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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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의 신작.(이지만 오래전 글을 개작한)

꿈, 그림자, 다른 세계, 시스템을 위해 희생되는 존재.. 라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키워드들이 망라되어 있는 느낌이다.

끝나지 않는 역병.이 의미하는 바는 뭘까. 작가 하루키에게 그 역병은 인간의 욕심일지, 아집일지.. 왠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17의 나이에 많난 일생의 인연을 그리워하는 소년의 이야기로 시작되는 이 이야기는 여러가지 측면에서 하루키의 소설다운데, 그래서 뭐가 어떻게 된다는 거야 싶은 주인공의 나른하고 의지없어 보이는 독백, 알 수 없는 세상에 대한 묘사, 무해하고 다른 세계의 존재들 같은 무성의 등장인물들이 그렇다.

그런 점이 지루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을텐데, 이야기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이유는 뭘까.

마음 한 편으론 이 이야기가 이 정도 두꺼운 책의 분량일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ㅋ

- 너는 여러 가지를 숨기지 않고 스스럼없이 말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도 진실은 아무도 모른다. 내 생각에, 이 세계에서 마음속에 비밀을 품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것은 사람이 이 세계를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일이다. 그렇지 않을까? - 44

- 쓸쓸한 외톨이로 보낸 여름이었다. 나는 어두운 계단을 내려간다. 계단은 끝없이 이어진다. 이쯤이면 지구의 중심에 닿지 않았을까 싶을 만큼. 그러나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내려간다. 주위 공기의 밀도와 중력이 점점 바뀌어가는 게 느껴진다. 그러나 그게 뭐 어쨌다는 건가? 고작해야 공기 아닌가. 고작해야 중력 아닌가. 그렇게 나는 더욱 고독해진다. - 172

- 무얼 하든 마음의 평온은 얻을 수 없었다. 무언가에 관심을 가지기가 불가능했다. 두꺼운 구름 속에서 넋을 놓고 마냥 앞으로 걸어가듯 종잡을 수 없는 나날이었다. 전부 너를 잃어버린 탓이다. 간절한 바람이 이뤄지지 않은 탓이다. - 190

-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의미를 도저히 찾을 수 없어. 나는 그 세계에서 더더욱 고독해질 테지. 그리고 지금보다 훨씬 깊은 어둠에 직면할 거야. 내가 그 세계에서 행복해지기는 불가능에 가까워. 물론 이 도시도 완전한 장소라고는 할 수 없어. 네가 지적했듯 이 도시는 수많은 모순을 안고 성립되어 있어. 그 모순을 해소하기 위해, 아귀를 맞추기 위해 여러가지 복잡한 조작이 이뤄지고 있고. 그리고 영원이라는 건 긴 시간이야. 그 사이 한 개체로서의 내 의식이 점점 엷어지고, 나라는 존재가 이 도시에 삼켜질지도 몰라. 하지만 설령 그렇다해도 괜찮아. 이곳에서 나는 적어도 고독하진 앟ㄴ아. 이 도시에서 내가 당장 무엇을 하면 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걸 알고 있으니까. - 215

- 그는 정말로 내 그림자일까? 나는 진짜 나일까? 그림자의 말처럼. 무엇이 가설이고 무엇이 사실인지 점점 구별하기 힘들어진다. - 217

- 그렇다, 나는 이 지상에 정지한 쇠공일 뿐이다. 매우 묵직하고 구심적인 쇠공이다. 나의 사념은 그 안에 단단히 갇혀 있다. 겉보기는 볼품없지만 중량만은 충분히 갖추었다. 지나가던 누군가가 힘껏 밀어주지 않으면 어디도 갈 수 없다. 어느 쪽으로도 움직일 수 없다. 나는 몇 번이고 나의 그림자를 향해 묻는다. 이제부터 어디로 가면 좋을까. 그러나 그림자는 대꾸해주지 않는다. - 230

- 훗날 고야스 씨는 자신이 왜 일상적으로 스커트를 입는지 친절하고 알기 쉽게 설명해주었다.
“첫째로는, 이렇게 스커트를 입고 있으면, 네, 왠지 내가 아름다운 시의 몇 행이 된 듯한 기분이 들어서랍니다.” - 268

- 때가 되면 동이 트고, 이윽고 햇살이 창으로 흘러드는 것처럼, 나는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상당히 근사한 표현이다. - 292

- <시편>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사람은 한낱 숨결에 지나지 않는 것. 한평생이래야 지나가는 그림자입니다.’ - 358

- 무언가가 시작되려는 걸까?
나는 무언가가 시작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내게 필요한 건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는 것이다. 이 상태가 끝없이 영원히 이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일단 시작된 변화는 - 그게 어떤 종류건 - 더이상 멈출 수 없는 게 아닐까, 그런 예감이 들었다. - 711

- 요컨대 진실이란 것은 일정한 어떤 정지 속이 아니라, 부단히 이행=이동하는 형체 안에 있다. 그게 이야기라는 것의 진수가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할 따름이다. - 작가 후기 중

2023. sep.

#도시와그불확실한벽 #무라카미하루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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