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고양이의 이름은 길다
이주혜 지음 / 창비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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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리티가 가득한 단편들.

요즘 많은 글들이 그렇듯, 잔잔하고, 갑갑한 마음이 드러나는.

- 자매는 내내 겨울을 살다 갑자기 봄의 한가운데로 내쳐진 것 같은 당혹감을 느꼈다. 이렇게 화사해도 좋은가 싶게 꽃들이 낭자했다. 검고 무거운 옷을 입고 꽃 그늘 아래 앉은 자신들이 번지수를 잘못 찾아온 소포 같았다. 그래도 봄이 좋긴 좋구나. 이 와중에도 꽃을 보니 웃음이 나오잖아. 첫째가 말했다. - 오늘의 할 일, 9

- 다시는 태어나지 마요. 그게 아버지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의 말이었다. 노스님이 준비해준 아버지의 종이옷을 태우면서, 봄의 대기로 하얀 재를 풀풀 날리면서 그녀는 오늘 자신의 유년을 영영 떠나보냈다. 더불어 어느 추운 겨울날 눈이 얼음장으로 꽁꽁 얼어붙은 골목길에 어린양 한마리를 놔두고 혼자 도망쳐버린 기억도 영영 하늘로 날려버렸다. 아버지, 내 죄까지 가져가고 다시는 태어나지 마요. - 오늘의 할 일, 29

- 수라 언니의 말 가운데 내 관심을 끈 대목은 미애와 달랐고, 그 말은 그후로도 꽤 오랫동안 수라 언니에 대한 내 인상을 좌우했다. 나는 우리 딸이 크게 불행하지 않게만 살았으면 좋겠어. 저 사람은 어떤 큰 불행을 겪었기에 저런 소원을 갖게 되었을까? 그러나 이 고립의 밤에 혼자 소파에 누워 그날의 대화를 찬찬히 되짚어보니 언니가 방점을 찍은 단어는 다른 쪽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크게 불행하지 않게만’ 살았으면 하고 바란 게 아니라 크게 불행하지 않게만 ’살았으면‘하고 바랐던 게 아닐까 하고. - 우리가 파주에 가면 꼭 날이 흐리지, 114

2022. sep.

#그고양이의이름은길다 #이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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