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판으로 구하기 어려울 수록 ‘그래서 대체 무슨 이야긴데!’라는 조바심이 난다. 몇번이나 재고없음으로 취소되는 중고 거래, 출판사에 문의까지 했던, 하여튼 안달복달하며 구한 책이다.
1권과 2권이 각각 구판 신판으로 구해져서 만족감은 다 채워지진 않았다. 그 점은 매우 유감이다.
그러나 이야기는 기대 만큼 흥미롭다.
세대간의 몰이해, 타인종에 대한 몰이해, 종교에 대한 몰이해, 아니 큰 맥락에서 인간에 대한 몰이해를 이야기하고, 영국이라는 잇몸에 뿌리 박힌 다양한 하얀 이빨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두 가족의 연대기에 한 가족이 더해지며, 세 가족의 구성원들이 복작대는 이야기므로, 어쩔수 없이 다수의 캐릭터들이 등장하지만, 대표성이 뚜렷해서 그다지 복잡하다고는 할수 없다.
가장 가까운 감정을 느낀 인물은 3세대라 할 수 있는 ‘아이라’다. 이민자,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이 자라나는 과정을 볼 수 있는 반면, 밀라트는 근본주의자화 되어가는 과정은 퇴행에 가깝다고 느껴졌다. 종교로의 귀의라기 보단 자신이 떠나온 세계의 구습으로의 퇴행.
등장인물 그 누구의 삶도 이해는 할 수 있으나, 그 누구의 삶도 적극적으로 응원할 수는 없는 묘한 이야기다.
삶은 누구에게도 녹록치않고 끊임없이 불만족을 생성하는 늪 같았다. 문제에 문제, 고민에 고민을 더하는.
어찌보면 시트콤같고, 어찌보면 비극같고, 우화같은 이야기의 결말이 조금 엉성하다고 느끼긴 했지만, 지금의 유럽을 바라보면, 문제작으로 꼽지 않을 이유가 없다.
하지만 그런 진실들에 대해서 항상 걱정만 하고 있을 수는 없어. 나는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진실들에 대해 신경 써야 해. - 130
직선이 아니야. 인생은 직선이 아니라고. 난 지금 손금을 읽는 것이 아니야. 인생은 돌고 도는 원이고 다른 세대 사람들이 우리에게 말을 걸어 와. 그래서 운명을 읽을 수가 없는 거야. 인생은 경험해야 하는 거야. - 187
사람들은 때로 치아의 중요성을 잊어버리지. 그러나 우리는 규칙적으로 새 이빨이 나는 하등동물과는 다르단다. 우리는 포유류야, 알지? 그리고 포유류는 치아에 관해서는 두 번의 기회만 있을 뿐이야. 설탕 더 줄까?
두 번의 기회뿐임을 유념하며 아이들은 설탕을 거절했다. - 268
뭐가 문제니? 도대체 뭘 입고 있는 거야? 어디 숨이나 쉬겠니? 아이리, 얘야, 저는 정상이야. 넌 그저 신에게 정직한 보든 가의 체격을 물려받았을 뿐이야. 네가 정상인 것을 모르겠니?
그러나 아이리는 자신이 정상이라는 걸 몰랐다. 거대한 거울인 영국이 있고 그 거울에 비치지 않는 아이리가 있었다. 낯선 나라에 있는 낯선 사람. - 11
물어봐도 될까? 너희 아버님은...... 직업이......?
조이스는 이 아이의 부모가 무엇을 하고 사는지, 무엇을 했는지 궁금했다. 돌연변이 꽃을 처음 발견했을 때 어디서 변종이 생겼는지를 알고 싶어 하듯. 하지만 잘못된 질문이었다. 문제는 부모가 아니었다. 한 세대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 세기의 문제였다. 새싹이 아니라 덤불. - 97
영국인들은 책임질 일 하나를 포기하고 다른 일을 맡는 데 선수다. 그러나 이들은 또한 자신들이 양심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싶어한다. - 147
이 나라에서 20년을 사는 동안 밴 영국식 억양으로 사마드가 씁쓸하게 말했다.
정말 모르겠다. 요즘 나는 이 나라에 들어온다는 건 악마와 계약을 맺는 것이라는 느낌이 드는구나. 검사대에 여권을 내밀고, 도장을 받고, 돈을 벌려고 일을 시작하고...... 그러나 돌아가려 하지! 여기 있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니? 이 춥고 습하고 비참한 곳에. 형편없는 음식에다 끔찍한 신문...... 누가 계속 있고 싶겠니? 그렇지만 악마와 계약을 했고..... 이것이 사람들을 길들여 놓고 어느 날 문득 이미 돌아가기는 틀렸다는 것을 깨닫지. 자식들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하고, 자신은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오. 확실히 그렇지 않아요.
그러고 나면 소속에 대한 생각 자체를 단념하게 되는 거다. 갑자기 이것, 이 소속감이라는 것이 어떤 더럽고 끝나지 않을 거짓말처럼 보이고...... 난 출생지란 우연히 결정된 것이고 모든 것이 하나의 우연이라는 것을 믿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이렇게 믿는다면 어디로 가겠니? 무얼 하겠지? 중요한 게 뭐가 있겠니?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사마드가 이 지옥세계를 묘사했을 때 아이리는 그 우연의 땅이 자신에게는 낙원으로 들린다는 것을 깨닫고 부끄러웠다. 그것이 자유처럼 들렸던 것이다.
내 말 알겠지, 아이리? 네가 이해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사마드가 진정으로 의미한 것은, ‘우리는 같은 언어로 말하지?’, ‘우리는 같은 곳에서 왔지?’. ‘우리는 같지?’ 하는 것이었다.
아이리는 사마드의 손을 꽉 누르며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물을 막으려면 그가 듣기 원하는 말 외에는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예, 예, 예, 예.” - 218
이런 과장된 이야기 또는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과거는 항상 긴장의 연속이고 미래는 완벽하다는 신화, 그 사악한 거짓을 재촉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그리고 아치가 알고 있는 것처럼 과거와 미래는 그렇지 않다. 결코 그런 적이 없다. - 410
2018. jun / se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