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화영의 번역수첩 - 1974~2014
김화영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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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할 수 없는 언어의 세계를 내가 믿고 의지해 읽어 나간다는 것을 생각하면 번역이라는 작업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가 생각하게 된다.

그렇게 여기는 것과는 또 별개로 때때로 나의 오독과 몰이해를 번역의 탓이 아닐까 의심하기도 하니 참 간사한 것.

이번에 이방인에 대해 좀 깊이 생각할 기회가 있어 겸사겸사 ‘미리 사두었던’(ㅋㅋㅋㅋ 책은 쟁여두면 다 쓸모가 있는 것이다) 그간의 작업 후기를 엮어 낸 번역수첩을 읽었다.

카뮈에 대한 이해를 해보고자 읽었는데, 실비 제르맹의 작품이 너무나도 궁금해졌다.

얼마전 분노의 날들 사두었는데 후훗… 역시 쟁여두면 인연이 닿는다.

그야말로 1도 모르는 누군가의 책을 사두었는데, 다른 책을 읽다가 그 구매의 당위성을 얻는 기분. 일종의 면책일수도 있지만….



작가가 한 권의 작품을 세상에 내놓는다는 것은얼굴도 모르는 남녀 군중들 속으로 종이로 된 수천 마리의 새를, 바싹 마르고 가벼운, 그리고 뜨거운 피에 굶주린 새떼를 날려보내는 것이다. 이 새들은 세상에 흩어진 독자들을 찾아간다. 이 새가 마침내 독자의 가슴에 내려앉으면 그의 체온과 꿈을 빨아들여 부풀어오른다. - 132, 미셸 투르니에의 독서론

놀랍게도 그 속에 내 글도 한 편 실려 있는 거예요. 아무리 봐도 내가 쓴 적이 없는 글이라 여간 의아하지 않았습니다. 자세히 보니 바로 내가 독일 신문에 독일어로 쓴 바로 그 글을 누군가가 프랑스어로 번역한 것이었어요. 그런데도 그 글은 전혀 내 글이 아니더군요.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 이상한 번역을 원문과 대조해보니 한 군데도 ‘틀린 데’가 없더라는 점이에요. 문학 텍스트의 번역은 이처럼 그냥 틀리지만 않으면 되는 게 아녜요. - 140, 미셸 투르니에 대화 중

찬미할 줄 모르는 사람은 비참한 사람이다. 그와는 결코 친구가 될 수 없다. 우정은 함께 찬미하는 가운데서만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학과 예술은 무엇보다 찬미의 한 방식이다. - 152

나에게 필요한 것은 적어도 얼마간의 침묵이다. 고래고래 소리치는 사람들, 무엇보다도 ‘입담’좋은 리얼리스트들로부터 거리를 두고서, 예컨대 전기 불빛이 전혀 보이지 않는 시골 마을의 밤하늘 같은 것, 그 시끄러운 세상을 다 지나고도 거기에 아직 초롱초롱 빛나는 별빛 같은 것이 내게는 필요하다. 적어도 잠시 동안만이라도. 이러한 마음 상태 속에서 생각해낸 것이 르 클레지오였다. - 192

어느 가을날 저녁 프라하의 구시가 골목으로 한 여자가 걸어간다. 심하게 다리를 전다. 그녀의 왼쪽 다리는 오른쪽 다리보다 훨씬 짧다. 그녀가 다리를 쩔뚝거리는 것은 두 세계 사이를 번갈아 딛고 가기 때문이다. 여자는 가시적인 세계와 비가시적인 세계, 현재의 세계와 과거의 세계, 살과 숨의 세계와 먼지와 침묵의 세계 사이에서 끝없이 다리를 쩔뚝거리고 있다. 그 여자는 하나의 세계에서 다른 세계 사이를 오간다. 사라진 자들과 살아 있는 자들의 것이 한데 섞인 눈물의 남모르는 밀사가 되어. 그 여자는 존재하지 않는 침묵 위에 한 발을 디딘 다음 다른 한 발은 언어의 세계로 조심스레 내려놓는다. 그래서 그녀의 뒤를 따라가는 우리 독자들의 마음도 심하게 다리를 전다. - 341, 실비 제르맹, 프라하에서 울고 다니는 여자 번역 후기 중


2017. J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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