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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프를 발음하는 법
수반캄 탐마봉사 지음, 이윤실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2월
평점 :
건조하고 쓰라린 시선이 돋보인다.
체념의 정서가 진한데 아마도 이민자의 삶이라는 점이 그런 느낌을 강화해 주는 듯.
생활의 기반이 되는 사회 속에서 타자로 규정되는 이들이 겪는 심리적 불안정감과 자존감의 결여 같은..
- 아이는 아빠에게 나이프의 k는 묵음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교장실에 불려갔었다고, 규칙들과 원래 그런 것들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저 글자 하나일 뿐이라고들 했다. 하지만 바로 그 글자 하나, 맨 앞에 놓인 단 한 글자 때문에 아이는 교장실에 불려갔다. 아이는 k가 묵음이 아니라고 우겼다고 말하지 않는다. 묵음일 수 없다고 아이는 우기고 또 우겼다. "맨 앞에 있는걸요! 첫 글자잖아요! 소리가 있어야죠!" 그러고서 아이는 무언가 중요한 것을 빼앗긴 양 괴성을 질러댔다. 아이는 아빠가 말해준 것. 그 첫음을 단념하지 않았다. 평생 읽고 교육받아온 선생님 중 어느 누구도 그 이유를 설명해주지 못했다.
아빠가 저녁을 먹는 걸 보면서 아이는 그가 모르는 게 또 뭐가 있을지 생각해본다. 스스로 알아내야 할 것들이 또 뭐가 있을지. 아이는 아빠에게 어떤 글자는, 비록 존재하지만 발음되지 않는다고 이야기해주고 싶다. 하지만 지금은 얘기할 때가 아니라는 결론에 다다른다. 대신 아이는 아빠에게 상을 받았다고 말한다. - 17, 나이프를 발음하는 법
- 레드가 아는 유일한 사랑은 하루의 조용한 순간들 속에서 자신에 대해 느끼는, 단순하며 복잡하지 않고 외로운 사랑이었다. TV에서 흘러나오는 웃음소리와 이야기 속에, 주말마다 들르는 식료품점 통로에, 그 자리에 한결같이 견고하게 서 있는 것이었다. 매일 밤 어둠 속 같은 자리에서, 고요함 속에서 눈부시게 퍼져나가는 것이었다. 그 모든 게 자신의 것이었다. - 35, 파리
- 때때로 사람은 죽는다. 그 죽음에 반드시 이유가 있을 필요는 없다. 인생은 원래 그런 것이다. - 71, 랜디 트래비스
- 아빠는 비통해하지 않았다. 그는 난민이 되었을 때 이 삶의 모든 비통함을 소진해버렸다. 사랑을 잃는 것, 아내로부터 버림받는 것조차 사치였다 - 어쨌거나 살아 있으니까. - 130, 세상의 가장자리
- 고국에 있을 때 엄마는 학교에 다닌 적이 없었다. 학교에 가려면 돈이 필요했고, 설사 집에 돈이 있더라도 남자 형제에게만 돈을 썼다. "그 돈도 다 낭비한 셈이었지만." 그녀가 말했다. 엄마는 마당에 앉아 닭을 돌보며 흰색 셔츠에 진청색 치마를 입은 여학생들이 학교에 가는 모습을 보곤 했다. 풀어놓은 닭을 모는 게 엄마의 일이었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가족에게 꼭 필요한 일이었다. - 206, 지렁이 잡기
2025. jun.
#나이프를발음하는법 #수반캄탐마봉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