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을 말하지 않는 법 암실문고
마리아 투마킨 지음, 서제인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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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하나 전체를 이해하긴 어려우나, 한 문단씩의 이해는 어렵지 않다.

그렇다고 이 글 모음이 지향하는 바를 이해하지 못한다기 보다는.. 익숙하게 한 묶음으로 종결지어지는 형식이 아니라는 점에 관한 어려움이라고 생각한다.

실험적 글쓰기 프로젝트라는 말은 이미 이런 독서 과정을 알려준 것인가.

부족한 이해에도 불구하고 마음에 남는 수많은 문장은 충분히 빛나는. 그런 책.

- 무슨 기간이라고요?
캐서롤 기간이요.
아, 전 좋았어요. 그 시간이 계속됐더라면, 훨씬 더 길었더라면 좋았을 것 같아요. 지금이 캐서롤 기간이었으면 좋겠어요.
사람들로 꽉 차고 꽃을 더 놓을 자리조차 없어진 집은 프랜시스에게 사무치는 외로움과는 정반대에 있는 공간처럼 느껴졌다. "그러다가," 그는 말한다. "꽃이 다 시들었어요. 사람들은 떠났고요. 그렇게 되니까 그 텅 빈 곳을 채울 게 아무것도 없더라고요." - 16

- 인간의 삶은 이렇게 묘사할 수 있지 않을까. 삶의 전성기에는 샐러드의 나날들이 있고, 삶의 끝에는 캐서롤의 나날들이 있다고. 그리고 우리가 떠나면서 뒤에 남겨 둔 이들에게는 캐서롤 이후의 영원 같은 시간이 주어진다. - 22

- 그리스인들에게 연민이라는 단어는 오늘날 그 말이 우리에게 종종 그러하듯 우월감이라는 함의를 품고 있지 않았다. 연민이란 슬퍼하고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을 나타내는 말이었다. - 36

- 소중한 아이들아, 이걸 이해해 주렴, 대개의 죽음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단다.
소중한 아이들아, 너희 가운데 어떤 아이들은 자기 안에 엄청나게 쌓여 있는 분노와 슬픔을 발견하게 될 거야.
소중한 아이들아, 너희 주변의 어른들, 너희 안전의 수호자라는 그 사람들도 실은 간신히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는 수준에 불과하단다.
소중한 아이들아, 모르는 사람이나 테러리스트가 너희를 해치거나 죽일까 봐 너무 걱정하지 말렴. 통계로 보다 다른 무엇으로 보나 너희에게 있어 가장 큰 문제는 너희 가족이니까. - 47

- 애도는 사실 하나의 장소다. 우리 중 누구도 거기 도착할 때까지는 알지 못하는 장소. - 73

- 내 친구의 우려는 자선이라는 행위 자체, 즉 제2 세계와 제3 세계 국가들의 내부를 좀먹는 자선 경제 자체에 관한 게 아니다. 그 우려는 사람들이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복잡한 생태계 속으로 억지로 파고들면 피해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뜻을 담고 있다. - 194

- 여기서 궁금한 게 하나 있다. '동일시를 통한 공감'이라는 것 말이다. '그 사람이 나일 수도 있었다'고 말하려면 우리는 먼저 그 사람이 누구였는지 물어봐야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 물음에 주어진 답을 해독하는 데에는 보통 영겁의 시간이 걸리지 않던가? 게다가 만약 트레이시가 나일 수 없고 내가 트레이시일 수 없다는 결론이 난다면(이를테면 나는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수년에 걸쳐 끝없이 반복하게 만드는 종류의 중독은 경험해 본 적이 없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걸까? 한 인간에 관한 사실들은 대개 타인들에게는 알려져 있지 않으며, 그중 대부분은 애초에 타인들이 결코 알아낼 수 없는 것이다.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 한계를 무시하면 타인들은 곧 상징의 집합체로 변해 버린다. 우리 자신이 좋아하는 음료만 골라 담은 물통으로, 일종의 도구로 변해 버리는 것이다. 타인을 온전한 인간으로 받아들인다는 건 그의 어떤 점이 우리와 다른지 알아차리는 것이며, 또한 그 다른 점을 굳이 비틀어 숭고함에 가까운 무언가로 왜곡하지 않는 것이다. - 211

- 당신은 말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당신과 당신의 민족에게 일어났던 그 극악무도한 일을, 세상이 종말하는 순간과도 같았던 그 모습을 그대로 알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지 않고서 어떻게 그런 일을 절대적으로 반대해야 하는 것으로, 앞으로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로 만들 수 있겠는가? 당신은 세상의 기억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빨리 사라지는 걸 보게 되고, "아뇨, 그 일은 그런 식으로 일어나지 않았어요"라는 말을 점점 더 많이 듣게 된다. 당신은 말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말한다는 행위야말로, 그리고 그렇게 말할 때마다 당신이 구성하고 재구성하게 되는 그 서사야말로 당신을 계속 살아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 그 거사는 당신이 꼭 붙들 수 있는 구심점이 되어 주고, 당신의 내면에 난 구멍을 (안타깝지만) 불완전하게나마 덮어 준다. 당신은 말해야만 한다. 당신이 말하지 않으면 그들이 이기기 때문이다. 말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싸움을 그만둔 것이다. 포기한 것이다.
동시에, 당신은 말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런 대화는 오직 몇 명의 동료 생존자들과 함께일 때만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과 함께일 때는 말하고 듣는 행위가 그렇게 날카로울 정도로 비현실적인 느낌을 주지 않는다. 또한 마치 제삼자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듯한 느낌도 들지 않는다. 당신은 말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당신이 아는 것은 언어로 옮길 수 없고, 따라서 전달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전체 경험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당신이 그것을 말해 버리면 남들은 그게 전부라고 생각하게 되고, 그렇게 당신은 말하거나 침묵하기를 스스로 택할 수 없는 다른 이들을 배신하게 된다. 당신은 말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런 말하기는 사람을 소진시키고 텅 비게 만들기 때문이다. 기억하고 증언하는 일은 너무나도 무거운 부담을 지는 작업이며, 심지어 그 서사 자체도 극심할 정도로 가혹하다. 당신도 그곳으로 몇 번이고 거듭해 돌아가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게다가 무엇을 위해 그런단 말인가? 당신은 말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당신의 삶은 이런 일보다 훨씬 더 크기 때문이다. 당신이 온갖 역경을 이겨 내면서 키워 온 바로 그 삶 말이다. 당신은 말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미 그동안 차고 넘칠 만큼 많은 말을 해 왔기 때문이다. - 326

2024. feb.

#고통을말하지않는법 #마리아투마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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