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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기둥 - 제36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 시집 ㅣ 민음의 시 242
문보영 지음 / 민음사 / 2017년 12월
평점 :
김수영 문학상을 받았다길래 골랐다.
시를 잘 모르기에 사기 전에 책 소개를 꼭 읽어보고 사는데, 사실 끌리는 면이 있는 시집은 아니었다.
시라는 표현방식을 참 자유롭게 최대한 활용한 종류의 시라고 생각한다.
발랄하게 기이한 시라고 느껴지기도.
"쓸모없는 인간이 쓰는 쓸모없는 시..."라는 자조도 오히려 자부심이 느껴지기도 한다.
알 수 없는 앙뚜안, 스트라인스, 지말... 어울리는 이들일까? 싶은.
다만 완결성이 없는 부분은 아직 나와는 거리가 멀어지는 부분.
- 벽을 앓는 모든 것은 집이 된다. 벽에 중독된 모든 것은 벽이 된다. 누구나 벽으로 태어나 벽으로 살다가 벽으로 죽듯 벽은 반복되고 벽은 난데없다 "꽃이 펴도 당신을 잊은 적 없습니다." 이런 문장은 위로조로 읽어야 할까 공포조로 읽어야 할까. - 벽 중
- 여전히
누군가 죽었다
잘 깍아 놓은 사과처럼 정갈하게 - 불면 중
- 책장을 넘기는 것은 관 뚜껑을 여는 행위이며
관 뚜껑을 열 때마다
누워 있는 자의,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변한다 - 그림책의 두 가지 색 중
- 그런 식이었다 파리는
잘하건 못하건, 누군가의 주위를 서성였다
서성이다 한 대 맞았지만 죽지 않는 것이 미덕이었다
(...)
노트 모퉁이에
파리가 살 만한 인간적인 삶의 조건,
이라는 구절을 휘갈긴 뒤 노트를 덮는다 그리고
생각한다
시 쓰기는 참으로 쓸모 있는 인간의 놀이다
여름이었으므로 그런 생각이 가능했다 - 파리의 가능한 여름 중
- 창문을 조금 열어 빛이 바깥으로 조금 새어 나가도록 두는데
새어 나간
빛은 언제나 현실이었다 - 남는 부분 중
< 그는 아직 미치지 않았다 - 안개에게 >
1
안개가 없는 마을에 정거장 같은 안개가 끼었다
사람들은 오랜 시간 안개를 그리워했다
안개를 낡은 속옷처럼 받쳐 입으며 그는 수치심을 던다
그는 한 꺼풀의 안개에 대해 기록한다
2
소년들은 창가에서 속손톱빛 안개를 내다본다 창문을 문질러도 안개는 지워지지 않는다고 했지 그래서 안개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했다
3
멀리 있는 것들을 미리 보여 주지 않아서 안심이 돼 사람들이 떨구고 간 손금들을 쓸어 담으며 청소부는 말한다 안개 속에서 코끼리가 섬같이 나타나도 슬퍼할 사람은 없어 애당초 멀리 있는 것은 보이지 않았으니 안개 속에서는 누구나 수상함에 익숙해질 수밖에
4
무릎뼈를 동그랗게 오므린 채 텅 빈 욕조 속에 담겨 있는 기분이야 그렇게 생각했던 사람이 안개 속에서 익사해도 애도하는 사람이 없으므로 세상은 고요히 흘러간다
5
자자, 나를 봐, 안개를 훔치고 싶다면, 쉬... 조용히 해... 이렇게 안개를 착착 개켜서 여기에 담으면 된다고... 쉬... 마늘 머리처럼 푸석한 노파가 오래된 장롱의 문고리를 매만지며 말한다 그녀는 미쳤지만 미치지 않았다 안개에 약간의 과거를 떠넘기는 방법을 터득했을 뿐이다
6
아무 말이 오가지 않는다 누구나 각자의 과거를 기다리며 안개를 버티는데 그들은 한 올 한 올 풀려나가는 바지의 해진 밑단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모두가 발소리를 죽이며
7
안개 속에서 아이들은 각자의 굴뚝을 내려 놓고 숨을 고른다 그들은 타인의 굴뚝에 발이 빠지지 않도록 조심한다 아이들은 발꿈치를 들고 총총히 뛰어간다
8
그대 떠나 버리고 나는 목 놓아 울었네, 울 때마다 그림자만 흥건해져요 안개 속에서 잃어버린 사람을 찾기 위한 유행가가 흘러나오면 그제야 사람들은 누락된 굴뚝이라든가 빠진 손톱을 찾아 나선다 그건 모두의 이중생활일 뿐 밑줄이 사라져 핵심을 알 수 없는 손바닥과는 상관이 없다
9
안개 속에서 책갈피 같은 코를 가진 남자가 복권을 판다 사람들이 복권을 사는 이유는 요행을 바라서가 아니라 미련을 떨쳐 버리기 위해서지 그런 점에서 복권과 안개는 닮았어 안개 속에서 남자는 복권을 나눠 주고 사람들은 녹슨 동전으로 은박을 긁어낸다
10
너덜너덜해진 안개의 끝 피에로 분장을 한 피에로가 딱딱한 오줌발로 안개를 적신다 그는 오줌을 피해 바짝 엎으린다 안개의 밑창은 서늘하다
(전문)
- 책을 펼치자 문장들이 이중 매듭 만들기에 몰두하고 있다. 끊임없이 몸을 비비 꼬고 있다. 무의미한 움직임만을 수년간 반복하는, 바위에 깔린 벌레들처럼. 문장들은 오직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느라 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다. 주변을 신경 쓸 재간도 없이, 미래를 도모하지도 않고 오직 한 자리에서 홈을 파며, 어쨌든, 바닥에 흔적을 내고, 그것을 위해 몸을 꼴 대로 꼬며 깊어지는 동작만을 반복하고 있다. - 멀리서 온 책 중
- 초현실주의는 불가능하며
현실이 현실을 무력화시키는 것만이 가능하다 - 프로타주 중
- 난쟁이들이 책기둥을 무너뜨리고 원하는 책을 얻는다. 다시 기둥을 쌓는다. 난쟁이들은 책을 때리고 책을 향해 침을 뱉고 욕설을 퍼붓는다ㅏ. 그럴 만도 하다, 고 나는 생각한다. 책은 무례하니까. 책은 사랑을 앗아 가며 어디론가 사람을 치우치게 하니까. 벽만 바라봐서 벽을 약하게 만드니까. 벽에 창문을 뚫고 기어이 바깥을 넘보게 만드니까. - 책기둥 중
2025. feb.
#책기둥 #문보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