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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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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과 직면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했다. 그것이 희망이라면 더 그렇다.

절망 뿐인 세상 속에서 아들을 지키려는 부성으로 이 책을 읽었었는데, 다시 보니 아니다.

아들과 아버지라는 관계가 흐려지고 그저 두 인간이 남았다.

극한으로 밀쳐진 생존 싸움의 현장에서 두 인간은 끊임없이 갈등했다.

원인이 무엇인지 분명치 않지만, 세계는 필멸의 프로세스로 작동하고
이전의 세계를 경험한 이는 오히려 더 불신하고 절망한다.
재앙의 세계에서 태어난 이는 근거는 없으나 희망을 찾는다.


희망을 찾는 이에게는 희망이 정녕 존재하는가하는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그 희망을 근거삼아 자신의 세계를 애써, 눈물겹게 확장하려는 시도가 포인트 아닐까 생각한다.
결국 남자의 죽음 이후 소년은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는 것이 그래서인지 자연스러운 과정 같았다.

이들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향하는지는 초장부터 관심사가 아니었다. 이들이 어떻게 생존하고 어떤 죽음을 맞이하는지도.

소년은 어떻게 연민과 공감을 체득했는지, 남자는 왜 소년에게 아내에게 아무런 기대가 없는 것 처럼 보일까 같은 것들.

그런 희미한 인상과 감정들이 짙게 드리워진 감상이 남았다.



이 소설이 뿜어대는 냉기와 스산함에 몸살이 날 것같았지만 이런 저런 방법으로 열심히 극복하고 완독하고 나니

얼마 전 구입한 ‘여섯번째 대멸종‘이라는 책이 옆에 놓여있다.

로드의 세계에 닥친 재앙이 무엇인지 알아 챌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읽던 책은 잠시 제끼고 대멸종의 세계가 궁금해졌기에 우선 읽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날은 왜이리 을씨년스러운가.

당신의 주위를 돌아보라. ‘늘‘이라는 것은 긴 시간이다. 하지만 소년은 남자가 아는 것을 알았다. ‘늘‘이라는 것은 결코 시간이 아니라는 것을. - 35

할 일의 목록은 없었다. 그 자체로 섭리가 되는 날. 시간. 나중은 없다. 지금이 나중이다. 우아하고 아름다운 모든 것들, 너무 우아하고 아름다워 마음에 꼭 간직하고 있는 것들은 고통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다. 슬픔과 재 속에서의 탄생. 남자는 잠든 소년에게 작은 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나한테는 네가 있는 거야. - 64

그는 회색 빛 속으로 걸어나가 우뚝 서서 순간적으로 세상의 절대적 진실을 보았다. 유언 없는 지구의 차갑고 무자비한 회전. 사정없는 어둠. 눈먼 개들처럼 달려가는 태양. 모든 것을 빨아들여 소멸시키는 시커먼 우주. 그리고 쫓겨 다니며 몸을 숨긴 여우들처럼 어딘가에서 떨고 있는 두 짐승. 빌려온 시간과 빌려온 세계 그리고 그것을 애달파하는 빌려온 눈. - 149

오랜 세월이 흐른 뒤 남자는 까맣게 타버린 도서관 폐허에 서 있었다. 시커메진 책들이 물웅덩이에 잠겨 있었다. 책꽂이들은 넘어져 있었다. 줄줄이 수천 권으로 배치되어 있는 거짓말들에 대한 어떤 분노. 남자는 책 한 권을 집어들어 물을 먹은 묵직한 페이지를 넘겼다. 남자는 다가올 세계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라면 어떤 것도 그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그래서 놀랐다. 이것들이 차지하는 공간 자체가 하나의 기대라는 것. 남자는 책을 내려놓고 마지막으로 한번 둘러 본 뒤 차가운 잿빛으로 나갔다. - 213

남자는 자신이 위험하게도 이 횡재를 당연한 것처럼 여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전에도 했던 말을 했다. 행운이란 이런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말. 남자는 거의 매일 밤 어둠 속에 누워 죽은 자들을 부러워했다. - 260

2017. M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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