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없는 나의 기억들
리베카 솔닛 지음, 김명남 옮김 / 창비 / 2022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리베카 솔닛의 회고록 성격의 에세이.
그간 저작들의 바탕이 되는 경험들.

매번 솔닛의 책을 읽고 말하는 것 같지만,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문장은 아니다. 아무래도 조금 구불구불 돌아가는 듯한 스타일이랄까.
걷기에 심취하는 사람의 글다운 구석이 있다.

그러나 빼놓고 읽을 수는 없는 작가.

뮤즈가 아닌 작가가 되고자 하는 사람, 미드센추리 여성혐오자들의 문화적 배경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 명료한 글을 쓸수도 있으나 구불구불 오솔길 같은 글이 쓰고 싶은 사람.

읽다보니 내가 왜 윌리엄 버로스를 싫어했는지 명백하게 드러나는 에피소드도 있었다. ㅡ.,ㅡ


- 포르투갈 시인 페르난두 페소아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길에 돌이 있다고? 나는 그것을 일일이 주워 간직한다. 그랬다가 언젠가 성을 지을 것이다.” 이 책은 내가 걸려 넘어진 돌들로 지은 성입니다. - 9

- 하루가 태어나고 죽는 무렵에, 오팔색 하늘은 가끔 뭐라고 묘사할 언어가 없는 색깔이 된다. 황금색이 녹색을 거치지 않은 채 어느새 파란색으로 변한다. 타오르듯이 따스한 색깔은 정확히 살구색도 진홍색도 금색도 아니다. 빛이 시시각각 달라지면서 하늘에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파란색들이 나타나서, 해가 있는 지점부터 저 멀리 다른 색들이 나타나는 지점까지 서서히 옅어지면서 이어진다. 우리가 잠시라도 한눈을 팔았다가는 어떤 색을 놓치게 되지만, 묘사할 언어가 없는 그 색 역시 다른 색으로, 또다른 색으로 변한다. 색깔들의 이름은 가끔 거기 속하지 않는 것들까지 담고 있는 철창과도 같다. 이것은 언어 전반에도, 이를테면 여자, 남자, 아이, 어른, 안전함, 강함, 자유로움, 진실됨, 검은색, 흰색, 부유함, 가난함 같은 말들에도 종종 적용되는 이야기다. 우리에게는 언어가 필요하다. 하지만 언어란 늘 넘치고 깨지기 마련인 그릇들이라는 점을 알고 써야 한다. 너머에는 항상 무언가가 더 있다. - 19

- 젠더폭력의 트라우마를 논할 때, 사람들은 그것이 단 한번의 끔찍하고 예외적인 사건이나 관계였던 것처럼 묘사한다. 마치 별안간 물에 빠지기라도 한 것처럼 묘사한다. 하지만 사실은 우리가 평생 물속을 헤엄쳐왔다면 어떨까? 뭍이라고는 눈 씻고 봐도 없었다면 어떨까? - 67

- 그것은 일종의 집단적 가스라이팅이었다. 주변 사람 누구도 전쟁으로 인식하지 않는 전쟁을 치르며 사는 것은... ‘미칠 노릇이었다’하고 말할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그 표현은 쓰고 싶지 않다. 사람들이 여자의 증언 능력과 여자가 증언하는 현실을 깍아내릴 의도로 그를 미친 여자로 몰아붙이는 경우가 하도 많으니까. 게다가 이 경우에 미치겠다는 말은 견디기 힘든 괴로움을 완곡하게 표현한 말일 때가 많다. 그런 뜻이라면 나는 미칠 것 같지 않았다. 다만 참기 힘들 만큼 불안했고, 골몰했고, 분개했고, 지쳤다. - 72

- 분노가 이런 사업의 추진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평생 활동가들과 함께한 경험으로 내가 확신하는바 대개 활동을 추진하는 힘은 사랑이다. 사유화된 우리 사회가 사람들의 트라우마에 대해서 내놓는 치료법은 개인적 차원의 것일 때가 많지만, 우리는 종종 타인을 위해서, 타인과 함께, 우리를 해친 환경을 바꾸는 일을 함으로써 연대와 힘을 경험할 수 있고, 그럼으로써 트라우마의 핵심인 고립감과 무력감을 극복할 수 있다. - 283

2022. oct.

#세상에없는나의기억들 #리베카솔닛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