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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워지지 않는 페미니즘
윤김지영 지음 / 은행나무 / 2018년 4월
평점 :
그렇다. 페미니즘은 지워질 수가 없다.
며칠 전 혜화역에서 역대 최대 인원 만명을 훌쩍 넘는 여성들이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공정하고 동등한 수사를 요구하는 집회를 가졌다. 이와 같은 청와대 청원 게시글은 삼일이 채 되지 못한 시간안에 20만명의 서명을 모집했다.
이미 몇 년 전부터 꾸준히 제기되어온 문제인데 이젠 얼렁뚱땅 미봉책만으로는 조용해 질 수 없게 된 것이 너무 기쁘다.
미투 폭로로 여러명의 가해자를 지목하였으나, 확실한 수사와 단죄는 아직도 요원하고 그런 과정을 별 수 없이 지켜보기만 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이런 폭발적인 움직임이 너무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페미니즘 책을 읽고 언제나 느끼는 바, 아는 사람만 아는, 알고 싶어하는 사람만 아는, 정작 알아야 할 사람들은 외면하는 것은 어떻게 해결해야 될까.
어려서부터-유치원부터?- 페미니즘 교육을 받아야 해결이 되는 걸까?
헬페미들은 리벤지포르노란 용어를 파기하고 ‘디지털 성범죄digital sexual crime’라는 새로운 용어를 제창해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의 잘못에 방점을 찍고 이를 사회적 문제로 부상시킴으로써 적극적 해결책을 촉구하는 것이지요. 소라넷 폐쇄를 이끈 DSO(디지털 성범죄 아웃)팀은 영상 유출자만이 아니라 이를 확대, 재생산하여 유통시키고 소비하는 자들 역시 디지털 성범죄의 공모자임을 지적합니다. 이러한 범죄적 공모성을 적확히 드러내기 위해 동영상 유포, 재생산 행위를 ‘유포 강간’으로, 영상 소비 행위를 ‘시청 강간’으로, 악성 댓글로 조롱 협박하는 것을 ‘온라인 강간’으로 명명합니다. 강간이라는 의미의 외연을 확장시킴으로써 디지털 성범죄가 어떠한 방식으로 한 사람을 사회적 죽음 - 사람들의 백안시, 배제, 열외, 비하, 협박에 의해 이민을 가거나 직장, 학교를 그만두게 되는 것 - 은 물론 생물학적 죽음 - 디지털 성범죄 영상 유출 후 자살-으로 내모는지를 드러내는 것이죠. 이러한 작업은 디지털 성범죄가 남성들 간의 유희를 위한 콘텐츠로 간과될 수 없는 것임을 사회적으로 알리고, 제도적 차원의 처벌과 방지를 촉구합니다. - 33
폭로는 비밀을 드러내어 전파함을 뜻합니다. 이것은 자기만족적 독백이 아니며 공동체의 구성원들을 불러모아 듣게하고 행동하게 하는 것입니다. 또한 폭로는 기득권이 누려온 특혜의 양식이 누구를 짓밟은 대가로 이루어져 있는가를 누설하는 행위이자 가부장제의 웅장하고도 비루한 배수관, 그 의미와 가치의 회로에 누수를 일으키는 행위입니다. 기존 가치 체계와 의미 체계에 편입되지 않는 새로운 가치의 들끓음이 촉발되는 양식인 것이죠. 이것은 세련된 몸짓보다 난장판을 벌이는 일에 가깝고 시끄러운 울음소리, 비명과도 같습니다. 고백 서사와는 다르게 비밀을 들을 수 있는 자의 특권적 자리를 박탈하고, 듣는이가 일방적으로 정한 서사의 문법 자체를 넘어서버리기 때문입니다. - 96
나아가 추모 물결을 남성 혐오 사태로 규정짓고 남성을 잠재적 또는 실질적 가해자로 일반화하지 말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오직 남성들만이 여성을 범주화하고 이를 일반화하여 정의내리는 언어적 권력을 독접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누군가를 명명하고 범주를 부여하는 행위 자체가 사회, 문화적 상징 권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감히 여성들이 기존의 범주화 방식의 프레임 속에서 김치녀로 불리지 않기 위해 몸을 도사리며 다른 여성에 대한 적대를 새기는 대신 여성들 간의 저항적 연대를 구성하여 남성 중심적 범주화 방식의 폭력성을 폭로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추모라는 고통의 통각에서 분노의 정치라는 저항으로 이행해나가는 것이 여성 혐오주의자들에게는 자신들의 안온한 특권 지대인 일상의 붕괴로 여겨지는 것이죠. - 142
페미니즘의 역사는 여성이 발화해 온 고통의 역사였습니다. 존재하지도 않는 것처럼 여겨졌던 여성의 고통은 발화를 통해서야 비로소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파문을 통해 물의 존재를 인식하는 것처럼, 고통의 발화를 통해 고통의 존재를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공동체에게 썩 유쾌한 일은 아닙니다. 안전하고 명확하리라 확신했던 나의 정체성이 타자의 고통 앞에서 무너져내리고, 나의 세계, 즉 공동체를 지탱하던 의미망들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하기 때문이죠. 고통이 발화되는 순간은 나와 당신이, 혹은 나와 사회가 서로에게 침투되고 섞이는 과정입니다. 발화자의 안전도 담보할 수 없습니다. 이를테면 이것은 자신의 온 존재를 건 말 걸기입니다. 발화 이후,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파문은 파문으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 파문은 혼돈이 아니라 움직임입니다. 이것은 공동체를 휘젓는 위협이 아니라 이전을 넘어설 수 있는 동력입니다. 우리는 이 동력으로 또 다른 가능성을 찾을 수 있습니다. - 230
2018. m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