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차 없는 나의 촉법소녀 현대문학 핀 시리즈 시인선 31
황성희 지음 / 현대문학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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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동 직전 >
모든 것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

나는 너무 빨리 자랐고
무모한 친절을 멈추지 못했다

단 한 가지 결말을 위해 수십 년을 허비해왔다
똑같은 모양에 머무르지 못하고 매 순간 무너졌다

한 번도 태어나 본 적 없는 자식이 나에게
그것이 최선이라며
원어민에 가까운 발음을 구사했지만

나는 함부로 칼을 사용하고
안과 밖을 뒤섞고 싶어졌다

어떤 사람이 되기 전에 미리
어떤 사람이 되어두려고
시간의 손길이 닿지 않는
독보적 유기체가 되어보려고

확인하고 싶은 건
내가 끝난 뒤에도 남는 끝이었다

눈을 좋아한다고 겨울을 잘 아는 것은 아니지 않나
산책을 즐기지만 발걸음에 능숙한 것은 아니듯이

유기체가 가진 일직선의 힘과
되돌릴 수 없는 길의 구조
이미 만들어진 집과
저절로 도착하게 되는 집 사이에서

나는 횡단보도를 건너는
아무의 멱살이라도 잡아야 했다
한 번 정도는 확실한 것을 붙잡고
흔들어보고 싶었다

출발하지 못하는 차들이 비키라고
경적을 울려댈 때면
가장 큰 경적을 울리는 차를 향해
왜 달려들지 않겠나

꽉 쥔 주먹으로 차창을 깨는
구체적 사건을 저지르고
피범벅 손에 팡파르처럼
왜 경적을 울리지 않겠나

어쩌면 나는
이 한 장면을 위해 급조되었는지 모른다

살가죽이 째지고
뼈가 부서지는 타격감을 위해서라면

모든 호흡이 매도당하고 낭비되는
쓸쓸함이야 얼마든지
(전문)

첫 장의 첫 시를 읽고.. 바로 한 눈에 반했다.
아무래도 나는 선동 잘 되는 사람인 듯하다.

- 나를 찾으러 오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내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 락앤락의 새로운 용기와 신흥 자본가의 출현 그리고 세계의 밖 중

- 살의를 잃어버리고 나는 오래된 사과처럼
더 이상 단단하고 아삭아삭할 일이 없어졌다 - 어떤 용서에게는 잔인한 일 중

- 머리 한 귀퉁이가 터진 채
세계 속으로 조금씩 개방된다
기억과 비명과 정서가
하나의 소용돌이로 휘말린다 - 베드타임에 듣기엔 부담스러운 동화 중

- 사람들이 왜 자꾸 이런 시를 쓰냐고 물을 때마다
나를 잊어버리지 못해 두려웠다고 대답했지만
나의 기억이 나에 관한 것인지 확실할 수 없었다 - 내가 없어지는 기분 중

< 꽃의 용기 >
바람을 따라 굽어지는 길

아무 질문도 소용없거나
모든 대답이 흩어지는 곳

흔드는 것과 흔들리는 것만 남았다

이제는 대답을 쏟아내야 할 차례
수십 년 봄과 함께 초록을 관람한 끝에

모르는 채로 알고 있던 해답을
결정타처럼 스스로에게 날리고

난데없이 쓰러져야 할 때
꽃은 스스로 억울해 하는 법 없이
아름다움을 끝낼 줄 안다

서정을 경계하며 살아온 지 얼마인가

함부로 반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나는 아무 의미도 되지 못한 채

차라리 꽃이라도 될걸 그랬다

형형색색 지천으로
지천의 너머로

피어날 걸 그랬다
(전문)

모든 시가 좋았다.
날렵하게 휘두르는 펀치 같은 충격이 매 편 존재한다.

좋아하는 시인의 목록에 올렸다.

2024. dec.

#가차없는나의촉법소녀 #황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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