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타일
김금희 지음 / 창비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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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늘 좋은 김금희 작가의 크리스마스 단편들.

은하의 밤, 데이이브닝나이트, 당신 개 좀 안아봐도 될까요가 좋았다.

- 이후에 어떤 인생을 살아야 할지는 모르겠으나 발병 이전처럼 살지는 않을 것이며 그런 삶에는 오로지 고독, 크기를 잴 수 없이 크고 깊은 고독만이 필요하리라는 결론이었다. 그것은 어느 흐린 날 거리를 걷다가 낙엽이 떨어져내리는 가로수 밑으 지나거나, 어느 늦은 시간 택시를 타고 강변북로를 달리다 한강에 어른대는 불빛들을 애잔하게 바라볼 때와는 차원이 다른 고독이었다. 설명하자면 아주 무섭도록 자기 삶 속으로 포섭된 고독이었다. 참여자 없는 연극이자 듣는 이 없는 아리아, 만남이 불발된 채 혼자서 나누는 열렬한 악수 같은 것. - 13, 은하의 밤

- 영화를 보다 밖으로 나와도 해는 중천이었고, 그렇게 손잡고 가는 길에 할머니는 인생에 필요한 경계랄까 교훈이랄까 하는 것들을 진지하게 알려주기도 했다. 그중 기억에 남는 말은 “너무 상한 사람 곁에는 있지 말라”는 것이었다. 꿈을 잃지 마라, 거짓말하지 않는 사람이 돼라, 근면하라처럼 흔한 당부가 아니라서 인생의 아주 비밀스러운 경계를 품은 듯 느껴졌다. - 69, 데이, 이브닝, 나이트

- 타당한 지적을 일시적 히스테리 정도로 폄훼하지 마. - 95, 데이, 이브닝, 나이트

- 세미의 고민은 더이상 설기가 곁에 없다는 것에도 있었지만 자신이 지금 이 상실 안에 안주하고 싶다는 것에도 있었다. 화가 났다가 고통스러웠다가 그리움이 들었다가 나중에는 그 마음을 놓아버리면서 불행감 자체에 기쁘게 투항하는 듯한 느낌. 그렇게 상처에 갇힌 사람으로는 살고 싶지 않았다. - 232, 당신 개 좀 안아봐도 될까요

2022. dec.

#크리스마스타일 #김금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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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저 노트, 여왕의 비밀 수사 일지 첩혈쌍녀
소피아 베넷 지음, 김원희 옮김 / 북스피어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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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인의 지극한 여왕 사랑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윈저 노트.

여왕과 젊은 여성 수행원의 콤비로 이런저런 사건을 남몰래 해결해왔다는 픽션인데, 꽤 그럴싸하고 여왕의 인간적인 면모를 공들여 묘사한 이야기다.

현명하고 노련한 여왕과 그의 수족으로 단서를 추적하는 로지와 대비해 수석수행비서나 다른 왕족이나 수사기관의 장인 남자들은 두 여성의 놀라운 활약을 눈치조차 채지 못한다는게 여왕의 수사의 포인트.
그래서 리얼리티는 살았지만 극적재미는 조금 줄어들기도.

제국주의에 삐딱한 아시아의 독자로서는 저자가 (왕가에선) 여왕‘만’을 사랑하는 듯 보이는 시선에 조금 너그러워지는 면이 있다.

그리고 찰스는 어지간히도 경멸하는 듯. ㅎㅎ.. 아니 경멸이라기 보다는 자신들의 왕가 이미지에는 미달이라고 여기는 느낌.


- 여왕이 남편을 힐끗 쳐다보았다. “사람들은 곧잘 잊어버리지. 내가 세계 대전을 겪었고, 그 퍼거슨이란 여자애도, 또 당신이 해군에 복무하던 시절도 버텨 낸 사람이라는 걸.” - 28

- 말하자면 험프리스는 머리카락도, 정장도, 정신도, 무미건조한 회색빛이었다. 또한 89세나 된 여왕이야 도무지 현대 사회의 복잡성을 이해할 수 없으리라고 확신하는 사람이었다. 이 남자는 현대 사회를 이룬 수십년의 세월을 여왕이 몸소 겪어 왔기에 어쩌면 자기보다도 더 미묘한 차이를 잘 이해할 지 모른다는 점을 깨닫지 못하는 것 같았다. - 61

- “폐하, 찾으셨습니까?”
“그랬네.” 여왕이 말했다. 그리고 골똘히 생각하며 잠시 펜을 만지작거렸다. “자네가 날 좀 도와줄 수 있을까 해서 말이야.”
“뭐든 말씀해 주십시오......” 로지의 대답은 의도했던 것보다 더 열렬한 목소리로 울려 퍼졌다. 하지만 진심이었다. 보스가 무엇을 원하든 따를 터였다. 로지는 왕실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이런 마음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여왕의 지위 때문이 아니라 여왕이라는 사람 때문이었다. 여왕은 거의 불가능한 과업을 떠맡아 감내하면서도 결코 불평해 본 적 없으며, 대다수 국민이 태어나기 전부터도 그 과업을 훌륭하게 수행해 온 특별한 인간이었다. 사람들은 여왕을 흠모했다. - 70

- 드디어 혼자 남은 여왕은 거실 창밖을 내다보았다. 옅은 파란색 하늘 아래로 착륙장에 선 비행기 한 대가 보였다. 그녀는 몹시 화나고 낙담했다. 몇십 년 전이었다면 자신의 무력함을 탓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았다. 여왕은 경험으로 배웠다. 언제나 옳은 일을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노력은 해 볼 수 있지. - 107

- 그 사람들은 폐하를 믿어야만 해요. 하지만 그러지 않죠. 그분은 아마 세상에서 가장 영향력 강한 여성 중 하나일 텐데도, 허구한 날 남들 말에 잠자코 귀를 기울여야만 한다고요. 저쪽에서는 그분 말씀을 듣지도 않는데. 그래서 미칠 지경이신 거예요. 뭐랄까, 그분은 그렇게 성장한 거죠. 남성 중심주의가 표준이던 시절, 30대밖에 안 된 젊은 여성이 왕위에 올랐으니까요. 참 나, 요즘 사람인 로지 씨도 분명 겪는 일일 테지만, 적어도 우리는 그게 잘못됐다는 걸 알잖아요. 폐하는 자신이 얼마나 유능한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혼자서 깨우쳐야만 했어요. 그리고 그분은 뭔가를 알아채는 데에 일가견이 있으세요. ‘어긋난’ 것을 발견하고 이유를 알아내고 문제를 해결하는일 말이에요. 사실 그 방면에서 천재라고 할 수 있을걸요. 하지만 도움의 손길이 좀 필요하시죠. - 117

- 에일린의 얼굴이 환해졌다. “아, 좋아요! 그 생각을 하니 정말 즐겁네요. 그게 그분 스타일이라서 그래요. 난 그 부분이 제일 마음에 들더라. 당신은 폐하의 명을 받아 미친 듯이 뛰어다니고, 자질구레한 정보를 주워 모으고, 필요하다면 거짓말도 천연덕스럽게 해야 할 거예요. 그러다 드디어 중대한 막판이 닥쳐오면...... 아무 일도 일어난 적이 없는 거죠.“
”그게 무슨 뜻이죠?“
”두고 보면 알아요. 그 순간을 만끽해야 돼요.“ - 119

- ”톰 말로는 험프리스가 전부 다 해결했다더군.“ 필립이 말했다. ”녀석에게 그런 능력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는데.“
”그래, 상당히 놀랐어.“
”놀라 자빠질 일이지. 거 참, 내가 보기엔 누가 그 녀석한테 정보를 떠먹여 준 거라니까.“
”그렇게 생각해?“ 그녀는 얼굴을 찌푸리며 예리한 눈으로 남편을 흘겨보았다.
”그렇고말고. 틀림없이 부하 중 하나겠지. 엄청나게 똑똑한데 승진에서는 밀린 친구. 일은 전부 다 그 친구가 하고 찬사란 찬사는 험프리스 녀석이 한 몸에 받는 거지. 당신은 그런 생각 안 들어?“
”뭐 그런 느낌이긴 해.“
”그런데도 훈장을 받는 건 그놈이겠지?” 필립이 침울하게 덧붙였다.
“그럴 것 같네.”
“보나마나 지금보다도 더 꼴 보기 싫어지겠군.”
그녀는 이 말을 듣고 그저 미소 지었다. 아마 필립 말이 맞겠지만, 여왕이야말로 누가 아무리 꼴 보기 싫더라도 참고 견디도록 단련된 사람이었다. - 369

2022. dec.

#윈저노트여왕의비밀수사일지 #소피아베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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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쓰지 않아도 마음산책 짧은 소설
최은영 지음, 김세희 그림 / 마음산책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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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하고 차분한 이야기를 풀어놓는 작가.
다정과 차분 안에 상처와 분노 슬픔도 녹아 있지만 화산 폭발같은 일은 없고 대체로 용암처럼 뜨겁고 느리고(실제는 겁나 빠르지만) 묵직하다.

장편을 기다려보게되는 작가.

- 우리는 더 사랑할 것이다 - 작가의 말 중

-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이런 것들뿐인데.
서로에게 커다란 귀가 되어줄 수 있는 시간 말이야.

- “중요한 것들은 배울 수가 없나봐. 미리 대비할 수가 없나봐, 송문.” 유리가 말했다.
그들은 광장 안쪽에서 바닥에 배를 깔고 누운 고양이 두 마리를 바라봤다. 송문은 생각했다. 동물들은 아무것도 배우지 않고 사는데도 저렇게 아름답구나. 무언가 배우지 않아도 될 만큼 완전하구나. - 91, 우리가 배울 수 없는 것들.

- 미리 울어두고 마음의 준비를 해서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소용 없었다고 했다. 우리는 모든 게 꼭 당연하고 영원하다고 믿는 사람들 처럼 살지만 그런 건 아무것도 없다고. - 196, 무급휴가

2022. dec.

#애쓰지않아도 #최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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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
윤이형 외 지음 / 워크룸프레스(Workroom)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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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이형, 김혜진, 김초엽이 좋았다.

광장성에 대해 여러가지로 생각해보기 좋은 이야기들.

자유로운 개인들의 느슨한 연대에 대해 비판적 의견을 적대적으로 개진하는 이들에 대해 실망하는 일들이 빈번한 시절에 읽기에 더더욱.
연대에도 공과 보상이 있으므로 거기에서 마저도 뒤로 밀리고 싶지 않다는 이기적인 마음이 연대에 얼마나 긍정적 영향을 미칠까도 생각해 본다.

차별과 혐오가 적극적으로 배양되는 공간이 또한 광장이라는 점.


- 광장을 떠날 순 있지만 광장을 떨쳐낼 수 있을까. - 해설 중

2022. dec.

#광장 #윤이형 #김혜진 #이장욱 #김초엽 #박솔뫼 #이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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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시인 문학동네 시인선 74
함명춘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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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읽은 시집이 천주교색채가 강했다면 이 시집은 불교적이다.

상실한 것들 사라지는 것들을 상기시킨다.

사납기도하고 아련하기도 하다.

귀향. 나뭇가지. 가 좋았다.

- 그렇다 끝이라 생각하는 모든 죽어가는 것들에겐
아직은 생을 향해 두 눈을 부릅뜨고 꼭, 결의에 찬 듯
어금니를 문 발사 직전의 화염방사기 같은
나뭇가지가 비죽 나와 있다 자고로 생은 그런 것이다 - 나뭇가지 중

- 따지고 보면 절망은 얼마나 사소하고 하찮은 것에
쉬 감동을 받는 가슴을 지닌 것이냐 - 간이역 중

2022. dec.

#무명시인 #함명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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