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테라스
파스칼 키냐르 지음, 송의경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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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냉소적인 표현에 따르면 이 책은 ‘사랑하던 여자의 아들을 친자로 인정하지 않았던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이 책에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실패하고, 관계를 맺고 관계를 청산하고, 어디론가 떠나고 어디론가 도착하는, 태어나서 죽어가는 결국 죽는 이야기다.

단락 마다 현자의 말씀 같은 이야기가 있어서, 좀 교조적이지 않나, 촌스럽지 않나 생각했지만.

결국 아름다운 문장과 삶에 대한 통찰에는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우화 같기도 하고, 역사의 기술 같기도 하고, 전문적인 기술서 같기도 하지만 그 모두가 삶을 이야기 하는 적절한 도구로 사용되었다.

절망에 빠진 사람들은 구석에서 살아가는 법일세. 사랑에 빠진 사람들도 모두 구석에서 살아가지. 책을 읽는 사람도 구석에서 사는 거네. 절망한 자들은 숨을 죽이고, 누구에게 말을 하거나 누ㅜ의 말을 듣지도 않으면서, 마치 벽에 그려진 사람처럼 공간에 달라붙어 살아가는거야. - 8

이 세상 특유의 드러내는 방식이라는 게 있거든. 그것은 대체로 꿈이라네. 하지만 때로는 침상의 휘장을 걷어내고 사랑의 행위 중인 두 육체를 드러낼 필요가 있어. 가끔은 다리와 촌락들, 탑과 망루들, 선박과 수레들, 가축들과 함께 주거지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도 보여주어야 하네. 어떤 땐 안개나 산만으로도 충분해. 사나운 바람에 휘청이는 한 그루 나무로 족할 때도 있어. 때론 어둠만으로도 충분할걸세. 영혼에는 결여되어 있거나 잃어버린 것을 존재하게 만드는 꿈이 아니라도 말이지. - 44

이유를 대는 것은 사랑을 황폐하게 만드오. 사랑하는 대상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거짓에 불과하지. 인간은 살아 있다는 감각이 절정에 달했을 때의 느낌에만 기뻐하기 때문이라오. 또 다른 삶이란 존재하지 않으니까. - 76

사람은 늙어갈 수록, 자신이 통과하는 풍경의 광채에서 몸을 빼내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네. 바람과 세월에 닳고, 피로와 기쁨에 탄력 잃은 살갗, 갖가지 체모, 눈물, 땀방울, 손톱과 머리카락, 이런 것들이 마치 낙엽이나 죽은 나뭇가지처럼 땅에 떨어져, 두툼한 살갗 외부로 점점 더 빈번히 빠져나가는 영혼을 흩어지게 하지. 마지막 떠남은 사실상 흩어짐에 불과해. 늙어갈수록 나는 내가 도처에 있음을 느끼네. 이제 내 육체 속에는 내가 많이 남아 있지 않아. 나는 언젠가 죽는다는 것이 두렵네. 내 살갗이 자나치게 얇아졌고, 구멍이 더 많이 생겼다고 느끼지. 난 혼자 중얼거리네. ‘언젠가 풍경이 나를 통과하겠지.‘ - 82

나는 그 마을의 이름이 좋았던 거예요. 캉이라 불리는 곳에서 내게 어떤 일이 생길지 궁금했던 거라구요. 그곳으로 나를 이끈 건 욕망이 아니라 호기심이었어요. 나는 방황하고 있었어요. - 89

어떤 나이가 되면, 인간은 삶이 아닌 시간과 대면하네. 삶이 영위되는 것을 더는 볼 수 없지. 삶을 산 채로 집어삼키는 시간만 보이는 걸세. 그러면 가슴이 저리지. 우리는 나무토막들에 매달려 이 세상 구석구석에서 고통을 느끼며 피 흘리는 광경을 조금이라도 더 보려고는 하지만 그 속에 떨어지지는 않으려고 안간힘을 쓴다네. - 128

2017. Ap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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