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씨 451 환상문학전집 12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박상준 옮김 / 황금가지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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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을 끄는 일을 하며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던 직업이 휘트먼을, 포크너를 불태우는 직업으로 바뀐 사회.
주체의식 없이 그저 방화수로 살아가던 몬태그 앞에 문득 나타난 이상주의자이자 자유로운 영혼이길 원하는 소녀 클라리세.
소녀의 말 한마디에 한마디에 감화되던 몬태그는 방화의 현장에서 책을 훔치게 되고, 사회가 규정한 범죄자가 된다.

도주 중에 마주치는 책을, 지식과 철학을 수호하려는 숨어있는 인류와 마주치는 흥미로운 이야기.

인간들을 획일된 사고방식에 가두고 그것이 진정한 평등이고 자유라고 주입하는 세상. 현 시대에서도 적용할 수 있는 반 지성주의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자극적이고 무용한 정보들에만 노출되어 있는 도파민 중독인 인간들에 대한 묘사가 소름 끼치는 이유는 그게 비현실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우매한 대중을 만드는 방법이 리얼하게 설정되어 있어 씁쓸하다.

클래식한 공포라고 할 만한 이야기, 명작이다.

다만 클라리세의 존재가 어찌 되었는지 흐려진 부분이 조금 아쉽다. 작가 자신도 그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던 것이 후기에서 밝혀져 있다.

- 그들이 가지런히 줄 처진 종이를 주거든 줄에 맞추지 말고 다른 방식으로 써라. - 후안 라몬 히메네즈

- 불태우는 일은 즐겁다.
불꽃은 춤추면서 천천히, 그러나 결코 멈추는 일 없이 무엇이든 자기 것으로 만들어 간다. 점점 색깔이 어두워지다 이윽고 검은색으로 변하고 마침내 본래의 것과는 전혀 다른 물질로 변해 버린다. 그 과정을 보고 있노라면 자신도 모르게 야릇한 쾌감이 온몸에 번져 오는 것이다. - 15

- 몬태그의 미소는 어느덧 사라졌다. 미소는 접혀져서, 녹아서, 미끈미끈한 그의 피부를 타고 흘러내린다. 황홀하게 타오르던 양초가 이윽고 마지막 심지를 불사르며 극적으로 무너져 내리듯이. 어둡다. 나는 행복하지 않다. 나는 행복하지 않다. 몬태그는 속으로 계속 중얼거렸다. 껍데기를 벗겨 보면 드러나는 나의 참 모습은...... 행복하지 않다. - 28

- 간밤에 나는 지난 10년 동안 내가 불사르느라 뿌렸던 등유를 생각했어. 그리고 불태운 책들에 대해서도. 그리고 처음으로 깨달았지. 불에 타 없어진 하나하나의 책들마다 제각기 한 사람씩의 이야기가 있다는 사실을. 그게 누구든지 한 권의 책을 채우기 위해 그 모든 것들을 생각해 낸 거야. 책 한 쪽 한쪽을 알맹이 있는 글로 채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쏟았는지 알 수 없지. 전에는 결코 이런 생각을 해 보지 못했어. - 89

- 타오르는 불이 아니었다. 따뜻한 불이었다.
따뜻한 그 불의 혜택을 받고 있는 수많은 손들. 어둠에 숨겨진 팔 없는 손들. 그 손 위로 불빛을 받아 앞뒤로 흔들리거나 깜박거릴 뿐인 정지된 얼굴들이 나타났다. 불이 이렇게도 보일 수 있다니. 태워 버리는 기능 외에 이렇게 따뜻함을 주는 기능도 갖고 있다니. 그런 생각은 평생 해 보지 못했다. 냄새조차 다르다. - 224

2024. jul.

#화씨451 #레이브래드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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