지.“ 그녀는 그의 맥주를 집어 들더니 벌컥벌컥 마셨다.
”이게 무슨 술이야. 좀 제대로 된 걸 마실 수 없어? 하보크! 이 양반한테 스카치를 갖다 줘.“
”망할 노인네.“ 보부아르가 중얼거렸다.
”입은 살았군. 아주 좋아.“ - 234

- 그러나 에밀은 다른 것도 알고 있었다. 가마슈가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었다. 그 누구도 그럴 수 없었다. - 301

- 가마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자신의 일을 그토록 매혹적이고 또한 어렵게 만드는 점이었다. 어떻게 한 사람이 친절한 동시에 잔인하고, 깊은 연민을 보여 주는 동시에 그렇게 끔찍할 수 있는지. 살인자를 찾아내는 일은 물적 증거보다 인간을 이해하는 문제였다. 상호 모순적이고 때로는 자신의 본 모습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 340

- 그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다음 주 일요일이 장례식이야. 참석할거야.“
그녀가 입을 열기 전에 두 사람은 몇 걸음 더 나아갔다. ”성당에 가겠다고?“
”아니. 장례 행렬에 설 거야.“
그녀는 그의 옆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단호한 얼굴, 꾹 다문 입술, 뇌졸중이었다는 흔적은 말아 쥔 오른손뿐이었다. 피곤하거나 무리했을 때 나타나는 가벼운 떨림과.
”내가 뭘 하면 되는지 말해 줘.“
”옆에 있어 줘.“
”언제나 옆에 있어. 몽 쾨르.“
그는 걸음을 멈추고 그녀에게 미소 지었다. 얼굴에는 멍이 들어 있었고 왼쪽 눈썹 위로 붕대가 감겨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살아 있었다. - 520

- 그는 2킬로미터를 걷는 동안 마지막에만 조금 절뚝였을 뿐이었다. 거수경례와 예포 의식이 끝날 때까지 얼굴은 정면을 향했고 눈빛은 단호했다. 그는 그때가 되어서야 눈을 꼭 감고 고통에 찬 얼굴을 하늘로 들었다. 더 이상 가두어 둘 수 없는 개인적인 고통의 순간이었다. 오른손을 꼭 쥔 채.
그것은 비탄의 상징이 되었다. 그 이미지는 모든 뉴스 프로그램에 사용되었고 모든 잡지의 표지를 장식했다. - 521

- 영웅적.
가마슈는 앙리를 뒤에 달고 천천히 가파른 계단을 올라갔다. 글쎄, 가마슈는 에밀이 모르는 사실 하나를 알았다. 그는 동영상을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 짐작이 갔다. 왜 만들었는지도 알았다. 자신을 나쁘게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훌륭하게 보이게 하려는 의도였다. 너무 좋게. 너무도 좋게 만들어서 그를 지금 사로잡는 이 기분을 맛보라고. 사기꾼, 기만자가 된 기분, 자신을 깎아내리기 위한 추켜세움이었다. 네 명의 경찰청 형사가 죽었는데 가마슈는 영웅적이었다.
이 일을 꾸민 사람이 누구든 자신을 잘 알았다. 그리고 자신에게서 어떤 대가를 이끌어 내야 할지 알고 있었다.
수치심. - 526

2022. aug.

#네시체를묻어라 #루이즈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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