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을 위한 변명.오래 전에 사두고 근대문학 전반에 마음이 멀어져서 묵혀두다가 숙제하는 마음으로 읽는다.아무래도 밀린 숙제는 짜증스럽기 마련인데, 그럼에도 재미가 없을 수는 없는 생애랄까.그러나 허울좋은 모던보이.... 그 이면을 보게된 이후로 대체 이 양반 뭔가 싶은 면이 끊임이 없이 등장해서 오히려 모르는 채로 지내는 것이 나은게 아닐까 생각도 한다.외양과 스타일만 모던 보이이며, 그 시대 있을 법한 가부장적 유교의 틀에서 그다지 해방될 생각 없는 남성이 아닌가.자신에게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던 여성이 친구와 결혼했다고 뺏겼다고 생각하고, 수차례의 집안 강압?에 못이긴 결혼을 하고 부인들을 어떻게 책임지고 부양했는지는 생략되고, 그런 와중에 기생과 빠진 사랑은 어디로 봐도 그다지 책임감 있는 모습은 아니지 않나? 그 전력을 보다보면 참 그 시대의 남자란 편리한 족속이구나 싶은 생각만 들게된다.시대가 하수상하여 스스로 뜻을 펼치기 어려운 시대였으나, 저자의 백석 감싸돌기는 좀 지나치지 않은가 싶다.‘모던보이’의 윤리성의 파행을 근대성의 파행이라고 변명하기엔 찜찜한 감이 없지 않다.(207) 라니... 찜찜한 감이 없지 않은 정도는 넘어서지 않을까.백석은 만주 시절에 일본어로 된시를 어디에도 발표하지 않았고, 시인으로서 일본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자는 글을 쓰지도 않았다. ...... 1940년을 전후해서 거의 모든 시인과 작가들이 일본에 무릎을 꿇고 적극적인 친일행위를 했다는 것과 비교해보면 백석의 행동은 확연히 차이가 난다.(227) 라니... 김응교가 공개한 ‘문인창씨록’에서 백석이 ‘시라무라 기코’로 창씨개명을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1943년경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 문건대로라면 백석은 안둥세관에 창씨개명을 하는 조건으로 들어갔거나, 그 후에 어쩔 수 없이 현실과 타협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명단에는 친구 허준도 ‘기노시타 슌’으로 성씨를 바꾼 것으로 되어 있다. 자의에 의한 것이든 외부의 강압에 의한 것이든 백석이 창씨개명에 참여한 사실은 분명하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백석이 이렇게 바꾼 일본식 이름으로 작품을 발표하거나 공식적인 자리에 나선 일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백석은 백석이고자 했다.(278) 라니...대단한 반일 행위라고 해야하나...어쩔수가 없이 삐딱하게 읽힌 이 평전을 그렇다고 폄하할 수는 없다. 백석에 대해 꽤 많은 정보(결과적으로 필요이상인 경우도 있지만)를 얻게 되고 그의 문학적 어프로치도 시집 한권을 읽는 것보다는 폭넓게 이해할 수 있다.예술가로서의 성취도 감히 나 따위가 왈가왈부할 수 없이 눈부시지만,분단 현실로 인해 우리가 볼 수 없던 백석의 흐릿한 발자취가 어쩌면 그를 좀 더 스타일리쉬한 예술가로 바라보게 하는 면이 있지 않은지 생각했다. 2018. j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