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 이전에 쓴 이야기를 팬데믹을 거치며 다시 쓴 이야기.현실을 공포로 만드는 순간을 예리하게 그려내는 작가답게, 재와 빨강에서도 허우적대며 아무런 대책 없이 구덩이로 빠져들고 마는 인간의 모습을 담았다.자신이 친 덫 속으로 추락하는 주인공의 모습 중, 폭력을 경험한 후 새로운 세계로 진입했음을 깨닫는 장면은 놀라울 만큼 현실적으로 다가왔다.나락으로 떨어졌다고 포기하고 받아들인 순간조차 조롱당할 거리가 남아있다는 비참함이 주인공의 처지를 한없이 끌어내린다.이야기를 읽는 사람의 심리도 몹시 위축되고 심란해지고 마는 것이 편혜영 소설의 특징이 아닐까 싶다.- 책을 출간하고 십여 년이 흐르는 동안 팬데믹은 가상의 사거니 아니라 현재의 사건이 되었다. 소설을 구상하고 쓸 당시만 하더라도 내게 역병은 먼 과거이자 중세의 것이었다. 겪은 적 없는 시간이자 도래하지 않을 미래였다. 팬데믹을 겪은 후였다면 이 소설은 쓰이지 않았을 것이다. 삶을 폐허로 만드는 것은 역병과 쓰레기, 끊임없이 출몰하는 쥐 떼가 아니라 적나라한 혐오와 차별, 정교한 자본주의임이 명백해졌으므로 다른 상상을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 작가의 말 중- 위험에 대한 경고는 언제나 실제로 닥쳐오는 위험보다 많은 법이다. - 8- 사내에게 얻어맞은 순간 그는 자신이 이제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세계에 들어섰음을 깨달았다. 도덕과 질서와 교양과 친절이 일상이었던 세계에서 약탈과 기만과 폭력과 쓰레기가 보편적인 세계로 진입한 것이다. 새로운 세계의 생존방식은 간명했다. 가격하거나 가격당하는 것. 약탈과 폭력이 생계의 방편이라면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 게 유일한 자산이었다. - 58- 지나간 생애가 너무나 시시하고 볼품없어서, 그런 인생에 회한이 느껴져서는 아니었다. 사소하고도 하찮은 일로 가득한 나날로부터 멀어졌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의 불행은 이처럼 사소한 순간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으리라는 서글픔에서 비롯되었다. 그 시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절망이 그를 짓눌렀다. - 171- 그는 방역복을 애지중지했다. 방역복은 안전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그 옷을 입었다는 것은 남과 똑같은 존재가 된다는 뜻이었다. 남들과 같아지면 자신에 대해 더는 생각하지 않아도 되었다. - 195- 전염병이 잦아든 후 병으로 죽은 사람과 일자리를 잃은 사람을 제외하면 대부분 일상으로 돌아왔다. 전염병으로 인한 불행은 순전히 개인적인 것으로 남았다. - 2252023. dec.#재와빨강 #편혜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