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물질적인 밤 - 이장욱 산문집 문지 에크리
이장욱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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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적인 글들, 그러나 단절되어있지 않은 흐름이 있다.

- 신성은 인간의 영혼이 궁극에 이르러 대면해야 할 무엇이지만, 현실 정치 안에서 그것은 반드시 오염된 ‘인간적’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나에게 현실 정치란 ‘경쟁’과 ‘적대성’을 통해서만 그 건전함을 간신히 유지할 수 있는 나약한 인간들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신성은 신의 것이어서 인간들이 저희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는 것이다. - 12

- 이것은 아마도 ‘밤‘과 ‘낮’이라는 언어 바깥에 있는 세계일 것이다. 관습적 언어 너머의 세계에서, 비는 내리고 있다. 저렇게 내리는 비에 가장 가까운 것이 시의 언어일지도 모른다. 만상의 바깥에 처연히 내려 모든 것에 스며드는 그것. - 17

- 상트페테르부르크 서쪽 연안, 핀란드만이라고 불리는 해변에 갔다. 글이 씌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글은 씌어지지 않아도 좋았다. 쓰지 않는 시간이 쌓이지 않으면 쓰는 시간이 오지 않는다. - 19

- 나는 며칠 후 이곳을 떠날 것이다. 츠베타예바는 이렇게 썼다. 언제 어디서든 떠난다는 것은 하나의 죽음과 같네, 라고. - 27

- 소설을 쓰는 일 자체보다는, 아직 소설이 아닌 무엇을 떠올리는 일을 나는 더 좋아하는 것 같다. 가령 하루오라는 인물에 대해 쓰는 시간이 아니라, 하루오라는 사람이 머릿속에서 문득 눈을 뜨는 순간을. 눈을 뜬 하루오가 미소를 짓거나 걸어 다니는 순간을. 그러다가 문득 사라져 버려서 나를 외롭게 만드는, 그런 순간을.
무슨 생각을 갖고 소설을 시작했는데, 끝나고 보면 내가 생각하지 않았던 세계가 거기 있다. 무슨 질문을 갖고 소설을 시작했는데, 끝나고 보면 내가 던지지 않았던 질문이 거기 있다. - 35

- 확실히 인생은 소위 ’내러티브‘와 다르다. 삶은 기승전결의 플롯을 지니지 않는다. 의미와 목적과 대단원을 전제로 인생을 서사화하여 설명하는 것은 우리가 품고 있는 욕망의 구조를 반영하고, 나아가 현실의 논리를 드러낼 뿐이다. 삶 자체는 그것을 훨씬 초과하거나, 또는 그것을 무시한다. - 39

- 그녀는 장차 어떻게 될까요? 내가 물었다. 누구 말이죠? 그가 말했다. 폴린, 내가 말했다. 늙겠죠, 굳게 확신하며, 그가 말했다.
그렇다. 폴린은 늙을 것이다.
소설을 쓰는 일은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폴린과 함께 늙어가는 것. - 59

- 그렇게 메모를 해둔 적이 있지만 나의 일상과 현실에서 평상심은 그냥 다음과 같은 뜻에 가깝다 ; 일희일비하지 않고 그냥 하던 일을 계속하는 것. 좋아하던 것을 계속 좋아하는 것. 그러다가 조금씩 천천히 마모되는 것. 시간이 지나 희미해지는 것. 그리고 조용히 사라지는 것. - 78

- ‘약자의 편’에서 ‘약자의 것’으로
하지만 문학은 궁극적으로 ’약자의 편‘이 아니라 ’약자의 것‘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경제적 계급 문제만이 아니라 인종, 젠더, 장애 등 수많은 정체성 이슈에 연루되었을 때 더더욱 중요하고 불가결한 문제가 된다. - 134

- 종교적 인간은 될 수 없어도 기도하는 인간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것이 모순은 아니라고 믿는다. 그래서 마음을 다해 기도한다. 주기도문을 외우고 성모송을 암송한다. 일신의 안위가 아니라 모종의 보편성을 위한 기도. 기도란 그런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 184

2023. oct.

#영혼의물질적인밤 #이장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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