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
리처드 플래너건 지음, 김승욱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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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올 해 처음 마음에 꼭 드는 소설.

문장 한줄 한줄이 너무 아름답다.

2차 세계 대전을 다룬 문학은 너무나도 많지만 오스트레일리아 포로의 시점의 책은 처음이었고,

독일군이 아닌 일본군에 대한 이야기는 아시아 작가가 쓴 경우 외엔 읽은 기억이 없다. (확신은 못하겠네...)

플래그를 붙이며 읽다보니 책 옆면은 플래그가 빼곡하게 붙어 버렸는데 아무래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포로들을 학대하는 일에 아무런 죄책감이 없던 나카무라는 하이쿠를 즐겨 외웠는데, 포로를 죽이는 동안에도 잇사의 하이쿠를 암송하며, 포로들에게 통역하게 했다.

고통의 세상
벚꽃이 피면
그 세상도 꽃을 피운다.

얼마나 역설이고 모욕인지. 그 아름다운 싯구를 입에 담고 저지르는 만행은...

포로와 일본군과 일본군에 가담한 또 다른 아시아인들과, 그들의 고향, 가족들이 흩뿌려놓은 카드들 처럼 펼쳐져 있다.

물론 화자인 도리고 에번스의 이야기도.

문장의 유려함에 넋을 잃어 흩뿌려진 이야기들의 (약간의) 산만함은 잊어버렸다.

전범들이 제대로 된 죗값을 치르지 않는 에필로그들을 보며, 세상 어디나 있는 불의를 실감한다.




행복한 사람에게는 과거가 없고, 불행한 사람에게는 과거만 있다. 노인이 된 뒤 도리고 에번스는 이것이 어디서 읽은 말인지 아니면 스스로 만들어낸 말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만들어냈다가, 이것저것 뒤섞었다가, 다시 부숴버렸나? 가차없이? 바위가 자갈이 되고, 자갈이 흙이 되고, 흙이 진흙이 되고, 진흙이 바위가 되는 식으로 세상은 굴러간다. 그가 세상이 왜 이러저러한 모습인지 설명해달라고 다그칠 때 어머니가 하시던 말씀 그대로다. 세상은 그냥 그런거야. 원래 그래, 아들. - 15

도리고 에번스는 미덕을 싫어하고, 미덕이 찬양받는 것도 싫어하고, 그에게 미덕이 있는 것처럼 구는 사람들도 싫어하고, 덕이 있는 척 행세하는 사람들도 싫어했다. 나이를 먹으면서 덕이 있다는 칭찬 아닌 칭찬을 들을수록 그는 미덕이 더욱더 싫어졌다. 그는 미덕을 믿지 않았다. 미덕은 잘 차려입고서 갈채를 기다리는 허영이었다. -75

지금 자신들이 하고 있는 모든 일이 도리고에게는 거대한 속임수 같았고, 도리고 자신은 여기서 가장 잔인한 역을 맡은 사람이었다. 사실은 아무 희망도 없는 곳에서 희망을 내미는 사람. - 298

콜레라의 전염을 막기 위해 환자의 소지품은 모두 불에 태웠다. 사람들이 새로 가져온 시체 세 구와 그들의 소지품을 장작더미 위로 올리는 동안, 인부 한 명이 토끼 헨드릭스의 스케치북을 들고 도리고 에번스에게 다가왔다.
태워. 도리고 에번스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인부는 기침을 했다.
결정을 내리기가 힘듭니다, 대령님.
왜?
이건 기록이라서요. 보녹스 베이커가 말했다. 헨드릭스의 기록입니다. 미래에 사람들이 이걸 보고 이곳에 대해 알고 기억하는 것, 그것이 토끼의 소망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일어난 일을 사람들이 기억해주는 것이요.
기억?
네, 대령님.
결국은 모든 것이 잊히게 돼 있다, 보녹스. 지금은 살아남는 것이 더 중요해.
보녹스 베이커는 납득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잊지 않기 위해서라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보녹스 베이커가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까, 대령님?
그렇지, 보녹스. 주문처럼 외우기도 하지. 어쩌면 그건 상당히 다른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이걸 남겨두어야 합니다. 이곳이 잊히지 않게요. - 303

나는 하느님한테 아무런 이의가 없다. 도리고 에번스는 보녹스 베이커와 함께 장작을 밀고 쑤셔서 시체들이 불길에 골고루 감싸이게 하며 말했다. 하느님의 존재를 놓고 다른 사람들과 논쟁하는 것도 귀찮아.
내가 지긋지긋하게 싫은 건 바로 나 자신이니까. 이런 식으로 끝을 내는 게.
이런 식이라니요?
하느님 방식. 하느님이 이랬네 하느님이 저랬네 하는 것.
사실 그가 하고 싶은 말은 씨발 놈의 하느님이었다. 이런 세상을 만든 씨발 놈의 하느님. 그 씨발 놈의 이름. 앞으로도 영원히 씨발. 평생 동안 씨발 놈. 우리를 구해주지 않은 씨발 놈. 여기를 돌아보지 않고, 저 씨발 놈의 대나무 위에서 불에 타고 있는 사람들을 구해주지 않은 씨발 놈. - 312

순간적으로 그는 무서운 세상의 진실을 본 것 같았다. 끔찍한 공포에서 도망칠 길이 없고, 폭력이 영원한 세상, 세상이 창조한 문명보다 폭력이 더 위대하고 유일한 진실이며, 폭력만이 진실한 신이기 때문에 인간이 숭배하는 어떤 신보다 폭력이 더 위대한 곳. 마치 인간은 폭력의 세력이 영원히 유지되도록 폭력을 전달하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세상은 변하지 않았으므로 폭력은 항상 존재했으며 앞으로도 결코 뿌리 뽑히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시간이 끝나는 날까지 다른 사람들의 부츠와 주먹과 끔찍한 행동 아래에서 죽어갈 것이다. 인류의 모든 역사는 폭력의 역사였다. - 365

2018. m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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