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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미
구병모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3월
평점 :
품절
북쪽 바다에 사는 커다란 물고기, 크기가 몇 천리나 되는지 가늠할 수도 없는 물고기, “곤”
자신이 발견하고 이름 붙여준 아름다운 생명에게 경외감과 거부감, 질투와 선망을 동시에 하는 강하와 남들과 무척 다른 곤이 살아온 이야기다.
그 안에는 할아버지, 강하의 엄마 이녕도 있다.
아름답고 착하고 환상적인 동화지만, 현실에 맞닿아 있는 부분이 너무 아리게 다가와 잔혹하다고 여러번 느끼며 읽었다.
결국 그들이 행복했는가를 계속 생각하다보니, 이것은 그저 환상 비극이 아닐까.라는 생각.
어쩌면 아름답기 위해 불행의 시간을 감내하고 인고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
어떤 이미지를 떠올리고 읽은 이야기고, 끝까지 그 자체로 완결되어서 더욱 공감각적인 동화가 되었다.
- 곤은 자신이 언제부터 시간의 흐름과 무관하게 살아왔는지를 헤아리지 않았다. 비좁은 세상을 포화 상태로 채우는 수 많은 일들을 꼭 당일 속보로 알아야 할 필요가 없으며 시대에 뒤떨어진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 애쓸 필요없고 속도를 내면화하여 자기가 곧 속도 그 자체가 되어야 할 이유도 없는, 아다지오와 같은 삶. 그 어떤 행동도 현재를 투영하거나 미래를 예측하지 않고 어떤 경우라도 과거가 반성의 대상이 되지 않으니 어느 순간에도 속하지 않는 삶이었다. - 49
- 사실 그들에게 붙은, 언제 바뀌어도 이상하지 않은 임의의 이름같은게 중요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들은 모두 살아 있었고, 살아 있는 건 언제 어디서라도 그걸 부르는 자에 의해 다른 이름을 가질 수 있었으며, 곤에게 의미있는건 그것을 뭐라고 부르는지가 아니라 그것이 얼마나 오래도록 또는 눈부시게 살아 숨 쉬는지였다. - 68
- 칼끈이 천천히 쇄골에 내려와 닿는 사느란 감각에 곤은 오히려 정신이 맑아진 데다 반감마저 솟아나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아주머니는 너랑 달라서 얼굴을 찡그리지 않았으며 징그럽거나 무섭거나 최소한 낯설다는 말 대신, 예쁘다고 해줬다고, 또는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이게 이상하지 않으세요?라고 머뭇거리며 물었을 때, 처음부터 숨기고 있던 노력이 허무할 만큼 그녀는 산뜻하게, 비록 범속한 위로에 불과하더라도 너는 너일 뿐이라는 말로 이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여주었다고. 그런 걸 보면 그 동안 네가 끊임없이 상기시켰던 타인의 기준이나 눈길이나 호기심이나 그로 인한 위험요소 같은 것들이, 실은 별것 아닌 우려에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두고 조바심을 친 지레짐작이었으리라고. 그것에 이루 말할 길 없는, 어쩌면 분노에 가까운 서운함마저 느낀다고. - 162
-“그래도 살아줬으면 좋겠으니까.”
살아줬으면 좋겠다니! 곤은 지금껏 자신이 들어본 말 중에 최선이라고 생각했던 ‘예쁘다’가 지금 이 말에 비하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를 폭포처럼 와락 깨달았다. 언제나 강하가 자신을 물고기 아닌 사람으로 봐주기를 바랐지만 지금의 말은 그것을 넘어선, 존재 자체에 대한 존중을 뜻하는 것만 같았다. - 185
2018. no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