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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과
구병모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4월
평점 :
품절
이것이야말로 하드보일드.
불친절한듯 툭툭 던져지듯 알려주는 조각의 인생이 어찌나 스산하고 건조한지.
흔치않은 여성 캐릭터라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게 읽기 시작했고, 캐릭터의 힘 못지않은 쫀쫀한 서사가 끝까지 재미를 끌어내는 이야기다.
방역의 부정적 결과로 생이 망가진 투우가 집요한 복수를 하는 듯 보이지만, 어쩌면 조각의 삶에 대한 경의를 보내는 듯도 하고, 결과에 따라서는 자신의 마지막을 완성해줄 동류의 인간에 대한 인정이 담겨있다. 또 그녀가 길을 잃고 헤매지 않도록, 집으로 안전하게 돌아올 수 있도록 장치하는 무용의 존재가 오히려 조각의 쓸쓸하고 비정한 생을 부각시킨다.
그런 지점들이 무척 마초적인데 그 중심에 노년의 여성이 자연스럽게 안착한 것을 경험하는 것은 어쩌면 매우 통쾌한 일이다. 자연스럽게 우리는 조각의 자리에 위치한 남성 캐릭터들에 익숙해지고 있었고 그 통념에 지루해지고 있었기 때문이겠다.
어디선가 파과를 영상화한다면 조각의 역할에 배우 예수정님이면 어떨까 하는 글을 본 적이 있는데, 아무래도 그 영향이어서인지 내내 그 배우의 얼굴을 한 조각을 생각하며 읽게 되었다. 무척 어울리면서도 상상력엔 제약이 따르는 과정이었으나 만족스러웠다는 것을 밝히고 싶다.
일어나는 대부분의 일은 아무것도 아닌 것들의 조형과 부착으로 이루어진 콜라주였고 지금의 삶은 모든 어쩌다 보니의 총합과 그 변용이었다. - 128
자신이 류를 바로 따라가는 것과 가능한 한 늦게 따라가는 것 가운데 어느쪽이 류가 바라는 일일까를 한동안 고민하다가, 둘 중 그 무엇도 류가 자신에게 바라는 건 없을 듯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류의 유지를 받들어, 같은 생각은 해본 적 없었고 애당초 유지라는 게 있지도 않았으며 방역업을 시작한 뒤로 삶은 언제나 현재진행형이 아닌 현재 멈춤형이었다. 그녀는 앞날에 대해 어떤 기대도 소망도 없었으며 그저 살아 있기 때문에, 오늘도 눈을 떴기 때문에 연장을 잡았다. 그것으로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를 확인하지 않았고, 자신의 행동에 논거를 깔거나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살아남으려고 노력하지 않았고 일찍 죽기 위해 몸을 아무렇게나 던지지도 않았다. 오로지 맥박이 멈추지 않았다는 이유로 움직이는 것은 훌륭하게 부속이 조합된 기계의 속성이었다. 류를 가끔 떠올렸고 그가 생전에 주의를 준 사항들에 자주 이끌렸지만, 제 몸처럼 부리던 연장으로 인해 손바닥에 잡힌 굳은살과도 같은 감각 외에는, 류를 생각하면서 온몸이 뻐근하게 달뜨고 아파오는 일이 더 이상 없었다. 그녀는, 나이 들어가고 있었다. - 264
2018. ju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