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류하는 흑발 민음의 시 239
김이듬 지음 / 민음사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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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분히 추락하고 난도질 당한 어떤 영혼.
그런 이미지를 떠올리며 읽었다.

이쪽으로 저쪽으로 충돌하는 어떤 것 들이 해석을 어렵게 하기도 한다.
쉬운 시어가 주는 혼동이 있다.

- 나는 침묵과 고요를 말하기에 이르렀다
지금은 묵언수행 중입니다
거듭 강조하던 어린 불자처럼
관광객 붐비던 가을 산사처럼 - 불우 이웃 중

- 나는 작은 숲을 가졌고 나무는 느리게 자란다
뾰족하고 부드러운 나무는 자기가 공기를 바꾸는 줄 몰랐다
대들보나 재목이 되고 싶지 않았다
사람의 꿈은 한층 더 사람으로 살다 죽는 것일까 - 평범한 일생 중

- 사랑한다는 말은 해 본 사람이 더 많이 한다
사랑의 총량은 말로 소모될까
잔인한 인간의 친절을 생각한다 - 살아 있는 시체들의 낮 중

- 머리 위로 먹구름 같은 기차가 지나간다 매시간 정각마다 범람하는 햇빛은 턱밑까지 흘러내린 눈물은 어떻게 사라지는가 우리는 밤의 늪에서 기어 나온 악어 떼처럼 공포를 모르고 가끔은 살아 있다고 착각한다 - 나의 수리공 중

- 덜 살아 있었고 조금 죽었다
아름다움은 미진했으므로 완벽했다 - 예술과 직업 중

<나는 춤춘다>
나는 춤춥니다
춤추기 시작했어요
파도가 파고드는 검은 모래 위에서
아름다운 눈발은 전조였죠
폭우 속에서

우선 가슴을 옮깁니다 마음이 아니라 말캉하고 뾰족한
바로 그 젖가슴 말입니다
사람들은 항상 너무 일찍 감정을 가지죠 다음으로
들린 발을 뒤로 보내는 겁니다

뒷걸음질이 중요합니다 나는 아직 스텝을 다 알지 못하고
몸을 잘 가눌 줄도 몰라요
내 몸은 내가 지탱해야 합니다 허벅지와 허벅지가 스치도록
발꿈치와 발꿈치가 스치도록 이동할 겁니다
모래에 뒤꿈치를 묻은 채 서 있지는 않을 거예요 멈춤과 정적을 좋아하지만
추종하지는 않아요 무한을 봐요 파도가 회오리는 치는

수평선 너머에 시선을 두는 겁니다 눈을 내리깔지 마세요
당신이 오른쪽으로 움직일 때
나는 왼쪽으로 갑니다
당신이 당신 편에서 동쪽으로 갈 때 나는 나의 서편으로 심장을 밀고 가요

가슴 맞대고 춤추는 겁니다
마주 보지만 얼굴을 살피지는 말자는 겁니다
바다 바깥으로 해변 밖으로 나가라는 방송이 거듭될수록
서로의 어깨 깊숙이 손바닥을 붙이는 겁니다

이곳에 살기 위하여
피하고 흥분하고 싸우기도 하듯이
나는 춤추겠다는 겁니다
눈 감고 리듬을 느껴 봅니다

당신이라는 유령,
다가오는 죽음을 인정하고 포옹하면서
매 순간의 나를 석방합니다
나는 춤을 춥니다

뒤로 가는 것처럼 보일 거예요
(전문)

- 괜찮아, 괴물아
목걸이를 던져 주면 가슴을 보여 주는 사람들이 올 거야
무너져도 괜찮아
우리는 감미롭게 슬퍼하고 우리는 악하다 - 발코니 중

2025. jan.

#표류하는흑발 #김이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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