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의 정귀보 - 2014 제8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
이장욱 외 지음 / 은행나무 / 2014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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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분의 일 정도는 이미 읽은 단편.

이승우의 복숭아향기와 김이설의 복기 편혜영의 식물애호가 특히 좋은 단편이었음.:)

2015. Dec.

전시가 끝난 뒤 작품들을 철거하면 미술관에는 흰 벽으로 이루어진 구조물만 남았다. 백색 패널로 된 벽은 구불구불하고 길고 하얀 미로를 이루었는데, 정귀보는 그 텅 빈 미로를 천천히 산책하는 것을 좋아했다. 같은 곳을 지나면서도 같은 곳인지 모르겠고, 다른 곳을 지나면서도 다른 곳 같지 않은 길을 그는 천천히 걸었다. 비가 내리는 날 아무것도 전시되어 있지 않은 그 미로를 거닐고 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깊은 상념에 젖어들 수 있었다. 그리고 결국에는 다소 감상적인 톤으로 이렇게 덧 붙였던 것이다.
아아, 이것은 곧 인생이 아닌가. - p. 24, 우리 모두의 정귀보 중

죽기 하루 전의 정귀보가 된 듯이, 나는 지금 막막한 감정에 잠겨 있다. 하지만 이것을 특별히 비관적인 기분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언성을 높이지도 않을 것이고, 만취해서 행패를 부리지도 않을 것이다. 단지 나는 무언가가 내 안에서 조금씩 피어오르고 있다는 것은 깨닫고 있다. 어쩌면 그것은 정귀보의 인생에 대한 기나긴 글의 첫 문장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마지막 문장이 없는...... 짧고 건조한...... 첫 문장 말이다. 첫 문장에서 두 번째 문장이 나오고, 두 번째 문장에서 세 번째 문장이 이어지고, 세 번째 문장에서 또 다른 문장이 태어날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거기서 아무렇지도 않게 걸어나오는 정귀보를 보게 될는지도 모른다. 해변에서 놀고 있는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우리 모두의 정귀보를 말이다. - p. 43, 우리 모두의 정귀보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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