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의 섬 제주도의 업장들 중에는 노키즈존이 그렇게나 많단다. 관광객들 중에는 어린아이를 동반한 가족 단위 관광객도 적지 않을 텐데, 그들을 거르고도 이럭저럭 장사가 잘 된다는 뜻이리라.
이런 현실을 감안해, 제주도 여행을 계획한 한 양육자는 아이를 둔 부모들은 헛걸음 방지 차원에서, ‘한적하고 조용한 분위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맞는 ‘맞춤형 정보’ 검색 차원에서 참고할 수 있도록 ‘제주도 노키즈존 리스트’를 만들어 자신의 블로그에 올렸다(링크). 혹여나 엉뚱한 업장이 리스트에 올라 불의의 피해를 입지 않도록, 리스트 작성자는 해당 업장에서 ‘직접’ ‘최근에 올린’ 노키즈존 공지를 하나하나 확인, 대조한 후에 리스트를 뽑았다. 9월 초의 일이다.
이 ‘노키즈존 리스트’가 새삼 논란이 되었다. (국민일보 기사) (한국일보 기사) 논란의 핵심은 이것이었다. “왜 노키즈존으로 자기 업장을 운영하려 하는 사람들의 가게를 ‘블랙리스트’화하느냐?” (‘리스트’에 올라간 업장 중 한 곳의 주인이 리스트 작성자에게 항의한 데서 논란이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정확한 출처를 찾을 수 없어 ‘충분히 그러했을 수도 있겠다’라는 가능성으로만 남겨둔다.)
배우자와 나는 이 논란을 접하고 동시에 탄식했다. “하나만 해라 하나만.”
사실 나는 이것도 양육자들이 꽤 많이 양보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노키즈존 업장들이 자신들의 운영 방침을 신속히 바꿀 가능성은 멀어 보이니(한국일보 기사의 여론조사 결과를 참고하자면, 아직까지 노키즈존 반대보다는 찬성 의견이 더 우세하다), 노키즈존이라는 기상천외한 형태의 차별을 전면 반대하는 것보다는 아무래도 우선 ‘문전박대’당하는 경험이라도 사전에 회피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현실적으로 부담이 덜한 선택지이다.
그래서 노키즈존을 노키즈존이라 불렀사온데, 노키즈존이 아니라 하시면… 이것을 자영업자 혐오라 말하시면…….
아, 노키즈존 업장 사장님들, 혹시 이겁니까? 내 맘에 들지 않는 부류의 손님군을 내 손으로 직접 쫓아내는 데서 오는 쾌감을 경험하고 싶어서? 그래서 양육자들로 하여금 “넌 나에게 모욕감을 주었어.”라는 대사를 말하게끔 하고 싶어서? 노키즈존이 차별인 건 알겠는데(남들이 차별이라 말하니까), 대놓고 ‘나는 차별주의자다’라는 이미지가 붙는 건 싫어서? 그래서 ‘은밀하게 위대하게’ 양육자들을 차별하고 싶어서?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로 흔히 ‘과거를 거울삼아 현재를 진단하고 미래를 대비 또는 예측한다’라는 ‘과거-현재-미래’론을 든다. 과거보다 진보한 현재의 관점에서 과거의 한 단면을 보면, 그 시대의 내적 필연성에도 불구하고, 종종 우스워진다. 그렇지만, 각종 차별을 아주 자연스럽게 이야기하고, 그 차별이 기괴한 논리로 뒷받침되던 시절, 이제는 지나간(혹은 지나갔다고 믿고 싶은) 시절을 역사 기록의 형태로 다시 살펴보는 것은 단순히 ‘그때 그 사람’들을 비웃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 우스운 모습, 과거의 과오가 현재에도 다른 방식으로 변주되고 있지는 않은지, 성찰의 기회를 마련하는 것이 역사 공부의 목적 중 하나다.
나는 작금의 노키즈존 논란을 접하며, 최근 읽은 『소비의 역사』의 한 대목이 떠올랐다. 미국에서 흑백분리가 ‘합법’이던 시절의 이야기. 지금으로부터 겨우 반 세기 전쯤 이야기.
자유노동자가 된 흑인들은 이제 상품과 소비의 세계에서 백인과 동등한 권리를 갖게 되었다. 상점 같은 소비 공간은 일터나 가정보다도 훨씬 더 백인과 마주칠 확률이 높은 곳이었다. 그런데 백인들은 흑인들이 자기들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했을 뿐 아니라 그렇게 ‘보이기’를 원했다. 그래서 흑인을 교묘하게 배제함으로써 소비의 장에서까지 그들을 소수자로 남겨두려 했다. 이를 위해 백인들은 ‘분리평등Separate but Equal’이라는 전략을 내세웠고, 이는 노예해방 후 이루어진 차별의 근본적인 기제가 되었다. 말이 좋아 분리평등이지 실제로는 분리와 불평등을 조장하는 수많은 인종차별적 규범과 법령이 만들어졌다.
흑인과 백인은 같은 숙소 건물에 묵는 일이 허락되지 않았고, 극장에서도 백인은 1층, 흑인은 2층에 완전히 따로 앉아야 했다. 화장실이 별도로 만들어졌던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음수대에서조차 흑인은 ‘유색인종 전용colored only’이라고 쓰인 수도꼭지만 사용할 수 있었다. 버스나 열차에서는 흑인용 좌석이 분리되어 지정되었을 뿐 아니라, 병원에서조차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대기하며 백인 환자의 진료가 끝나기를 기다려야 했다.
(중략) 이런 식의 차별은 심지어 죽어서까지 계속되었다. 흑인은 백인과 같은 묘지에 묻히는 일이 법적으로 금지되었다. 인종차별이 극심했던 앨라배마 주의 버밍엄 시는 1950년에도 새로운 분리법(Birmingham Segragation Law)을 추가하여 흑인과 백인이 야구, 축구, 농구 등의 스포츠를 함께 즐기는 일을 금지했다. 이런 상황에서 흑인이 상품과 소비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은 오직 불평등의 원칙을 순순히 받아들일 때만 가능했다. (396-398, 강조는 인용자)
노키즈존 리스트를 반대하는 의견 중에는 이런 것도 있었다고 한다. ‘노키즈존이라 하더라도 아이 없이 양육자들끼리만 올 수도 있고, 테이크아웃을 해서 갈 수도 있지 않느냐. 왜 굳이 리스트를 만들어 공유를 하나.’
→ 아, 네, 그래서 노키즈존 계속 하는 게 좋다고요? 저는 안 갑니다. 내가 왜 굳이 불평등을 ‘감수’까지 해 가면서, 말로 설명하기조차 싫은 굴욕감과 모욕감과 그 외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면서 그 업장을 이용해야 합니까?
흑백분리가 ‘분리평등’이라는 미명으로 위장된 시대를 살았던 흑인들도, 그들에게 주어진 불합리와 차별을 더는 받아들이기만 할 수 없었다. 소비는 평등하게 하지만 불평등한 차별을 받는 괴리를 극복하고자 하는 움직임은, 자연스럽게 ‘차별받느니 소비하지 않겠다’는 운동으로 이어졌다.
1950년대부터는 흑인인권운동이 시작되면서 ‘분리평등’ 원칙에 근거한 수많은 불평등에 대해 저항하는 목소리가 수면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먼저, 흑인들이 백인과 가장 자주 접촉해왔던 상업 공간, 즉 백인 소유의 상점에서 일어났던 차별들이 구체적인 불만 사항으로 공론화되었다. (중략)
이런 상황에서 1960년대로 접어들자 미시시피주에는 수년 동안 계속된 흑인인권운동의 영향이 만들어낸 팽팽한 긴장감이 돌았다. 그 결과의 하나로 많은 도시에서 백인 소유 상점에 대한 ‘보이콧(불매운동)’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이 운동을 가장 적확하게 대변하는 슬로건은 “차별을 사지 맙시다Don't Buy Segregation”였다. (399-400, 강조는 인용자)
노키즈존의 찬성 논리 중 가장 흔한 것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아이를 싫어하는 게 아니다. 아이가 타인에게 폐를 끼치는데 말리지 않는 일부 무개념 엄마(꼭 이럴 때만 엄마 찾더라)들 때문에 노키즈존이 필요한 것이다.’
한 마디로 ‘그럴 만하니까 그러는 것이다’라는 논리인데, 이 ‘그럴 만하니까’가 시대적 상황에 따라 얼마나 자의적인지는, 백인들이 흑인 소비자를 공공연하게 차별하며 내세웠던 논리를 보면 알 수 있다.
백인들은 흑인들에게 물건을 팔면서도 그들이 돈만 생기면 마구 돈을 써대는 무절제한 존재이자 고상한 취향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천박한 인간들이라고 생각했다. 상점 주인들은 흑인 손님이 오면 싸구려 옷만 잔뜩 골라서 내주곤 했는데, 특히 형형색색의 옷을 내놓으며 흑인들에게는 이런 옷이 잘 어울린다는 식으로 대하곤 했다. 더 심각한 차별은 흑인에게는 옷을 입어보는 일조차 금지한 것이다. 흑인은 무언가를 훔쳐갈 것이라는 의심을 받은 탓에 원천적으로 탈의실 사용이 불허되었다. 심지어 모자를 써볼 수도 없었는데, “흑인들의 머리카락은 언제나 기름기로 떡칠되어 있어서 모자를 망가뜨린다”는 이유에서였다. (399-400, 강조는 인용자)
아이를 데려가면 노키즈존이니 오지 말라 하고, 그래서 안 간다고 하면 업장 혐오라고 하는 이 놀라운 이중 잣대는, 사실 백인들로부터 수입해 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들도 업장에서 흑인을 실컷 차별해 놓고, 막상 불매운동을 벌이니 자신들의 행동을 돌아보는 대신 흑인들을 비난하고 탄압했다.
흑인의 불매운동은 백인 상점주와 정치가 들을 놀라게 했다. 그들은 흑인들이 분별없이 돈을 써대는 집단이라고 생각해왔기에 흑인들 스스로 소비를 통제하며 집단행동에 나선 사실이 몹시 뜻밖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인종분리철폐운동이 내세운 다른 저항에 비해 상점 앞 시위는 사소한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대신 백인들은 이런 불매운동은 외부에서 온 선동가들이 벌인 것이라고 떠벌리면서 참여자들도 금세 질려서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큰소리쳤다. 하지만 보이콧은 몇 달이 넘도록 계속되었고, 상점 주인들은 경제적 압박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1960년대 중반에 인권운동이 강렬해지면서 언론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자 긴자이 고조된 도시에서는 KKK단과 시의회 등이 나서서 백인들에게 피켓 시위가 벌어지는 가게를 멀리하라고 권고했다. 자칫 그곳에서 흑백 간의 충돌이 일어날 경우 언론에 알려질까 봐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자 상점에는 흑인뿐 아니라 백인 손님마저 끊기는 상황이 벌어졌다. 다급해진 상점들은 자기 가게는 안전하다는 내용을 신문에 광고하며 손님을 끌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중략) 하지만 불매운동은 계속되었고, 발길을 끊은 백인 고객도 별로 늘어나지 않자 상점주들은 흑인 시위자들을 영업 방해 혐의로 고발하기 시작했다. (402-403, 강조는 인용자)
백인들의 반발이 어떤 식으로 있었는지에 대한 서술이 더 이어지지만, 백인들의 행태가 우리 사회의 차별주의자들을 떠올리게끔 하니 스트레스를 받아가며 굳이 인용하지는 않겠다(정 궁금하시면 책을 직접 찾아 보셔도 좋다. 조만간 이 책에 대해 리뷰를 하나 쓸 것인데, 결론부터 미리 말하자면 좋은 책이다.).
아, 그래서 미국에서의 이야기는 결말이 어떻게 되었냐고요?
십여 년도 더 전에 미국 고등학교에서 수학할 때, 내가 가장 재미있게 공부한 과목은 미국사(American history)였다. 미국도 한국 못지않게, 아니 오히려 어떤 측면에서는 한국보다 더 ‘국가’를 강조하는 가치관이 뚜렷하다 보니, 미국사 교과서의 서술이 ‘국뽕’에 찬 것은 아닐지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500년도 안 되는 ‘비교적 짧은’ 역사이지만 그 안에는 개척주의, 식민지 시절, 제국주의, 전쟁, 다원화사회 등의 테마가 모두 녹아들어가 있다. 그 테마 중 어느 하나라도 간과하고 지나갈 수 없다. 그렇기에 그들은 공은 공대로, 과는 과대로 기록한다. 당연히, 저 흑백분리 시절의 ‘분리평등Separate but Equal’도 ‘그런 것이 있었다’라고 적는다. 그리고, 거기에 하나의 설명을 덧붙인다. ‘그것은 부끄러운, 말도 안 되는 과거였다’라고.
노키즈존이 사업자의 자유라고 하는 사람에게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사회학자 오찬호는 여기에 이렇게 되묻는다. “사업자의 권리가 '사회적으로 지향해야 하는 패러다임'을 벗어나 있을 수 있을까요?”(원본 링크)
‘그래도 노키즈존이 흑인 차별 같은 건 아니지 않냐’라고 이야기할 분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맞는 이야기다. 완전히 같지는 않다. 전자는 법적으로까지 보장되지는 않은 사업자의 재량이고, 후자는 법적으로 보장된 백인 사업자의 권리였으니까. 그러나 노키즈존과 ‘분리평등’은 본질적으로 같다. 차별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굳이 차이를 구분해 이야기하자면, 전자는 ‘법적으로 아직은 보장되지 않은 차별’이고, 후자는 ‘법적으로 보장된 차별’이라는 점일 테다.
나는 먼 훗날, 한국사 교과서의 사회문화사 부분에서 ‘2010년대 들어 사회적 지위에 따른 차별이 가속화되었다. 아이를 동반한 보호자가 입장할 수 없는 ‘노키즈존’이 대표적인 사례였다.’ 같은 문장을 보고 싶지 않다. 내 생애의 일부분을 거대한 차별의 흐름 속으로 밀어넣고 싶지 않다. 그뿐이다.