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그들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김승욱 옮김 / 은행나무 / 2015년 12월
평점 :
결코 반갑지 않은 기분이 달라붙는 독서.
시작하는 작가의 말에서 만났다는 모린 웬들은 실제하는 그들에 일단 무게를 실어 두었지만, 읽을수록 현실이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들어서, 후반의 작가의 말에서 `오해하게해서 미안한데, 여기 나오는 애들은 실제인물은 아니란다`라는 작가의 말에 오히려 분노보다는 안도에 가까운 마음이 되었다.
이런 연대기, 이런 가족사라면 차라리 허구인 편이 속은 편하겠다.
로레타를 찾아 돌아온 브룩은 모린에게 신문을 읽어주고, 떠나가 있는 줄스의 편지를 읽어준다.
부재의 시간동안 브룩에게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무엇이 그를 조용히 병상에 누워 세상을 외면하고 있는 조카에게 무언가를 읽어주는 사람으로 만들었던 걸까.
결코 친절하지 않지만, 세밀한 그림을 그린 작가는 엄청나긴하다.
그 엄청남이 묘사하는 불행들이 나한테 달라붙을까봐 으악하는 기분이 든다는 사실을 잠시 잊는다면 조금은 더 `그들`을 좋아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작가가 후기에서 언급했듯 소설 속 그들은 결코(라고 단정지을 순 없지만) 조이스 캐롤 오츠의 그들이라는 책을 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모린 웬들은 (허구의) 오츠 교수의 글들을 읽었고 소개받은 책들을 통해 현실에서 빠져나올 수 있지 않을까하는 희망을 탐색한다.
결론적으로 봐서 모린의 탈출은 그저 탈출을 위장했을 뿐 무엇이 달라졌는지......
이 이야기 속의 인물들 중 불행을 벗어던진 자가 있기는 한지......
......우리가 가난하므로 사악해질까? - 존 웹스터, 하얀 악마
가난과 악을 대치시킨 문장을 이야기의 시작에 배치한 것부터가 작가의 지독한 독설이다.
개인의 불행은 개인의 문제로 끝나지 않기 때문에, 막바지에 이르러 일어나는 폭동은 어쩌면 불가항력의 자연재해같다.
불행을 이야기 하지 않는 문학은 드물지만, 불행만을 이렇게 꼬치에 줄줄이 꿰어서 내 눈앞에 들이대고 흔들면 아무래도 기분이 좋지 않다.
볼륨도 상당하지만 그보다는 그 불행의 꼬치들이 버거워서 읽는데 한참이 걸렸다.
좀 즐거운 이야기로 정신의 피로를 풀고, 조이스 캐롤 오츠의 다른 책들도 읽어보고 싶어지기는 한다.
나중에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언뜻언뜻 기억했다. 마치 화면이 뚝뚝 끊기는 옛날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그 웃기는 영화에 나오는, 웃기는 옷을 입은 사람들은 고통도 고뇌도 느끼지 못했다. 저렇게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들이 어떻게 인간일 수 있을까? 줄스 웬들은 과연 아이였던 적이 있을까? - 129
난 지금 사실대로 말하는 거야. 얼굴을 마주하고. 내 기분을 말하는 거라고. 너희는 너희가 특별한 줄 알지? 세상 사람들은 전부 자기가 특별한 줄 알아. 하지만 너희도 나보다 특별할 것 없어. 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지. 할 일도 아주 많고, 구경할 곳도 많아. 세상은 이게 전부가 아냐! 이런 게 아냐! 내 인생은 이런 게 아냐! - 159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에 의문이 하나 있었다. `나는 왜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일까?` 하지만 이 질문을 막아버리려는 듯이 곧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다른 사람으로 태어나는 거나 이렇게 태어나는 거나 가능성은 똑같으니까.` - 261
세상은 계속 돌아갑니다. 계속. 선생님이 우리에게 가르친 책들은 이런 것을 설명해주지 않았습니다. 뒤죽박죽 뒤엉킨 현실은 어딘가에 감춰져 있었어요. 선생님이 우리에게 가르친 책들이 대체로 거짓말이라는 것을 저는 분명히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을 비난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 452
신문을 읽는다고 해서 하루하루 무슨 일들이 일어났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1년 치 신문을 모두 봐야 해요. 그러면 모든 것이 물밀듯이 밀려옵니다. 그해가 얼마나 헛되이 지나갔는지 알 수 있어요. 헤드라인들이 점점 빠르게 다가오고, 하루하루는 서로 전혀 관련이 없고, 갑자기 누군가가 목숨을 잃거나 어떤 나라가 1면에 등장합니다. 거리에 쓰러진 사람들의 사진이 바뀌고 이름들도 바뀌고, 모든 것이 오르락내리락하며 눈을 흔들어 댑니다. 도서관에서 저는 너무 무서워서 식은땀이 났습니다. 세상이 이런 꼴이라면 제가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이런 세상에서는 살 수 없습니다. 아무도 제대로 살아낼 수 없습니다. 세상은 제멋대로 미쳐 돌아갑니다. - 453
선생님의 수업시간에 현기증을 느낄 때가 아주 많았습니다. 선생님이 보바리 부인의 이야기를 그린 책을 그토록 중요하게 생각하신 이유가 무엇인가요? 그 모든 책들을 중요하게 생각하신 이유는요? 왜 우리에게 그 책들이 인생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셨나요? 그 책들은 제 인생보다 중요하지 않습니다. - 457
그녀는 그를 사랑할 준비가 되었다. 혹시 그는 알고 있을까? 그가 종이를 뒤적인다. 불안해 하고 있다. 그는 상냥하고 부드럽다. 그녀는 이 남자와 결혼해야 한다고, 그가 완벽한 남편이 될 거라고 몇번이나 실감한다. 그녀는 이 남자와 결혼해서, 그의 아내와 세 아이에게서 빼앗고 싶다. `그의 아내와 세 아이`야말로 모린의 마음을 곧바로 사로잡은 특징이다. 그가 안정되고 좋은 남자라는 뜻이니까. 그는 자신의 미래를 미리 준비했고, 그것에 만족하는 듯 보인다. 그는 완벽한 남편이다. 만약 그가 그녀를 위해 가족을 버린다면, 곧 그것이 사랑의 증명이 될 것이다. 그리고 다시는, 다시는 그런 변화를 꾀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서른네 살이고 그녀는 스물여섯 살이다. 좋다. 나이 차이가 딱 적당하다. 그가 그녀를 위해 반드시 버려야 하는 가족도 딱 적당하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 그녀가 지닌 능력의 증거다. 만약 그가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면 그의 사랑을 증명하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를 과거와 떼어놓고 미래를 보장해 주는 증거. 그녀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점점 불안하고 탐욕스러워진다. - 568
그는 책 속의 시구절들을 힐끔거리며 어렴풋이 두려움을 느꼈다. 그는 셰익스피어를 믿지 않았다. 비극의 퉁명스럽고 다듬어지지 않은 리듬, 우아한 언어와 피투성이 엔딩과 차분한 부활이 무서웠다. 묵시록 같은 느낌에 뒤이어 평범한 아침이 찾아온다. 호레이쇼와 포틴브라스가 벨벳이 늘어져 있고 바람이 잘 통하는 방에서 참을성 있게 체스를 두며 하품을 한다. 훌륭한 싸움을 위해 남겨진 좋은 남자들이다. 그들은 살아남을 수 있을 만큼 무지하다. 그리고 항상 카시오 같은 인물도 남아 있다. 다치고 멍들었지만 활기가 넘치는 카시오. 켄트는 과거 때문에 멍한 상태지만, 낙천적이라서 미래를, 역사의 오랜 상승을 받아들인다. 그는 책을 휙휙 넘기면서 그 어떤 것에도 오랫동안 눈길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너는 나의 혈육이다, 딸아/ 아니, 내 살 속의 병이라고 해야겠지.......˝ ˝놈을 당장 매달아라. 놈의 눈을 뽑아......˝ ˝나의 병이 점점 자라는구나......˝ 죽음을 가지고 이렇게나 호들갑을 떨다니! 삶을 가지고 이렇게나 호들갑을 떨다니! 책을 덮으면서 그는 조금 속이 좋지 않았다. 그래, 그런 것은 좋지 않았다. 죽음이나 삶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무의미했다. 하루를 살아내는 것...... 하루는 그의 인생이라는 거대하고 해독할 수 없는 화강암 덩어리의 일부였다. 그는 그 덩어리를 조금씩 쪼아내고, 씹고, 놀리고, 간청해야했다. 다른 사람들이 한 방에 해치울 수 있는 일을 해낼 만큼 날카롭거나 강력한 도구가 없기 때문이었다. - 576
˝어떻게 그럴 수 있죠? 제가 평생 원한 건 하나의 인간이 되는 거였어요. 단단하게 고정된 사람으로서 성공하는 것.˝ 모린이 느릿느릿 말했다. ˝꿈과 뒤섞이지 않는 것. 마약을 말하는게 아니에요. 우리 엄마가 꼭 그런 사람이에요. 언제나 말짱하게 깨서 어딘가를 돌아다니고 항상 잘 웃어대지만 사실 엄마의 인생은 전부 잠들어 있어요. 코니 고모의 삶도 마찬가지예요. 엄마와 고모의 친구들도 모두, 남녀를 막론하고 모두 잠들어 있는데 저는 그게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겠어요. 아버지와 의붓아버지도 모두 잠들어 있어요. 잠들어 있는 남자들이에요. 저는 모린 웬들이 되고 싶지만, 거기에 뭔가 의미가 생기면 좋겠어요. 깨어 있고 싶어요. 하지만 정말 안 좋을 때는, 내가 보기에 나 자신 인 것 같은 존재가 사실은 인간이 아니라 이것저것이 혼란스럽게 뒤섞인 존재라는 걸 알 수 있어요...... 제 기억, 제 눈에 보이는 것, 제 생각이 뒤섞인 존재예요. 저는 그걸 통제할 수 없어요. 모든 것이 부글부글 들끓고 있어서 무서워요.˝ - 603
˝예전에 나는 사랑이 없으면 살 수 없을 줄 알았어. 그런데 살 수 있더군. 그냥 계속 살아가. 언제나 계속 살아가면 돼.˝ ˝뭐라고요?...... 뭐라고 했어요?˝ ˝언제나 계속 살아가면 돼.˝ -654
2016. J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